입동 즈음입니다. 세상은 그대로 화려한 풍광을 펼쳐놓습니다. 연갈색의 갈참나무와 노랑의 은행나무, 붉은 단풍으로 빛나는 아름다움은 제 마음을 흔들어 놓습니다.
봄이 새롭게 출발하는 싱싱한 젊은이 같은 밝은 아름다움이라면, 가을은 스산한 중년 여인의 눈가 주름처럼 아름답고 고독합니다. 이렇게 늦가을 떨어진 낙엽같이 인생을 살다간 이가 있습니다. 그는 매월당 김시습입니다. 어린 신동으로 세종대왕 앞에서 문재를 뽐내었던 그가 수양대군의 왕위 찬탈로 세상을 등지게 됩니다. 절의를 잃은 그는 세상을 떠돌며 글을 토해냅니다.
『금오신화(金鰲新話)』의 제목은 "금오산에서 지은 새로운 이야기"라 풀이할 수 있고, 이 제목에서 우리는 많은 것을 알 수 있으며 또 추리할 수 있습니다. 김시습(金時習)은 19세 때 서울의 북한산 중흥사에서 공부를 하다 수양대군이 단종을 폐위하고 왕위에 올랐다는 소식을 듣자 책을 모두 불사르고 강원도 김화로 들어가 뜻을 같이 한 사람들과 함께 한동안 은둔합니다. 1462년 잠시 경주 남산의 용장사에 머문 적이 있고, 31세 때인 1465년에 남산에 금오산실을 짓고 6년 남짓 정착 생활을 합니다. 제목에 금오산 이름을 쓴 것으로 보아 이 시기에 『금오신화』를 창작한 것으로 추정합니다.(금오신화 [金鰲新話] - 기이로 그려낸 고독과 울분, 한국의 고전을 읽는다, 2006.휴머니스트)
『금오신화』에는 「만복사저포기(萬福寺摴蒱記)」, 「이생규장전(李生窺墻傳)」, 「취유부벽정기(醉遊浮碧亭記)」, 「남염부주지(南炎浮州志)」, 「용궁부연록(龍宮赴宴錄)」 등 5편이 들어있습니다. 모두 기이하고 재미있지만 개인적으로 ‘남염부주지’가 가장 인상적이었습니다. 특히, 걸리버 여행기의 랴퓨타와 비슷한 천공의 섬은 정말 탁월한 상상력으로 저를 환상특급으로 초대했습니다.
11월 중순 경에 경주로 반가운 벗들을 만나러 갈 계획이 있습니다. 그리운 사람들이 있는 그 곳 언저리에 김시습이 금오신화를 썼던 금오산이 있습니다. 기이한 인연을 만나는 젊은 문재의 이야기는 김시습 자신의 분신이었을 것입니다. 경주 남산 자락 금오산을 오르며, 그의 삶을 생각하겠습니다. 시대와 화합하지 못한 불우한 천재는 소설 속에서 귀신과 사랑을 나누고, 불타는 섬과 용궁을 거닐며 자신만의 세상을 만든 것입니다. 시대를 잘못 만난 천재의 불우한 삶이 가을 낙엽처럼 스산하고 안타깝습니다.
가을이 깊어져 있습니다. 깊은 가을은 오랜 사색과 긴 침묵으로 저를 불러들이고 있습니다. 오늘은 만년필에 잉크를 채우고 그리운 벗에게 엽서를 써야겠습니다. 많이 보고 싶다고, 너와의 추억이 책갈피의 낙엽처럼 나를 행복하게 한다고 그렇게 낯간지러운 말을 써서 보내야겠습니다. ^^
『금오신화』, 김시습 지음(이지하 옮김). 민음사, 20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