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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이 우리를 지배할 때

요즘 같은 가치혼돈의 시대에는 교육자들에 대한 존경심이 저절로 배어 나온다. 모든 것이 불확실하고 상대적이며, 그때그때 상황과 사람에 따라 모든 판단이 달라진다는 걸 어떻게 아이들에게 설명해야 할까?


사람은 자기 생각이 맞는지 틀리는지를 알 수 없을 때 자연스럽게 다른 사람들의 생각에 관심을 두게 된다. 자연히 더 많은 지지를 받는 쪽의 생각이 옳을 가능성이 높다는 판단도 하곤 한다. 집단지성이 21세기를 구할 것이라는 낙관 론에는 바로 그런 생각들이 잘 녹아 있다. 이 낙관론을 역이용하려는 사람들도 물론 있다. 지난 정권과 이번 정권 모두에서 문제가 되는 ‘댓글 공작’ 같은 것들이 대표적인 사례다. 사람들은 인터넷에서 어떤 기사를 읽는 만큼이나 그 기사의 댓글에 주목한다. 다른 사람들의 생각이 궁금하기 때문이다. 때때로 기사의 부족한 부분이나 모순을 날카롭게 지적하는 댓글이 해당 사안에 대한 판단 기준을 재정립해주는 순기능도 있다. 문제는 늘 순기능만 존재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혼란의 시대와 교육자의 역할

댓글 공작에는 필연적으로 ‘조직’이 동원된다. 이들은 특정 정치세력의 이익을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댓글을 단다. 이들 조직은 자발적으로 결성된 경우도 있고 모종의 대가를 받아 움직이는 경우도 있다. 독자들로선 그들의 ‘성분’을 알 도리가 없기 때문에 그들이 남긴 댓글과 공감 숫자를 여론으로 착각하기 십상이다.


여론을 조작하고 싶은 사람들이 댓글 공작을 주된 업무로 삼았다는 점에는 일말의 통찰력이 존재한다. 그만큼 우리들이 댓글에 큰 영향을 받고 있음을 간파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어느 틈에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에 대한 기준을 ‘여론’이라는 이름의 남에게, 더 정확히 말하면 댓글에 양도했다. 양도한 만큼 편안해졌는지는 몰라도 개개인의 통찰력을 유지할 가능성은 그만큼 낮아졌다. 청와대 국민청원 역시 본래의 의도와는 달리 여론전의 진지로 변질되고 있 다. 평창올림픽에서 밉살맞은 인터뷰를 했던 한 스케이트 선수는 5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의 ‘청원 지탄’을 받았다. 숫자로만 놓고 보면 웬만한 범죄자보다 그 선수가 더 나쁜 사람이다. 과연 그런가? 그들 사이의 갈등과 내분이 과연 다른 모든 국가적 사안을 제칠 만큼 중요한 것인가? 청와대 국민청원은 꼭 그런 것처럼 보이도록 우리를 혼동시킨다.


‘미투 운동’의 그림자

수많은 사람이 a라는 사안에 대해 한참 떠들면 a는 세상 어떤 이슈보다 중요해 보이는 착시효과가 발생한다. 그 와중에 a라는 가치를 구성하는 더욱 근본적인 가치인 A를 놓치게 되는 불상사도 발생한다. 최근 연이어 터져 나오고 있는 미투(Me Too : 나도 당했다) 운동의 패턴이 어떻게 바뀌고 있는지를 살펴보자.


권력을 가진 유부남 A가 ‘을’의 위치에 있는 여성 B를 성적으로 유린하거나 폭행하는 사건이 미투 운동의 발단이다. 하도 여러 차례 미투가 터지다 보니 최근에는 그 진위를 의심하는 반대 여론도 생겨난 게 사실이다. 예를 들어 A와 B는 원래 ‘사귀는 관계’인데 B가 다른 어떤 이유로 마음이 상해 A를 괴롭히기 위해 미투를 이용했다는 일종의 ‘음모론’이다. 최근에 문제가 된 미투 폭로에는 이런 식의 음모론이 거의 필연적으로 따라붙고 있다. 한 가지 이상한 게 있다. 이런 음모론을 제기하는 사람들의 뉘앙스를 보면 이른바 ‘사귀는 관계’였을 경우 봐줄 수도 있는 것 아니냐는 전제가 깔려 있기 때문이다. 가정을 가진 한 남자로서, 심지어 한 사람의 정치가로 국가행정을 책임지려는 사람이 불륜관계를 맺었다는 점에 대한 비판은 어느 틈에 희석된다. 성폭행이 아니고 불륜이기만 하면 괜찮다는 건가?


간통죄가 사라졌다는 걸 근거로 들며 불륜을 일종의 ‘사생활’로 인정해 주자는 의견도 있다. 그러나 법적 처벌항목이 사라졌다고 해서 도덕적인 무게감까지 사라진 것은 아니다. 법이 도덕의 영역까지 간섭하는 것은 분명 잘못이지만, 도덕적 토대가 마련돼 있지 않은 상황에서 법의 테두리가 좁아지는 것은 또 다른 가치 혼 란을 야기한다(그렇기에 모든 법과 일련의 규제 조치는 한 번 정할 때 신중해야 한다).


중심이 사라질 때 ‘숫자’는 괴물이 된다

우리 사회의 또 다른 비극은 도덕적 갈등과 고민에 대해 권위있는 대답을 해줄 수 있는 ‘어른’이 부재한다는 사실이다. 사실상 이런 역할은 종교계에서 담당해줘야 하지만, 슬프게도 종교계야말로 다른 어떤 분야보다도 도덕적 권위를 더욱 많이 잃어버린 상태다. 장기적으로 종교의 권위를 회복해야겠지만 일단은 교육계가 이 문제를 떠안을 수밖에 없다.


5년 전 고등학생들을 대상으로 ‘10억 원을 준다면 감옥에 갈 수 있겠느냐’는 설문조사가 이뤄진 적이 있다. 놀랍게도 50%의 학생들이 ‘그렇다’라고 대답했다. 이들도 이제 어엿한 성인으로서 사회 각계각층에서 활동하고 있을 것이다. 댓글을 남기기도 하고 국민청원에 한 표를 던지기도 할 것이다.


내면의 중심이 되는 가치의 토대 없이 우리는 댓글로 대표되는 여론에 속절없이 휩쓸리고 있다. 도덕의 자리는 ‘숫자’가 대신한다. 더 많은 댓글이 달리는 사안이 더욱 중요한 사안이고, 더 많은 돈을 주는 행동이 이로운 행동이라고 말하는 세상 속에서, 우리는 무엇을 가르칠 것인가. 아무도 문제 삼지 않는 ‘댓글 0’의 이슈라 해도 잘못된 걸 잘못됐다고 말할 수 있을 때에만 그 사회의 미래는 밝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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