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이런 우스갯소리가 나돌았던 적이 있다. 무언가 잘못한 아이를 선생님이 야단치시면서 “너 집에서 이렇게 배웠니? 너 부모님이 이런 짓 하라고 말씀하시더냐?” 하고 나무라면, 그러는 선생님에 대해서 예전의 아이들은 이렇게 발끈했다고 한다. “선생님, 저를 야단치시는 것은 이해하지만, 저희 부모님을 건드리는 것은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그냥 저만 야단치십시오.” 그런데 요즘 아이들의 발끈하기는 이렇게 달라졌다는 것이다. “선생님, 제 부모님이 저를 잘못 키우신 건 뭐라 이야기해도 좋지만, 저를 가지고서 야단치는 건 참기 힘들어요.” 요즘은 사실 이런 어조로 아이들을 야단치는 자체가 인권 침해쯤으로 인식된다. 어른이고 아이고 발끈하고 싶은 것을 참지 못하는 세태가 된 것 같다.
누구에겐가 발끈해 본 적이 있는가. ‘발끈하기’는 타자의 공격으로부터 나를 지키기 위한 심리적 방어기제의 일종이다. 그러나 방어기제 중에서는 그다지 고급의 방책이라고 할 수는 없다. 언제 발끈해 보았던가. 자라면서는 형제 중 나만 불공평하게 대한다는 느낌이 들 때, 부모님께 발끈할 수 있다. 평범한 직장인이라면 주어지는 업무 부담이 나에게만 유독 많아진다고 생각할 때, 상사에게 발끈한다.
발끈한다는 것은 참는 행동과 깊은 관련이 있다. 오래 잘 참아오다가 어떤 대목에서 참는 끈을 놓치고 왈칵 성질을 내는 것이 ‘발끈’이기 때문이다. 언제 어디서나 수시로 습관적으로 성질을 내는 사람에게는 발끈한다는 표현을 쓰지 않는다. 어떤 상황에서 내가 발끈했을 때, 주변 사람들이 ‘정말 참고 참았는데, 오죽하면 저렇게 발끈한단 말인가.’하고 인식해 주면 나의 발끈은 유효타가 되는 셈이다. 그런데 내가 발끈한 것을 두고, 공연히 성질부린다는 인상만 주변 사람들에게 주었다면, 그것은 ‘실패한 발끈’이다.
생각해 보자. 살아오면서 누구에겐가 발끈해 본 적이 있는가. 발끈했던 일이 오래도록 마음에 남았다면, 그 발끈으로 인해서 뒤에 마음 쓸 일이 많았거나 불편해지게 된 점이 있었기 때문이다. 발끈했던 기억이 나지 않는다면 그 발끈은 잠시 내 손상된 자존심을 회복해 주는 효과를 발휘했을지도 모르겠다.
발끈하므로 해서 얼마나 이익을 보았는지를 계산하기란 쉽지 않다. 자존심은 지켰지만, 주변의 인간적 신뢰는 잃을 수도 있다. 마찬가지로 발끈하지 못해서 얼마나 이익을 보았는지를 계산하기도 쉽지 않다. 차별과 모멸에 발끈하지 못해서 그것이 트라우마로 남을 수 있다. 대부분의 발끈하기는 잠시 후련하고 오래 불편하다. 인내가 무너지는 지점에서 ‘발끈의 심리’가 솟아나기 때문이다. 지혜롭게 발끈하기란 참으로 어렵다.
02
‘발끈’은 성을 내는 모양을 나타내는 말이다. 그냥 성을 내는 것이 아니라, 사소한 일에 왈칵 성을 내는 모양을 나타낼 때, ‘발끈’이라고 한다. ‘발끈’에다 ‘하다’를 붙여서 ‘발끈하다’라고 하면 동사가 되어서, ‘사소한 일에 왈칵 성을 내다’의 뜻이 된다. ‘사소한 일’에 성을 낸다는 것, 갑자기 ‘왈칵’ 성을 낸다는 것, 이것이 문제이다. 사전적 풀이로만 보면 ‘발끈하기’는 아주 양호한 행동 자질을 담은 것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사전적인 뜻이 그렇다는 것이고, 인간 생활의 실제에서, 특히 대인관계나 감정 소통 과정에서 ‘발끈하기’가 필요할 때가 있는 법이다. 우리가 불완전한 존재이기 때문에, 완벽한 인간이 못 되기 때문에, 발끈할 때가 있는 것이다. 예컨대 나에 대해서 부당하게 공격해 오는 타자를 막아내기 위해서 ‘발끈하기’라는 방어기제(Defense Mechanism)의 작동이 필요하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무의식 기제로서 ‘발끈하기’가 발동되는 것이다. 다만 이 ‘발끈하기’를 평상시에 상위 인지(上位認知, meta-cognition)하는 훈련이 있어야 하겠다는 생각이 든다. ‘발끈하기’에도 수준이 있다면, 좀 더 고급의 수준으로 사용해야 하지 않겠는가.
‘발끈’은 욕정의 기제와 비슷하다. 통제되지 않은 채로 분출된다는 점에서 둘이 비슷하다. 그리고 분출한 이후에 금방 후회하기 쉽다는 점에서도 이 둘은 유사하다. 수습이 쉽지 않다는 점에서도 유사하다. 후회하게 되고, 수습이 쉽지 않은 것은, ‘발끈’이 ‘욕정’처럼 충동적으로, 그리고 우발적으로 발생하는 데서 생기는 결과이다.
사소하고 중요하지 않은 일에 필요 이상의 성을 내는 것도 ‘발끈’이 가진 약점이다. 공의롭고 대의명분이 반듯한 분노를 두고 발끈했다고 말하지 않는다. 이런 부정적 요소를 좀 제거하면, ‘발끈’도 면모를 쇄신할 수 있을 것이다. 요컨대 ‘충동적 발끈’을 ‘전략적 발끈’으로 진화시킨다면, 또 ‘우발적 발끈’을 ‘적시(適時)의 발끈’으로 업그레이드할 수 있다면, 지혜로운 발끈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점을 좀 고친다 해도 ‘발끈’에는 숙명적인 난관이 있다. 발끈하는 그 순간의 우리 몸을 해치는 작용이 있는 것이다. 우리 주변에는 ‘핏대’라는 별명을 가진 사람들이 있다. 핏대는 혈관, 즉 핏줄(a blood vessel/a vein)이라는 뜻이다. ‘핏대’는 힘주어 세게 말할 때, 목에 드러나는 핏대(핏줄)를 말한다. 걸핏하면 발끈하여 소리를 높이며 핏대를 세우는 습관이 있어서 얻게 된 별명이다. 혈관이 두드러질 정도로 핏대를 세운다는 데서 이 별명이 지어졌을 것이다. 핏대라는 별명을 가진 사람들이 가장 자주 듣는 충고는 혈압 조심하라는 말이다. 핏대를 세우다가 혈압이 높아져서 목을 잡고 쓰러지는 장면은 텔레비전 드라마에서 얼마나 자주 보는가. 그러니 ‘발끈’은 신체적·정신적 건강 면에서 여전히 위험하다.
공자님은 나이 60을 귀가 순해지는 이순(耳順)의 나이라고 했다. 귀가 순해진다니, 무슨 뜻이겠는가. 깊은 뜻이 여러 가닥으로 있겠지만, 여간 불편한 말을 들어도 금방 발끈하지 아니하는 경륜에 이를 만한 나이라는 뜻으로 해석해도 무방하리라.
03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의 사회는 어디서부터 병이 들었는지, 우리를 끊임없이 발끈하도록 부추긴다. 발끈하지 못하면 사람 축에도 못 낀다는 인상을 준다. 온갖 댓글이 횡행하는 SNS 공간에서는 이런 느낌이 거역할 수 없는 실감으로 다가온다. 마치 모든 SNS 공간에는 이런 팻말이 붙어 있는 듯하다.
“발끈하지 않는 자, 여기에 들어오지도 마시오.”
충동적이고 퇴행적인 감정에 기대어 발끈하는 사람이 SNS 공간에는 지천이다. 날것 그대로, 조금도 숙성되지 않은 감정에 기대어 발끈하며 자기 최면에 빠지는 경우는 얼마나 많은가. 발끈의 감정을 정의감 정도의 미덕으로 오해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없는 적개심까지도 기꺼이 만들어 내어 열심히 발끈하도록 감염시키는 SNS 공간은 ‘무한 증오’의 영토를 만들어 가는 곳이다.
물론 발끈의 순기능은 있다. 그것은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한다.”라는 말에서 찾을 수 있다. 그런데 어떻게 된 셈인지, 지렁이를 밟는 쪽에서 더 발끈하는 형국이다. 문제는 발끈해야 할 사람은 좀체 그리 아니하고, 발끈하지 않아야 할 사람은 늘상 발끈하며 지낸다는 데에 있다. 발끈의 순기능과 역기능 사이의 균형은 찾을 수 없게 되었다. 분노가 일상의 감정이 된 사회, 성냄이 남아도는 사회, 저마다 정의의 심판자 역할만 하려는 사회, 소망이 없는 사회이다. 진지하고 비장하여 그럴듯하게 보이는가. 그 뒤에 숨어 있는 위장된 욕망은 없는가.
04
누추하고 더러운 고물을 수집하며, 온갖 모멸을 겪으면서도, 자존감을 잃지 않고 노력하여, 마침내 반듯한 사업가로 성장한 이석수씨의 자서전 <3평 고물상의 기적>에서 그가 ‘발끈’을 다루는 방식을 엿볼 수 있었다. 그를 인용함으로써 이 글의 결말을 삼으려 한다.
발끈하고 싶을 때 발끈하지 마라. 발끈하면 그걸로 그냥 끝이다. 기분만 나빠지고 아무것도 얻는 게 없다. 그러느니 호흡을 가다듬고, 모멸감을 준 상대에게 펀치를 날리듯 더 야무지게 일하라. 그래도 자꾸 발끈해지려고 들면, 내가 자주 사용했던 방법을 써보길 권한다. 모멸감이 느껴지는 일을 당할 때마다 나는 생각했었다. ‘반전을 보여주고 말 거야. 이게 끝이 아니라는 걸 나 스스로 증명해 보일 거야.’(3평 고물상의 기적, 200쪽)
잘못이 내게 없다면, 위기 상황이 지나가길 기다리는 인내심과 지혜가 필요하다. 파도를 맞아봐야 파도를 견딜 수 있듯이, 위기로 인해 나 자신이 더 단련된다고 생각하며, 위기를 즐기라. 그리고 지쳐 나가떨어지지 않도록 자신에게 알맞은, 스트레스 푸는 방법이나 취미를 꼭 한두 개쯤은 갖기를 권한다.(같은 책, 210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