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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육필(肉筆)

01

돌아가신 어머니의 유품을 정리하다가, 어머니가 써 두신 편지를 발견했다. 검은색 볼펜으로 또박또박 써 내려간 편지이다. 두어 군데 줄을 긋고 고친 곳이 보인다. 아마도 이 편지는 어머니가 초고로 먼저 쓰고, 새 편지지에 다시 깔끔하게 정서해서 보내셨으리라. 어머니는 늘 그렇게 하셨다. 어머니 글씨는 강가에 있는 작은 조약돌처럼 동글동글 모나지 않게 쓰여서, 가지런히 문장을 만들고 있었다. 나에게는 너무도 눈에 익은 글씨이다.

 

어머니의 편지 옆에 꽃무늬 봉투 하나가 있다. 열어보니, 아동문학을 하는 정영애 작가가 보낸 편지이다. 어머니의 산문집을 받아보고, 그 소감 인사로 어머니께 보낸 편지이다. 볼펜으로 쓴 굵은 글씨이다. 정 작가는 연로하신 내 어머니가 읽기 좋게, 큼직큼직하고 시원시원한 글씨체로, 마치 기러기 떼가 날아가듯, 글씨들을 썼다. 어머니는, 그 편지에 대해서 답장을 쓰신 것이다. 헤아려 보니 18년 전의 일이다.

 

어머니가 가지고 계셨던 편지 가운데는 내가 보낸 편지도 수십 통이 되었다. 47년 전, 군대에서 드렸던 나의 편지는, 어머니를 안심시킨다고 얼마나 의젓했던지(의젓한 척했던지), 꾹꾹 눌러 쓴 글씨가 그 의젓함을 떠받치고 있었다. 나는 어머니께 드린 편지들을 내 집으로 가져와 읽었다. 편지마다 어머니와 오간 내 마음의 정황들이 내 글씨의 모습 안에 숨어 있었다. 그때 나의 글씨는 왜 이렇게 울퉁불퉁했을까. 그때 나의 글씨는 왜 이렇게 동그마니 외로웠을까. 편지를 쓸 때 내 마음에 일렁이었던 미세한 감정의 이랑들이 떠올랐다. 글씨의 표정들이 내게 말을 걸어온다. 어머니와 나 사이에 오간 육필들을 보는 동안, 마르셀 프루스트(Marcel Proust, 1871-1922)가 말했던 ‘잃어버린 시간’들이 내 안에서도 되살아나는 듯했다.

 

어머니 편지를 보관하려고 옛날 편지 보관함을 꺼내다가, 오래된 엽서 한 장을 발견한다. 50년 전 조부의 엽서이다. 짙은 잉크로 쓴 육필이다. 조부의 글씨는 벼 알갱이를 또박또박 세워놓듯이 쓰신 글씨이다. 돌아가시기 한 달 전 병석에서, 대학생인 나에게 쓰신 엽서다. 내용은 대개 이러하다.

 

육친의 정으로 당부하마. 첫째, 노력하여 세상에서 성공해라. 둘째, 성공에는 부모의 은덕이 있음을 잊지 마라. 셋째, 그 모두는 하늘의 은혜인 줄 아는 지혜를 가져라.

 

나는 조부의 육필 글씨에 그리움이 맺힌다. 어린 시절 할아버지 댁에서 사랑을 받으며 보냈기에 더욱 그러하다. 조부의 육필은 그 아득한 시간을 그리움으로 불러낸다. 조부의 육필에서 조부의 육성이 들리는 듯하다.

 

02

‘육필(肉筆)’! 몸으로 직접 쓴 글씨라는 말이리라. 이때의 ‘육(肉)’은 몸이라는 뜻이다. 그냥 단순히 ‘몸’의 뜻으로만 그치지 않는다. 좀 고상하게 말하면 ‘존재의 온전한 실체’를 잘 담보해 주는 글자가 바로 이 ‘육(肉)’이다. 어버이를 그냥 어버이 ‘친(親)’으로만 쓰지 않고, 그 앞에 ‘육(肉)’을 붙여서 ‘육친(肉親)’이라고 말하는 순간, 어버이는 내게 당신의 살과 피를 주어 나를 세상에 나게 하신 분으로 다가온다. 정감 가득 몸에 와닿는 실체적 존재로서의 어버이를 느낀다. 한자어가 주는 의미의 심연이 울려 나오는 말이다.

 

‘손글씨’라는 순우리말도 있다. 이는 영어의 ‘Handwriting’을 옮긴 데서 온 말이리라. 육필이 주는 묵직한 울림보다는, 아름답고 경쾌한 손가락의 이미지가 글씨의 이미지와 겹쳐진다. 손가락으로 쓰는 글씨이다. 모래사장에 쓰기도 하고, 유리창에 입김을 불어 쓰기도 하는 데는 ‘육필’보다는 ‘손글씨’가 어울린다. 예쁜 카드나 소박한 메모지에 사연을 남길 때도 ‘손글씨’라는 말이 더 잘 어울린다. 컴퓨터 출력물이 홍수를 이루는 세상이니, 손글씨로 쓴 손편지는 정성 가치가 담뿍 든 편지로 인정받는다. ‘육필’과 ‘손글씨’ 사이에는 글씨를 가치화하고 상징화하는 의미론적 차이가 있다. 문화적 차이 같기도 하다. 그러나 큰 프레임으로 보면, 컴퓨터로 글씨 쓰기에 맞서는 자리에 육필과 손글씨는 한 편이 되어 있다.

 

근대 우리 문학사의 문인 예술가들의 기념관을 가면, 그분들의 작품 원고가 육필로 남아 있다. 볼펜이 없던 시절이었으니 붓이나 만년필로 썼으리라. 그렇듯 문인들끼리 주고받은 육필 편지들을 보노라면 그 원고를 썼던 책상이며, 방이며 하는 것들이 떠오른다. 글씨를 한 자 한 자 보노라면 그분들의 성격이나 풍모도 상상이 간다. 그분들의 손에 쥐어진 만년필이 움직여 나갔던 모습들도 상상이 된다.

 

좌측의 사진은 1934년 10월 27일 소설가 박태원의 결혼식장 방명록에 남겨 둔 시인 정지용의 육필 축하 글씨이다. 내용도 좋고 글씨도 인상적이다.

 

정지용의 이 글씨를 보노라면, 육필에 대한 감수성을 개발할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든다. 글씨 쓴 분, 그분 몸의 모든 감각이 녹아 있는 글씨를 느껴본다. 나는 학교 다닐 때 글씨 잘 쓰시는 선생님에 대해서 호감이 갔다. 너그럽고 성실하셨다. 편견이라기에는 나의 경험칙이 어느 정도 입증을 해 주었다. 지금이라고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육필은 단순히 복고조 취향만을 반영하지는 않는다. 글씨의 주체, 글씨의 자아를 되찾는 일, 무엇보다도 글씨에 내 인격(Personality)을 구현하는 미래 가치에 닿아 있다. 각자의 표정 있는 글씨들이 소통하는 문자 공간을 갖고 싶다. 자동화나 AI가 우리의 생태를 지배할수록, 주체와 자아를 표상하고자 하는 현대인들의 요구도 많아질 것이다. 붓이나 펜으로 쓴 듯 질감이나 필력이 느껴지는 글씨, 즉 캘리그래피(Calligraphy)를 배우려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03

누구나 무엇을 배울 때는 배운 내용을 적는다. 배운 내용을 적는 행위는 학습에 수반되는 피할 수 없는 행동이다. 이른바 ‘필기’를 한다. 그러나 컴퓨터나 스마트폰이 일상화되면서 필기하기의 양태가 바뀌었다. 직접 육필로 필기를 하며 학습하는 것이 더 학습 효과를 주는가. 아니면, 컴퓨터 자판을 치는 방식으로 기록하며 학습하는 것이 더 학습 효과를 주는가. 미국 프린스턴 대학의 학습심리학자들이 실험을 해 보았다고 한다.

 

프린스턴 대학의 실험을 국내에서도 SBS 취재팀이 그대로 재현해보았다(SBS 조동찬 의학전문 기자의 보도, SBS 2019.12.29.). 먼저, 네 명의 남녀에게 대입 수능 독해력 문제를 들려주었는데, 두 명에게는 노트북 키보드로 쳐서 넣도록 했고, 다른 두 명에게는 손으로 직접 받아 쓰도록 했다.

 

노트북을 이용한 사람들은 거의 모든 문장을 그대로 받아서 쳐서 넣었지만, 필기도구로 필기를 한 사람들은 그렇지 못했다. 하지만 각자 기록한 것으로 2분 동안 공부해서 얼마나 정확하게 이해했는지 문제를 풀게 했다.

 

그 결과 이해도는 기록의 정확도와는 정반대의 결과가 나왔다. 손으로 필기한 그룹이 컴퓨터로 쳐서 넣어 기록한 그룹보다 더 많은 정답을 맞히었다. 컴퓨터 사용 학생들은 기억하면서 친다기보다는 빠르게 최대한 많은 양을 적어보려고 했다. 반면 손으로 필기한 학생들은 필기하면서 적은 내용에 스스로 번호도 붙이고, 내용에 따라 필기할 위치도 정해가면서 기록을 하다 보니까 기억에 많이 남았다고 말했다. 이는 프린스턴 대학의 실험 결과와도 비슷했다. 글씨를 손으로 직접 쓰면서 공부하면, 컴퓨터로 치면서 공부하는 것보다 단순 기억은 물론 개념 이해도도 월등히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는 것이 결론이었다.

 

SBS의 조동찬 의학전문 기자는 이렇게 말한다. “손으로 기록할 때 뇌는 더 활성화되는데요. 손으로 쓰면 다 받아적을 수 없어서 요약하고 이해할 수 있도록 쉬운 표현으로 바꾸는데, 그러는 동안 뇌 여러 부위를 사용하기 때문입니다.” 세브란스병원 노년 내과의 김광준 교수도 이렇게 말한다. “자기가 잘 알지 못하는 것도, 글씨로 적는 과정 동안 뇌에서 사고가 이루어지게 되고, 그게 내용을 이해하거나 기억하는 데 도움을 줍니다.”

 

육필의 가치를 재발견하는 노력이 다방면으로 있어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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