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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얀마에 대해서 몰랐던 것들…

 

미얀마는 참 낯설다. 동남아 어딘가의 가난한 나라. 수도가 어딘지…. ‘아웅산 수치’는 안다. 민주주의를 하다가 오랫동안 구금된 사람. 다시 쿠데타가 일어났고, ‘아웅산 수치’는 또 구금됐다.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민들이 죽어간다. 안쓰럽고 화가 난다. 그러고 보니, 오래전 우리 현대사와 참 많이 닮았다.

 

닮은, 너무도 많이 닮은 미얀마와 우리의 현대사

미얀마는 몇 안 되는 불교국가다. 쌀농사를 짓는다. 한국은 바다를 끼고 일본과 중국 사이에 있다. 미얀마는 바다(인도양)을 끼고 인도와 중국 사이에 있다. 두 나라 모두 큰 나라 사이에서 버티며 살아왔다. 그래서 침략당하기도 좋고 큰 나라를 끼고 발전하기도 좋다.

 

미얀마는 130여 개 다민족국가다. 인구의 70%는 버마족이다. 영국 식민지였을 때 주류인 버마인들은 간절히 독립을 원했고, 그래서 일본제국주의와 손을 잡았다. 그때 다른 소수민족은 독립을 위해 영국과 손을 잡았다. 그때부터 같은 미얀마에 살지만 버마족과 소수민족과의 갈등은 시작됐다.

 

그 갈등을 묻고 연방국가로 만든 게 독립영웅 아웅산 장군(우리는 1983년 아웅산 묘소 폭발 참사로 기억한다. 해외 원수가 방문하면 꼭 참배할 만큼 미얀마에서 아웅산 장군의 위상은 신성하다)이다. 지난 1948년 영국으로부터 독립하고 버마연방(Union of Burma)을 세웠다. 아웅산 장군이 독립을 위해 만든 군대가 탓마도(Tatmadaw)다. 그 탓마도가 70여 년이 지나 아웅산의 딸 ‘아웅산 수치’ 정권을 무너뜨리고, 그녀를 잡아 가뒀다.

 

‘아웅산 수치’는 15살에 영국 유학길에 올라 옥스퍼드대학에서 경제학을 전공했다. 옥스퍼드대 교수인 영국인 마이클 에어리스를 만나 결혼했고, 두 아들을 낳았다. 33살이던 지난 1988년, 어머니 병문안을 위해 고국을 찾았다.

 

58년 군사정권을 끌어내린 아웅산 수치

마침 그해 랑군(지금의 양곤)에선 8888(1988년 8월 8일 랑군 대학생들의 민주화 봉기)시위가 벌어졌다. 시위에 참가했다. 그렇게 그녀의 두 번째 인생이 시작됐다. 미얀마 군부는 그녀를 15년 동안 집에 가뒀다.

 

1990년 마침내 아웅산 수치가 이끄는 민주주의 민족동맹(NLD)이 82%의 지지를 얻어 군부 여당에 압승을 거둔다. 하지만 군부는 총선 결과를 거부했다. 수치 여사는 다시 가택 연금됐다. 이듬해인 1991년, 아웅산 수치 여사는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물론 갇혀있어서 직접 받지 못했다. 시상식에는 아들과 남편이 대신 참석했다.

 

1999년 남편 에어리스 교수가 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아웅산 수치는 군부가 재입국을 거부할 것을 우려해 영국을 찾지 못 했다. 남편의 임종도 보지 못했다. 수치 여사는 2000년에 민주화 열기가 거세지자 다시 구금된다. 2002년 UN의 중재로 석방되지만, 2003년 다시 구금됐다. 그러자 미국 등 서방세계는 끈질기게 미얀마 경제를 틀어막았다.

 

경제제재를 버티지 못한 미얀마 군부는 2012년 결국 아웅산 수치를 석방한다(그해 그녀는 노르웨이를 방문해 노벨평화상 수락 연설을 한다. 수상 21년 만이였다). 그리고 2015년 총선, 아웅산 수치가 이끄는 민주주의 민족동맹(NLD)이 총선에서 압승했다. 비로소 미얀마에 문민정부가 들어섰다. 58년의 군사정권이 막을 내렸다.

 

하지만 (YS가 하나회를 척결하듯) 아웅산 수치는 군부를 쳐내지 못했다. 군의 권력 뿌리는 거대했다. 수치 고문은 대신 권력분점을 선택했다. 국방장관 등 3명의 장관을 군에게 보장했다. 국회 의석의 25%도 군에게 자동 할당된다(군이 25%를 차지하는 의회에서 개헌을 하려면 의원 75%의 동의를 얻어야 한다. 그러니 군이 존재하는 한 개헌은 불가능하다) ‘아웅산 수치가 대통령 위에 있다면, 군은 미얀마 헌법 위에 있다’는 말이 생겨났다.

 

 

다시 1990년으로 돌아간 미얀마의 시계

그러던 2018년 미얀마군이 북부 소수민족 로힝야족을 학살한다. 로힝야족이 무장난동을 벌였다는 명분이지만, 미얀마군은 오래전부터 버마인(불교)들의 미움을 샀던 로힝야족(이슬람)을 토벌하면서 지지세 확장을 시도했다. 무차별 학살과 성폭행이 자행됐다. 확인된 사망자만 9,700여 명. 1년 뒤 유엔 진상조사위는 이 사건을 ‘종교와 인종의 씨를 말리려는 중대 범죄’로 규정했다.

 

이를 지켜보기만 한 아웅산 수치 고문에 대한 국제사회의 비난과 실망이 이어졌다. 이듬해 유엔의 진상조사위에 출석한 아웅산 수치 고문은 “로힝야족의 무력 사용에 대한 불가피한 대응이었다”고 군부를 옹호한다. 이날 이후 국제사회는 민주화 영웅 ‘강철 나비(영국 언론이 붙인 별명)’에 대한 기대를 접었다.

 

하지만 급전직하하던 아웅산 수치 고문은 다시 지난해 총선에서 83%의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고 재진권에 성공한다. 권력에서 밀려날 것을 우려한 군부는 지난 2월 1일 새정부 출범일을 하루 앞두고 쿠데타를 일으켰다. 미얀마의 시계는 다시 1990년으로 돌아갔다.

 

미얀마 시민들은 민주주의를 쟁취할 수 있을까

40년 전 우리도 비슷한 경험이 있다. 그때 우리도 10% 남짓 고성장을 이어갔다. 미얀마는 베트남과 함께 동남아에서 가장 높은 6~7% 성장을 이어왔다. 아시아개발은행(ADB)는 2030년까지 연 7% 성장을 할 나라로 ‘미얀마’를 꼽았다. 그때 우리는 민주화를 이뤄냈다. 산업화와 민주화 두 마리 토끼를 잡은 우리는 결국 세계 10위권의 경제 대국까지 달려왔다.

 

미얀마도 문민정부가 들어선 후 글로벌투자가 물밀 듯 들어왔고 국민소득도 1,000달러를 넘어섰다(미얀마 경제는 한국 경제의 1/23쯤 된다). 인터넷과 모바일에 익숙한 젊은 세대가 발전을 견인했다. 오랜 가난을 뚫고 이제 막 달리기 시작한 나라. 그런데 또 쿠데타가 터졌다.

 

미얀마 시민들은 민주주의를 쟁취할 수 있을까. 시민들이 목숨을 걸고 거리로 나온다. 아웅산 수치가 처음 조국에서 민주화 시위에 참여했던 1988년, 8888 시위 때 미얀마 시민 3천여 명이 죽었다. 네윈 독재정권은 무너졌지만, 다음 군부가 또 집권했다. 시민혁명은 좌절됐다. 이번에 쿠데타를 일으킨 윈 아웅 사령관은 그 군벌의 대표주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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