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도자의 목소리를 찾아서
"삶을 마치 소유물처럼 생각하기 때문에 우리는 그 소멸을 두려워한다. 그러나 삶은 소유물이 아니라 순간순간의 있음이다. 영원한 것이 이 세상에 어디 있겠는가. 모두가 한때일 뿐. 그러니 그 한때를 최선을 다해 최대한으로 살 수 있어야 한다. 새롭게 발견되는 삶은 놀라운 신비요, 아름다움이다. -60쪽
조용한 은둔자로 살면서도 빛과 소금 같은 언어로 시절에 맞추어 세상을 향해 올곧은 목소리를 내며 청아한 삶을 견지하다 이승을 떠난 노스님의 말씀을 밑줄 그으며 읽습니다. 읽는다기보다는 죽비로 맞았다는 표현이 더 맞습니다.
더 가지지 못해, 더 높은 곳을 향하여 달려가는 일상을 되돌아보며 나를 질책하고 내려놓음을 생각하게 하는 `스승`의 목소리를 듣습니다. 타계하신지 오래 되었음에도 생전의 모습이 그대로 투영되는 목소리는 여전히 맑고 향기롭습니다. 세상의 아픈 곳을 향해 소리 없는 가르침으로 살아서보다 죽어서 더 빛나는 스님의 책들은 여전히 위대한 고전입니다. 삶이 곧 글이었던 까닭입니다. 글과 삶이 하나였기에 영혼을 울리며 목마른 사람들에게 아직도 생수가 되어줍니다.
지친 영혼에 생수를 마신 듯 부스스 깨어나며 눈이 밝아옴을 느끼며 14년 전 읽었던 이 책에서 위안을 받습니다. 외딴 산골에서 산 짐승들과 친구하며 나무들의 목소리를 글로 옮긴 노승의 따스한 목소리는 혼탁한 세상을 향해, 소비로 얼룩진 물질 세상을 향해 질타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시선이 밖이 아닌 내면으로 돌아와야 함을 준엄하게 꾸짖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할아버지가 손자에게 조용조용 이야기하듯 다정다감한 언어로 깨달음과 지혜의 선승들이 남긴 주옥같은 언어들을 꿰어서 목걸이로 선사해줍니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며 밝아오는 여명 속에 명상에 잠긴 듯 맑고 향기로운 내밀한 충만함으로 무더위에 지친 삶에 몇 날 동안은 피곤함을 모를 것 같습니다. 혼탁한 시대에 이처럼 맑은 영혼의 소유자가 우리 곁에 있었다는 사실이 참으로 감사하고 고맙습니다. 불편함과 무소유를 참살이로 인식하며 흙과 나무, 바람과 물을 그처럼 소중하게 찬미하는 아름다운 영혼의 노래를 즐겨 들어야겠습니다.
힘들게 사는 사람들이 많은 세상입니다. 금방이라도 소낙비가 퍼 부을 것같은 어두운 구름이 우리의 시야를 덮고 있습니다. 희망을 노래하는 목소리를 찾아보기가 어렵습니다. 살아남기 위해 목소리를 높이고 몸부림을 치지 않으면 안 되는, 생존의 끈을 부여잡고 힘들어하는 사람들이 넘쳐납니다. 한가롭게 책 이야기를 하는 것조차 미안한 세상입니다. 그래도 희망을 마시기 위해, 내일을 위한다면 책을 들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밥이 없으면 못 사는 삶입니다. 기름이 없으면 굴러가지 못하는 삶입니다. 일자리가 없으면 너무나 고단한 삶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을 가까이 하지 않는 삶은 우리들의 영혼을 삭막하게 합니다. 어디선가는 마알간 샘이 흘러서 지친 삶의 흔적들을 씻어낼 수 있어야 합니다.
책을 읽는 동안 이 책의 제목처럼 맑고 향기롭게 살 용기를 얻습니다. 먹고 살기도 바쁘고 힘든 세상에 그렇게 한가한(?) 삶의 이야기를 읽을 여유가 없다고들 합니다. 억울하고 힘들 때일수록, 마음을 둘 곳 없어 한바탕 싸우고만 싶은 심정이 드는 때일수록 한 박자 늦춰서 느긋한 목소리를 들어야하지 않을까요?
상생보다는 경쟁의 논리가 앞선 세상, 낮은 곳보다는 높은 곳을 지향하는 목소리가 넘치는 세상, 먼 미래보다는 발끝의 돌부리조차 넘지 못하고 근근히 살아내는 이즈음의 세상 이야기를 잠시 덮었으면 합니다. 힘들어도 희망을 이야기하고 적게 가지는 삶을 실천하는 노승의 목소리에서 살아낼 용기를 얻었으면 참 좋겠습니다.
이 책은 법정 스님이 낸 산문집 중에서 백미라고 할 수 있는 글만을 다시 뽑아서 출간한 글입니다. 아무리 먹어도 질리지 않는 생수처럼, 날마다 먹는 밥처럼 가까운 곳에 두고 눈맞춤하며 읽어야 할 책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감히 `스승`의 반열에 두어도 좋은 책입니다. 어찌하면 <맑고 향기롭게> 살아갈 수 있을까를 날마다 묵상하며 곁에 두고 눈맞춤하며 읽을 참입니다.
이 책을 다시 꺼내 읽다가 시선이 오래 머문 곳을 소개합니다. 내게도 몇 안 되는 정말 그리운 사람이 있었고 지금도 있음을 생각하니 잠시 코끝이 찡해집니다. 이제는 얼굴조차 볼 수 없는, 천상에 머무는 이름들, 이제는 그립지만 만날 수 없는 사람에 이르기까지. 이제는 더는 그리운 사람이 없어서 마음이 아려옵니다. 그립지만 볼 수 없는 존재에는 어쩌다 잃어버린 아끼던 반려견 토실이와 사고로 잃은 고양이, 양이의 모습도 눈에 보일 듯 선명합니다. 그러니 그리움의 대상은 사람만이 아닙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만나야 할 사람은 그리운 사람이다. 한 시인의 표현처럼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는 그런 사람이다. 곁에 있으나 떨어져 있으나 그리움의 물결이 출렁거리는 사람은 때때로 만나야 한다. 그리워하면서도 만날 수 없으면 삶에 그늘이 진다. 그리움이 따르지 않는 만남은 지극히 사무적인 마주침이거나 일상적인 스치고 지나감이다. 마주치고 스치고 지나감에는 영혼에 메아리가 없다. 영혼에 메아리가 없으면 만나도 만난 것이 아니다. "-209쪽
그러고 보니 최근에 지워 버린 친구와 지인 목록은 그리운 사람이 아니라 영혼이 없는 만남이었음을 깨닫습니다. 만날 때마다 영혼이 소진되는 듯한, 이해타산에 밝은, 매우 사무적인 만남을 수십 년 이어오다 잘라낸 나의 용기에 박수를 보냅니다. 사람이든 물건이든 그리움이 없는 것은 결코 곁에 두지 말라는 스님의 가르침에 미안함을 덜어냅니다.
잘라낸 사람들이 혹시 뒷담화를 하더라도 개의치 않을 용기가 생겼습니다. 누군가 왜 만나주지 않느냐고 물어온다면 더는 소진되는 영혼을 감당할 자신이 없어서, 그리움이 남아 있지 않아서라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용기를 준 스님에게 감사하고 싶습니다. 무더위마저도 잊게 하는 맑고 서늘한 책의 숲으로 초대합니다. 삶에 지치고 힘든 그대여! 책 속에서 위안을 느껴보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