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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픔에서 벗어나고 싶다 문경민의 <훌훌>

학생 출결을 위한 기록 지침을 보면 ‘입양’과 관련한 항목이 있다. 직접 적용을 해본 적은 없지만 늘 관심을 갖고 있었다. ‘입양(入養)’은 ‘양친과 양자가 법률적으로 친부모와 친자식의 관계를 맺는 신분 행위’로 정의되어 있다. 과거에는 우리나라에서 외국으로 입양을 보내는 것으로 생각했지만, 실제 현황을 보면 국내에서도 많은 수의 입양이 이루어지고 있다. 입양 규모는 어느 정도 될까? 2021년까지 총 24만 9,635명의 입양이 이루어졌으니 그 숫자가 적지 않다. 2012년 1,880명이었으나 지난해에는 415명으로 급감하였는데 이는 코로나19 상황과 가구 형태의 변화 등으로 분석된다(e-나라 지표 참조). 입양을 지원하기 위한 법률적·행정적 지원이 다양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유명 배우 가정의 사례가 알려지며 입양에 대한 긍정적 분위기가 형성되기도 하였지만, ‘정인이 사건’에서처럼 끔찍한 일이 벌어지기도 하였다. 아직까지는 예민한 문제를 여러 매체들이 다루고 있지만 당사자의 입장에서 세밀하게 그려내기란 쉽지 않다. 제12회 문학동네청소년 문학상을 수상한 문경민의 <훌훌>은 우리에게 물음표와 느낌표를 동시에 던진다.

  

친한 내 친구들도 너절한 내 가정 사정은 몰랐다. 부모님이 이혼해서 할아버지와 같이 사는구나, 하고 짐작하는 것 같았다. 앞으로도 입양 사실을 말할 생각은 없었다. 2년 뒤면 없던 일이 될 터였다. 까만 상자에 담아 낭떠러지 아래로 내던져 버릴 사연이었다. 
내 진로 키워드는 셋이었다. 4년 전액 장학금, 기숙사, 취업 전망. 이것만 만족시킨다면 지역이 어디든 전공이 무어든 상관없었다. 징글징글한 과거를 싹둑 끊어 내고 오롯이 나 혼자서 살고 싶었다. 이름도 바꿔 버리고 싶었다. 취업까지 성공하면 나를 낳은 부모를 찾아갈 생각이었다. 
날 만나길 원하든 말든 반드시 찾아가고 싶었다. 나를 낳은 부모가 한심하게 살고 있다면 그것도 좋을 것 같았다. 다만 이 말만은 꼭 하고 싶었다. 당신들이 포기했던 내가 이만큼 제대로 커버렸노라고. 내 부모가 어떻게 생겨 먹었는지 한 번은 봐야 했다고 말하고 싶었다. 얼빠진 표정으로 나를 쳐다볼 그들 앞에서 차갑게 돌아서고 싶었다.                                                 _ 본문 32p

 

주인공 유리는 입양을 왔다. 입양을 해온 양엄마는 어렸을 때 몇 번 만난 적밖에 없고, 양할아버지와 살고 있다. 학대를 당하거나 차별을 받은 것은 아니지만 입양가정에서 벗어날 날만을 기다리고 있다. 자신을 양육하지 않고 입양을 보낸 부모에 대한 마음이 어떤지 잘 나타나 있다. 그러던 중 양엄마가 사고로 죽는 일이 생긴다. 이 일이 있은 후 양엄마의 또 다른 아들 윤우가 집으로 온다. 

 

윤우는 순한 아이였다. 이것도 모른단 말이야? 하고 목소리를 높이면 부끄럽다는 듯 고개를 수그렸다. 간식으로 고구마 맛탕을 책상 위에 올려 주면 눈을 빛내며 나를 올려다보았다. 나는 무심하게 눈길을 돌렸지만 내심 흐뭇했다. 그런 눈빛을 느끼고 싶어서 내 공부도 바쁜 중에 고구마에 설탕물을 입히는지도 몰랐다. 요리와 관련된 전공을 선택해서 대학을 가는 건 어떨까 생각하기도 했다. 진로 고민이 조금 복잡해졌다. 원래대로라면 대학 합격을 빌미로 이 집을 훌훌 털고 떠날 생각이었다.                           _ 본문 116p 


혈육이 아니지만 연우와 함께 지내며 생각이 변한다. 이 대목에서 가족의 의미와 정의가 무엇인지 생각하게 된다. 혈연으로만 이루어진 전통적인 개념의 가족이 아니라 새롭게 변동하고 재정의되는 가정의 모습에 대한 진지한 고민을 해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좋은 일들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연우는 자기 방으로 들어갔다. 나는 두 손으로 헝클어진 머리칼을 가다듬었다. 조금 전 내 안에서 터졌던 살벌하고 뜨거운 감정이 떠올랐다. 잔인하고 거칠었던 내 행동들이 머릿속에서 고스란히 재생됐다. 나를 믿을 수가 없었다. 어디에선가 엄마 서정희 씨가 웃고 있을 것만 같았다.               _ 본문 133p 
 

연우에게 불편한 감정을 쏟아내고, 유리는 자신의 복잡한 감정과 알지 못했던 폭력성에 적지 않은 충격을 받는다. 하지만 아픔을 함께 겪으며 점점 성장해간다. 친구 중 우연히 자신과 같은 처지인 세윤을 알게 된다.  

 

아빠, 엄마, 세윤, 세희가 스튜디오에서 찍은 가족사진이었다. 정장을 입은 세윤 아빠와 엄마가 의자에 앉고 단정한 옷을 입은 세윤과 세희가 뒤에 서 있는 사진이었다. 네 가족이 모두 비슷한 미소를 올리고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나는 눈을 깜빡였다. 뭔가 이상했다.
세윤의 모습이 가족사진에서 도드라지는 느낌이었다. 세희의 얼굴에는 아빠와 엄마의 생김새가 배어 있었지만 세윤은 아니었다. 세윤은 아빠, 엄마, 동생과 얼굴색부터가 달랐다. 세윤의 얼굴만 유달리 하얘서 이질감마저 들었다.                                                                                              _ 본문 139p 

 
이 소설에서는 현재 우리 사회의 다양한 문제들을 다채롭게 담아내고 있다. 아픔 속에서 성장하는 소녀를 통해 그 문제들을 어떻게 해결하고, 아픔을 이겨내야 하는지 전하고 있다. 소설의 후반, 유리의 담임선생님이 전해주는 이야기는 우리들에게 담담한 위로를 준다. 

 

선생님의 말이 이어졌다.
“그 정도면 죽을 만큼 힘들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그것보다 더 독한 일들이 세상 곳곳에서 벌어지더라. 일단 우리는 전쟁은 겪고 있지 않잖아. 지독한 곳에 끌려가서 고문을 당하는 것도 아니고. 그래서 내가 겪은 일로 죽어 버리겠다고 말하기는 나는 좀 그래. 하지만 유리야. 사람마다 느끼는 고통은 각각 다른 것 같더라. 감당해 낼 여건도 다르고. 설령 나와 비슷한 상황에서 죽음을 선택한 사람이 있다고 해도 함부로 말할 수는 없을 거야.”
길이 열리기 시작했다. 선생님은 조금씩 속도를 내며 비슷한 말을 반복했다. 
“살아온 길이 저마다 다르니까 함부로 판단할 수는 없을 것 같아. 나는 그 사정을 알 수가 없잖니.”
_ 본문 206p 

 
가벼워 보이는 이야기지만 결코 가볍지 않은 이야기. 작가는 다음과 같이 전하고 싶었던 말을 남기고 있다. 
 
이 작품은 한 입양가정의 어머니를 인터뷰하면서 시작됐다. 소설 작업은 착실히 진행됐고 조금씩 꼴을 갖추어 초고 상태로 나아갔다. 초고가 나올 즈음, 인터뷰했던 어머니께 초고를 검토해주셨으면 한다는 채팅 메시지를 보냈다. 
‘그럼요! 당연히 해 드립니다. 그리고 꼭 검토해야 하고요.’ …(중략)… 
나는 그 말의 인상을 다음과 같은 한 문장으로 정리했다. 
한 아이와 평생을 함께하기로 한 우리의 결심을 대상화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겪어 보지 않으면 알 수 없는 마음이 있다는 걸 나도 안다.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내 딸은 자폐 장애가 있다. 영화나 소설에서 자폐 장애인이 등장할 때마다 나는 신경이 곤두선다. 장애인들이 웃음거리나 억지스러운 감동을 자아내는 소품으로 쓰이는 건 아닌지 걱정이 앞선다. 보면서 마음 편했던 작품은 많지 않았다. 쓴웃음을 짓게 되는 일이 종종이어서 이제는 그러려니 한다. 내 소설은 그러지 않았으면 한다. <훌훌>이 모든 사람의 마음에 닿는 소설이기를 바라지만 무엇보다 입양가정으로부터 지지를 얻는 소설이 되기를 소망한다. 이 소설이 그분들께 힘이 되기를 바란다느니, 세상이 그분들의 삶을 알아주었으면 한다느니 하는 말이 섣불리 나오지는 않는 걸 보면 나는 여전히 <훌훌>이 그분들께 불편한 마음을 끼치면 어쩌나 걱정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내 염려와 별개로, 나는 이 소설이 좋다고 여긴다. 모든 고통은 사적이지만 세상이 알아야 하는 고통도 있다. 무엇으로 아프고 힘든지 함께 나누고 이야기해야 세상이 조금씩 더 나아지기 마련이다. <훌훌>이 없는 세상보다 <훌훌>이 있는 세상이 더 좋다고 나는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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