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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 레슨 

 

꼭 40년 전이다. 그때 나는 한국교육개발원에서 내 생애 처음 연구직에 발을 들여놓았다. 내가 연구소의 연구원이 된 데에는 약간의 우여(迂餘)와 곡절(曲折)이 있다. 교직에 만족하며 학생들과 잘 지내는데 선배의 권유가 나를 흔들었다. 교육방송(EBS)에서 PD를 공개채용하는데 응시해 보란다. 대학 시절, 방송에 살짝 빠져서 학점을 아래로 깔고 지냈던 나에게는 유혹이었다. 교직도 너무나 좋은데 어떡하나. 일단 시험을 치며, 마음을 다독거렸다. ‘그냥 한번 시험만 쳐 보는 거다. 합격이 되더라도 안 갈 수 있어. 불합격이면 그것도 절대 나쁘지 않아.’


합격자 발표가 났는데, 딱 한 사람을 뽑았다. 그런데 그게 나였다. 결정을 계속 유보할 수는 없었다. 그렇게 해서 나는, 조금은 불안하게, 선생에서 PD가 되었다. 당시는 교육방송이 한국교육개발원이라는 국가연구소에 속해 있었다. 연구소 분위기가 나에게 모종의 자극을 주었을까. 방송 제작일을 하면서, 나는 내게 공부와 연구가 더 필요함을 깨달았다. 나는 대학원 진학과 더불어 PD에서 다시 한국교육개발원의 연구원이 되었다. 


연구원이 되긴 했지만, 나는 ‘교육연구’를 하겠다고 일찍 뜻을 품은 교육학 전공의 친구들과는 달랐다. 나는 연구직을 포부로 품고 연구원이 된 건 아니었다. 나는 ‘어쩌다 연구원’에 가까웠다. 그래서 직무에 바짝 매달렸지만, ‘연구를 잘 모르는 연구원’이라는 것이 문제였다.

 

그날은 아침부터 조바심이 일었다. 내가 처음으로 맡은 연구(survey) 프로젝트의 승인 결재를 받는 날이었다. 내가 맡은 조사연구란 비교적 단순한 연구이다. 그런데도 나에게는 긴장이 따라붙는다. 오전 10시 30분, 나는 연구본부장의 방으로 가서 일단 부속실에서 대기한다. 본부장은 기관 조직상 내가 속한 부서의 최상급자이다. 내 순서가 되어 들어간 나는 연구내용과 설문 설계를 본부장 앞으로 내어놓는다. 본부장은 연구내용을 일별한다. 그리고 이어서 내가 만든 설문 설계를 한참 들여다본다. 무슨 문제가 있는 건가. 


본부장은 창가에 있는 회의용 테이블로 나를 데리고 간다. 그도 내 맞은편에 앉으며, 연구 프로젝트 준비하느라 수고했다는 덕담을 건네신다. 나는 조금 긴장을 풀었다. 그는 부속실 여직원을 불러서 내가 가져간 ‘설문 설계’를 복사해 오라고 한다. 나는 한결 마음이 편안해졌다. 여직원이 복사 서류를 가지고 들어오자, 본부장은 이렇게 지시한다. 


“지금부터 여기 내 방에 아무도 들이지 말 것, 날 찾으면 부재중이라고 하세요. 지금 결재받으러 오는 사람은 이따 오후 2시에 오라하고, 전화로 누가 나를 찾으면 두 시간 뒤에 다시 걸어달라고 하세요(그때는 휴대전화가 없던 시절이다).” 


본부장은 설문 설계를 어떻게 했는지 나에게 설명해 보라고 한다. 나는 갑자기 자신감이 사라진다. 본부장은 미국에서 박사를 하고 귀국한 매우 실력 있는 교육평가 전공의 교육학자이다. 나는 주눅이 들었으니 요령부득의 설명을 했으리라. 그는 나의 설명을 참을성 있게 청취하며 무언가 메모를 부지런히 했다. 


본부장은 설문 설계를 다시 해야 할 것 같다는 말로 말문을 열었다. 나무라는 것이 아니니, 마음에 부담을 풀고, 함께 설문지 설계 공부를 해 보자 했다. 그때부터 본부장의 ‘설문조사법’에 대한 일대일 강의가 시작되었다. 본부장은 나를 인간적으로 배려했다. 문학 쪽 공부를 한 사람이니 언제 교육연구방법을 접한 적이 있었겠느냐. 잘 모르는 것 이해한다. 연구소에서 일하는 교과교육 전공 연구원들이 처음에 겪는 어려움일 수 있다. 그러면서 나를 가르쳐주기 시작했다. 교재는 내가 잘못 만든 ‘설문 설계’, 바로 그거였다.


그는 내가 만든 구체적인 설문 문항에 대해서도 요모조모 질문을 한다. 그의 질문은 일종의 산파술 같은 화법이다. 무언가 나를 깨우치게 하려는 의도가 숨어 있는 질문이다. 고밀도의 집중과 효율적인 소통이 될 수밖에 없다. 나는 이날 처음으로 조사연구는 설문과 인터뷰 설계가 연구의 질을 결정함을 체득하였다. 


시간이 잠깐 지나갔다. 어느새 점심시간이었다. 본부장은 내 연구의 설문 설계를 다시 해서 가져오라며 나를 보내 주었다. 생애를 두고 기억되는 참으로 인상적인 ‘개인 레슨’이었다. 그날 나에게 이렇듯 감동적이고도 너그러운 ‘개인 레슨’을 베풀어 준 나의 본부장을 여기에 공개한다. 그분은 박도순 교수님이다. 뒤에 고려대학교 교수로 근무하시면서 국립교육평가원 원장을 하시고, 이어서 새로 출범한 교육과정평가원의 초대 원장을 하셨다.

 

몇 해 전 교회의 교육프로그램에 재능기부 방식으로 강좌 하나를 맡았다. 강좌명은 ‘자서전 쓰기’였다. 강좌 이름을 보고 부담을 갖는 분들이 많았다. 자서전은 대단한 분들이나 쓰는 걸로 생각하는 고정관념이 문제였다. 주일 낮 예배가 끝난 뒤 오후에 1시간 반 정도 진행하는 강좌인데, 모두 네 분이 수강생으로 등록하였다. 한 분을 제외하고는 나보다 연배가 위였다.


그런데 이 강좌는 첫 번째 강의 후 위기에 봉착했다. 다양한 경험과 왕성한 발표 욕구를 가진 70대 할머니가 골절상을 입어 출석이 어렵게 되었다. 이어서 또 한 분이 교회의 다른 직무를 맡게 되어서 수강이 어렵단다. 이제 두 사람이 남았다. 


한 분은 1938년생 그해 팔순이 되는 A 어르신이다. 이분은 일제 강점기 평양 근교에서 태어나 6.25 전쟁 때 열세 살 소년으로 죽을 고비를 넘고 월남한 분이시다. 전쟁통에 전전하다 초등학교를 마친 것이 그의 학력이다. 이 강좌에 놀라울 정도의 열성으로 꾸준히 원고를 써 오신다. 다른 한 분은 기업의 CEO를 역임하신 B 대표이다. 그는 자신의 전문활동을 담은 자서전을 이미 출판한 바 있다. 암 투병에서 암을 이기고 새로운 가치로 세상을 살고 있다고 했다.


내 강좌는 이 두 분을 상대로 해야 하는데, 두 분이 너무 많은 차이를 가지고 있어서 운영이 어려웠다. CEO 출신인 B 대표가 제안한다. 자기는 그냥 참석만 해서 듣기만 할 것이니, 팔순의 A 어르신 저분을 중심으로 강의를 해 달란다. 저렇게 매주 어렵고 드문 체험을 담은 원고를 계속 써 오시는 의욕을 존중해 드리기로 하잔다. 자기로서는 A 어르신의 험난한 인생을 경청하는 것도 좋은 공부가 되겠다고 하신다. 참으로 착한 마음이시다. 


이렇게 해서 강의는 두 분이 나오시기는 하지만, 사실상 A 어르신과 나의 1:1 강의가 된 셈이다. 이번에는 내가 가르치는 ‘개인 레슨’을 하게 된 것이다. 나는 A 어르신이 살아온 이야기를 사건 별로 일단 한번은 말씀으로 하게 하시고, 그것을 글로 써 오도록 하고, 그 써온 글을 두고 문장과 어휘, 내용과 표현, 감정과 정서 등을 함께 생각하는 방식으로 강의를 진행했다. A 어르신은 문장을 생산하고 문단을 구성하는 능력이 모자랐지만, 자신의 젊은 시절을 재생하려는 글쓰기에 대한 집념은 정말 대단했다. 한 주 한 번의 대면강의로는 충분한 지도를 받기 어렵다고 생각했는지 평일에도 전자메일로 글을 보내오고, 전화통화로 나의 검토와 수정의견을 청취하려 하셨다. 나는 그 성의에 감복했다. 물론 그의 최종 원고는 내가 촘촘히 문장을 다듬어 드림으로써 완료되었다. 


A 어르신은 태어나서 군대를 마칠 때까지의 25년 인생을 기록해 두려고 했다. 종강은 7월 초에 했지만, 그는 어떻게 해서든 이 기록을 책자로 만들어 추석에는 자녀들과 친지들에게 돌리겠다고 했다. 책을 만들기 위해서, 그에 대한 나의 ‘개인 레슨’은 9월 중순까지 이어졌다. 나는 송파구청 부근에 있는 제본소를 물색하여 책을 제본하는 일까지 맡아 주었다. 제목은 <전란의 세월을 뚫고, 시련의 청춘을 넘어>라고 내가 지어드렸다. 총 92페이지 분량이었다. 


A 어르신은 모두 70부를 제본하여 책을 만들어 갔다. 그가 책을 받아 가던 날, 소년처럼 기뻐하던 그를 잊을 수가 없다. 추석이 지나고 그는 우리 부부를 조용한 한식당으로 초대하였다. 나의 ‘개인 레슨’에 대한 감사의 표시라며 열두 살 아래인 나에게 선생님 대접을 한다.

 

* ‌‘개인 레슨’은 교수와 학습의 개별화를 이상으로 하는 현대교육의 지향점에 부합하는 측면이 있다. 이 말이 지금은 ‘사교육 과외’라는 왜곡되고 비틀린 개념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지만, 이 말을 우리는 제 자리에 돌려놓아야 할 것이다. 교육이 인격과 인격의 소통, 존재와 존재의 상호 일깨움이라는 명제를 건강하게 회복하기 위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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