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인과 결과의 다양한 관계 어떤 이야기를 듣고 나서 우리는 ‘과연 그럴 수 있겠군’ 하고 고개를 끄덕이기도 하고 ‘앞뒤가 안 맞는 엉터리군’ 하고 반발을 느끼기도 한다. 이러한 감상이나 평가에 관여하는 중요한 기준 중 하나가 개연성 또는 인과성이다. 개연성은 절대적으로 확실하지 않으나 아마 그러할 것이라고 생각되는 성질을 가리킨다. 전통적인 논리학에서는 그럴 것 같다고 여겨지는 정도를 수량으로 측정할 수 있는 경우를 개연성이라고 정의한다는데, 오늘날의 학문에서 보자면 이것은 수학의 확률이나 철학에서 말하는 ‘확실성’에 해당할 것이다. 한편 인과성은 원인과 결과가 맺는 규칙적인 관계를 가리킨다. 그런데 물리학처럼 둘 사이의 필요충분조건을 인과성으로 취급하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생물학처럼 원인과 결과의 관계를 필요 또는 충분조건으로 규정하기 어려운 경우도 있다. 예를 들어 간암의 원인으로 흔히 지나친 술 담배를 거론하지만, 술, 담배를 거의 하지 않는 사람도 간암에 걸릴 수 있다. 즉, 술, 담배는 간암의 필요충분조건이라 할 수 없으므로 이 둘 관계를 딱히 인과성으로 보기 어려운 것이다. 이렇게 보면 개연과 인과는 원인과 결과의 다양한 관계를 나타낸다. 개연성
인간의 언어는 상징적 비둘기를 평화의 상징이라고 하거나 흰색이 순결을 상징한다는 말은 누구나 한번쯤은 들어보았을 것이다. 이때 상징(象徵, Symbol)이란 평화나 순결 같은 추상적인 관념을 비둘기나 흰색처럼 구체적인 사물을 빌려 나타내는 방법을 가리킨다. 이와 비슷한 말로 우의(寓意)가 있는데, 이 용어는 알레고리(Allegory)라는 외래어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상징과 마찬가지로 추상적인 개념을 직접 표현하지 않고 구체적 대상을 빌려 묘사하는 알레고리는 주로 동물이나 식물에 인간의 감정과 의식을 의탁하는 의인화 기법을 차용하는 것이 특징인데, 그 대표 주자로 유머와 풍자를 통해 교훈적인 이야기를 엮어내는 우화(寓話, Fable)를 꼽을 수 있다. 그렇다면 상징과 알레고리는 어떤 맥락에서 탄생한 것일까? 이미 지난 연재 ‘비유와 은유’, ‘제유와 환유’에서 언급한 바 있듯이, 이러한 표현법은 어떤 것을 그 자체로만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 다른 것을 연상하고 상상력을 뻗치는 인간의 사고행위에서 비롯한다. 이를테면 세렝게티 초원에서 살아가는 사자한테 가젤은 사냥의 대상, 먹을거리라는 기호에 불과하지만, 인간에게 가젤은 또 다른 연상과 상상을 불러
유사성을 바탕으로 삼는 대유법 낯익은 것과 낯선 것을 조우시켜 새롭고 신선한 뜻을 얻어냄으로써 대상을 묘사하거나 새롭게 인식하게 해주며, 나아가 대상에 변화를 일으키는 수사법을 비유라고 정의할 수 있다. 한마디로 비유란 인간의 앎을 고양시키는 표현법이며, 그 중 은유가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다고 할 수 있다(지난 호에 실린 ‘낯선 것과 낯익은 것의 만남 - 비유 : 은유’를 참조 바람). 그런데 비유 가운데 직접 그 사물의 명칭을 가리키지 않고 비슷한 점을 지닌 사물을 대신 내세워 그와 관련된 다른 사물을 가리키거나, 부분으로 전체 또는 전체로 부분을 대체하여 대상을 표현하는 수사법을 대유법(代喩法)이라고 한다. 대유법은 크게 환유법(換喩法, Metonomy)과 제유법(提喩法, Synecdoche)으로 나뉘는데, ‘백발 → 노인’, ‘한민족 → 백의’, ‘요람 → 탄생’처럼 어떤 사물의 속성이나 특징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딴 낱말을 빌려서 표현하되 좀 더 보편적이거나 폭넓은 뜻을 환기시키는 방식을 환유법이라 하고, ‘약주 → 술 전체’, ‘펜 → 필기구 일반’과 같이 사물의 한 부분을 빌려 대상 전체를 지칭하는 데 주력하는 표현을 제유법이라고 한다. 일상적
‘지방’의 두 가지 뜻 지방의 뜻은 사전적으로 풀이할 때 두 가지 결로 나뉜다. 하나는 행정 구획이나 다른 특징으로 구분되는 일정한 지역이고, 또 하나는 한 나라의 수도 바깥에 위치한 지역이다. 전자의 의미에는 차등의 시선이 담겨 있지 않지만, 서울 이외의 지역 또는 아랫단위의 기구나 조직을 일컫는 후자의 의미에는 서울과 지방의 차이가 분명히 드러난다. 지금 한국사회에 만연한 서울중심주의를 떠올려보면 지방을 낮추어 본다는 뜻을 더욱 현실감 있게 느낄 수 있다. 국가를 세우고 도시를 건설해온 인간의 역사는 서울(수도)과 지방이라는 양극 구도를 낳았다. 예로부터 지방을 가리키는 ‘향(鄕)’ 또는 ‘촌(村)’은 ‘경(京)’과 대비를 이루었으니, 전근대 시대부터 지방은 권력의 중심부가 아닌 곳, 즉 중심에서 벗어나 있는 모든 곳을 통칭했다. 요컨대 지방이라는 말에는 이미 중앙을 중심에 놓는 사고방식과 시선이 오롯이 깃들어 있는 셈이다. 오늘날 서울과 그 나머지인 지방 사이에는 격차가 점점 더 벌어지고 있다. 서울‘특별’시민이라는 말을 비꼬는 의미로 사용하거나 서울을 ‘나라의 심장부’라고 비유하는 일은 그리 드물지 않다. 그리하여 서울이라는 지리적 경계 안에서는 우월
동양과 서양을 지도 위에 나타낸다면? 웬만한 사람이라면 동양과 서양이 무슨 뜻인지 그다지 어렵지 않게 대답을 해낼 것이다. 그렇다면 동양과 서양이 각각 어디를 일컫는지 세계지도를 펼쳐놓고 색칠을 하게 해보면 어떨까? 동양은 중국과 인도를 중심으로 한 아시아 지역, 서양은 유럽과 아메리카 지역이라는 사전적 의미를 잘 알고 있는 사람이라도, 막상 거기에 걸맞은 지도를 시각적으로 확실하게 그리는 일은 그리 쉽지 않을 것이다. 과연 어디를 동양이라 하고 어디를 서양이라 확정할 수 있을까. 아프리카 대륙은 동양인가 서양인가? 호주는 또 어떤가? 동양과 서양은 인류가 품어온 강력한 지리적 심상 중 하나임에 틀림없지만, 이런 반론에 부딪히는 순간 동양과 서양이라는 상식적 개념은 매우 상대적이고 유동적인 것으로 다가온다. 오늘날의 지도와는 사뭇 다른 김정호의 ‘대동여지도’ 요상한 중세의 지도에서 알 수 있듯이, 지리적 인식과 감각은 그 사회의 세계관과 우주관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지도란 머릿속에 그려놓은 지리적인 이미지를 단지 종이 위에 옮겨놓은 것에 불과하다. 과학과 문명의 발달로 인해 거리의 측량 방법과 지도 작법이 끊임없이 개선을 거듭하고 있고, 이
‘앞으로!’를 외치는 사회 ‘앞으로 앞으로’(윤석중 작사, 이수인 작곡)라는 동요가 있다. 지구는 둥그니까 앞으로 계속 걸어가면 온 세상 어린이를 다 만나고 올 수 있다는 내용이다. 세계화 시대를 이미 내다보기라고 한 듯, 맹랑하지만 밝고 명랑하고 진취적인 기상이 엿보인다. 시간과 공간, 개인과 사회, 물질과 정신을 막론하고, 앞으로 나아간다는 사고방식이 오늘날 추구해야 할 방향이라는 데 토를 다는 사람은 거의 없지 않을까. 어느새 긍정적이고 미래 지향적인 사고방식이야말로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중요한 가치관이라는 것이 사회적 신념이 되어버린 듯하다. 확실히 우리가 몸담고 있는 21세기는 진보를 지향한다. 진보는 사물이 점차 발달하는 것, 또는 바람직한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이지만, 인간의 역사를 중심으로 그 뜻을 새겨보면 역사 발전의 합법칙성에 따라 사회의 변화나 발전을 추구하는 일을 가리킨다. 다시 말해 진보라는 관념은 인간이 스스로의 힘으로 역사의 발전을 추진해왔고 그렇게 해나갈 것이라는 인간주의(휴머니즘)적인 사고에 의거한다. ‘앞으로!’를 외치는 진보의 가치관은 신이 주관하는 역사에서 합리적 이성을 갖춘 인간 주체의 역사로 이행한 시대, 즉 근대세계의 탄
두뇌의 기억, 몸의 기억 마음이나 생각 속에 어떤 모습, 사실, 지식, 경험 따위가 잊히지 않고 남아 있는 것을 기억이라고 한다. 누구나 꼭꼭 여며서 간직해두고 싶은 기억이 점점 흐릿해져서는 망각의 저편으로 사라지거나, 잊고자 몸부림쳐도 잊히기는커녕 점점 더 또렷해지는 기억 때문에 괴로워한 적이 있을 것이다. 인간에 속한 능력이면서도 마음대로 되지 않는 기억은 운명의 엇갈림을 초래한다. 현대에 들어와 뇌과학의 발달로 인해 인간의 기억에 대한 지식이 풍부해졌다. 그러나 기억은 두뇌뿐 아니라 몸 전체로 하는 것이다. 어릴 적에 스케이트를 탈 줄 알았다면 성인이 될 때까지 오랫동안 스케이트를 타지 않았어도 금방 스케이트를 탈 수 있는데, 이런 것은 근육의 기억이라 할 만하다.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 나오는 저 유명한 마들렌 과자의 장면에서도 근육(혀)의 기억을 확인할 수 있다. 이렇듯 기억을 두뇌작용으로 여기는 상식과는 달리, 기억을 담당하는 것은 두뇌라기보다 몸이다. 몸 전체가 기억의 기능을 갖고 있는 것이다. 몸으로 기억하는 행위는 이루 말할 수 없는 복잡한 과정과 효과를 지닌다. 설령 똑같은 시공간 속에서 똑같은 체험을 했다 해도 기억의
인간적이면서 초월적인 세계 우리 안에는 이야기 본능이 있다(여기에 대해서는 지난 호에 실린 글을 읽어주기 바란다). 다시 말해, 인간은 자신이 속한 공동체 안에서 이야기를 지어내고 들려주면서 살아가게끔 되어 있다. 생존을 위해 본능적으로 음식을 먹고 잠을 자는 것처럼, 이야기를 만들고 전달하는 일은 인간으로 살아가기 위한 필수적인 조건이다. 합리적 이성으로는 도저히 이해하거나 해명할 수 없는 현상에 부닥쳤을 때, 이야기로 꾸미는 과정에서 인간은 그것을 알아 나간다. 고난이나 상처로 얼룩진 상황에 빠졌을 때는 이야기가 자기 자신을 보호하고 치유하며 구원을 모색하는 길잡이가 되어주기도 한다. 이야기 속에는 풍요로움이나 복을 기원하는 마음이 들어 있을 뿐 아니라,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려는 자기 성찰의 정신도 담겨 있다. 이렇듯 이야기를 향한 욕구는 삶의 구석구석에 촉수를 드리우고 있다. 한마디로 이야기는 상상력을 발동하여 개인과 집단을 지키고자 하는 인간의 자기 생존 전략이라고 할 수 있다. 이야기 가운데는 인간의 세계를 훌쩍 벗어나 영혼이나 신의 세계를 넘나드는 것이 있는데, 대표적으로 신화와 전설을 꼽을 수 있다. 신화와 전설은 인간이 자신이 발 딛고 있는
삶을 좌우하는 이야기 본능 인간에게는 식욕, 성욕, 수면욕 같은 기본적인 욕구뿐 아니라 온갖 대상에 대한 욕망이 있을 터인데, 그 중에는 이야기를 향한 본능도 있다. 이야기는 우리 삶 도처에 스며 있으니, 이를테면 이야기와 별 관련이 없어 보이는 스포츠 경기에서도 사람들은 ‘한 편의 드라마’를 기대한다. 사람들은 경기를 관람하면서도 이야기 본능을 충족할 수 있을 때 더욱 만족을 느낀다. 우리는 마치 기승전결을 갖춘 완결된 이야기를 읽는 것처럼 게임을 지켜보면서, 경기의 흐름이 반전과 역전으로 긴장감 넘치는 전개를 보여줄 때 더욱 열광한다. 또한 스포츠 경기와 관련한 인물과 사건 등 끊임없이 주변 이야기와 뒷이야기를 즐긴다. 우리 속에 내재한 이야기 본능이 비단 즐거움 때문이라고만 여기는 것은 곤란하다. 이야기를 추구하는 열망은 상처 받은 마음의 치유에 관여하기도 하고 삶과 죽음을 좌우하기도 한다. 고아나 입양아처럼 부모가 누구인지, 고향이 어디인지 등등 자신의 서사를 모르는 사람들은 정체성 혼란 때문에 고통을 받으며, 개중에는 자살을 선택하는 사람도 있다. 어떻게 보면 그들의 괴로움은 삶의 첫 단추인 자신의 출생담을 제대로 구성할 수 없다는 것, 그래서 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