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명 우편향이라 자청하는 일부 단체들이 자유민주주와 시장경제의 기치를 내걸고 뉴라이트 교사연합이라는 새로운 교육단체로의 출범식을 가졌다. 기존 교육 단체인 전교조가 우리 교육현장을 망쳐놓았고, 더 이상 전교조의 세력 확대를 좌시할 없다는 의도하에 나름의 새로운 교육 패러다임으로 무장하고 첫 기치를 올렸다. 교직에 발을 들여 놓은 지 8년째다. 그 동안 어느 교육 단체에도 가입하지 않았었다. 물론 특별한 신념이 있고 없고 떠나서 굳이 아이들을 가르치는 데 특정 단체에 가입해야 할 의미를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중간중간에 여러 선생님들로부터 특정 단체 가입에의 요구를 받기도 했었다. 혹은 관리자들로부터 특정 단체에 가입하지 않은 점에 대해 수상스러운 눈 초리를 받기도 했었다. 뿐만 아니라 젊은 사람이 어떻게 우리 단체에 가입하지도 않느냐는 무언의 압력을 받기도 했었다. 대한민국의 한 평범한 교사로서, 가끔 우리 교육이 정치판에 휘둘리는 모습을 보면 서글픔을 삼키지 않을 수 없다. 마치 우리 교육이 일부 좌파 진영의 무리들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식으로 곡해당하는 모습을 보고 있자면, 과연 저 사람들은 도대체 21세기 대한민국의 교사들을 어떻게 보고 저 따위
교원임용고사 2차 시험에 평가 감독관으로 시험장에 간 일이 있었다. 몇 년 전에 필자 역시 이 시험을 통과하면서 어려움을 겪었던 터라 자못 수험생들의 긴장된 모습들이 예사롭게 보이지 않았다. 새벽같이 차를 몰고 시험장에 도착했다. 이미 많은 수험생들이 추위에 떨며 2차 시험 준비에 여념이 없었다. 요즈음 교원 임용 시험은 1차와 2차 시험을 보게 되는데, 필기고사인 1차 시험에 합격한 수험생들은 2차시험에서 면접과 논술 그리고 수업 실연이라는 과정을 거쳐야 비로소 합격자의 대열에 이름을 올릴 수 있다. 특히 1차 시험에 합격한 사람들 중에 몇 명만이 불합격하기 때문에 그 긴장도란 1차에 비해 더할 수밖에 없었다. 자못 긴장된 수험생들의 눈빛을 보니 애처롭기도 하고 한편으론 합격해야 겠다는 강인한 의지도 읽을 수 있었다. 다들 2차 수업 실기를 준비하느라 가져 온 자료들을 가지고 읽기도 하고 함께 온 이들 앞에서 수업 연습을 하느라고 열심히 준비들을 하고 있었다. 시험이 시작되고 수업시연을 하는 수험생들을 앞에 두고 자못 긴장된 자세로 평가에 들어가게 되었다. 심사위원이라는 자격으로 수험생들을 앞에서 그들을 평가한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뼈저리게 느
아이들과 생활하다 보면 이유없이 교사를 좋아하거나 미워하는 아이들을 종종 만나게 된다. 특히 감성적으로 민감한 여고생들은 특히 그런 부분에서 자신의 감정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거나 혹은 마음 속 깊이 숨김으로써 갈등을 빚는 경우를 종종 보게 된다. 첫발령을 받고 여고생들로부터 총각이라는 이유만으로 받은 사랑은 평생을 두고도 잊지 못할 추억으로 남아 있다. 하지만 이런 일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이유없이 나를 미워하면서 수업 시간이 여타 시간에 알 수 없는 싫은 감정을 보내는 아이들을 종종 만나기도 한다. 물론 사람이 살다 보면 싫은 사람, 좋은 사람 다 만나게 된다. 이런 점을 인정하면서도 혹시나 그런 감정으로 학교 생활이 어려워지거나 재미 없어진다면 그것은 곧 아이들 개인에게는 큰 문제가 될 수 있는 일이기에 교사로서 관심을 두지 않을 수 없다. 지난날 학생 시절로 되돌아 가보면, 선생님과의 관계가 필시 좋지 못하다면 이는 곧 성적에 그대로 반영되는 경험을 해 본 적이 있는지라 더욱 걱정이 되기도 한다. “○○아 좀 일어나거라. 무슨 공부를 그렇게 열심히 한다고 종일 자냐. 제발 부탁이다 눈 좀 뜨거라.” 아이는 나의 말이 성가시기라도 한 듯 못내 눈을 비비며
“선생님 방학 때는 도서관 문 열지 않습니까. 책 빌려 볼 때도 없고, 학교 아니면 안 되는데….” “이 놈아, 그럼 선생님이 너 책 빌려 주려고 학교에 나와야 되겠니.” 방학 전에 책읽기를 유독 좋아하는 아이가 도서관 담당인 필자에게 직접 찾아와 하소연을 하는 것이었다. 얼떨결에 아이에게 타박 아닌 타박을 주고 나니 마음이 좀 그랬다. 시골 아이들이라 특별하게 책을 빌릴 만한 곳이 없다. 도서관이라야 인근 읍이나 도시로 나가야 되니, 책을 빌려 볼 수 있는 곳은 학교 도서관이 유일했다. 하지만 방학이 되고부터 아이들은 책을 빌려 볼 수 있는 유일한 곳을 잃고 만 것이었다. 내심 고민이 되었다. 방학 중에 나오시는 선생님들에게 일일이 아이들의 책 대출을 부탁할 수 없고, 그렇다고 당번 나오는 아이들에게 무조건 맡길 수도 없었다. 도시의 큰 학교 같은 곳에서는 도서관을 맡고 있는 사서가 있기 때문에 방학 중에도 얼마든지 아이들에게 책을 대출해 준다고 한다. 하지만 대부분의 시골 학교들이라 도서관을 담당하는 인력이라고 해 봐야, 고작 도서관 담당 교사와 몇 명의 대출 및 자료정리를 맡고 있는 아이들이 고작이다. 그렇다고 그 아이들 보고 돌아가면서 방학 중에 나오
겨울방학이 되자마자 보충수업이 시작되었다. 입시를 앞둔 고2 아이들이라 방학의 의미도 느낄 여유도 없이 바로 보충수업이 시작되었다. 대부분의 아이들이 자기들 앞에 놓여진 큰 산을 넘어가야 한다는 막중한 사명감 때문인지 군소리 없이 대부분 참석하겠다는 의사표시를 받았기 때문에 출석률에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되겠다는 생각을 했다. 무조건 다 나오라고 강요 아닌 강요를 해야 하는 담임의 입장이 썩 그리 유쾌하지만은 않았다. 방학 때 나름대로 계획을 세워놓고 공부하려는 아이도 있을 것이고, 그리고 꼭 대학이 목표가 아닌 아이들도 있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진정으로 보충수업이 교육적인지의 여부에 대해서도 의문이 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입시라는 거대한 목표가 그들 앞에 버티고 있는 한 약간의 타율적인 부분도 필요하다는 것을 조금씩 터득하고 있는 터였기에 아이들 하자는 대로 무조건 두고 볼 수는 없었다. 주말을 보내고 보충수업이 시작되는 날, 다른 날 보다 더 일찍 출근해 교실로 가 보았지만, 교실은 냉기만이 돌 뿐 텅하니 비어 있었다. 아직 수업시간까지는 15분정도 남아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한 명도 오지 않았다는 것이 내심 서운하기도 하고 화나기도 했다.
추운 날씨가 겨울방학을 재촉하는 듯, 연일 혹독한 추위가 우리 곁을 떠나지 않고 있다. 이미 일선 학교들은 방학을 했거나 겨울방학을 준비하고 있다. 아이들의 학교생활기록부나 평가 처리에 일선 현장의 대부분 선생님들은 정신없는 학기말을 맞이하고 있을 것이다. 그런 바쁜 와중에도 ‘내년에는 어떤 아이들과 업무를 맡을까’라는 막연한 기대와 두려움을 가지게 된다. 대부분의 국공립 중·고등학교에서는 업무 분장이 인사이동이 끝나는 2월말에 이루어진다. 그렇기 때문에 내년 교과지도나 업무 준비에 어려움을 겪게 되는 경우가 많다. 학기말이 되고 보니 아이들과 그 동안 나누지 못한 이야기들을 나누며 쌓였던 앙금이나 오해를 풀기도 한다. “선생님 내년에도 우리 담임선생님 맡으세요?” “내년에도 꼭 맡아 주세요.” “싫어요. 선생님 내년에는 다른 학년 맡으세요. 제발!” 엉뚱하기로 이름난 한 아이가 갑작스럽게 내년 담임선생님 이야기를 꺼내면서 이야기꺼리로 돌변하고 만 것이었다. 때로는 아이들이 장난스럽게 내뱉는 이야기들이 왠지 아이들의 나를 향한 일 년 평가가 아닌지 싶어 예사롭지 않게 들렸다. 다행히 정색을 하고 ‘담임 맡지 마세요!’라고 하는 아이는 없었지만, ‘내년에도 선
최근 우리 교육계는 교원평가, 사학법 개정 등으로 시끄럽다. 마치 교육이 정치판의 안주거리가 되어 가고 있는 느낌이다. 교육이 百年之大計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하루가 다르게 교육 그 본연의 진정성을 잃어 가고 있는 듯하다. 과연 이 땅의 교육의 주체는 누구이며, 과연 교육은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 지 혼란스러울 정도이다. 문득 그런 시끄러운 난장판으로부터 잠시 눈을 돌리고 싶다. 산골의 조그마한 학교에서 아이들의 고사리 같은 손을 잡고 그들과 혼연일체가 되어 살아가고 있는 선생님들의 훈훈한 인간애가 그리워진다. 한편으로 우리 주변에서 그런 조그마한 시골 학교들의 정겨운 모습들이 추억 속으로 사라질까 두려운 마음이 앞선다. 학교는 단지 아이들만을 위한 공간은 아니다! 하루가 다르게 농·어촌 학교들이 폐교의 길로 들어서고 있다. 물론 다른 용도로 학교를 사용하는 곳도 있지만, 대부분이 버려진 채 보기 흉한 애물단지로 남아 있다. 시골의 정겨운 길을 걷거나 차로 달리다 보면 이런 폐교들을 자주 볼 수 있다. 단지 ‘학교가 아이들을 위해서만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이들은 아이들이 없으면 학교가 문을 닫는 것을 당연하지’라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문제는 시골의 학교들
요즈음 아이들 곧잘 같은 학우들의 생일이나 기념일들을 잘 챙긴다. 특히 친한 사이인 경우는 경제적으로 부담이 갈 정도의 선물이 오고가기도 하고, 때로는 끼리끼리 모여 파티를 열기도 한다. 물론 아이들끼리 모여서 서로간의 단합도 도모하고, 같이 어울리면서 그 동안에 몰랐던 면들도 알 수 있는 좋은 기회다. 뿐만 아니라 모임 문화를 통해 서로간의 동질감이나 연대의식을 배울 수 있는 좋은 일임에는 분명하다. 하지만 때론 과도하고 겉포장만 화려한 모임들이 빚어내는 모습들은 우리 성인들의 일그러진 초상을 엿보게 하는 것 같아 서글픔을 남긴다. “선생님 케익 좀 드세요.” 머리에 온통 케익으로 난장판이 된 한 아이가 일회용 접시에 케익을 담아 와서 좀 먹으라는 것이었다. “이놈아 네 머리에 있는 케익부터 치워라. 어디 지저분해서 먹겠냐.” “선생님도 이렇게 아이들끼리 어울리는 거죠. 선생님도 생일 축하해 주세요.” 아이의 간곡한 권유에 케익을 먹긴 했지만, 왠지 머리에 케익을 온통 뒤집어쓴 아이의 모습을 보니 썩 유쾌하지는 않았다. 잠시 후 밖에서 아이들의 고함치는 소리가 들렸다. 놀라 달려가 보니, 케익으로 범벅이 된 두 아이가 싸우고 있는 것이었다. 생일 축하하는
연말이 다가온다. 일선 학교에서도 기말 시험을 앞두고 교사나 학생 할 것 없이 모두 바쁠 때이다. 특히 아이들을 시험 준비로, 교사는 아이들의 여러 가지 자료들을 정리하느라 바쁜 시간을 보내게 된다. 최근에 일선 학교들은 일부 학교의 성적 부풀리기나 내신 조작 문제 등의 여파로 인해 골머리를 앓고 있다. 특히 고등학교는 대학입시와 직결되기 때문에 그 정도가 더 심하다. 이것이 아이들을 위한 교육인가! “정말로 해도 해도 너무해요. 이거 원 선생님이 신도 아니고, 어떻게 아이들의 평균 점수를 일정하게 맞추어 내라는 건지. 결국은 아이들을 1등부터 꼴찌까지 정확하게 줄 세우라는 소리가 아니고 뭐겠어요.” 일선 교육청 혹은 그 이상의 기관으로부터 내려오는 내신 성적과 관련된 지시 사항들이 때로는 도를 지나쳐 도저히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경우가 많다. 특히 아이들의 평균 점수를 특정 점수에 맞추고 거기에 맞지 않을 경우는 해당 선생님에게 주의나 경고 등의 벌칙을 준다고 엄포 아닌 엄포를 놓고 있다. 물론 상부 기관의 지시도 이해할 만하다. 보다 객관적이고 신뢰성 있는 내신 성적 산출을 갈망하는 이 땅의 수많은 학부모들의 바람을 조금이라도 현장에 반영하려는 의지
교사로서 ‘가르친다는 것’보다 어려운 일은 없을 것이다. 당연해 해야 할 일이기 때문에 그 중요성을 망각할 때도 있고, 때론 매너리즘에 빠져 지긋지긋한 일상으로 다가올 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가르친다는 것’ 자체에 대한 고민은 교사로서 평생을 가져가야 할 ‘업’임은 두 말할 나위 없는 핵심 명제임은 분명하다. 아이들 앞에서 열심히 강의하는 가장 일반적 의미에서의 가르치기에서부터 한편으로는 학교에서 교사의 작은 행동 하나하나가 우리아이들에게 소중한 가르침 영역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선생님 무슨 책 읽으세요? 가끔은 아이들이 도서관이나 교실에서 열심히 책을 읽는 모습을 살필 수 있다. 독서에 심취한 아이들의 모습을 보면서 내심 흐뭇함을 감출 길이 없어, 아이들 옆에 가서 유심히 그들의 책읽는 모습을 살피게 된다. “무슨 책을 그렇게 열심히 읽니? 샘에게도 좋은 책 있으면 추천 좀 해 줘라!” “선생님 이 책 정말로 재미있습니다. 선생님이 도서관에 구입해 놓지 않았더라면 이런 책이 있는지도 몰랐을 텐데, 여하튼 선생님 덕분에 재미있게 읽고 있습니다.” “○○이가 이렇게 책을 좋아하는지의 선생님도 미처 몰랐네. 여하튼 ○○이가 이렇게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수능 시험이 그런 대로 무난하게 끝이 났다. 하지만 시험 도중에 소지한 휴대폰이나 MP3 때문에 부득이하게 처벌을 받아야 하는 수험생들이 속출하고 있다. 자의든 타의든 시험 시간에 소지했다는 것 자체만으로 처벌을 받아야 하는 것이 수험생에게는 너무나 가혹한 규정은 아닌가라는 의견이 만만치 않게 제기되고 있는 실정이다. 수능이 끝나고 며칠 뒤에 도에서 주관하는 모의평가를 치르게 되었다. 대상은 고 1,2학년이었다. 규정상 사설 모의고사를 치르지 못하게 하고 있기 때문에, 일 년에 몇 번 보는 모의평가는 학생 본인의 수능 관련 성적이 어느 정도인지를 가늠해 볼 수 있는 중요한 잣대가 되었다. 아침 일찍부터 교실로 올라가 시험 준비를 하게 했다. “너희들 소지하고 있는 물건들 있으면 가방에 모두 넣고 혹시 잊고 주머니 속에 넣어 둔 전자 제품 없는지 꼭 살펴봐라.” 아이들은 부산하게 손전화(휴대폰)나 MP3를 거두게 되었다. “정말 짜증난다. 손전화나 MP3가 커닝의 도구도 되지 않는데 왜 이렇게 야단법석을 떠는지 모르겠어.” 한 아이의 항변하는 듯 한 말투가 마치 나를 향하고 있는 듯해, 기분이 상할 수밖에 없었다. “○○아, TV도 안 보나. 멋도 모르고 가져
교사로서 현장에서 부딪히는 가장 큰 문제는 과연 좋은 수업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의 문제이다. 체 바퀴 돌 듯 반복되는 수업이 항시 재미있을 리도 만무하고, 매 시간을 색다르게 아이들에게 다가서기란 더 없이 어렵고 힘든 일 이다. 때론 한 시간의 수업이 열 시간의 수업보다 더 힘든 때가 있고, 혹은 연속적으로 몇 시간을 해도 한 시간 수업보다도 더 가뿐할 때가 있다. 이처럼 교사에게 수업이란 정말로 풀기 어려운 과제와도 같은 것이다. 항상 고민해도 고민한 만큼 보상을 받기 어려운 경우가 다반사이다. 가끔은 징글징글한(?) 교과서를 집어 던지고 정말로 내 삶을 오롯이 담아낼 수 있는 지식의 장을 아이들에게 안겨 줄 수 없을까라는 고민에 빠져든다. 나는 잘 가르치고 있는 것일까? 일주일에 6시간, 여기에 보충까지 합하면 8시간 정도를 한 반 수업에 들어가게 된다. 고등학교에 국어교사로 근무하다 보니 언어 영역 관련 교과를 부득이하게 두 세과목을 가르치게 된다. 일주일에 8시간 정도면 어떤 날은 하루에 3시간을 같은 반에 들어가는 날도 있다. “선생님 싫어요. 차라리 우리 따라 다니는 귀신이 되세요.” 아이들의 장난기 섞인 볼멘 소리에 괜스레 주눅이 든다. “너그들
교사로서 가장 견디기 힘든 일 중의 하나가 자기 반 아이가 불의의 사고나 질병으로 세상을 저버리는 경우이다. 간혹 주위 선생님들로부터 그런 안타까운 사연을 접하면 그저 우리 반 아이의 일이거니 싶어 가슴이 저미고, 한편으론 아이들에게 더 잘해주어야겠다는 생각이 들게 된다. 우연히 이종 조카 수능 격려차 간 이모집에서 교사이신 이모부로부터 그런 아픈 사연을 듣게 되었다. “서 선생! 요사이 아이들 수능 때문에 고생 많지. 바쁜데, 뭐 이런 것까지 사와. 참 우리 차나 한 잔 해. 오랜만에 만났는데.” 이모부는 이종조카를 응원하러 온 우리 내외를 차 한 잔 하자면서 머물게 하셨다. 이모부는 우리 내외에게 뭔가 하실 말씀이 있으신 듯 자못 긴장된 표정으로 우리는 대하시는 것이었다. “이모부 ○○이가 수능 칠거라고 이모부가 더 긴장한 것 아니에요. 잘 볼 거예요.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서 선생, 그게 아니고. 오늘 내가 너무 안타까운 소식을 들어서 마음이 너무 안 좋아서 그래.” “안타까운 소식이라니, 이모부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이모부는 우리에게 뭔가 속 깊은 사연을 말씀하시고 싶은 심정으로 운을 띄우시는 것이었다. “오늘 우리 학교 교장 선생님이 출장을
교육인적자원부가 40만 교사들의 동의도 구하지 않은 채 무작정 시도하려는 교원평가가 진통을 겪고 있다. 이 시대를 살고 있는 수많은 교사들은 그저 묵묵하게 자신의 자리에서 그저 아이들만을 바라보며 열심히 살고 있다. 대부분의 교사들은 할 말이 있어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그저 이 얽혀 있는 난맥상이 잘 해결되었으면 하는 바람만 가지고 있을 뿐이다. 검증되지 않은 교원평가, 자칫하면 교육공황 불러올 수 있다! 교육인적자원부(이하 교육부)는 일부 선진국들에서 실시하고 있는 검증되지 않은 교원평가를 시대적인 열망이라는 미명하에 도입하려 하고 있다. 미국이나 영국, 그리고 일본에서 실시하고 있는 교원평가는 여전히 진통 과정에 있다. 일부 국가에서는 교직을 지원하는 사람이 너무 적어 다른 나라로부터 교사들을 수입하는 실정에 있기도 하다. 그런 사정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도 없이 단지 몇몇 학부모들의 열망과 일부 교육행정가들의 선택으로 교육현장으로 끌어들인다면 그 결과는 불 보듯 뻔하다. 최근 십년 간 우리 교육계는 엄청난 진통을 겪었다. 열린교육이다, 수행평가다 해서 일부 선진국에서 완전히 실패한 정책들을 들여와 우리 교육계를 쑥대밭으로 만들어 놓았다. 그리고 수시로
몇 천만 원을 들여 우리 학교에 현대식 도서관이 들어섰다. 몇 천 권의 장서도 비치하고 제법 고급의 정보 검색용 컴퓨터도 갖춰 놓았다. 이전 도서관에는 없던 많은 책들과 정보기기들로 도서관은 그야말로 최신식 교육 공간으로 탈바꿈했다. 하지만 외형만 바뀌었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정작 문제는 그런 도서관에 와서 아이들이 즐겁고 편안하게 책을 읽느냐이다. "요즈음 아이들 정말로 책 안 읽어. 시험 보면 아이들이 어휘 해독력이 너무 부족해. 단어 뜻을 몰라 문제 못 푸는 경우가 허다해. 정말 문제야!" 종종 모의고사나 교내 시험을 치면서 여타 선생님들이 하시는 말씀이다. 그런 말들이 국어 교과를 맡고 있는 나를 겨냥해서 하는 말씀인양 어깨가 무거워진다. "선생님, 독서 시간은 독서하라고 있는 시간 아닌가요? 매일 수업만 하고... 제발 책 좀 읽어요." "이놈아, 독서 시간에는 수능 대비 문제도 풀어야 하고, 교과서 진도도 나가야 하는데 책 읽자고 하면 어떡하니... 차라리 자율학습하자고 해라." "다들 우리 보고 책 읽으라고 하면서 정작 책 읽을 시간도 주시지도 않으면서…." 책 읽을 시간도 주지 않는다는 학생의 말이 자꾸만 마음에 걸렸다. 정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