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어느 사회학자가 지난 50여 년간의 현대사를 연구하여 시대적 변천사를 다음과 같이 규정했다. 1950년대는 허무의 시대였다. 2차 세계대전 속에 숱한 죽음을 보며 사람들은 삶에 대한 깊은 허무에 빠졌다. 1960년대는 쾌락의 시대였다. 무수한 죽음을 보며 허무에 빠졌던 사람들은 우선 즐기고 보자며 쾌락을 탐닉하게 되었다. 1970년대는 방황의 시대였다. 쾌락이 궁극적인 삶의 의미를 가져다줄 수 없다는 걸 깨닫자 사람들은 방황할 수밖에 없었다. 1980년대는 이기주의의 시대였다. 급속한 경제개발을 이루면서 유대감이 결여된 사회구조 속에서 자신의 이익을 가장 우선시하는 철저한 이기심의 지배를 받는 나밖에 모르는 시대가 되었다. 그리고 1990년대는 가치혼돈의 시대였다. 그 당시 사람들은 부를 이루는 것이 생의 최대목적이었다. 돈이 삶의 절대가치로 등극하자 인간의 본질을 잃어버린 가치관 혼돈의 시대가 되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의 2000년 이후를 무엇이라 부를 수 있을까? 어쩌면 상실의 시대라고 할 수 있다. 요즘 사람들을 만나면 가장 많이 하는 말이 “사는 게 너무 재미없다. 우울하고 답답하다”는 말이다. 사는 게 활력도 없고 재미도 없단다. 그저
오늘 소속 학교에서 정년을 마치고 퇴임하는 선배 교사를 온 교직원이 조촐한 식사와 함께 작별을 고하며 떠나보냈다. 시기적으로 전국적인 감염병 확산으로 취소하자는 의견도 있었지만 희망자에 한 해 참석을 알리고 참석자의 자유의지에 따라 거행한 행사였다. 다행히도 참석자는 우려를 불식하고 상당수가 참여했다. ‘끝마침’이란 의미가 주는 인지상정인지도 모르겠다. 분위기는 대체로 화기애애한 가운데 행사를 마쳤다. 교사의 정년퇴직은 말 그대로 만 62세까지 유종의 미를 거두고 퇴임하는 것이다. 이는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냉정한 세상은 수많은 평교사 중의 하나로 퇴임하는 것이 뭐 그리 큰 이슈가 되느냐고 말할 수도 있다. 또한 세속적인 기준으로 그리 큰 명예도 부도 권력도 아닌 평범한 직업인의 과정을 끝마쳤다는 것에 별 다른 의미를 부여하기를 주저할 수도 있다. 왜냐면 세상의 관념은 성공자에 대한 기준이 높고 엄격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요즘처럼 명예퇴직자가 기하급수적으로 늘면서 교단을 등지는 사람들이 많은 세태를 돌아보면 이는 결코 평범하지 않은 결과다. 특히 언제부터인지는 모르나 요동치는 교단에서 하나의 철학과 가치관을 가지고 끝까지 소임을 완수했다는 것
요즈음 학교에서 학생들을 볼 때마다 감정이입을 해 보고자 노력한다. 물론 직접 당사자가 아니기에 피상적일 수밖에 없지만 각종 고민과 불안, 두려움에 살아가는 학생들이 측은하고 미안하기 짝이 없다. 그래서 늘 가슴속에 부채를 안고 사는 기분이다. 과거엔 그들의 입에서 나오는 거친 언어에 지도교사의 입장만으로 다가갔다. 그리고는 배움이 약한 그들을 탓하며 이맛살을 찌뿌리곤 했다. 하지만 이제는 다르다. 상황에 따른 새로워진 인식 때문이다. “그래, 얼마나 힘들면 욕이라도 하면서 커야 할까. 다 못난 어른들이 너희를 힘들게 하니 입으로라도 스트레스를 풀어야겠지. 이해한다. 그리고 미안하다.” 내면의 소리는 이렇게 바뀌어 간다. 사람이 나이를 먹으면 신중해진다. 삶의 태도가 바뀌어 가는 것이 그 단적인 예다. 자기중심적인 굴레를 벗고 주변의 약자들에 관심과 이해가 깊어진다. 그 바탕에는 ‘역지사지’의 마음이 작동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학교현장에서 현 직책의 버거움이 가져다주는 사고의 확장 때문이기도 하다. 학교 업무에서 교감이 관여하지 않는 것은 거의 없다. 모든 것이 교감의 중재가 필요하고 관여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니 머릿속 모든 영역이 서로 촘촘히 연계
최근에 지식인의 아이콘 최장집 고려대 명예교수는 한 강연에서 "현 진보 세력의 직접민주주의는 전체주의와 같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는 또 "교수들이 옛날처럼 언론 통제가 겁나는 게 아니라 집단의 공격이 무서워서 얘기를 '자체 검열'해서 한다"고 덧붙였다. 이런 주장은 당연히 필자에게 전체주의에 대한 관심을 유발했고 이를 잘 상징하는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을 다시금 책장에서 꺼내 들게 되었다. 이는 전직 법무부장관 사태와 맞물려 자연스럽게 관심을 유발하던 차였다. 우리 사회에서 오랫동안 ‘반공 소설’로 잘 알려지기도 했던 이 소설은 러시아혁명에 뒤 이은 스탈린 시대의 전체주의를 낱낱이 까발려, 권력이 어떻게 부패하는가를 통찰한 소설이었다. 여기에선 온갖 종류와 크기의 권력에 대한 속성을 기막히게 간파하고 있었다. 그럼 조지 오웰의 동물 농장을 다시금 소환하여 이 시대를 통찰해 보자. 반란을 앞둔 동물들의 비밀 회합에서 우두머리 돼지가 처음 던지는 질문은 "쥐는 우리의 동지인가"였다. 권력이 곧 바뀔 것을 간파한 쥐는 벌벌 떨지만, 돼지는 뜻밖에도 쥐를 동지로 받아들인다. 권력 쟁취를 위해 '인간의 적은 동물의 친구'라는 정치 구호를 만들어 낸 것이다. 인
요즈음 교육관련 뉴스 미디어마다 논란이 한창이다. 선거 연령이 만 18세로 낮아지면서 오는 4월 21대 총선에서 고3 학생 14만 명이 투표권을 갖게 됐기 때문이다. 진보, 보수의 입장에서 나오는 각각의 메시지가 미묘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하지만 서로 공감하는 메시지는 어떻게 학교현장에서 올바른 선거교육을 실시하느냐의 문제다. 선거연령 하향은 세계적인 추세로 환영할 만한 일이다. 그동안 우리나라만이 만 19세로 되었던 선거권의 나이가 여타 OECD 국가와 같이 18세로 하향된 것이다. 이로써 우리도 법적으로 결혼이 가능한 나이, 국방의 의무를 치를 수 있는 나이인 18세로 조정이 되었다. 이는 진일보한 역사이며 청소년들의 정치참여로 민주주의가 제도적으로 한 단계 발전을 이룬 것으로 평가한다. 그러나 교실의 정치화 우려가 큰 것도 사실이다. 교육부가 2월 말까지 교수·학습 자료를 개발해 선거교육을 하겠다고 했지만 급조된 만큼 부실할 가능성도 크다. 시급하게 교육부가 밝힌 방안 중 하나는 선거법 위반 사례집을 만들어 배포하겠다는 것이다. 교육부장관은 “혹시라도 학생들이 선거법을 위반하는 일이 생기지 않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어린 나이에 친구 따라 강남 가듯
우리가 살아있다는 것을 느끼는 것은 언제일까? 누군가를 진심으로 사랑할 때? 행복에 겨워 눈물이 솟구칠 때? 풍요로움을 느끼며 만족스러울 때? 물론 이런 순간들이 우리의 삶과 함께 할 때 살아있음을 느낄 수 있다. 그러나 필자는 미래를 향한 희망이 존재할 때 진정으로 살아있음을 실감할 수 있다고 믿는다. 왜냐면 희망한다는 것은 살아있는 인간만의 특권이기 때문이다. 희망은 이 세상 최고의 행복이자 우리가 추구하는 최상의 가치다. 그것은 행복의 반대 개념이 불행이 아니라 희망이 없음에서 유추해 볼 수 있다. 그만큼 희망은 삶의 힘이 되는 기반이자 구심점이다. 그렇다면 미래를 여는 희망은 어떤 모습이고 또 어떻게 다가올까? 제인 구달에게서 우리는 그 답을 얻을 수 있다. 침팬지의 어머니로 불리는 제인 구달(1934~)은 26세의 나이로 야생 침팬지의 행태를 관찰하고자 여러 위험을 무릅쓰고 아프리카 탄자니아 곰비 지역으로 갔다. 그 후 30년 넘게 현장 연구를 계속해 온 구달은 야생 영장류 현장 연구 분야에서 기념비적인 업적을 쌓기에 이르렀다. 뿐만 아니라 그녀가 쓴 책과 그녀의 현장 연구, 다큐멘터리 영화 등은 연구에 대한 그녀의 헌신과 삶을 향한 깊은 성찰을
다양한 직업군이 존재하는 현대에도 우리 사회에서는 아직도 교사는 청소년들이 선호하는 직업이다. 오랫동안 우리 사회에서 교사는 비교적 긍정적인 평가를 받아 왔다. 이른바 ‘군사부일체’라는 뿌리 깊은 유교적 사상이 그 기저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대적 흐름에 따라 그에 상응하는 만큼 기대에 부응하고 있는지는 의문이다. 우리 사회는 전통적으로 유교적 배경에 의해 교사를 사회적 모범(paragon) 집단으로 인식해왔다. 이런 인식은 개인적 지각의 총합체로 나타난 이미지다. 하지만 이미지와 선호가 반드시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예컨대 특정 물건이나 사물에 대한 이미지가 좋다고 해서 그 물건이 구매로 이어지는 것은 아닌 것과 같다. 이미지 속에는 실제와는 다른 따져봐야 할 부분들이 많기 때문이다. 교직에 대한 이미지도 교사집단의 질적인 문제까지 보장해주는 것은 아니다. 질적인 문제는 교사집단 내부의 문제이자, 개인들이 성찰을 통해 스스로 해결해야 할 문제다. 어느 사회, 어느 집단이든 문제는 있다. 하지만 대부분은 외부의 자극에 의해 문제가 쉽게 개선되기도 한다. 이에 비해 교직은 그렇지 못한 측면이 강하다. 이는 아이들을 교사들에게 맡겨야 하는 학부모들이 자녀
우리 사회엔 약자 아닌 약자로 불명예를 짊어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다. 예컨대, 어린이, 여성, 노인, 노숙자, 외국인 노동자, 성소수자, 사회 극빈층, 등등이 그렇다. 당연하게도 이들은 자신들이 약자로 대접받기를 원하지 않으며 자신들의 권리 즉 인권이 제한당하는 것을 원치 않는다. 이들도 우리 사회의 엄연한 구성원이고 함께 더불어 살아갈 권리를 가진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언제부터인지 자신들의 권리를 운운하며 이들을 배제하려는 사람들, 즉 강자 행세를 하려는 사람들로 우리 사회가 양분되어 가는 것은 애석한 일이다. 권리는 누군가를 혐오하거나 배제하면서 누릴 수 있는 ‘제로섬 게임’이 아니다. 우리 사회가 극단적으로 이기주의화 되면서 내 것을 지키기 위해 상대의 것을 제한하려는 것을 당연시하고 이를 권리라 고 주장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 한때 음식점마다 아이들의 동반을 제한하려는 이른바 노키즈존 음식점이나 레스토랑이 화제가 된 적이 있었다. 물론 가족들과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대화를 나누거나 사람들 간에 만남을 통해서 중차대한 이야기를 하고 업무상 식사를 할 수도 있다. 그렇다고 다소 소란을 피우는 아이들을 배제하면서 자신들만의 권리를 주장할 수는
사람은 자기보다 좋은 사람, 자기 것보다 좋은 물건엔 깊은 관심을 표명한다. 그것이 때로는 질투이기도 하고 때로는 부러움이기도 하다. 인간 세상엔 옛 선인의 가르침 ‘삼인지행(三人之行) 필유아사(必有我師)’처럼 일상적인 삶 속에서도 반드시 내가 배워야 할 점을 가진 사람, 소위 스승이 존재한다. 타산지석(他山之石)도 그것과 일맥상통한다. 타인의 행위를 보고 그것이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나에게 반면교사로 삼을 수 있다. 가깝고도 먼 나라, 일본이 바로 우리에겐 그러한 대상이다. 지금 일본은 선진국의 대표적인 나라(G3)로 막강한 경제력과 국력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그들만의 DNA답게 우리 눈에 비친 일본은 약자에겐 한없이 강하고 강자에겐 더없이 약한 모습을 보여준다. 작금의 일본 총리가 미국과 한국에 보여주는 행태를 보면 충분한 증거가 된다. 세상은 혼자서 살 수는 없다. 국가도 마찬가지다. 이러한 명제 하에서 우리로서는 일본보다 더 좋은 국가가 되어야 한다는 당위성에 다시금 타산지석의 교훈을 돌아본다. 그만큼 일본은 속 좁고 편협하며 국제적으론 혼자서만 살아갈 고집불통이자 역사상 이단아의 길을 걷기 때문이다. 2차 세계대전의 또 다른 전범국인 독일과는 여러
달랑 한 장 남은 달력도 이제 며칠밖에 시간이 없다. 새로운 시대의 도래가 카운트다운이 시작되었다. 영어로 10년 주기의 세월을 Decade 라고 한다. 2010년의 Decade를 보내고 바야흐로 2020년의 Decade를 앞두고 있다. 새로운 무대에 오르면 늘 두렵고 설레며 가슴이 뛰는 것이 인지상정이듯이 이제 새로운 2020년 Decade를 맞이하는 심정은 더욱 남다르다. 그럴 때마다 마음 한편에서는 지나온 삶을 되돌아보게 된다. 온고지신(溫故知新)이라 하지 않는가. 우리 모두 자신과 가족의 삶, 직장에서의 삶, 마을공동체에서의 삶, 그리고 국가적인 삶을 회고해 보는 시간이다. 작은 가슴에 소소한 행복을 찾아서 살아가는 것이 개인과 가족의 삶이라면 직장과 마을과 국가는 그보다 더 큰 관점에서 바라보아 조금씩 달라질 수밖에 없다. 개인의 삶은 크게 만족할 수는 없어도 반대로 크게 후회스러움이 없으면 일단은 평균점은 넘어간 것이다. 가족은 그러한 우리의 보금자리이니 오십보백보라 믿는다. 하지만 국가적인 삶은 그리 만족스럽지 못하다. 아니 최악이다. 특히 정치권과 언론, 종교계는 아예 처음부터 평균을 기대하기는 염치가 없을 정도다. 2019년 새해 벽두에
최근 우리 사회의 온갖 건물 외벽, 골목길, 학교 교실, 등산로, 식물원이나 동물원, 유치원, 관공서의 푯말, 시비, 신문의 칼럼, 강연의 제목, 심지어는 술자리 건배사에서도 패러디되는 등 아주 많은 곳에서 만나는 한 편의 시가 있다. “자세히 보아야 / 예쁘다. 오래 보아야 /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 나태주 시인의 「풀꽃」이다. 총 24자로 된 이 시는 2002년에 세상에 등장 한 이래로 초등학생은 물론 중고생, 대학생 및 성인에 이르기까지 온 국민의 사랑을 받는 시가 되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이 시가 예쁘고 사랑스런 아이가 아니라 그 반대인 아이들을 위해서 쓴 시라고 시인은 밝힌 바 있다. 수업 시간에 풀꽃 그림그리기 공부를 하면서 풀꽃을 제대로 보지도 않고 제멋대로 쓱싹 그려오는 아이들에게 “얘들아, 풀꽃도 자세히 보면 예쁘고 오래 보면 사랑스럽단다.”고 여러 차례 잔소리를 했단다. 그때마다 아이들은 그런 말을 고스란히 듣고 예 라고 대답하던 상황에서 얘들아, 너희들도 그래 하고 들려주던 말을 시로 탄생시켰다 한다. 여기서 우리는 아이들을 자세히 보고 오래 보아야 한다는 교육적 시사점을 얻게 된다. 필자는 어느 날 저녁 무렵에 교내 공터에서 한 학
‘공명지조(共命之鳥)’ - 목숨(=命)을 공유(共有)하는 새(鳥)라는 뜻으로, ‘상대방을 죽이면 결국 함께 죽는다’는 압축된 의미다. 이 말은 대한민국 대학교수들이 2019년 올해의 사자성어로 선정했다. 공명조(共命鳥)는 아미타경(阿彌陀經), 잡보장경(雜寶藏經) 등 여러 불교 경전에 등장하는 머리가 두 개인 상상 속의 새로 한 머리가 시기와 질투로 다른 머리에게 독이 든 과일을 몰래 먹였다가 둘 다 죽고 만다는 설화 속에 등장한다. 필자는 이 말에 가슴이 타오름을 느낀다. 서로를 이기려고만 하고 자기만 살려고 하지만 어느 한쪽이 사라지면 자기도 죽게 되는 것을 모르는 작금의 대한민국 사회에 대해 경종을 울리기 때문이다. 지극한 안타까움이 가득하다. 올해는 작년보다 조금 더 희망적인 사자성어가 선정되길 바랐다. 하지만 이는 역시 헛된 꿈이었다. 허구헌날 정치권이 서로 나뉘어 싸우는 것을 넘어 이제는 애꿎은 국민들까지 편싸움에 동조해 서초동과 광화문으로 분열되어 죽기살기로 싸우는 우리나라의 현실을 보면 격하게 동의할 수밖에 없다. 우리는 홍익인간(弘益人間) 사상을 국시로 하여 태어난 민족이다. 홍익인간이 무엇인가? 널리 인간세계를 이롭게 한다는 뜻으로 우리나
언제부터인가 우리 사회에는 진정한 리더가 보이지 않는다. 우리의 역사를 뒤돌아보면 국가가 위태로울 때는 나라를 걱정하는 원로나 리더가 등장하여 국민적 지지를 얻고 위기극복의 선두에서 애국심을 발휘했던 역사가 무색하다. 그렇다면 지금은 국가적인 위기가 아니란 말인가? 연일 저마다 언론에선 국정 전반의 위기를 부르짖고 경제조차 최악의 상황이라고 앞 다투어 아우성인데 그것이 바로 가짜뉴스이고 언론 조작이란 말인가? 이 시대에 대한민국은 어디로 가고 있으며 과연 이 땅에 정치, 사회, 경제, 문화, 교육 등의 어두운 곳에 밝은 등대 불을 비추어 주고 희망에 찬 길을 제시하는 진정한 지도자는 없단 말인가? 요즈음 베트남은 전 국민이 잠을 들지 못하고 희망에 차있다. 남자 축구 국가대표팀이 그토록 꿈꾸던 동남아시아 경기(SEA 게임) 우승을 60년 만에 이루었기 때문이다. 이로써 “이번 승리는 경제⋅사회⋅문화 발전에 영감을 줘 베트남을 강국으로 건설하게 하는 데 이바지할 것”이라고 베트남 총리가 말하기도 했다. 여기엔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든 이방인 축구 지도자 박항서 감독이 그 중심에 있다. 박 감독의 성공신화가 베트남 민족의 잠재력과 성장 동력이 언제든 폭발할
세상에는 악한 사람이 선한 사람보다 많은가? 세상이 혼돈으로 시끄러울 때는 온 세상이 악한 사람으로 가득 찬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세상엔 남자와 여자가 거의 반반이다. 이처럼 단순하게 생각하면 문제 될 것이 없다. 남자와 여자 중에 어느 한 쪽이 부각되느냐에 따라서는 상황은 달라진다. 이성적 판단이 흐려진다. 마찬가지로 나와 생각이 다른 사람은 나 이외에 대부분일 것인데도 불구하고 굳이 공감의 정도를 따져 조금이라도 다르면 모두를 적으로 간주하면 세상사가 힘들어 진다. 그래서 세상이 온통 악인으로 가득한 것처럼 착시현상이 생긴다. 그러나 필자는 관점을 달리 보고자 한다. 세상이 갈수록 힘든 것은 악한 사람이 많아서가 아니라 선한 사람이 착한 일을 더 많이 하지 않아 부각되지 않기 때문이다. 무슨 말이냐고? 착하게 사는 것도 힘든데 더 많이 힘들게 살라고? 당장 반박할 것이다. 이것은 필자가 느끼는 단순한 소감이다. 눈만 뜨면 세상은 혼탁한 사건•사고로 도배된다. 이제 개가 사람을 무는 것은 뉴스거리도 못되고 사람이 개를 무는 행동만이 등장한다. 그러면 세상은 개를 무는 사람이 지천인 것처럼 보인다. 이러한 파격적이고 자극적인 사건에 사람들은 ‘뭐야?
품위란 사람이 갖추어야 할 위엄이나 기품을 지칭한다. 어떤 사람이 고상하고 격이 높은 인상을 지니면 품위가 있다고 칭찬함은 물론이고 존경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특히 교사의 경우에는 ‘사표(師表)’로 삼아 진정으로 사도(師道)를 걷는 스승으로 예찬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에 반(反)하는 경우는 교사로서의 품위 유지의 의무를 어긴 것으로 간주되 사회적인 지탄을 받기도 한다. 특히나 지금처럼 교사의 품위유지 위반이 사회문제화 되는 시대도 헤아리기 쉽지 않다. 예컨대, 각종 스쿨미투에 등장하는 막말, 제자와의 성관계로 파격적인 비윤리적 행위, 각종 학교폭력 사건 및 비위에 의한 송사, 내신 성적의 조작 및 시험지 유출, 학생부의 의도적인 기록 수정 등 수많은 범법 행위 내지 교사의 품위유지 의무를 망각한 온갖 사건들이 풍미하고 있다. 이른바 교사로서의 품위를 먹칠하는 사건, 사고가 세상의 주목을 받으며 하루가 멀다 하고 터지고 있다. 교사는 어린 청소년들을 교육하는 지도자이다. 단지 자신의 행위 자체의 과오나 불명예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그 후유증이나 여파는 동심을 멍들게 하고 오염시킨다. 이는 어린 인생을 망가트리는 심각한 범죄가 될 수 있기에 그 심각성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