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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세검색학생들이 글로벌 인재로 성장해야겠다고 생각할 때 머리에 떠 올리는 교육 기관은 어디일까? 학부모들이 자신의 자녀를 세계적인 인재로 교육하기 위해 보내고 싶은 학교 또는 교육 기관은 어디일까? 글로벌 인재가 되기 위한 준비를 위해 학교 교육으로는 부족하다고 느끼는 사람들이 아무래도 많은 것 같다. 학교 공부가 끝나면 아이들은 영어 학원을 찾아 가고, 방학이 되면 바로 어학연수 등으로 해외로 떠나는 것을 쉽게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어떤 부모들은 많은 부담을 감수하면서까지 외국으로 유학을 떠나보내기도 한다. 학교 밖이라야만 글로벌 역량을 키울 수 있다는 생각이 점점 확산되어 가는 것 같다. 우리들의 학교 교육만으로는 정말 글로벌 교육이 불가능한 것일까? 세계적인 인재가 되기 위해 정말 필요하고 기본적인 공부를 학교에서 다 해야만 학생들은 또 다른 수업을 받는 고행에서 벗어나 학교에서 배운 것을 기초로 하여 꿈을 펼쳐 나가고 꿈을 이루어가기 위한 제 각각의 준비를 할 수 있는 것이다. 학교의 선생님의 수업과 학교 교육 프로그램으로는 무언가 부족하다고 느껴지기에 세계를 품고 더 전진해야할 시간에 다시 수업을 들어야만 하는 비효율적 교육형태가 전개되고 있는 것이다. 학교 안에서 글로벌 교육의 기본을 충실하게 배운다면 여유 있게 자신의 이상을 펼쳐 나갈 수 있을 것이다. 학교가 글로벌 역량을 갖춘다는 것의 핵심은 선생님들의 글로벌 역량 신장이며, 학교의 프로그램의 개발에 있다고 할 수 있다. 경쟁과 보상 시스템을 통해 교사들의 역량을 우선 키워 가야 한다. 자신의 경험을 통해 학생들에게 끊임없이 세계와 미래를 향해 도전하도록 격려하는 꿈과 열정을 교사들은 갖추어 가야 할 것이다. 학교마다 별 특색이 없이 수행되는 우리나라 교육과정 운영 방식은 정말 개선되어야 한다. 전 세계 124국가의 1890개교가 채택하고 국제적인 교육 프로그램인 IB(International Baccalaureate) Program이 있다. 이 국제적인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한국의 학교는 하나도 없다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좋은 교육과정의 과감한 도입과 학교간의 교육과정 운영 경쟁을 통해 우리나라 학교들의 글로벌 경쟁력을 갖추어가야 한다. 그래서 우리나라의 학교에서도 얼마든지 세계적 인재로 성장할 수 있다는 결연한 모습을 보일 때가 된 것이고 철저한 준비를 이젠 시작하여야 한다. “학부모님, 그리고 학생 여러분 우리 학교로 오세요. 세계적 인재에 대한 꿈과 열정만 준비하고 오세요. 여러분의 자녀를, 여러분을 세계적 인재로 성장할 수 있도록 교육하겠습니다.”라고 우리 모든 선생님들이 자신 있게 말 할 수 있는 날이 곧 오리라는 기대를 가슴에 품는다.
학원에 갈 처지가 못되는 저소득층 자녀들에게 방과 후 수준별 보충수업을 실시하는 부산시교육청의 올해 학습지원단 수업이 2일부터 시작됐다. 부산시교육청은 이날 오후 동평중학교를 비롯 지역별 10개 거점 중학교에서 2007년도 학습지원단 개강식을 일제히 가졌다. 중학교 3학년 저소득층 자녀를 대상으로 실시하는 학습지원단 수업은 거점학교별로 주변학교 학생들을 모아 정원 60여명을 수준별 3개 학급으로 편성, 국어.수학.영어.과학 과목을 중심으로 이뤄진다. 수업시간은 1일 2시간씩 주당 10시간이며 연간수업은 방학기간 수업을 포함해 36주 360시간에 달한다. 학습지원단이 운영되는 권역별 거점학교는 동평, 당리, 신선, 부산서, 덕천, 주례여자, 금사, 부곡, 재송여자, 반송중학교 등이다. 강사들은 현직 교사들 중에 공모 또는 추천을 통해 각 과목 베테랑 교사들로만 구성돼 학습지원단의 수업만 충실히 들으면 학원에 갈 필요가 없어 사교육비 경감은 물론 사회양극화에 따른 교육격차 해소에 큰 도움이 될 것으로 예상된다. 부산시교육청 학교정책과 천정국 과장은 "학습지원단 운영은 사교육비 경감과 교육격차 해소를 위한 부산시교육청의 대표적인 사업"이라며 "학생은 물론 학부모들의 반응이 갈수록 좋아져 앞으로 혜택지역을 확대해 나갈 방침"이라고 말했다.
한국에 사는 대부분의 남성들은 늘 바쁘다. 일에 바쁘고, 관계가 중시되는 집단중시 사회분위기상 모임에 빠지면 안되므로 또 바쁘며, 고생만하다 죽은 가여운 아내를 생각하며 눈물을 흘렸다가 졸장부로 낙인이 찍혀 관직에서 파직되던 조선시대의 의식이 쉽게 없어지는 것이 아니므로 집안식구에 엄격한 대장부(?)로 보이기 위해 집밖으로 돌아야 하므로 또 바쁘다. 식구들을 멀리하고 집밖에서 허황된 시간을 보내느라 바쁜 것이 대장부인가? 오늘날의 대장부의 개념은 달라져야 하지 않을까? 물론 예전에 경계하였듯이 오늘날에도 자신의 집안, 자신의 코앞의 이익에만 연연하는 사람들은 여전히 졸장부이다. 사이비 대장부, 사이비 가부장과 진짜 대장부, 가부장은 구별되어야 한다. 권위만 누리며 책임은 미루기만 하는 사람은 파렴치한이다. 요즈음 처자식 거느리기 힘들다고 장가가지 않고 늙는 총각들, 손위 누나 연배 여성에 기대는 결혼 풍속도는 버리고 싶은 남성, 가부장의 버거움을 들려준다. 더불어 나누어 짊어져야 할 짐의 무게, 변화해야할 가부장의 형태를 생각하게 한다. 한국은 ‘대단히 역동적인 나라’라는 말을 많이 듣는다. 외국인들이 한국을 말할 때 ‘빨리빨리’라는 단어를 많이 기억하고, 이동속도가 빠른 인터넷, 휴대폰이 가장 많이 보급된 나라이며, 식민국에서 해방된 후 사람과 자연 그 모든 것이 피폐해진 여건, 無의 상황보다 더 어려운 조건에서 출발하여 현재의 기적을 만들어낸 남성들은 가부장이었다. 집 밖에서 잘사는 나라를 건설하느라 온 힘을 기울였으므로 사회는 휙휙 쾅쾅 빠르고 힘있게 변화되어 갔고 가족들과의 여유로운 시간은 생각조차 어려웠는지도 모른다. 자본과 기술 그 어느 것도 없었던 시절,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가족보다는 집단적 가치가 우선했어야 했을 것이다. 나라가 잘 살아야 한다는 집단적 가치를 위해 힘의 향배는 한 곳으로 몰렸고, 개인들은 참아야 했으며, 참을 수도 있었다. 일반 사람들이 외국여행도 쉽게 생각하게 되었던 시기가 언제였을까? 커다란 상점들이 들어오고 삶에 윤기가 돌던 시기부터 집 밖과 집단 우선의 가치에 변화가 있어야 했지 않았을까? 팔려고 내어놓은 사과 한 알을 먹고 싶어하는 아이에게 사과를 줄 수 없었던 가난 했던 시절에 아내와 아이들은 밖에서 일하는 아빠가 밤늦게 귀가하거나 며칠 집에 올 수 없을 때 안위를 걱정하며 응원했었다. 먹고 사는 기본적 욕구가 어느 정도 해결되면 개인이 사회에 요구하는 제도와 가치는 달라진다. 국민소득 백달러 미만, 또 5000불의 생활에서의 제도와 가치가 국민소득 이만달러를 바라보고 있는 시점에서 수용이 되겠는가? 가정, 정치, 경제, 군사, 교육, 사회와 문화, 모든 분야에서 국민소득 이만달러, 삼만달러 시대 개인의 권리와 책임을 반영한 가치와 제도가 마련되어야 하는데 현재 우리 사회는 그에 상응하는 계획과 노력이 진행되고 있는 것일까? 출산율이 낮아지고 결혼기피율이 높아진 까닭이 무엇인가? ‘아녀자’라는 단어에서 배어나오는 의미가 ‘하찮다’로 들리는 사회의 통념과 어떤 연관성이 있을까? 모처럼 집에서 가족과 시간을 보내게 된 남편은 아이들 방에 놓인 낮은 책상위의 컴퓨터를 널찍한 큰 책상 위로 옮겨놓고, 평소에 기계를 모르는 필자가 여기저기 놓아 둔 전기선, 배터리, 마이크, 카메라 부품 등 잡동사니를 하나하나 꺼내어 용도에 맞게 각각의 서랍에 정리를 하고, 이방 저방 다니며 필요한 물건과 필요없는 물건들을 구분하여 깔끔하고 편리하게 해 놓았다. 사관학교 졸업 후 오랜 군생활로 다져진 정리 습관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다. 필자의 남편은 군인이며, 조종사이고, 항공공학자이다. 학교에서 보충 수업을 마치고 돌아온 아들은 환해진 방을 보며 즐거워하며 몇 가지 손보고 싶었던 기계들을 내어 놓고 아버지와 의견을 나누었다. 점심상을 마주하고 앉아서도 부자간의 대화가 길게 이어졌다. 대로마제국의 기틀을 잡아가던 초기에 로마 집안에서 아버지의 역할은 자녀의 삶에 방향을 설정해 주는 것이었다. 목욕을 마치고 나온 아버지가 뒤이어 나오는 아들을 위해 수건을 들고 섰다가 물기를 닦아주고, 서로에게 하고 싶은 말들을 나누며 함께 시간을 보내는 동안 아버지의 이상과 삶의 방향은 아들에게 이어진다. 목욕은 함께 할 수 없을지라도 아버지와 함께하는 시간은 딸에게도 중요하다. 인도의 초대 총리였던 네루는 딸 인디라에게 옥중서신을 통해 국가지도자로서 갖추어야 할 기반을 닦아주었다. 어머니의 역할은 자녀가 어릴 때에는 생활에 필요한 일상을 거들어주는 것과 기본생활 습관 형성, 기초적인 읽기, 쓰기, 셈하기를 가르치는 일이었다. 필자는 자녀교육에 많은 시간을 할애하지 못하였다. 교육을 전공하였고, 교육에 종사하고 있으면서도 그러하지 못하였음을 생각할 때 아이들에게 두 배로 더 미안하며, 그럼에도 심신이 건강하게 잘 자라주었음에 감사하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아이의 존재가 더 크게 다가온다. 남편도 같은 생각인지 ‘한 달에 한 번은 온 가족이 함께 외식을 하자’고 했다. 프랑스의 사상가 몽테스큐는 중국에서 자손이 아버지를 공경하며, 죽은 후에도 제사를 모셔주는 관념과 장려 정책이 인구수 증가를 가져오는 반면 장자에게만 모든 재산을 물려주고 나머지 자손은 빈털터리로 만드는 유럽의 정책이 인구의 빈곤을 초래하는 한 원인이라고 보고 있다. 국가의 안위 더 나아가 흥망성쇠를 고려할 때 교육의 방향과 시각은 군사안보영역보다 더 중요하다. 최신 기술의 훌륭한 무기와 많은 군대를 가지고 있을지라도 그를 다루는 것은 사람이다. 다루는 사람의 기술과 능력이 부족하면 아무리 좋은 기계도 무용지물이 된다. 더 중대한 것은 그 자리, 그 일에서 정신을 실종했을 때이다. 무기가 훌륭할수록 기술이 좋을수록 패망의 속도만 더 빨라질 뿐이다. 필자로부터 볼 때 할아버지 세대는 일본의 식민지국 전락과 한국동란으로 통일된 한국역사상 가장 한심한 조상이 되었으나 논팔고 밭팔며 자손을 교육하여, 자손이(아버지 세대) 황폐와 극심한 가난을 극복하고 한강의 기적으로 중진국 입성을 이룩할 바탕을 마련해주었다. 아버지 세대는 먹고사는 문제는 해결하였으나 자손(현재의 우리세대)의 교육에는 실패하여 선진국으로의 입성을 위한 기본 교육과 의식을 갖추게 하지 못한 탓으로 선진국으로 진입할 것인가 혹은 갈등을 극복하지 못하고 다시 할아버지 세대의 잘못을 반복할 것인가의 기로에 10년 가까이 머물게 하였다. 갈등과 반목, 이기심이 충돌하는 사이 2세를 위한 교육은 내 가족, 내 아이의 안녕, 나 자신의 행복만을 고집하는 그야말로 깊이 얕은 소위 ‘아녀자(?)’에게 전담되었고, 자라나는 젊은 세대의 방황과 황폐화가 미래에 대한 걱정을 키우고 있다. 그래도 다소 어려움이 있긴 하지만 선진국 입성을 위한 연착의 가능성이 보인다. 반드시 그래야 하지 않을까? 이제는 아버지들이 가부장의 권위를 가지고 팔을 걷어부치고 어머니와 함께 아이들의 손을 잡아야 하지 않을까? 멀리 해외에 출장을 가 있을지라도 전화나 이메일 안부를 전하고, 일관계로 공휴일에도 운동약속이 있을지라도 저녁은 가족과 같이하며, 집안 행사에 딸과 아들을 함께 데리고 다니며 집안의 역사를 들려주고 의례를 알려주며, 조상과 자신, 후손으로 이어지는 긴 역사 그리고 넓은 세상과 긴 안목을 키워주어야 하지 않을까? 교육의 방향과 시각은 어떻게 설정되어야 하는가? 필자는 자신의 위치와 뿌리에 중심을 두고, 세계와 우주를 바라보는 인재 양성에 있다고 본다. 그러기 위해서는 유구한 전통속의 장점을 살리고, 잘난 나라들의 의식과 제도, 가치를 연구하여 우리의 몸에 맞는 넓고도 큰, 새 틀을 만들어야 한다. 중심이 바로선 앞선 의식과 틀이 필요하다. 잘난 나라, 앞서 가는 나라는 거저 생기는 것이 아니다. 18세기를 살았던 몽테스큐의 글을 읽으며 왜 프랑스가 당시 세계 제일의 강국이었는가를 이해할 수 있었다. 기술과 새로운 것에 대한 열망으로 가득차 있었다, 수도원에 있는 대형도서관에는 일반인들도 열람이 가능하였고, 여성들은 살롱의 중심인이 되어 남성들과 더불어 정치, 사회, 과학, 문학, 외교 전반에 관해 토론을 하였다. 도서관에 비치한 도서목록은 웅변, 기하, 형이상학, 광활한 우주의 구조와 아주 간단한 기계에도 똑같은 관심으로 연구하는 물리학, 병과 치료법에 관한 의학서적과 해부학, 연금술, 지극히 한심한 눈으로 바라보는 점성술과 주변 국가들의 근대 역사서, 소설과 시 등 인간지식의 총망라이다. 현대의 국가통치체제, 의식과 가치 이 모든 것에 유럽은 새로운 길을 만들었고 강국이 된 것이다. 유럽에 풍요를 가져다 준 20세기의 양식은 각 분야 전문가들이 만들어놓은 부품을 조립하여 하나의 완성품을 만드는 대량생산 방식이었다. 각 분야의 전문가들은 담당한 부품만을 만들어내면 되었으므로 다른 분야와의 협력을 통한 다양성은 필요하지 않았다. 아귀가 맞지않는 서로 다른 다양한 부품은 대량의 생산을 방해하였으므로 철저한 전문화, 고립화를 통한 이익 창출 형태였다. 이와같은 경제, 산업부문의 가치는 단순히 그 분야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전 분야의 의식과 가치가 그러한 경제구조를 낳은 것이다. 따라서 전문화로 일컬어지는 고립화는 상대를 알려고도, 인정하려고도 하지 않는 대결구도를 심화시켜 지배자와 피지배자, 풍요와 빈곤의 극한 대립을 불러왔다. 인간의 풍요를 위해 자연은 희생되었고, 한 국가를 위해 다른 국가가 희생되었으며, 이 사람을 위해 저 사람이 희생되었다. 하지만 과학기술 추구와 기계화 덕택으로 먹거리 문제의 해결, 질병의 극복과 수명 연장, 불합리한 의식과 제도의 극복은 20세기 문명의 지대한 공헌이다. 21세기는 생존을 위하여 단절에서 비롯된 황폐화의 치유를 위해 서로를 이해하고 양보하고 타협해야할 필요성이 생겼다. 다양성의 인정과 통합이 중요하게 된 것이다. 내 것은 문명이고, 네 것은 야만이고, 나는 우월하고 너는 열등하고, 나는 윗분이고, 너는 아랫것이고의 이분법이 아니라 서로간의 장단점을 인정하고 접합하여 상호 발전할 수 있는 새로운 틀을 만들어 가야 하는 것이다. 아버지는 바깥양반이고 어머니는 안사람, 아이들은 받기만 하는 존재가 아닌 집안을 함께 일구어가는 소중한 동반자이며, 동식물은 마구잡이로 이용당하고 버려져야 하는 것들이 아닌 먹거리와 즐거움, 일손을 덜어주는 함께 살아야 할 고마운 존재이며, 손을 모우고 인사하는 사람, 악수를 하는 사람, 코를 비비고 인사를 나누는 사람들은 각자의 방식을 존중 받아야 한다. 서로 다른 것들의 통합으로 이루어진 새 틀은 보다 나은 개인과 국가, 인류의 발전을 위해 새롭고도 강력한 힘을 발휘할 것이다. 21세기 한국 교육의 목표는 현지화와 세계화가 되어야 한다. 성인식은 그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사회의 발전과 번영에 책임을 다하고 권한을 행사하는 어른이 되는 무거움과 즐거움을 알려주고자 마련된 것이다. 한국에는 계례식과 관례식의 전통이 있다. 남녀 공히 성인이 되어 오랜 세월을 이어온 가정과 국가의 맥을 이어갈 책임과 권한을 부여하는 중요한 의식이다. 책임있는 성인으로서의 개인의 행동이 조상과 부모 더 나아가 후손에게까지 영향을 미치는 엄중함을 의식을 통하여 꼼꼼히 알려주고 가르치면 한 공동체를 이루는 친구를 학대하고, 작은 이익을 위하여 죄를 짓는 일은 하지는 않지 않을까? 물론 의례만 부활시킨다고 되는 일은 아니지만 우대되어야 할 사회적 가치, 정상적인 사회의식을 불러일으키는 데에 한 몫을 하게 될 것이다. 한국 사람들은 어디에서나 자기가 제일이라고 으스대기를 좋아하는 경향이 있는 듯하다. 그렇다면 좁은 한국땅에서만 한정시킬 것이 아니라 세계 속에서 잘났다고 끼와 부지런함, 노력과 포부를 펼 수 있도록 장을 마련해주면 어떨까? 세계 여러나라에 나가있는 사람들 즉, 기업 등 민간인, 정부기관들, 군관계자와 재외 교포들이 현지의 생활과 사고로 현지인과 협력하여 최고로 발전할수 있도록 잘난 끼를 발휘하고 업적을 내도록 후원을 하고 실질적으로 필요한 도움을 주고 평가를 하면 이만불, 삼만불의 선진국 고지에 곧 다다르지 않을까? 참하고 훌륭한 지역민과 혼인하는 것도 째려볼 일은 아니다. 다양한 문화와의 접촉은 우리의 사고와 문화의 폭을 넓혀주고, 세계와 세계인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실시간으로 서로의 소식을 주고받을 수 있는 시대에 네트워크망을 형성하여 필요한 정보와 도움을 공유하면 세계인이 배우고자 성황을 이룰 모델이 나올 수도 있을 것 같다. 남편이 집에서 아이와 함께 시간을 보내고, 집안일을 거드는 동안 이리저리 흩어진 것들이 제자리를 잡아가는 것을 보며 아버지의 존재, 가장의 존재를 깊이 깨닫는다. 오랜 동안 출장을 나가있어 비어있는 시간이 많을지라도 식탁에 남편의 수저를 놓아두고, 안방에 남편의 자리를 마련해둔다는 한 아줌마의 말이 생각났다. 아이들 방이 비좁고 책은 많아 커다란 공간이 필요할지라도 크고 좋은 안방은 쓰임이 적더라도 아버지의 상징으로 놓아두어야 한다는 한 선생님의 말씀도 상기해보았다. 자신이 타던 전투용 비행기를 자신의 힘을 보태 만들어 보겠다고 개발에 골몰하느라 많은 시간을 밖에서 보내던 남편이 집에서 휴일을 보내며 구석구석 일을 챙기는 모습에 감격하여 몇 자 적어보았다. 필자는 사관학교시절부터 박사에 이르기까지 국가의 도움으로 공부를 하였으므로 국가를 위해 일을 해야만 한다고 수없는 날들을 밖에서 보내는 군인정신 투철한 남편이 다소 집안을 소홀히 한다고 째려보고 있을망정 매우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팔푼이 마나님에게 자신의 남편은 누구보다 더 크고 잘나 보이는 것이다. 다른 집의 마나님들도 그러하겠지만.
서울시내에는 지역교육청내에 있는초, 중, 고등학교를 몇 개씩 묶어서 지구별 장학협의회를 구성하고 있다.지구별 장학협의회이긴해도 교장협의회, 교감협의회, 교과협의회 등도 이렇게 나누어져있다. 전체 지역교육청을 하나로 묶으면 각종 협의회등에 어려움을 겪기 때문에 편의상 나누어놓은 것이다. 전체를 하나로 묶는 것보다는 훨씬 더 효과적이다. 이 안에는 생활지도부장 협의회도 속해 있는데, 며칠전에 우리학교가 속해있는 지구의 생활지도부장 협의회가 열렸다. 10개의 초, 중, 고등학교가 속해 있는데 생활지도부장이 바뀌지 않은 학교가 2개학교뿐이었다고 한다. 여기에 참석한 생활지도부장들은 한결같이 '연속해서 생활지도부장을 해야 학생지도를 효과적으로 할 수 있다는 것에는 공감하지만 솔직히 학교에서 생활지도부장의 위치가 매우 어렵고 힘들기 때문에 2년 혹은 3년연속 한다는 것은 보통의 각오로는 어렵다'고 했다고 한다. 심지어는 "생활지도부장을 하다가 '패가망신[敗家亡身]'하는 경우도 있다"는 이야기까지 나왔다고한다. 주변의 학교에서 학생지도와 관련하여 생활지도부장이 소송에 걸린 경우들이 더러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소송에 휘말리는 바람에 전재산을 다 소송비로 사용한 생활지도부장의 경우도 있다고 한다. 이런 사정때문에 일선학교에서는 생활지도부장이 기피 1호의 보직이다. 서로가 하지 않으려고 하다보니 매년 바뀌는 것이 그리 새삼스럽지는 않다. 생활지도부장을 기피하는 이유는 업무의 어려움도 있지만 더 큰 이유는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신분불안'으로까지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잘해 보려고 학생지도를 열심히 한 것이 죄라면 죄인데, 학부모들은 그것을 그렇게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무조건 학교책임, 생활지도부장 책임으로 돌리려는 인식이 문제인 것이다. 반면, 학부모들은 학교에서 좀더 강력한 생활지도를 해주기 원하는 경우가 많다. 두발문제, 복장문제등을 학교에서 강제해서라도 바꿔놓아야 한다는 것이다. 결국 국가에서는 학생들의 인권을 중요시하고 있지만 학교에서는 그보다 제대로된 인성교육을 실시하는 측면을 더 중요시하고 있다. 결국은 학생지도는 교사, 학부모가 함께 해야 효과적이라본다. 기피하는 것은 생활지도부장뿐이 아니다. '스쿨폴리스'라는 그럴듯한 이름으로 출발한 제도가 있다. 그러나 스쿨폴리스제도가 정착하기도 전에 그것을 담당하려는 인사가 많지 않은 문제점에 봉착하고있다. 우리학교의 경우도 교내순시를 하던 자원봉사자가 1년만에 그만두었다. 업무적으로나 학생지도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올해의 경우 새학년이 시작된지 거의 1개월이 흐른후에 인선을 겨우 한 상태이다. 아무리 좋은 정책이라도 담당자가 없다면 무용지물이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떤 대책이 필요한 걸까. 일단 학교에서 일어나는 각종 사안에 대해서 학교나 생활지도부장의 잘못된 처리로 인해 학생에게 심각한 피해가 간 경우를 제외하고는 법적인 보호가 필요하다. 즉 일반사건과 똑같이 취급하지 말고 학교의 특수성을 감안하여 고의가 아닌 경우에는 최대한 보호를 해 주어야 한다고 본다. 실제로 학부모들은 생활지도부장으로 최선을 다했음에도 무조건 소송을 하는 경우들이 많다. 이것은 결국은 교권침해로 이어져서 생활지도부장이 심각한 상처를 받게 된다. 또한 최소한 생활지도부장에 대한 우대책을 도입해야 한다고 본다. 교육부나 시,도교육청에서는 우대책으로 제시하는것이 '승진가산점부여'를 많이 거론하는데, 이는 우대책이 아니다. 모든 생활지도부장이 승진가산점을 받기 위해 노력하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그런 우대책보다는 실질적인 우대책이 필요하다. 생활지도부장에게는보수나 수업시수등에서 적극적인 검토를 해야 한다고 본다. 물론 이렇게 한다고해서 생활지도부장 기피현상이 사라질 것으로 보지는 않는다. 그렇더라도 가시적인 효과가 기대된다면 실시하는 것이 옳다고본다. 만일 소송에 휘말릴 경우는 어느정도의 소송비용은 교육부나 교육청에서 부담해 주어야 한다. 생활지도부장이 모두 책임지도록 방치하는 것은 불합리하다는 생각이다. 결국 책임만 강조하는 현재의 시스템에서는 날로 어려워지는 학생지도를 효과적으로 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최소한의 보호장치가 우선되어야 한다고 본다. 깊은 검토가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최근 5월 15일 스승의 날을 2월로 연기하자는 움직임이 있다.어떤 학교에서는 이날 수업을 편성하지 않았다가 부랴 부랴 변경하려 하고 있다. 그런데 스승의 날이 포함된 5월 셋째주는 학생들에게 직업세계 체험의 주간으로 할 것을 2006년에 발표한 것을 아는 학교교육 관련자는 많지 않은 것 같다. 앞으로 우리 나라가 발전하기 위해서는 청소년들이 영어와 수학을 잘하는 것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은 앞으로 자신이 맡을 직업분야에서 성공하는 것이다. 각 개인들이 성공하면 그것이 모아져서 우리 나라가 발전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재 우리 나라의 현실을 보면 학생들은 자신이 무엇을 잘하는지 하고 싶은지도 모른 채 일단 공부만 열심히 하면 나중에 무엇인가 된다는 생각이고 이에 따라 30대 초반이 되어서도 홀로서기를 못하고 방황하고 있는 것을 많이 본다. 또 학생들이 아는 직업의 수가 수십개에 불과하고 학생들 가운데 직업에 대하여 조금이라도 체험한 비율이 8% 정도에 불과하다. 마침 5월 스승의 날을 학교수업을 배치하지 않았다면 이날을 직업세계 체험의 기회로 만들어 주면 어떠할까 생각한다. 그 몇 가지 방법을 찾아보면 다음과 같은 몇 가지를 들 수 있다. 첫째, 학교가 지역 내 기업체(지자체 포함)와 협의하여 다양한 직업체험을 제공하는 「1校 1社 직업체험의 날」을 운영한다. 전경련, 상공회의소, 지자체 등에서 추천하는 기관과공동 추진을 통하여 특강 및 직업 설명회, 현장 견학 및 체험, 인터뷰, 직업 박람회 공동 개최, 직원과 학생의 멘토링제 운영 등을 실시하는 것이다. 둘째, 기업의 CEO 특강 및 현직자의 직업 설명회를 학교에서 갖는다. CEO가 특강을 요청하는 학교를 방문하여 직업세계의 변화 및 성공 사례 등에 관한 「CEO 특강」을 실시할 수도 있다. 혹은 학생들이 선호하는 직업 종사자가 직업설명회를 가져 직업 소개 및 직업 수행에 요구되는 능력, 직업 에피소드 등을 설명한다. 기업체에서는 출장처리 및 자기계발 실적으로 인정하고, 학교에서는 예산의 범위 내에서 강사료를 지급한다. 셋째, 현장 견학 및 체험 기회를 제공한다. 학생들이 관공서나 공장이나 회사 등을 방문하여 견학하고 정보를 수집하거나 간단한 직업 체험을 실시하는「현장 견학 및 체험 기회 제공」이 있다. 현재 정부에서 시행 중인 「어린이 정부 체험」 행사와 연계하여 협조를 받을 수 있다. 넷째, 직업 박람회 등 직업체험 행사를 공동 개최하거나 지원한다. 현재 시․도교육청별로 실시되고 있는 행사에 기업체가 공동 참여하거나 지원한다. 다섯째, 학생들이 관심 있는 직업에 대한 면담 및 인터뷰 기회를 제공한다. 학생들이 기업체를 방문하여 직업 종사자와 면담하거나 인터뷰하는 기회를 가진다. 다섯째, 학교 교육과정과 연계된 직업종합체험실을 운영한다. 기업의 대표적인 직무내용을 모형으로 제작하여 일선학교에서 체험할 수 있도록 제공한다. 학교의 실험실 등에 직업종합체험실을 설치한다. 지역 중심학교, 농․공업계 공동실습소, 각 시도별 거점 위치에 설치한 ‘직업종합체험실’을 활용한다. 여섯째, 학생들에게 부모님(또는 친인척 등)의 일터 방문 기회를 제공하는 「부모님 회사 탐방의 날」을 운영한다. 학생들이 부모님(또는 친인척 등)의 일터 방문하여 직업세계 체험하게 한다. 3~5명의 학생이 한 조를 이루어 부모님의 회사를 탐방할 수 있다. 일곱째, 대학교, 전문대학, 한국폴리텍대학, 실업계고등학교 등을 방문하여 교육 내용 및 교육 훈련 장비 등을 견학하고 전문가로부터 현장 교육을 받는「직업교육훈련기관 방문」도 생각할 수 있다. 여덟째,시도교육청별로 구성되어 있는 지역진로교육협의회의 20여개 기관과 진로교육인력풀(50개 직업별 직업체험 지원할 인력의 데이터베이스가 구성되어 있음)을 활용할 수 있다. 아홉째,다양한 직업을 가진 학부모, 학교 동창, 관내 우체국, 은행, 소방서, 세무서, 법원, 증권회사, 구청, 동사무소, 대학, 지역별 업종별 협회(예 : 미용사 협회, 의사협회, 한의사협회 등)에 공문을 보내 협조를 요청하면 될 것이다. 열번째, 이외에도 학교에서 찾아보면학생들의직업체험을 도와주는 기관이 많이 있다.몇가지 예를 들면 Job School(한국고용정보원 및 각 고용지원센터), WISE 지원 사업(교육인적자원부), 과학기술 엠배서더, 닮고 싶은 스타과학자, 청소년 현장체험학습장 조성 사업(과학기술부), 청소년 산업 기술 체험캠프(산업자원부), 청소년수련관의 각종 수련활동(청소년위원회),청소년 인터넷방송국스스로넷, 서울에니메이션센타,아우성 센터,하자센터,대한항공정비소, 한국여성경영자 총연합회, 한국경제신문, 중앙일보 등에서 현재사업을 전개하거나 지원을 하고 있다. 5월이면 중간고사도 끝나고 소풍도 가고 현장학습도 가고 할 일이 많겠지만 여러 행사 중 학생들의 미래를 생각각하여 직업세계를 체험할 기회를 학교가 제시하여야 한다고 본다. 지난 2월 교육인적자원부에서 각 시도교육청으로 협조공문이 내려갔으나 일선 학교 교육계획서에 많이 반영안된 것 같아 안타깝다. 이제 5월 스승의 날이라는 하루의 여유가 생겼는데 이날을 중심으로 학생들의 직업세계 체험의 날을 편성하여 줄 것을 간곡하게 선생님들에게 부탁드립니다.
김제 원평초등학교(교장 유주영) 전교어린이회(회장 6학년 이나래)가 장애·노인 복지시설과 자매결연을 맺었다. 지난 3월31일 김제시 금산면 소재 복지시설 ‘임마누엘 평강의집’(원장 서해인)에 원평초등학교 각 학급별 대표학생 15명이 때 아닌 폭우가 잠시 멎어 이슬비가 내리고 있을 때 정성들여 마련한 위문품을 한 아름씩 안고 방문하였다. 3년 전부터 결연을 맺어 온 어린 학생들은 해마다 7회씩 본 시설을 방문 25명의 장애·노인들을 위로하고, 장기자랑으로 즐거운 시간을 갖도록 하였으며, 관심어린 대화를 나누며 어깨를 주물러 드리고, 음식을 나누어 먹는 등 사랑나눔 체험활동을 벌여 왔다고 한다. 전교 12개 학급 중 2개 학급씩 연중 방문시기를 다르게 본 시설을 방문하여 위문 봉사 체험 활동을 하여 어려운 이웃에 대한 관심을 제고하고, 학생들 스스로 다양한 프로그램을 구성하는 등 자치활동의 역량을 시장시키는데도 효과적이었다고 한다. 이번까지 모두 네 번 째 왔다는 이나래(6학년)학생은 “몸이 아픈지 잘 움직이지도 않고 잘 웃지도 못하는 할머니를 보니 너무 안타깝다.”고 아쉬워했으며, 처음으로 찾아 온 1학년 어린이들은 생소한 시설의 환경과 노인들의 모습에 약간은 두려워하는 듯 했지만 곧 대화를 나누고 정성껏 팔 다리를 주물러 드리면서 곧 친해졌다. 유주영 교장은 “어려운 이웃을 돕는 것은 말이나 생각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의도적인 체험을 통해 내면화 되어야 언제든지 실천으로 옮길 수 있는 능력이 생긴다.”고 현장체험학습의 중요성을 강조 하였다. 올해도 6회에 걸쳐 본 시설 방문 위문 봉사활동을 벌일 계획이라고 한다.
교육은 상식적 안목에서 지적 안목 형성으로의 변화를 의미하며, 지성인을 육성하여 행복한 삶을 영위하는 것이 목적인 미래지향적 활동으로써 치열한 국제 경쟁 사회에서 국가 흥망의 원동력이다. 수박 농사를 짓는 아버님을 도우며 원두막에서 글짓기도 하고 그림도 그리며 주렁주렁 열린 수박을 따서 차에 싣고 아버지와 함께 시장에 나가 팔아본 경험이 있는 중학생이 막상 수박에 관한 시험문제에서는 0점을 맞았다. 그러나 학원에 다닌 도심지 학생은 “박과에 속한 1년생 덩굴 풀”이라고 암기해 100점을 맞았다는 픽션이 있다. 이것은 시골 학생은 상식적 안목에 머물고 도심지 학생은 지식이 암기되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본질수업을 전개하여 질적 평가를 실시하면 도심지 학생은 0점이고 농촌 학생은 100점이 될 것임에 분명하므로 수업과 평가에 문제가 있다고 보아야 한다. 입시교육은 칠판에서 수영과 논술 그리고 영어를 가르치고, 도덕과 수학 그리고 과학 교육이 전개되고 필기시험에서 100점만 맞으면 실력이 있다고 해석한다. 그러나 공교육은 수영장을 찾고, 논술지도에 앞서 다독부터 시키며, 원어민 수업을 전개하고 도덕적 논의를 시키며 수학이나 물리학 그리고 철학을 하도록 한다. 즉, 자기 주도적 지식 구성학습으로 스스로 지적 안목을 형성하게 한다. 그러므로 학교에는 과학실과 도서실, 어학실, 정보실, 실습실 등이 존재한다. 공교육과 사교육은 목적과 방법이 다르고 평가가 다르다. 사교육이 명문대 입학을 목적으로 학습문제(시험문제)를 제시하고 문제해결의 열쇠가 되는 개념, 원리, 법칙을 다양한 방법으로 쉽고 재미있게 설명하면 학생들은 앉아서 주의 깊게 듣고, 이해된 내용을 암기해서 시험문제가 나오면 기계적으로 대입(代入)해서 푼다. 이것은 교육이 아니라 훈련이며, 학교에서 방과 후에 개인차에 따라 이해력과 기억력 신장을 위한 보충학습을 하는 것과는 개념이 다르다. 따라서 입시교육은 테니스는 교사가 하고 학생은 구경하고 있는 모습에 비유되기 때문에 비정상적이라고 평가되고 수박 겉핥기식 교육이라 혹평 받고 있다. 또한 입시교육은 학생들의 이해력과 암기력, 단순 사고력이 신장되지만 타율, 암기, 경쟁을 학습하기 때문에 공교육에서 추구하는 인간상(건강, 자주, 창의, 도덕)과는 정반대의 인간이 육성될 수가 있다고 분석되고 있다. 특히 대학에 들어가면 강의에 적응하지 못하기 때문에 다시 기초교육을 받아야 하며, 취업 후 또다시 교육을 받아야 한다. 이를 두고 교육적 낭비라 질타하고 입시 지향적 교육행태를 망국적 병리 현상으로 진단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지금 각급 학교 교실에서는 미국 등 선진 국가처럼 교사가 학습목표를 제시하면 학생들이 학습문제를 선정(수준별 학습을 위해)하고 스스로 인터넷, 도서 등을 통해 정보를 수집하여 가설(아이디어 창출)을 설정하고 협동으로 실험, 관찰, 성찰, 토의, 조작 등을 통하여 스스로 개념, 원리, 법칙을 구성시켜야 한다. 즉 학생들이 학문을 듣고 구경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주도적 지식 구성학습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혁신 수업을 통해 학생들은 과학적 탐구력과 창의력이 신장되어 학생의 삶과 대학을 포함한 평생학습에 필요한 수학 능력 신장은 물론 자주성과 도덕성(협동성), 창의력이 육성되고 학습량(많은 문제 풀이 연습)이 줄어들게 된다. 이렇게 확보된 여가 시간을 이용하여 건강관리와 논술의 기초가 되는 독서와 인성의 요인이 되는 사회성, 정서 함양 등 사람다운 사람 육성 교육을 지향해야 한다. 앞서 본 바와 같이 입시교육이 대증요법이라면 공교육은 보약처방이라고 할 수 있고, 입시교육이 ‘수박 겉핥기식’ 교육이라면 공교육은 ‘수박 재배식’ 교육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지자체에서는 고장을 떠난다고 지금 당장 대증요법을 쓰지 말고 먼 훗날을 내다보고 보약처방의 용단을 내려야 한다. 그래서 지방 고등학교를 명문 고등학교로 만들어 학생들의 인성과 창의성을 길러 놓으면 이들이 오히려 부모님과 고향을 생각하고 취직도 잘하고 고향에 남아 창의적 사업을 일구어 고향 발전에 기여할 것이다. 물론 개인차에 따라 어떤 학생은 명문대학에 들어가 지도자가 되겠지만 그것만이 성공은 아니며 교육의 본질적 목표는 지도자가 되기 전에 우선 사람다운 사람을 육성하는 일이다. 그리고 인재의 현대적 의미도 낙제생이었지만 발명왕 에디슨과 같이 인성과 창의성이 뛰어난 사람이거나 소프라노 조수미, 골프 황제 타이거 우즈, 야구선수 박찬호 등과 같이 예·체능이 탁월한 사람 등으로 변화하고 있다. 필자가 지방에서의 지도자(군수, 의장, 군 의원, 사회단체장 등)의 특성을 조사한 바에 의하면 명문대학 출신이라기보다는 애향심과 사회성, 도덕성, 협동성과 같은 인성과 창의성이 탁월한 인격자, 즉 교육에서 추구하는 인간상에 부합된 민주시민으로 분석되고 있다. 현재도 그렇지만 미래 사회는 공무원, 회사원은 물론 자영업자까지도 학벌보다는 인성·창의성이 우수한 사람이 성공할 확률이 높다고 한다. 그리고 사회 환경이 그렇게 조성되어야만 공교육이 정상화되고 치열한 국제 경쟁사회에서 국가가 생존할 수 있다. 근래 지방자치단체에서 학원을 운영하는 사례가 있는데 이는 헌법에 보장된 교육의 자주성을 침해할 뿐만 아니라 공공 기관이 사적 목적 실현을 위한 입시교육을 조장하는 부적절한 행정으로써 국가백년대계를 저해하는 오점을 남길 수가 있다. 따라서 공교육은 현행 법제도와 같이 전문기관인 교육청에 위임하되 지방자치단체에서는 부족한 예산을 확충하여 적극 지원함으로써 본질적 수업을 통한 공교육의 질을 향상시켜야 한다. 학생과 학부모가 신뢰할 수 있도록 서로 돕는 슬기로움 교실수업 및 평가 방법의 혁신에 대한 계속적인 노력도 절실히 요구된다.
악마의 불꽃? 1887년 이른 봄이었다. 수많은 종로 사람들이 일제히 자신들의 키를 훌쩍 넘는 궁중의 담벼락으로 몰려들었다. 경복궁에 켜진 ‘물불’을 보기 위해서였다. 화려한 빛으로 사방을 비추는 물불은 다름 아닌 ‘전등’이었다. 사람들은 전기가 펼치는 마술의 현란함에 마음을 빼앗겨 버렸다. 당시의 사람들은 전등을 물불이라 불렀다. 그 이유는 전깃불이 연못에 반사되어 마치 물에 불이 붙어 활활 타오르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었다. 경복궁에 한국 최초의 전등이 가설되기 4년 전인 1883년 조선 보빙사 일행은 샌프란시스코에서 처음으로 전등과 마주쳤다. 샌프란시스코의 하늘은 마치 거미줄이 처진 것 같았다. 전깃줄로 가득한 하늘과 길가를 따라 즐비한 가로등을 바라보며 말을 잊지 못했다. 그들은 전기와 가로등이 어떤 원리로 작동하는지 몰랐다. 보빙사 일행은 전깃불이 인간의 힘이 아니라 ‘악마의 힘’으로 켜진다며 전기에 대한 충격을 감추지 않았다. 그리고 십 년이 훨씬 넘은 후에도 전기에 대한 경이감은 줄어들지 않았다. 1896년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 대관식에 참석하기 위해 러시아로 떠났던 민영환은 도중에 유럽의 각 도시들을 유람한다. 민영환은 근대화된 유럽의 거리를 활보하며 전깃불과 가스등을 대면했다. 그의 눈 속으로 들어온 문명의 이기(利器)는 너무나 밝아서 별과 달빛을 빼앗는 것 같았다. 이처럼 서구에서 발명된 ‘전기 테크놀로지’는 100년 전 한국인들의 혼을 빼놓을 만큼 위력적으로 다가왔다. 이제 전기 테크놀로지로 대변되는 자본의 스펙터클이 자연의 원형성을 파괴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자본주의 근대 사회의 입구에 ‘전기의 마력’이 버티고 서 있었다. 인간의 눈을 현혹하는 요술 인간의 말(言)을 어떻게 실어 나를 것인가. 100년 전 한국인들에게 인간의 말을 수송하는 도구는 글자(활자)로 된 매체였다. 대표적인 형식은 ‘편지’였다. 그러나 전기의 발명과 함께 편지의 전성시대는 황혼 속으로 사라지고 ‘전신’의 시대가 떠오르고 있었다. 한국 최초의 수신사였던 김기수는 누군가로부터 전신에 대해서 들은 적은 있었다. 하지만 그는 전신의 원리와 ‘속도’에 대해서는 믿을 수 없었다. 만 리나 되는 장거리를 일순간에 가로지르는 전신의 위력을 김기수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서로 다른 이질적인 공간, 당시 한국인의 인식으로는 판단 불가능한 한계 영역을 한 순간에 이동하는 테크놀로지가 바로 전신이었다. 김기수뿐만 아니라 일본과 서구를 여행한 한국인들의 전신에 대한 반응은 대체로 비슷했다. 전신은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로 묘한 기계였으며, 사람을 어리둥절하게 만드는 마치 ‘요술쟁이의 거짓말’ 같은 것이자, ‘사람을 현혹하는 서양의 기계’였다. 그렇지만 비록 서양의 전신이 인간을 현혹하는 것일지라도 그것이 문명개화를 위한 밑거름이 된다면 이를 끝내 거부할 수는 없는 상황이었다. 수십 년 이래, 일본은 오로지 부국강병(富國强兵)을 급선무로 삼아, 각가지 기계 부분의 설치와 규모는 아주 크고, 여러 가지 쓰는 기물의 제작은 재주와 공교로움이 겸비되어 하늘의 조화력(造化力)을 빼앗고, 땅이 만물을 이롭게 하는 힘을 다하는 것이라고 이를 수 있다.(이헌영, 일사집약, 1884) 부국강병을 위해서는 서구의 기계문명을 받아들여야만 했다. 그렇지만 그것은 성현이 말씀하신 ‘기기음교’(奇技淫巧)의 극치였기에 배척해야만 하는 것이었다. 하나 현실은 ‘눈을 현혹하는 음란한 기술’인 서양의 기계가 ‘하늘의 조화력’을 대체하고 있었다. 전신과 전화가 부여한 시공간의 ‘단축’은 확실히 획기적인 소통방식을 창조했다. 눈으로 보지도 못하고 귀로 듣지도 못하던 전화의 특징은 무엇보다도 근대적 인간의 관계망을 새롭게 조직하는 데 있었다. 전화는 새로운 정보를 교환하거나 유통하는 창구였다. 전화로 인해 안과 밖의 경계가 모호해지고, 타자와의 공간적 ‘거리’가 전파를 타고 축소되었다. 더욱이 전화는 전신과 다르게 ‘소리’를 직접 실어 나르는 특징이 있었다. 전신이 송신자의 정보를 교환수가 특정한 코드로 변환해서 수신자에게 공급한다면, 전화는 송신자의 생생한 소리를 직접 수신자에게 전달한다. 유성기가 복제된 소리, 즉 녹음방송이라면 전화는 생방송인 셈이다. 그만큼 송신자와 수신자의 거리를 축소하며 서로의 관계를 긴밀하게 구축하였다. 하지만 제국주의 국가들에게 전화와 전신은 근대적 전쟁을 수행하기 위한 매우 효과적인 무기로 사용되었다. 1894년의 청일전쟁과 1904년의 러일전쟁에서 쟁점이 되었던 사안 중에 하나가 바로 일본이 한국에 설치한 ‘전선’을 보호하기 위해 일본군을 한국에 주둔한다는 내용이었다. 그만큼 전화와 전신이 근대 제국주의 열강들에게는 전술적으로 매우 중요한 수단이었다. 통신을 점령하는 자가 곧 전쟁에서 승리하기 때문이었다. 감각의 확장, 거리의 소멸 전기 테크놀로지의 발명은 인간의 감각을 확장하기도 했지만, 역으로 인간의 감각을 지나치게 시각의 영역으로 축소시켰다. 갑자기 무대가 바뀌면서 우레 같은 바다 소리가 장내에 가득 차고 망망한 창파 위에는 윤선들이 좌우로 오가기도 하고, 혹은 평원과 광야, 깊은 산과 긴 골짝을 기차가 번개같이 달리는 것 같다. 혹은 경마장에서 여러 말들이 앞을 다투어 달리는 듯하여 그곳에서 관람객들이 실지로 활동하는 것 같으니, 이는 활동사진의 조화로 전기의 힘으로 조작하는 것이라 한다.(이종응, 서사록, 1902) 1902년 영국의 에드워드 7세 대관식에 참석했던 이종응은 전기의 원리를 이용한 활동사진(영화)을 관람한다. 그는 영화의 화면 속에서 움직이는 피사체들이 실제 자신의 앞에서 움직이고 있는 것으로 착각한다. 당시의 활동 사진은 ‘무성’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종응은 증기선이 마치 우레 같은 바다 소리를 내며 움직인다고 느낀다. 이종응과 같은 시각중심의 감각변화, 즉 시각이 모든 감각을 압도하는 현상은 근대 세계의 특징이기도 했다. 이러한 현상은 여행을 하면서 자연과 소통하는 인간의 감각에도 예외 없이 적용되었다. 과거의 여행에서는 풍경(승경)에 대한 몰입이 가능했다면, 기차 여행은 몰입의 즐거움을 조각(분산)낸다. 따라서 달리는 기차의 차창 밖의 자연은 자연을 격자에 가둔 화면이지 풍경이라고 할 수 없다. 때문에 빨리 달리고 있는 기차의 창밖의 풍경을 인지하기 위해서는 모든 감각을 집중적으로 동원해야만 한다. 이는 감각의 확장이 아니라 감각의 소모를 유발한다. 결국 증기기관차 자체가 일종의 미디어인데, 이는 인간의 감각을 ‘간접화’하게 만드는 미디어이다. 자연과 인간이 일대 일로 직접적으로 소통하는 게 아니라 기차라는 미디어를 매개로 간접화되는 것이다. 여행자들의 파노라마적 풍경체험은 결국 영화를 관람하는 것과 같았다. 결국 사신들이 보았던 서양의 기계문명은 신이 계시한 질서나 자연 그대로의 질서가 아니었다. 인위적인 기계가 자연의 속성을 대체하고 있었다. 서양의 기계문명은 신의 영역을, 자연의 영역을 새롭게 개척한 ‘인간의 척도’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들이었다. 또한 전신과 전기 및 전화를 견문한 사신들은 한결같이 ‘형언할 수 없다’는 말로 일관했다. 이는 사신들의 입장에서는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그들은 서구의 근대적 문물에 대해서 무언가 말하고 싶지만, 그것을 표현할 수 있는 ‘언어’를 찾지 못했던 것이다. 사신들은 서구의 근대적 기계문명을 표상할 수 있는 지적 체계, 즉 인식 틀이 아직까지 형성되어 있지 않았기에 곤혹스러웠다. 서구의 문명에 대한 표상 불가능성은 여행자로 하여금 가능한 있는 그대로, 보는 그대로 기술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하게 만들었다. 요컨대 사신들은 자신들 앞에 펼쳐진 사물에 대한 현상과 그것을 언어로 표현해야 하는 강박 사이에서 사유의 균열을 느꼈다. 현상과 표현 사이에서 그들의 사유는 찢겨지고 균열되었다. 이러한 사유의 찢김과 균열 속에서 한국의 근대는 시작되었다. 이와 같이 사신들이 견문한 전신, 전기, 전화 등은 모두 ‘속도’와 관련된 ‘전기 테크놀로지’였다. 이것들은 단순히 근대적 미디어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근대 세계를 구조화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근대 세계란 시간과 속도에 지배받은 세계이다. 서로 다른 공간은 근대적 시간과 속도에 의해 균질화 된다. 전기를 이용한 전신은 지구상의 모든 시공간이 문명사회의 관측범위 안으로 빨려 들어오는 것이며, 동시에 멀리 떨어져 있는 지역들 간의 시차도 지워버린다. 결국 전신의 발명은 ‘거리의 소멸’을 가능하게 했던 매스미디어였다. 이러한 근대적 미디어의 절대적 속도의 본성은 절대적인 권력과 절대적이고도 즉각적인 통제를 가능하게 하는 전지전능한 권력이었다. 현재 우리는 신의 세 가지 속성인 편재성, 동시성, 즉각성을 ‘전기 테크놀로지’를 통해서 획득한 셈이다. 전신과 전기 및 전화를 견문한 사신들은 한결같이 ‘형언할 수 없다’는 말로 일관했다. 그들은 서구의 근대적 문물에 대해서 뭔가 말하고 싶지만, 그것을 표현할 수 있는 ‘언어’를 찾지 못했다. 서구의 문명에 대한 표상 불가능성은 여행자로 하여금 가능한 있는 그대로, 보는 그대로 기술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하게 만들었다. 사신들은 자신들 앞에 펼쳐진 사물에 대한 현상과 그것을 언어로 표현해야 하는 강박 사이에서 사유의 균열을 느꼈다. 이러한 사유의 찢김과 균열 속에서 한국의 근대는 시작되었다.
한반도 끝에서 시작한 신라, 기지개를 켜다 신라 천 년의 세월 안에는 ‘신라’라는 한 나라가 어떻게 생겨났으며 어떻게 힘을 키워서 삼국을 통일하고 찬란한 문화를 꽃피웠으며, 또한 어떻게 스러져갔는가를 완벽하게 살펴볼 수 있습니다. 신라는 진한, 즉 경상북도 지역에서 12개의 작은 나라 중 하나인 사로국에서 시작되었습니다(기원전 57년). 촌장이 지도하는 촌락공동체에서 출발한 사로국은 주변의 작은 나라들을 차례로 정복, 4세기 무렵에는 국가로 발전하게 되었고, 676년에 이르러 고구려, 백제와 치열한 전쟁을 거쳐 삼국을 통일하게 되었습니다. 신라는 통일 과정에서 외세의 도움과 한반도 남쪽을 차지하는 데 그친 불완전한 통일이었지만 최초의 민족 통일국으로서 하나의 문화를 만들어가는 계기가 됐습니다. 신라의 시조왕 박혁거세는 여섯 부족의 촌장들에 의해 왕으로 추대되었습니다. 초기 왕들은 박·석·김씨가 번갈아 왕위에 올랐고 사로국의 영역도 경주를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이것은 신라가 여러 세력 집단이 연합하여 임금을 선출하였고, 이러한 시기에는 더 강력한 국가를 만들기엔 힘이 부족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삼국유사와 삼국사기에 기록된 건국설화에 따르면 박혁거세가 탄생한 천 년의 역사가 시작된 ‘나정’은 박혁거세가 알에서 태어난 우물로, 소나무 숲에 둘러싸여 있어 아늑하던 이 곳은 지금 발굴조사가 한창이어서 들어가 볼 순 없지만 우물 터, 건물 터 등이 남아 있습니다. 바로 신라 천년의 역사가 시작된 곳이랍니다. 석탈해와 월성 탈해가 신라에 와서 살집을 찾아다니다 마음에 드는 곳을 발견하였는데, 그곳은 호공이라는 사람의 집이었습니다. 탈해는 밤중에 몰래 호공의 집 주변에 숫돌과 숯 등을 묻고서 다음날 호공의 집을 찾아가 이곳은 자기 조상의 집이니 돌려 달라 주장했지요. 결국 탈해와 호공은 서로 다투다 법으로 결정하기로 하고 관가를 찾아갔습니다. 탈해는 그 집은 자기 집이 틀림없으며 집주변을 파보면 알 수 있을 거라 큰소리쳤겠죠? “나의 조상은 대장장이인데 잠시 멀리 떠나 있는 동안 다른 사람이 차지한 것이니 집 주변을 파보면 알 수 있다”고 말이에요. 결국은 탈해의 꾀에 호공은 억울하게 집을 뺏겼고, 소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2대 임금인 남해 차차웅에게까지 알려졌대요. 탈해의 지혜를 높이 산 남해 차차웅은 자신의 딸과 탈해를 혼인을 맺게 하였습니다. 이로서 탈해는 임금의 사위가 되었지요. 그 후 파사 이사금 때에 이곳에 성을 쌓아 월성이라 했습니다(반달처럼 생겼다 하여 반월성이라고도 하지요). 월성에 가면 성벽을 따라 파놓은 인공해자를 볼 수 있습니다. 월성 안에 있는 석빙고는 조선시대 얼음을 저장하던 창고로, 원래 월성 서쪽에 있던 것을 영조 때 옮겨 지은 것이에요. 월성과 첨성대 중간에 나무가 우거지고 작은 시냇물이 흐르는 곳이 있습니다. 바로 김알지가 태어난 계림이랍니다. 탈해왕 시절 서쪽 숲에서 우렁찬 닭울음소리가 나서 찾아가보니 나뭇가지에 금빛 궤짝이 걸려 있고 그 아래 흰 닭이 울고 있어 궤짝을 열어보니 아이 하나가 있었습니다. 그 아이가 바로 금빛 궤짝에서 나왔다 하여 성이 김씨가 된 김알지랍니다. 신라의 기틀을 다지다 신라는 17대 내물왕 때 이르러 나라의 기틀을 갖추고 왕을 중심으로 체제를 정비하게 되었습니다. 이 때부터 김씨가 왕의 자리를 독차지하게 되었으며 ‘여러 우두머리 중에서 대장’이란 뜻을 지닌 마립간을 왕의 호칭으로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한마디로 왕의 힘이 강해졌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아직은 고구려, 백제와 맞설 만한 힘을 갖춘 것은 아니었답니다. 신라는 5세기 중반까지 고구려의 힘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왜(倭)의 침입으로 곤경을 당할 때는 고구려의 광개토대왕이 5만의 군사를 보내며 신라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답니다. 신라의 왕위 계승 문제에 간섭하거나 신라 땅에 고구려 군대를 주둔시켜 신라를 간섭하고 지배하려 하였지요. 427년 고구려 장수왕이 수도를 평양으로 옮기자 백제의 비류왕과 신라의 눌지마립간은 나제동맹을 맺게 되었고, 드디어 신라는 조금씩 고구려의 영향력을 벗어나는 한편 힘을 강화해가기 시작합니다. 경주 시내 여기저기 산처럼 불쑥 솟아 있는 거대한 무덤들을 보았나요? 마립간과 왕족들의 무덤이랍니다. 대릉원은 미추왕릉으로 추정하는 무덤을 비롯하여 천마총, 황남대총 등 돌무지덧널무덤이 모여 있는 곳입니다. 천마총은 하늘을 나는 천마가 그려진 말다래가 발견되어 붙은 이름입니다. 최근에는 ‘천마가 아니라 상상의 동물인 기린을 그린 것이다’라는 주장이 많은 힘을 얻고 있습니다. 말다래는 말 탄 사람의 다리에 흙이 튀지 않도록 안장 밑에 늘어뜨리는 판을 말합니다. 자작나무 껍질에 그려진 천마도는 삼국시대 신라의 유일한 그림으로 바로 이 무덤에서 발견되었습니다. 그래서 이름도 천마총이랍니다. 이외에도 그릇에 담긴 채 발견된 달걀이나 화려한 금관 등 여러 가지 유물들이 나왔습니다. 국립경주박물관에 가면 금관, 금귀걸이, 토우, 금동신발 등 신라왕릉에서 출토된 여러 가지 유물들을 볼 수 있습니다. 평지무덤의 왕, 황남대총은 남과 북의 고분이 표주박처럼 붙은 표형분으로 부부의 것으로 추정됩니다. 발굴 결과 남편의 무덤인 남분이 부인의 무덤인 북분보다 먼저 만들어진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남분에서는 60세 전후의 남자 인골과 순장된 것으로 보이는 15세 전후의 여성의 인골이 있었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남편의 무덤에서는 도금한 금동관이 출토되었고 부인의 무덤에서 순금제 금관이 나온 사실이지요. 북분에서 부인대(부인의 허리띠)라는 글자가 새겨진 허리띠 장식품이 나온 사실로 미루어 북분이 부인의 무덤이라고 믿을 수밖에 없겠지요. 무덤의 주인공이 소지왕이니 내물왕이니 하는 의견이 분분하지만 아직 누구의 무덤인지는 밝혀내지 못했답니다. 미추왕은 13대 왕으로 김씨로는 최초로 신라왕이 된 인물입니다. 미추왕릉은 다른 고분과 다르게 담장이 둘러있고 삼문을 통해 들어가야 하는 곳인데 재미있는 전설이 전해집니다. ‘14대 유례왕 때 이서국 군사들이 쳐들어와 금성을 포위한 일이 있었지요. 온 힘을 다해 적을 막던 신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 갑자기 귀에 대나무잎을 꽂은 군사들이 나타나 적을 물리치고는 사라졌습니다. 군사를 뒤쫓아 가보니 군사들은 간 데 없고 대나무잎만 미추왕의 무덤 앞에 수북이 쌓여 있으므로 미추왕이 도왔음을 알았다’고 합니다. 이후 미추왕릉을 ‘죽장릉’이라 하였고 나라에 어려움이 있을 때마다 제사를 지냈다고 합니다. 돌무지덧널무덤이라고 부르는 이 무덤들은 땅 속에 모래와 자갈을 깔고 나무로 만든 관을 놓고 그 관 위에 다시 나무로 만든 곽을 씌웁니다. 곽과 관 사이에 금관이나 허리띠, 귀걸이 등 껴묻거리를 넣고 나무 곽 주위에 자갈돌을 쌓아 진흙을 덮어 다진 뒤 마지막에 흙을 쌓아올린 형태로 삼국 중에서 신라만 이런 무덤을 만들었답니다. 어마어마한 돌무더기가 쌓여 있어 도굴하기가 어려웠겠죠? 한편, 굴식돌방무덤은 사람이 사는 집처럼 돌로 방과 통로를 만들고 입구에 문이 있어요. 무너질 염려가 없으니 입구만 찾으면 도굴하기가 쉬운 구조랍니다. 신라의 발전, 분황사와 황룡사 6세기 초 지증왕 때 농업생산이 크게 발전하였고 국가의 모습이 날로 새로워짐에 따라 나라 이름도 신라(新羅)라고 새로 정했습니다(503년). 법흥왕 때에는 법률을 발표하고 불교를 받아들여 중앙집권적 왕조국가로 체제를 정비하였습니다. 진흥왕 때는 신라 역사상 가장 넓은 영토를 차지하게 되었지요. 가야연맹 지역을 정복하여 낙동강 유역을 확보하고 백제와 손을 잡고 고구려를 공략하여 한강상류를 차지하게 되었으며, 그 후 백제가 차지했던 한강 하류마저 빼앗아 명실상부한 한강의 주인이 되었습니다. 신라는 독특한 신분제도인 골품제도를 마련하여 지배층의 지위를 보장하였고, 성골만이 왕위를 이어갈 수 있었습니다. 진평왕에겐 딸만 셋이 있었는데 큰딸이 왕위에 올라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의 여왕인 선덕여왕이 됐습니다. 선덕여왕 재위시 당나라(태종)와 고구려(연개소문)는 끝없는 전쟁을 치르고 있었으며, 백제(의자왕)와 신라(선덕여왕)도 치열한 싸움을 거듭하고 있었답니다. 또한 여자가 왕이 된 것에 불만을 품은 귀족들의 반란과 당나라의 비웃음을 극복해야 했던 선덕여왕은 부처의 힘을 빌려 적을 물리치고 여왕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 분황사와 첨성대를 세웠고 황룡사 9층탑을 세웠으리라 여겨집니다. 분황사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고승 원효와 황룡사 9층탑을 세울 것을 건의한 자장이 머물렀던 곳입니 다. 분황사는 이름 그대로 향기 나는 황제의 절이라는 뜻입니다. 분황사에 들어서자마자 보이는 탑이 삼국 시대 가장 오래된 탑 중 하나이지요. 분황사 모전석탑은 안산암이라는 돌로 벽돌모양을 본떠 쌓은 탑입니다. 임진왜란 때 왜군이 허물었던 탑을 조선시대 승려가 수리하려다 오히려 더 손상이 되었고, 일제시대에 일본인들에 의해 보수되었으나 원형대로 복원되지 못했습니다. 원래는 9층 또는 7층이었을 것으로 추정되나 여러 차례 파괴되고 수리하는 과정에서 지금의 모습으로 남았습니다. 탑에서 나온 사리함에는 여성(선덕여왕)을 상징하듯 바늘과 가위가 나왔습니다. 국립경주박물관에 전시되어 있어 직접 눈으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분황사를 나서면 눈앞에 드넓은 잔디밭이 보이지요? 이곳이 바로 황룡사터입니다. 신라 진흥왕 14년(553년)때 새 궁궐을 짓다가 황룡이 나타났다는 말을 듣고 절을 짓고 황룡사라 하였답니다. 진흥왕 때 이곳에 커다란 부처님(금동장륙상)도 만들었으며, 진평왕 6년(584년)에는 이 불상을 모시기 위해 금당을 세웠습니다. 고려시대에는 황룡사 9층목탑에 오르는 꿈을 꾸면 과거에 합격하는 행운의 꿈이라 여겼답니다. 황룡사는 총 면적 2만 여평으로 동양 최대의 사찰이며 진흥왕 때 시작하여 선덕여왕 때까지 4대왕 93년이라는 긴 세월에 걸쳐 완공되었습니다. 신라 역대 임금이 절에 와서 고승의 설법과 강의를 받는 등 신라 최고의 사찰로 유지되었으나 고려시대 몽골의 침략으로 불타버렸습니다. 황룡사 터를 발굴하던 어느 날 목탑의 심초석 밑에 있는 사리구멍에서 사리기구가 사라졌습니다. 심초석을 옮기던 중 날이 저물자 발굴팀은 다음날로 일을 미루고 일정을 마쳤답니다. 그날 저녁 기회를 노리던 도굴꾼에 의해 사라진 것입니다. 수년의 세월이 흐른 뒤 다행히 금판에 쓰여진 탑지는 찾았지만 나머지 사리기구는 영영 사라져버렸습니다. 탑지의 기록은 삼국유사의 황룡사 창건에 대한 기록과 일치하여 삼국유사의 진가를 확인해주었지요. 부왕의 은혜, 감은사와 대왕암 감은사는 문무대왕이 부처의 힘으로 왜구의 침입을 막으려고 이곳에 절을 세우다 완성하지 못하고 죽게 되자 아들인 신문왕이 부왕의 뜻을 따라 완성한 사찰이지요. 금당터 아래를 보면 빈 공간이 있는데 용이 되신 아버지를 위해 물길을 파서 드나들 수 있도록 하였다는 삼국유사 기록과 일치하는 부분입니다. 금당 앞에 우뚝 솟은 쌍둥이처럼 생긴 두 개의 탑이 있습니다. 수십 개의 돌로 조립된 통일신라 초기의 탑이지요. 두 탑의 당당한 모습에서 삼국통일 후 신라의 시대적 분위기를 읽을 수 있습니다. 대종천이 흘러드는 감포 앞바다 일대를 신라 사람들은 동해구라 불렀습니다. 왜구가 이곳으로 자주 침입하여 당시 방어의 요새로 중요하게 여겼답니다. 이곳에 백제를 멸망시킨 태종 무열왕의 뒤를 이어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당나라 세력까지 몰아내고 삼국통일을 마무리한 문무대왕의 수중릉이 있는데 대왕암이라 불립니다. 죽어 용이 되어 왜구로부터 동해를 지키겠으며, 장례는 불교식으로 화장하여 검소하게 치르라는 유언을 남겼지요. 유언에 따라 대왕의 시신을 화장하여 유골을 이곳에 매장하였다고도 하고, 뿌려졌다고도 합니다. 대왕암이 있는 곳에서 바다 건너 언덕에 정자가 한 채 보이는데 신문왕이 만파식적을 얻었다는 이견대입니다. 통일신라의 전성기, 불국사와 석굴암 한반도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삼국의 백성을 아우르게 된 통일신라는 보다 앞서있던 고구려와 백제의 문화를 받아들여 진정한 의미의 통일정책을 추진하였습니다. 또한 당나라를 통해 교역이 빈번해지면서 서역과의 교류도 활발해져 다양한 문화를 접하게 되었습니다. 신라 문화는 통일 이후 장기간의 평화를 바탕으로 성덕왕에서 경덕왕 때 최고의 전성기를 이루었으며 높은 문화수준을 기반으로 석굴암과 불국사, 에밀레종을 탄생시켰지요. 신라 사람들의 소망이 한 곳에 모아져 불국사와 석굴암이 탄생했습니다. 설화에 의하면 불국사와 석굴암은 김대성이라는 개인에 의해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모량리의 가난한 집안 출신 대성이 전 재산인 밭 한마지기를 부처님께 시주하고 죽게 되었는데 명문가에 환생하였습니다. 그는 전생의 어머니를 위해서 석굴암을 지었고, 현생의 부모를 위해 불국사를 지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불국사와 석굴암은 국가적인 대사업이었습니다. 경덕왕은 이 절을 지으면서 당대의 고승이며 국사인 표훈과 신림에게 조언을 구하고 완공 후에는 이곳에 머물게 하였습니다. 두 절이 창건된 시기는 통일 전쟁을 치른 후 100년, 정치적·사회적으로 나라가 안정되고 모든 문화가 골고루 발달한 때였습니다. 석굴암은 불국사와 함께 1995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됐습니다. 신라 사람들은 힘들게 토함산을 올랐겠지만 우린 차를 타고 갑니다. 창밖을 한번 보세요. 멀리 동해바다에서 밀려오는 구름과 안개가 온 산을 휘감고 있습니다. 토함산이란 안개와 구름을 삼키고 토하는 산이랍니다. 구불구불한 산길을 한참을 지나야 석굴암을 만날 수 있습니다. 본래 이름은 석불사였고, 원래는 암자가 아닌 독립된 절이었습니다. 석굴암은 300여 개나 되는 화강암을 다듬어 만든 인공석굴로, 예배와 공양을 하는 네모난 공간과 본존불이 놓여진 동그란 공간을 통로를 통해 연결해 놓았습니다. 석굴암 후실 중앙에는 본존불이 앉아있고 본존불 주위의 둥근 벽을 빙 돌아 10대 제자를 비롯하여 보살상과 제석천, 범천이 조각되어 있습니다. 통로에는 사천왕을 조각하였는데 부처님의 나라를 동서남북에서 지키는 신이지요. 전실에는 금강역사와 팔부신중을 조각하였습니다. 조각들의 표정과 동작이 생생하게 새겨져 있어 벽에서 걸어 나오는 듯 착각에 빠지기도 하지요. 천년을 끄떡없이 버텨온 석불사는 일제강점기에 콘크리트를 바른 뒤부터 석굴 안에 이슬이 맺히고 곰팡이가 피어 조각들이 훼손되기 시작했습니다. 해방 후 정부에서도 대책을 세웠지만 습기를 없애지는 못했습니다. 결국 지금처럼 유리벽을 세우고 석굴을 밀폐시켜 냉방시설을 들여놓게 되었답니다. 현대의 최첨단 기술이 천 년 전 신라인의 과학기술을 따라가지 못한다는 말이지요. 몰락하는 신라, 포석정 세월이 흐르면서 신라 내부에서는 여기저기서 불평, 불만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뛰어난 능력을 가진 사람도 골품제도에 막혀 뜻을 이룰 수 없었으며, 비참한 백성들의 삶을 외면하는 왕실과 귀족들 간의 권력 쟁탈전은 지방 통제력의 약화로 이어졌습니다. 착취와 억압을 견디지 못한 백성들의 반란이 이어지고 정부의 간섭이 미치지 못하는 지방에서 힘을 키운 호족들은 백성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하며 스스로 나라를 세우고 왕을 칭하게 되었습니다. 그 대표적인 사람이 궁예와 견훤이지요. 천년의 역사를 이어온 신라는 마지막 왕 경순왕 김부가 고려에 항복하는 935년에 막을 내리게 됩니다. 포석정은 통일신라 때 만들어진 것으로 유상곡수연을 하던 곳입니다. 유상곡수연이란 구불구불한 수로에 흐르는 물 위로 술잔을 띄워 잔이 머무는 곳에 앉아있는 사람이 시를 짓는 놀이입니다. 유상곡수연은 중국의 기록에도 나오는데 남아있는 유적이 거의 없어 포석정의 유적이 중요한 연구자료로서 가치를 지닙니다. 포석정은 927년 음력 11월에 경애왕이 비빈과 신하들을 데리고 잔치를 즐기다 견훤에게 잡혀 자결을 강요당했다는 이야기의 장소로도 유명한 곳입니다. 경애왕이 잔치를 벌였다는 때는 추운 겨울입니다(음력 11월). 또한 9월에 견훤의 공격이 있어 왕건에게 원군을 요청했던 급박한 상황에서 술판을 벌였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믿기 어려운 이야기이지요. 삼국유사에 보면 ‘헌강왕이 포석정에 행차했을 때 남산신이 춤을 추었는데 왕의 눈에만 보였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신라 사람들이 신성시하는 남산의 신이 보였다는 것은 곧 국가적인 행사를 하는 신성한 장소임을 의미하지요. 견훤의 공격이 감행될 때 경애왕이 질펀하게 잔치판을 벌인 것이 아니라 국가의 안위를 위해 신께 제사를 지내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이렇듯 우리의 역사는 기록으로, 또 구전으로 이어져 오지만 누구에 의해서였든 사실 그대로가 아닌 왜곡된 역사적 사실을 기정사실화해서 알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신라의 몰락에서 이어져 오는 얘기도 마찬가지고요. 우리의 역사를 바로 알고 그것에 깃든 우리 조상의 훌륭함과 왜곡되지 않은 바른 역사를 알아내 공부하는 것도 큰 의미가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우리의 소중한 역사가 숨 쉬는 우리의 땅, 한번 슥 지나오며 사진 찍는 것에 머무르지 말고 더 많은 관심과 애정으로 우리의 역사를 알아가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생각됩니다.
다문화 교육은 남을 이해하는 교육이지만 결국에는 자신을 되찾는 신뢰의 교육이다. 다문화 교육이란 타자를 통해 자신을 성찰하고 정체성을 알아가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아직도 이질적인 다문화 맥락과 상황을 제대로 가르치고 있지 않다. 영어의 중요성은 지나칠 정도로 강조하지만 영어를 사용하지 않는 더 많은 다른 세상을 어떻게 만나야 할지를 가르치고 있지 않다. 국제이해교육(EIU, Education for International Understanding)이란 개념은 아직도 우리의 교육 현장에서 그리 친숙하지 않다. 대학에서 조차도 국제이해교육이나 개발교육, 인권과 평화교육에는 관심이 없고 영어와 취업에 필요한 실용 교육이 갈수록 범람하고 있다. 나와 다른 남도 인정해야 국제이해교육은 세계시민 교육이나 지구촌 교육, 다문화 교육, 평화와 인권 교육, 지속가능한 발전과 환경 교육, 민주주의와 관용 교육 등으로 불리기도 하는데, 이러한 개념들은 교육 현장에서는 너무 거창할 뿐 아니라 이념과 가치 중심의 교육이라 효과적인 교육방법을 찾기도 쉽지 않다. 그러면 왜 국제이해교육인가? 필자는 국제이해교육이 한국의 학교교육에서 왜 절실히 필요한지에 대해 다섯 가지로 설명하고자 한다. 한국에 온 외국인 노동자들이 한국에서 여러 가지 어려움들을 겪고 있지만 가장 난감한 경험으로 말하는 것은 목욕탕에 들어가다가 제지당할 때이다. 한국인 손님들이 좋아하지 않는다고 하여 피부색이 검은 외국인들의 출입을 금하는 것이다. 어떤 외국인은 피부가 검다는 것을 마치 더럽다고 느끼며 함께 앉으려고도 하지 않는 한국인을 만날 때 더욱 서러움을 느낀다고 한다. 지금은 사라지고 있지만 동남아 여성들과의 결혼을 알선하는 업체들은 ‘몸에서 냄새가 나지 않는다’, ‘도망가지 않는다’는 식의 광고를 버젓이 언론에 내기도 하였다. 19세기 노예상인들이나 했던 인종차별과 야만 행위를 우리가 하고 있는 것이다. 외국에서 한국인들의 모습은 더욱 문제가 많다. 한류 때문에 일부 외국인들이 한국의 대중문화 스타들을 좋아하고 한국의 드라마와 가요, 영화를 즐기는 것도 사실이지만 한류가 한국인들의 ‘함께 살지 못하는’ 배타적 모습을 바꾸어 주지는 못한다. 대부분의 해외 한인 사회는 배타적이고 현지인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며 가난한 개발도상국의 유색인들에게는 매우 권위적이고 차별적이기도 하다. 현지 문화나 언어를 알려고 하지 않으며 반말과 욕, 고압적 태도, 때로는 폭력을 쓰기도 하여 현지인들에게 반감을 사기도 한다. 베트남이나 인도네시아, 몽골과 같이 한인들의 사업체가 많은 지역에서는 한인들의 부적절한 태도 때문에 현지 언론에서 ‘야만적인 한국인들’에 대한 기사가 실리기도 한다. 한국인들은 해외에서 더욱 끼리끼리 뭉쳐 산다. 대부분은 한인 거주 지역에 모여 살면서 한인 교회에 나가고, 한인 슈퍼마켓에서 물건을 사며, 한인 식당에서 음식을 먹고, 한인들과 사업을 하고, 한인들 끼리 골프를 치고, 한인 노래방에서 모여 떠들고 논다. 다른 민족 집단들도 해외에서 일정한 배타성을 지니고 현지적응하고 있지만 한인사회는 유별나다고 평가된다. 왜 그럴까? 어려서부터 함께 사는 교육과 훈련이 없었기 때문이다. 가정과 사회가 끼리끼리 문화를 조장하고 강화하기도 하지만 학교교육에서도 더불어 사는 세상을 가르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인류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다른 종족(ethnic)에 대한 감정은 원초적으로 생겨나는 것이라기보다는 역사적으로 만들어지고 문화적으로 형성되고 학습되는 것이다. 나와 다른 사람들을 게으르고 무식하고 가난하고 더러운 것으로 여기면 그러한 부정적 종족 감정이 후세들에게도 학습될 것이다. 반면에 나와 다른 사람들은 내가 지니지 못한 아름다운 특성을 지닌 같은 인간으로 받아들게 되면 함께 사는 긍정적 종족 감정이 전승될 것이다. 나와 다른 피부색과 머리, 복장과 음식습관 등에 익숙해지고 이러한 차이들을 즐기고 아름답게 생각하는 문화 다양성 교육과 훈련이 절실하다. 실제로 손으로 음식을 먹는 서남아시아 사람들과 어울리고자 하면 이들과 함께 손으로 음식을 나누는 것만큼 좋은 방법도 없다. 다른 사람들은 나와 문화가 다르고 세상을 보는 눈과 가치관이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고, 그들과 함께 먹고 일하고 사귀고 결혼할 수 있는 학습이 필요한 것이다. 그래서 유네스코의 ‘21세기 교육위원회 보고서’(1995)는 ‘함께 사는 학습’과 ‘지구촌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국제이해교육은 함께 사는 학습으로 타인을 존중하고 다양성과 상호의존성을 이해하며, 모든 것이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는 진리를 깨닫도록 교육하는 것이다. 세계인이 될 자신감이 필요하다 자신에 대한 진정한 신뢰(confidence)는 자신의 고유성과 정체성을 인식함으로부터 싹튼다. 우리의 학생들이 세계의 청년들과 함께 어울리고 ‘또 다른 세상’을 위해 함께 일할 수 있으려면 자신에 대한 깊은 신뢰를 지니고 있어야 한다. 과연 우리의 아이들은 세계 속에서 어울려 살 수 있는 진정한 신뢰와 자신감을 지니고 있는가? 필자는 그렇지 못하다고 생각한다. 자신의 문화와 사고방식, 종교와 일상의 습관에 매몰되어 있는 자는 아집과 독선, 과신과 오만을 범할 수는 있어도 타인들과의 관계에서 진정한 신뢰와 자신감을 갖기는 어렵다. 오늘날의 세계는 누구도 국가 경계와 민족에 갇힌 채로 살아갈 수 없다. 갈수록 상이한 민족과 문화들 간에 교류가 많아지고 상호의존성은 심해지며, 인간과 기술, 자본, 물질과 상품, 정신과 이념, 이미지와 기호들이 세계를 넘나들며 범람한다. 어떤 것이 한국적인 것인지, 어떤 것이 미국문화인지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로 문화의 혼성화와 융합이 가속화되고 있다. 수천의 상이한 민족 집단들이 각각 다른 세계관과 언어, 종교, 습관을 고집하면서도 다른 문화를 일상으로 받아들이고 살 수밖에 없다. 100% 미국인이 없듯이 순전한 한국인도 없다. 혈연적으로 순혈주의란 있을 수 없는 것이지만 문화적으로는 더욱 더 그렇다. ‘잡종과 혼성의 시대’를 살아가야 하는 학생들에게 정체성의 혼란은 당연하다. 이러한 다양성의 시대에는 다양한 문화와 민족 집단들을 인정하고 존중함으로써 비로소 자신에 대한 자존감도 싹트게 된다. 다문화 교육은 남을 이해하는 교육이지만 결국에는 자신을 되찾는 신뢰의 교육이다. 다문화 교육이란 타자를 통해 자신을 성찰하고 정체성을 알아가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아직도 이질적인 다문화 맥락과 상황을 제대로 가르치고 있지 않다. 영어의 중요성은 지나칠 정도로 강조하지만 영어를 사용하지 않는 더 많은 다른 세상을 어떻게 만나야 할지를 가르치고 있지 않다. 우리나라의 사회 교과서에는 이슬람교도들이 가장 금기시하는 마호메트의 초상화를 삽입하기도 하며, 신세계를 아직도 콜럼부스가 발견한 것으로, 오세아니아를 백인들의 대륙으로 설명하기도 한다. 다문화 교육에서 다른 문화는 외국의 이문화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모든 지역문화(local culture)와 지방의 전통, 소수자들의 문화와 다양한 정체성은 모두 다문화 교육에서 중요하다. 다문화 교육은 세계를 가르칠 뿐 아니라 지방을 가르치며, 타자를 통해 자신을 발견하도록 하는 교육이다. 그러므로 모든 생명 있는 존재들이 그 다양성 때문에 아름다운 것과 같이, 모든 인간 집단과 문화도 다양성 때문에 보호되고 존중되어야 한다는 것을 깨닫도록 하는 것이다. 당연히 ‘나’라는 존재는 세계에서 유일한 개체이고 누구도 복제할 수 없는 아름다운 개성을 지닌 존귀한 존재라는 것을 깨닫도록 하는 것이 다문화 교육이고 국제이해교육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젊은이들에게 자신감을 찾아주기 위해 국제이해교육은 절실히 필요하다. 국제 사회 정세에 대한 이해 교육 지난 수백만 년 동안 이루어졌던 인류 문명의 진화보다도 더 큰 변화가 최근에 일어나고 있으며 변화의 속도는 상상을 초월하고 있다. 우리가 어디로 질주하고 있는가를 되돌아볼 여유도 없이 무한경쟁 속에서 우리는 남을 추월하는 방법을 가르치고 또 배우고 있다. 이러한 급변하는 세계 속에서 세계를 이해하고, 세계에 적응하며, 세계와 더불어 살아갈 수 있도록 하는 것이 국제이해교육이다.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는 종(種)은 사라지고 마는 것이 자연계의 이치일 뿐 아니라 인류사회의 진화과정이기도 하다. 최적의 적응을 위해서는 변화의 본질을 이해해야 하며 세계 변화의 본질을 이해하도록 하는 것이 국제이해교육인 것이다. 변화는 생명복제나 나노 기술, IT, 항공우주공학과 사이보그의 출현과 같은 기술적 혁명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기술 혁명은 새삼 강조할 필요도 없이 인간의 가치관과 생활을 변화시키고 세계를 더욱 가깝게 하는 혁명적인 것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변화의 본질은 기술 혁명이 초래하는 삶의 양식과 사고의 혁명에 있다. 21세기의 인류사회는 생명과 인간성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을 던지고 있으며 과학기술의 발전은 결혼과 양육, 교육과 노동, 여가에 대한 가치관을 바꾸고 있다. 인간 수명의 연장과 의료산업의 발달로 인해 전 세계의 인구학적인 변화가 초래되고 있으며, 어떻게 사는 것이 잘사는 것인가에 대한 새로운 가치관들이 등장하고 있다. 민족과 국민국가에 갇혀 있던 문화는 폭발하듯이 국경을 넘어서 유동하고 있으며 소수자집단들의 다양한 대안적 삶의 양식이 등장하고 반문화와 대안문화가 범람하면서 기존의 주류문화에 도전하고 있다. 전통적인 가치관과 권위는 신인류의 등장으로 약화되고 대체되고 있으며, 문화와 가치관의 충돌과 이행 과정에서 갈등과 분쟁이 발발하기도 한다. 이러한 문화혁명과 동시에 종교적 근본주의와 전통주의가 다시 등장하기도 하고 문명의 충돌을 야기하기도 한다. 우리의 학교 교육은 이러한 세계 변화의 현상과 본질에 대해 얼마나 가르치고 있는가. 국제이해교육은 다양한 지구촌 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문화변동과 교류, 충돌을 주목하고 기술혁명과 가치관의 변화를 이해하도록 함으로써 세계 속에서 잘 적응하며 살아갈 수 있도록 한다. 다른 대륙과 다른 종교, 다른 문화에서 대두되고 있는 새로운 사상과 조류를 읽고 변화에 대한 적응력을 높여 모두가 생존할 수 있도록 하는 교육이다. 이러한 세계이해교육은 신자유주의적 교육 담론을 통해 시장경쟁을 촉진하고 영어와 실용교육으로 국제경쟁력을 높여야 한다는 주장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다. 영어권 중심의 일방적 세계화와 단일 문화 지배적 세계관이 아닌 보다 다원적이고 다양한 세계관을 가르치는 것이며 인류문화의 새로운 생존과 적응 양식을 이해하고 미래를 준비하도록 하는 것이다. 모두 함께 잘사는 세상 만드는 준비 국제이해교육은 참 권리 교육이다. 국제이해교육은 우리가 세계시민(global citizen)으로서 세계 시민권과 책임을 지닌 자들임을 이해하도록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세계 시민교육은 행동과 실천이 수반되는 권리와 책임 교육이다. 우리는 한 국가의 국민이기도 하지만 세계시민으로서 지구촌이 당면하고 있는 제반 문제를 해결하는 데 동참하고, 평화와 공존, 상생이 가능한 지구촌 사회가 만들어질 수 있도록 세계 문제에 관심과 애정을 가져야 한다. 국제이해교육의 주된 교육과정은 평화의 문화를 만드는 평화교육, 소수자와 차별받는 자들의 인권을 이해하고 이들의 인권을 신장하도록 돕는 인권교육, 지속가능한 환경을 일구고 후속 세대가 환경과 조화된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하는 환경 교육, 지구촌의 공동 발전과 국제협력을 통해 빈곤과 질병을 퇴치하고 지속적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하는 개발교육, 다른 문화와 민족 집단을 존중하고 공존하도록 하는 다문화 교육 등으로 구성된다. 평화, 인권, 환경, 개발, 다문화는 상호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어서 이 모든 문제들은 다차원적이고 총체적인 관점으로 보아야만 한다. 국제이해교육은 지구촌이 당면하고 있는 이러한 이슈와 공통의 과제들을 포괄적으로 이해하고 문제해결에 동참하도록 하는 실천 교육이다. 지구촌 시민으로서 코스모폴리탄적인 세계관과 가치관을 지니고 세계시민이 지녀야 하는 의식과 책무를 다하도록 하는 것이 국제이해교육이다. 따라서 국제이해교육은 아래로부터의 시민운동과 인권운동, 평화운동, 환경운동, 소수자 권익운동, 원주민운동, 문화 정체성 운동 등과 같은 실천적 프로그램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국제이해교육은 무엇보다도 현장성과 실천성을 강조하며, 학교에서만의 국제이해교육은 불가능하다. 국제이해교육을 통해 공적개발원조(ODA)가 확대되기도 하고 시민들의 자발적 모금활동을 통해 지구촌이 함께 잘살 수 있는 각종 인도적 구호 프로그램이 확산되기도 한다. 또 소수자들이 무지개와 같이 화려한 색으로 함께 어울려 살 수 있는 사회를 꿈꾸고 실천할 수 있도록 한다. 아울러 획일적인 개발과 난개발에 저항하고 환경과 생명을 보호하고 존중하도록 하며 무엇보다도 모든 사람들이 존엄성을 지니고 살아갈 수 있도록 하는 인권사회를 실현하는데 기여한다. 국제이해교육을 통해 폭력과 차별, 전쟁이 우리들 안에 있으며 평화의 문화를 만드는 일도 우리 안에서 시작되어야 함을 깨닫게 된다. 그러므로 더 나은 세상, 모두 함께 어울려 잘사는 세상, 차별과 폭력, 전쟁이 없는 평화로운 세상을 꿈꾸는 자들에게 국제이해교육은 더욱 절실하다. 교육에서부터 ‘소통의 장벽’ 없애야 국제이해교육은 단순히 국제화 교육이 아니다. 국제이해교육은 세계 속에서 참 인간성을 깨닫도록 하는 자기발견의 교육이고, 가치 교육이며, 인성교육이다. 국제이해교육은 개인과 개인, 교육자와 학생, 문화와 집단, 국가와 민족 간에 소통을 증진시키는 과정이다. 그리고 국제이해교육은 다양한 삶의 현장에서 소통 증진을 통해 모든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세계의 공통 문제에 참여하도록 하는 참여 교육이기도 하다. 이러한 의미에서 우리나라의 교육현실은 국제이해교육과는 너무 거리가 멀다. 교육 현장에는 제도적 장벽 뿐 아니라 세대 간, 문화 간, 교육 주체 간에 보이지 않는 소통의 장벽이 너무도 많다. 교사와 학생, 부모와 자녀, 사회의 기성세대와 신세대 간의 소통 장벽과 격차는 오히려 커져가고 있다. 소통이 없는 곳에서 ‘너’가 있을 수 없고 당연히 ‘나’도 있을 수가 없다. 소통이 없는 곳에는 세계도 지방도 있을 수 없다. 소통이 없는 곳에는 인권도 평화도 민주주의도 있을 수가 없다. 그러므로 소통이 없는 곳에 국제이해교육은 없다. 국제이해교육의 출발과 내용, 방법, 성과는 모두 소통의 증진으로 귀결된다. 다양한 개인과 집단들 간의 보다 원활한 소통을 통해 평화의 문화가 구축되고 상호 공존하는 세계가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다. 소통은 결국 참여를 촉진하고 자발성과 자유가 신장되는 인류의 참 진보를 이루는데 기여한다. 영어교육도 역사교육도 사회교육도 과학교육도 다문화교육도 모두 소통 증진을 위한 것이며, 자발적인 참여에 의해 평화의 문화를 이루기 위함이다. 소통에 기반한 국제이해교육이 있는 현장에서 배타적 민족주의나 순혈주의가 있을 수 없으며 종교적 근본주의도 이념적 도그마도 있을 수 없다. 분쟁과 폭력의 싹이 사라지는 것이다. 문화는 인간을 위한 거울이다. 다른 문화를 이해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자신과 인간성의 본질을 이해하는 데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그래서 인류학자들은 “보편적 인간성은 있는가?”라고 끊임없이 질문을 던졌다. 인간성에 대한 탐구는 다른 문화를 통해 타자를 이해하는 데서부터 출발한다. 그런 의미에서 국제이해교육은 타자를 이해함으로써 나의 인간성을 이해하고 참 인간됨을 이루는데 기여한다. 모든 교육의 목적이 참 인간을 이루는 것에 있듯이 국제이해교육의 궁극적 목적도 참 인간성의 발견에 있는 것이다. 이제 국제이해교육이 전처럼 그리 거창하고 어렵고 낯설게 느껴지지 않았으면 좋겠다.
온누리안 → 코시안 → 다문화 가정 교육부는 올해 시행할 사업으로 늘어나는 다문화가정 자녀의 학습지원 강화와 다문화가정을 이해하는 사회 환경 조성을 위해 ‘다문화교육센터’를 설립, 운영키로 한다고 발표하였다. 낯선 용어인 ‘다문화가정’이란 말 그대로 단일문화가 아닌 문화적 배경이 다른 가정을 뜻하는데 크게 두 가지 형태가 있다. 1988년 서울올림픽 이후부터 한국에 들어오기 시작하여 그 역사가 20년에 가까운 외국인이주노동자 가정과, 농촌총각 장가보내기 운동이 시작인 국제결혼가정, 즉 결혼이민가정이다. 사회학적으로는 외국인이주노동자가정과 국제결혼가정으로 분리해서 부르기도 하지만 우리 교육현장에서는 모두 언어가 불편하고 문화충격을 겪고 있으며 교사의 관심과 배려가 절실하게 필요한 소수자이므로 이들을 모두 다문화가정으로 아울러 부르는 것이 합당하다고 교육부에서 판단하여 그대로 쓰고 있다. 국제결혼가정의 자녀들을 처음에는 혼혈아동으로 부르다가 이 명칭의 부정적인 의미를 없애려고 전북교육청에서는 정책을 시행하기 전 이름을 공모하여 ‘온누리안’이라고 부르고 있다. 경기도 안산에서는 마을 주민의 반이 외국인으로 구성되자 그 자녀들을 따뜻이 품어 안으려고 처음으로 ‘코시안’이라 부르기 시작했으나 차츰 아시아가 아닌 다양한 국적으로 대상이 확대되고 또 역차별 현상도 우려되던 바 결혼이주민 본인들도 ‘다문화가정’으로 불러 주기를 희망하고 있다. 물론 언젠가는 이 말도 쓰지 않게 될 날이 올 것이다. 필자가 다문화가정 자녀들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 것은 해외파견근무가 계기가 됐다. 1997년부터 2001년까지 4년 동안 남미 아르헨티나의 부에노스아이레스 한국학교에서 근무하였는데, 그 때 이역만리로 이주해 와 낯선 땅에 뿌리를 내리고자 애쓰며 정말 힘들게 살아가는 동포들의 삶을 깊이 있게 들여다보며 다른 언어, 문화 속에서 사는 것이 어떤 것인지 피부로 절감했다. 정체성 고민하는 이민 2세 부모 세대와 자녀 세대 그리고 그 자녀 세대들이 겪는 문화 충돌, 한국어와 한국식의 가정생활, 가치관과 아르헨티나라는 백인사회와의 생활에서 부딪치는 어려움은 참으로 컸다. 가장 큰 어려움은 언어다. 언어는 생존에 관한 문제이니 현지어인 스페인어를 하지 못하면 살아갈 수가 없다는 건 두말할 필요가 없는 일이다. 다음이 정체성의 문제인데, 현지어를 몰라 당한 설움을 곱씹으며 앞도 뒤도 돌아보지 않고 스페인어만 붙들고 열심히 공부해서 변호사나 의사, 예술가 등이 되어 성공한 사람들이 현지인 주류 사회와 어울릴 때가 문제였다. 현지인이 ‘당신은 한국 사람인데 한국은 어떠냐, 한국문화는 어떠냐’ 등을 물어보면 한글과 한국 문화를 모르는 자신의 모습에서 그 정체성에 혼란과 회의를 느껴 뒤늦게 한국을 찾고 한국어를 배우려는 것을 많이 보았다. 아무리 지식이 많고 부를 이룰지라도 자기의 고유문화를 제대로 배우지 않으면 오히려 현지 문화와 대등하게 어울리기 어려울 뿐 아니라, 늘 심리적 열등감을 안게 된다는 걸 절감하고 아이들에게 우리 문화를 가르치는 데 열성을 다하게 되었다. 그 아이들은 영주권자이거나 시민권자이므로 한국에 돌아오지 않고 아르헨티나에 살게 될 아이들이어서 학부모들은 스페인어 학습에 대단한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다. 그래서 전교생이 바이올린을 배우게 하고, 레슨은 스페인어로 하되 곡은 아리랑이나 도라지 등을 연주하게 해서 전통 음악을 익히게 했다. 추석에는 학부모와 함께 한복을 입고 송편을 빚으며 윷놀이를 하는 등 전통문화를 알게 했다. 또 동요대회, 백일장 등을 열어 아이들이 한글을 수준 높게 접하도록 했다. 이러한 시도는 당장 아이들의 조부모나 부모들로부터 큰 호응을 얻었다. 이런 경험은 한국에 한 번도 온 적이 없는 아이들에게 긍정적이며 올바른 정체성 형성에 큰 영향을 주리라 생각한다. 파키스탄 다문화가정 자녀 지도 귀국하여 2003년에 경기 부천 옥산초등학교에서 근무할 때였다. 5월 경 부천외국인노동자센터에서 메리와 마훔이라는 파키스탄인 자매를 필자가 근무하는 학교에 입학시키려고 데리고 왔다. 한창 미등록노동자에 대한 문제로 사회가 시끄러웠는데 부천외국인노동자센터에서는 당시 교육부에서 막 발표한 ‘출입국사실증명서 또는 외국인등록사실증명서 제출만으로도 초등학교 입학이 가능하다’는 지침 서류 한 장을 가져왔지만 그 아이들 부모는 미등록노동자여서 아무런 공식 서류가 없었다. 학교에서는 아직 시행령이 내려오지 않은데다 아이들이 한글을 몰라서 학업에 지장이 있다며 받아들이기를 거부했다. 하지만 필자가 나서 한글 지도를 책임지겠다는 약속을 하고 어렵게 자매를 입학시켰다. 당시 언니 마훔이는 4학년 나이이고 동생 메리는 2학년 나이인데 둘 다 2학년 같은 반에 있게 되었다. 1) 한글 교육 남동생도 한 명 있는 메리와 마흠이 자매는 한국에 온 지 4년이 지나 우리말은 잘했지만 글은 아무 것도 몰랐다. 동네 아이들이 학교에 갈 때 부러운 눈으로 쳐다보기만 했던 그 아이들은 그토록 고대하던 학교를 다니게 되어 기뻐하면서 열심히 공부했고, 필자도 학교에 약속한 대로 매일 열심히 한글지도를 했다. 아이들은 집에서 늘 보던 벵갈어와는 다른 한글을 보고, “왜 한글은 네모, 세모, 동그라미가 많아요?”하며 고개를 갸우뚱거리면서도 자기 이름을 쓸 수 있게 되었을 때 무척 신나했고, 힘들어 할 땐 가끔씩 간단한 산수 문제를 풀게 해 주면 아주 좋아했다. 하지만 자기주장이 분명한 이 자매는 반의 다른 아이들과 차츰 마찰이 생기기 시작했다. 2) 한국 아이들과의 문화 충돌 극복하기 한국 아이들은 “선생님, 쟤들은 음식 다 안 먹고 버려요”, “ 선생님, 쟤들은 냄새나요”, “이상한 옷 입고 와요”하면서 그 파키스탄 아이들이 자기들과는 다르고 별나다는 이야기를 했다. 이 자매가 다투거나 울 때 까닭을 물으면, 음식이나, 냄새, 의복 등이 다르다는 것으로 따돌림 당하는 일이었고 그만큼 학교생활이 점차 위축되어갔다. 그런 일이 있을 때마다, 아이들 한 명 한 명에게는 타일렀지만 학교 전체 분위기가 달라지지 않으면 메리와 마훔이가 계속 상처를 받겠다 싶어 전교 재량학습 시간을 만들어 국제이해교육을 했다. 메리와 마훔이에게 예쁜 전통의상을 입고 오도록 하고 전교생에게 파키스탄어로 간단한 인사말을 가르치게 하자 처음엔 쑥스러워하다가 아이들이 벵갈어를 진지하게 따라하자 차츰 자신감을 되찾게 되었다. 인사말과 함께 인사할 때의 동작도 배우고, 파키스탄 전통 의상의 아름다움에 대해 발표도 하게 했다. 돼지고기를 먹지 않는 등의 이슬람교의 특징에 대해 간략히 설명하고 이해하고 도와주도록 부탁했다. 그리고 사람 몸에서 나는 냄새는 다 다르다고 말하고 아이들과 반대 입장인 마훔이에게 한국인들한테서는 어떤 냄새가 나느냐고 물었다. 마훔이는 머뭇거리며 “마늘 냄새가 나서 싫어요”하자 아이들은 믿기지 않는다는 듯이 서로 쿵쿵거리며 냄새를 맡아보기도 했다. 아이들은 이런 과정을 통해 차츰 서로 따뜻하게 다가서게 되었다. 3) 네팔인 초대 국제이해교육 수업 한번은 외국인노동자센터의 도움으로 한국어를 잘 하는 네팔인을 교실로 초대했다. 한국에 와 있는 이주노동자 중에는 의외로 고등교육을 받은 사람들이 많고, 이들은 자신이 살던 곳을 떠나 외국에 온 사람들인 만큼 대단히 진취적이고 개방적이다. 우리 학교에 와서 네팔 문화를 소개해 달라고 부탁했더니 여러 가지 사진과 네팔의 전통의상, 쌀, 화장품(헤라연지) 등을 가지고 와서 재미있는 수업을 해주었다. 필자가 전통의상을 직접 입고 아이들에게 설명하기도 했다. 아이들은 이때 네팔인에게 배운 ‘돈네밧’(감사합니다)’라는 말을 학년 말이 되도록 기억하고 있었다. 필자는 외국에 다닐 때 모았던 소품들과, 국제회의에서 외국 지인들에게 받은 선물, 한복과 교환했던 그들의 전통의상 등 외국 물품 이백여 점을 갖고 있다. 어느 날 이런 것들을 아이들에게 보여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물건 하나하나에 번호를 붙이고 설명을 써서 학교 축제 때 전시했다. 학부모 도우미들에게 먼저 설명하고 각 코너마다 안내를 맡겼더니 학부모는 신나서 아이들에게 설명을 하고 아이들은 갖가지 질문 속에 세계로 향하는 꿈을 키우고 있었다. 4) ‘외국 노래 배워오기’ 숙제 여름방학 숙제로 ‘외국노래 배워오기’를 내주었다. 영어 노래는 제외했다. 인터넷으로 배워 오는 것은 금지시키고 반드시 사람을 만나서 배워오도록 했다. 아이들은 처음에 아는 외국인이 아무도 없다며 기가 막혀 했지만 어렵지만 불가능한 일은 아니라고 설명하고 노래를 배우게 된 과정을 보고서로 작성하게 했다. 사실 필자도 어떻게 될까 기대 반 우려 반이었다. 방학이 끝나고 50여 명이 숙제를 해 왔는데 그 중 하나를 소개한다. “처음엔 이런 황당한 숙제를 내 주신 선생님이 원망스러웠다.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다가 엄마와 함께 동대문시장에 갔다(동대문시장에는 뭐든지 다 있다). 두리번거리고 있으려니 어떤 일본사람이 한국 사람과 서 있었다. 부끄러웠지만 용기를 내어 인사하고 사정을 말씀드린 뒤, 간단한 일본노래를 불러달라고 부탁했다. 그 일본 사람은 신기해하며 노래를 가르쳐주셨다. 그런데 그 일본 사람이 부른 노래는 내가 아는 노래와 비슷했다. 어머니는 그 분께 감사하다고 차를 대접했고 그 분은 나를 많이 칭찬해 주셨다. 어려웠지만, 하고보니 참 재미있는 숙제였다. 이 숙제를 내 주신 선생님이 너무 멋있다.” 아버지의 사업장에 가서 현장 직원인 이스라엘 사람에게서 배웠다는 아이도 있었는데, 그 아이도 노래보다는 이스라엘에 대한 것을 더 많이 배웠다고 했고, 외국인과 직접 만나 이야기한 것이 아주 큰 경험이었다고 했다. 그 밖에도 엄마 친구의 식당에서 일하는 연변사람에게서 중국노래를 배워 온 아이, 옛날 살던 동네에 찾아가서 필리핀 사람한테 타밀어로 노래를 배워 온 아이, 외국인노동자센터로 찾아간 아이 등 이 숙제의 파급효과는 아이들이 외국인을 찾아가기 시작했다는 것이고 그로 인해 학부모들도 외국인에게 부탁하는 처지가 되어 짧은 시간이지만 어떤 인간 대 인간 관계를 만들어낸 점이다. 아이들도 외국인을 막연히 두려워하거나 무시하지 않게 되었다. 숙제를 해 온 아이들에게 상으로 몽골에서 사 온 몽골 전통 주택인 게르 모형을 한 채씩을 주고, 필자가 몽골에 가서 배워 온 노래를 가르쳐주었다. 5) 지역축제 참가 가을이 되어 ‘우리도 부천을 사랑해요’라는 주제로 열 세 나라가 참가한 이주노동자 축제가 있었다. 아이들에게 행사에 참여한 내용을 보고서로 쓰고, 그 행사에 참가한 각 나라 사람 7명을 만나서 이름을 써 오도록 했다. 아이들은 행사장에서 각 나라 부스를 돌아다니며 마치 여권에 도장 찍듯이 각 나라의 국기가 새겨진 도장을 책자에 찍기도 하고 음식도 먹고, 여러 가지 볼거리도 접했다. 다음 가장 큰 고민인 숙제를 하기 위해 아이들은 ‘헬로우’, ‘익스큐즈미’, ‘플리즈’, ‘왓츠 유어 네임’, ‘땡큐’ 등의 영어를 직접 외국인에게 써서 물어보았다. 능숙한 한국어로 되돌아오는 대답도 있었고, 통역 자원봉사자들을 통해서 이름을 알아 온 경우도 있었다. 몽골 부스에 가서는 그 분들의 친절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학교에서 배운 몽골노래도 부르고 왔다고 했다. 그 몽골 사람들은 힘들게 살고 있는 한국 땅에서, 한국아이들을 통해서 자기 나라 노래를 듣는 순간 그 느낌이 어땠을까? 또한 각 부스에 있던 이주노동자들은 행사에 와 준 것만 해도 고마운데 ‘자신의 이름’을 물어보고 또박또박 공책에 적어가는 아이들에게서 어떤 걸 느꼈을까? 아이들은 훌륭한 민간외교를 국내에서 하고 있었다. 아이들의 ‘거부감’ 먼저 없애줘야 다문화이해교육의 측면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 이주노동자 자녀여서 본국으로 돌아갈 아이든지, 결혼이민자가정의 자녀로서 다른 외모를 가진 한국인으로 한국에서 살아갈 아이든지, 반드시 이중문화의 당위성을 가르쳐야 하고 두 문화 모두를 존중하는 태도를 갖게 해야 바르게 자랄 수 있고 나라의 앞날도 밝다. 서로 다르다는 것을 인식하면서, 스스로를 존중하는 마음을 갖게 하는 것, 특히 그 부모가 자기 문화를 부끄러워하지 않고 떳떳하게 가르치고, 아이들은 이를 자랑스럽게 배울 수 있도록 학교가 앞서서 이끌어 주는 것이 절실히 필요하다. 둘째, 다문화 가정 아이들을 대하는 일반 어린이들의 마음가짐이다. 이주노동자의 자녀든, 결혼이민가정의 자녀든, 혹은 외국인이든 우리는 모두 한 사회에서 각기 다른 역할을 하는 동등한 사람이라는 인식을 분명하게 해야 하며 다른 문화에 대해 거부감을 갖지 않게 해야 한다. 다른 문화에 대한 거부감은 자기 문화 속에 고립된다는 것을 뜻한다. 세계화는 자신과 남에 대한 긍정적인 인식이 전제되어야 하는데 이에 대해 우리 사회가 아무 준비 없이 있다가는 반드시 큰 상처를 입을 게 훤한데 소 잃고 외양간 고칠 이유가 없으며 이에 대한 대책을 더 늦출 수는 없다. 특히 우리에게 다문화이해교육이 필요한 이유는 오랫동안의 일제지배와 군사지배의 틀 안에서 다른 것을 용납하지 않는 문화가 내재되어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식당에 가면 다 설렁탕으로 통일한다. 누가 다른 걸 시키려고 하면 ‘아, 다 같이 통일 하지…’하면서 그 사람에게 눈치를 준다. 이처럼 틀리거나 다른 걸 우리는 잘 참아내지 못한다. 다 같이 이민을 와도 일본인들은 현지사회에 섞여 들어가서 살지만 한국인은 현지사회와 동화하지 않고 따로 모여 산다. 한국인이 하나둘씩 모이게 되면 그 거리, 마을 전체는 한글로 도배를 한 간판들만 있게 된다. 칠성복덕방, 수정미용실, 은혜목욕탕, 영원비디오. 무궁화노래방…. 스페인어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 그 거리에 들어와 본 아르헨티나 사람들은 자기네 땅에서 알 수 없는 글자로만 된 광고 간판들이 몇 블록이나 되면 느낌이 어떨까? 현지인이 어떻게 생각할까 하는 고민은 전혀 하지 않는 한국인들이기에 더욱 교육이 필요하다. 그래서 한 개인의 존재가 독립된 존재가 아니고, 온 세상이 하나라는 인식, 서로가 서로를 돕고 의지하지 않으면 개인의 존재 자체도 위태롭게 된다는 걸 알아야 한다. 사회전체의 다문화에 대한 열린 인식이 필요하지만, 급한 것은 다문화가정 아이들을 맡고 있는 담임교사와 전 교직원의 열린 인식과, 학부모의 바른 이해, 아울러 교육의 테두리를 제시해주는 관계부서의 실질적 지침이 있어야겠다. 이로써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우리 아이들의 앞날에 희망이 가득하길 기대해본다. 이주노동자자녀든, 결혼이민자가정의 자녀이든 반드시 이중문화의 당위성을 가르쳐야하고 두 문화 모두를 존중하는 태도를 갖게 해야 한다. 서로 다르다는 것을 인식하면서 스스로를 존중하는 마음을 갖게 하는 것, 특히 그 부모가 자기 문화를 부끄러워하지 않고 떳떳하게 가르치고, 아이들은 이를 자랑스럽게 배울 수 있도록 학교가 앞서서 이끌어 주는 것이 절실히 필요하다.
거짓말을 많이 하는 우리 사회 지난해 법무부장관이 어느 조찬 모임의 강연에서 우리나라의 부끄러운 범죄 실태에 관해 이야기했다고 한다. 이를 인용해 유명 일간지의 칼럼니스트가 전한 내용이 아직도 큰 충격으로 남아 있다. 이 칼럼이 전한 바는 다음과 같다. 우리나라의 대표 범죄는 위증, 무고, 사기 세 가지이며, 인구 비를 고려하지 않은 단순비교로도 2003년 우리나라의 위증은 일본의 16배, 무고는 39배, 사기는 26배나 많았다는 것이다. 더욱 놀라운 것은 일본의 인구가 우리의 3배 가까이 되는 것을 감안하면 우리의 위증, 무고, 사기 건수는 엄청나다는 것이다. 이런 위증, 무고, 사기의 공통분모는 ‘거짓말’이며, 한마디로 우리는 거짓말을 너무 많이 하는 국민이라는 것이다. 강연에서 그 법무부장관은 “검찰 업무의 70%가 이 세 가지 범죄를 처리하는 데 써야 한다”고 했다. 또 “피의자들이 거짓말을 너무 많이 해서 사기 사범의 경우 기소율이 19.5%이고, 위증이 29%, 무고가 43.1%”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는 “국제적으로도 우리나라 대표 범죄가 ‘사기’라는 인식이 있다”며 “최근 진행된 큰 의혹사건에서도 보듯이 ‘거짓말’이 너무 횡행하는 것을 개탄했다”고 전했다. 어찌해서 우리는 거짓말쟁이가 이렇게 들끓는 사회 속에서 살게 되었을까. 그 원인과 책임으로는 지난 반세기 간의 혼란했던 사회, 가정교육의 부실, 학교교육의 미흡 등을 꼽지 않을 수 없다. 해방 이후 우리 사회는 불안정하고 혼란스러웠다. 빈곤·정치적 혼란·이념적 갈등·급격한 산업화 등에 따른 사회적 대변혁을 거치면서 무엇보다 우선 먹고 살아야 하고,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살아남아야 할 만큼 현실은 각박했다. 이런 상황에서 그동안 학교교육도 일반사회의 신뢰를 받지 못했고, 중요한 도덕교육이 불가능했을 뿐만 아니라 학력만능주의에 밀려서 소홀히 다루어졌던 것도 사실이다. 마지막으로 핵가족화와 물질만능주의 풍조에 밀려 가장 중요한 가정교육도 인성교육에 제대로 힘을 발휘하지 못했음도 인정해야 할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해방 이후의 혼란기에 청소년 시절을 보내야 했던 우리 세대보다, 경제가 호전된 이후에 자란 젊은 세대가 더 착하고 순수하다고 생각하게 된다. 안정된 사회에서 자란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대체로 더 순수하고 정직하다. 거짓말을 한다는 것과 남을 속이는 것이 모든 인간사회에서 도덕적으로 얼마나 부끄러운 일이며, 비난받아야 하는가는 재론할 필요조차 없다. 살만한 사회 또는 평화로운 사회란, 그 구성원이 정직하고 남을 거짓말로 속이려고 하지 않는 사회를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왜 우리 사회가 이 지경에 이르렀는지 모든 국민, 특히 우리 교육자들은 깊이 반성해야 된다고 생각한다. 앞에서 열거한 이유들 중에서도 그간 교육에 종사했던 우리들의 책임이 어느 다른 원인보다 더 무겁기 때문이다. 사회구성원 간 신뢰도가 경제 발전 좌우 1992년에 역사의 종말과 최후의 인간이라는 책으로 화제를 불러일으켰던 프란시스 후쿠야마(Francis Fukuyama) 교수는 1995년에 신뢰: 사회적 미덕과 번영의 창조(Trust: The Social Virtues and the Creation of Prosperity)라는 책에서 경제적인 번영을 이루는 데 ‘사회적 미덕’으로서 ‘신뢰’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여러 나라와 민족의 예를 들어가면서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즉, 그 사회의 구성원 사이에 신뢰가 깊을수록 사회 조직의 형성이 쉽고 활발해지며, 보다 큰 자본의 형성도 원활해져 결국 경제적으로 번영을 누리게 된다는 것이다. 서로가 믿지 못하는 사회는 자유로운 사회적·경제적 조직과 협력이 어렵게 되고, 많은 사람들이 참여해야 하는 큰 자본의 형성도 어려우며, 또한 그 규모도 자연히 작아지기 마련이란 것이다. 프란시스 후쿠야마는 사회구성원 사이의 신뢰 수준이 경제적 번영 달성에서 차등을 가져온다고 주장한다. 그는 이와 같은 사화구성원 간의 신뢰를 ‘사회적 자본(social capital)’과 ‘자동적인 사교성(spontaneous sociability)’이라는 국민의 건전한 자질(장점)로 보면서, 독일·미국·일본 등이 세계의 주도적인 경제대국이 된 것도 이와 같은 사회적 자본이 큰 이유라고 설명한다. 사회구성원 사이에 신뢰가 많으면 경제적 거래의 효율성이 높아지는 것은 물론이다. 결과적으로 이는 그 사회의 경제활동의 사회적 비용을 경감시켜 그 사회의 경제적 번영에 공헌하게 된다고 한다. 일본 도요타 자동차공장에서 시작되어 세계의 주목을 받았던 ‘군살 없는 생산방식(lean manu facturing)’을 모방한 미국의 자동차공장은 별로 성과를 내지 못했는데 그는 그 이유가 일본 노동자들의 상호 간 신뢰관계, 즉 쉽게 따를 수 없는 문화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이와 같이 사회구성원 사이의 신뢰관계를 사회·경제적 발전의 중요 요인으로 보는 그의 견해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시사한다. 정직한 사회 만들기위해 노력하자 우리가 채택한 시장경제체제는 자유로운 계약으로 서로의 권리와 의무를 준수해가며, 사유재산권을 지켜주는 제도이다. 그런데 정직하지 못하고 남을 속이는 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는 풍조가 만연한 사회에서 사회구성원 간에 신뢰가 두터워지기를 바랄 수 없음은 물론이다. 특히 근래에 채권자와 채무자에 대치(代置)해서 ‘있는 자’와 ‘없는 자’로 가르는 풍조는 도덕 불감증을 조장시킬 뿐만 아니라 거래상대를 불신케 하는 결과를 낳게 한다. 시민 상호 간의 신뢰가 두터운 사회에서는 계약내용이 잘 준수되며 거짓말로 상대를 기만하는 것을 무엇보다 부끄러워하고 미워하는 문화가 정착하게 마련이다. 우리들의 경제활동이란 사회생활의 중요 부분을 나타내며, 그 사회를 형성하는 다양한 기준·규칙·도덕적 의무 그리고 이들 이외의 관습 등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고 후쿠야마 교수는 설명했다. 따라서 경제생활의 연구에서 얻을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교훈은 어떤 국민의 복지 및 다른 국민과의 경쟁력(결국 국제경쟁력)은 그 사회에 널리 보급되어 있는 문화적 특징, 즉 그 사회의 고유한 ‘신뢰의 수준’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정직하고 거짓말을 하지 않는 문화, 환언하면 서로가 서로를 신뢰하는 문화가 그 민족이나 국가의 ‘달성 가능한 번영의 수준’을 결정한다고 말할 수 있다. 얼마 전 만났던 법조계의 한 사람은 지루한 소송절차를 거쳐 승소하고도, 상대방의 간교한 술책으로 인해 자기의 채권을 실현 못하고 눈물을 머금고 돌아서는 사람이 부지기수라며, 오늘날 우리 사회의 실정을 개탄하기도 했다. 이와 같이 거짓말로 남을 속이고도 태연한 사람이 많은 우리 사회를, 경제적·사회적·문화적으로 한 단계 더 높은 사회로 도약·발전시키려면 정직하고 서로를 신뢰할 수 있는 사회로 바꾸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우선 우리 교육계부터 명심해야 할 것이다. 즉, 우리의 부끄러운 거짓말 문화는 모두가 갈망하는 경제성장의 발목을 잡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를 바로잡기 위해서는 사회와 가정은 물론이거니와 특히 우리 교육자의 책임이 더 크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Q1. 시간 외 근무수당 정액분은 월간 출근(또는 출장) 근무일수가 15일 이상인 자에게 지급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현재 저는 1일 1시간씩 주어지는 육아시간을 활용해 아이를 돌보고 있는데 이 경우에도 시간 외 근무수당 정액분을 지급받을 수 있는지 궁금합니다. A1. 여교원 육아시간 활용의 경우 「국가공무원복무규정」 제20조(특별휴가) 제4항의 규정에 따라 생후 1년 미만의 육아를 가진 여자공무원은 1일 1시간의 육아시간(특별휴가)을 얻을 수 있도록 돼 있습니다. 또 「공무원수당 등에 관한규정」 제15조와 동 지침의 “일반대상자의 시간 외 근무수당 정액분 지급”의 규정에 의하면 월간 출근 근무일수가 15일 이상인 자에 대하여는 별도의 초과근무 명령 없이 월 15시간분의 시간 외 근무수당 정액분을 지급하도록 돼 있습니다. 따라서 여자공무원이 육아를 위하여 특별휴가(1일 1시간)를 얻었다 할지라도 정규 근무시간 전후에 시간 외근무 여지가 있는 점과 특별휴가의 취지를 감안한다면, 육아를 위한 특별휴가를 활용한다 하더라도 시간 외 근무수당 정액분 지급을 위한 근무일수로 인정하는 것이 타당합니다. Q1. 시간 외 근무수당 정액분 지급과 관련해 방학 중 자격연수에 참여하게 된다면 수당지급은 어떻게 되나요? A1. 우선 방학 중 시간 외 근무수당 정액분 지급과 관련해서는 방학의 경우 월간 출근(또는 출장) 근무일수에서 제외되는 것이 원칙입니다. 하지만 학교장의 근무명령에 의해 특별히 출근하여 「국가공무원복무규정」에서 정한 근무시간 이상 근무하는 경우에는 정규 근무일로 간주, 월간 출근(또는 출장) 근무일수에 포함하여 시간 외 근무수당 정액분을 지급받으실 수 있습니다. 따라서 방학 중이라도 학교장의 근무명령에 의해 자격연수에 참여(출장처리)하는 경우, 이는 정규 근무일로 간주해 시간 외 근무수당 정액분을 산정함이 타당합니다. 다만 방학 중 자율(자비)연수의 경우에는 시간 외 근무수당 정액분 지급 출근일수에서 제외되며, 학교장의 허가를 받았다 할지라도 본인의 희망에 의한 (계절제)대학원을 수강하는 경우도 특정한 공무수행을 위한 출장으로 보기 어렵기 때문에 시간 외 근무수당 정액분을 받으실 수 없으니 유념하시기 바랍니다.
“마르크스가 공산당선언을 한 1848년, 22살인 아일랜드의 가난한 농부의 아들은 천신만고 끝에 애인과 함께 미국행 배를 탔다. 여비가 없어 남의 돈을 사취(詐取)해 비용을 마련한 것이 부끄러웠지만 자신이 살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당시 흉년으로 인해 굶어 죽는 사람이 속출하는 등 아일랜드에서는 더 이상 희망이 없다고 생각한 그는 차라리 신대륙에 가기로 작정하고 2개월이나 걸리는 미국행 배에 몸을 실었다. 하지만 그가 도착한 보스턴은 이미 영국인들이 지배하고 있었다. 그곳에서도 아일랜드인은 흑인보다 더 굴종적인 삶을 살고 있었다. 당시 아일랜드는 영국의 식민지였고 미국에서도 아일랜드인의 처지는 바뀌지 않은 것이다. 22살이던 농부의 아들은 술집을 시작으로 돈을 모으기 시작했다. 제대로 먹지도 못해서인지 그 청년은 미국에 온 지 10년 만에 그만 결핵으로 죽고 말았다.” 이 정도의 이야기만으로는 이 가문의 앞날도 그리 밝지 않을 것으로 지레짐작할 수 있다. 구한말 가난으로 하와이로 이민을 떠난 우리 선조들의 처지도 이와 별반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선조가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무작정 미국행 배에 몸을 실은 지 110년 만에 미국 역사상 가장 훌륭한 대통령을 배출해낸 가문이 된 것이다. 다름 아닌 미국 역사상 가장 존경받는 대통령으로 회자되는 케네디 가문이다. 이웃의 신망은 무형의 자산 케네디 가문이 전 세계인들의 가슴에 깊은 감동을 주는 것은 비단 미국 대통령을 탄생시켰다는 그 사실 자체에 있지 않다. 케네디 가문은 모든 가난한 사람들에게 누구나 열심히 노력하면 자녀를 훌륭하게 키울 수 있고 부자가 돼 가문을 일으킬 수 있다는 확신을 준다는 데 있다. 희망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것이다. 희망은 절망에 빠져있는 사람들을 다시 일어나 살아가게 하고, 열정을 다해 꿈을 이루게 하는 원동력으로 작용한다. 요즘도 케네디 가문은 미국 이민자들이 꿈꾸는 전 세계 사람들에게 ‘아메리칸 드림’의 상징적인 존재이다. 먼저 가문의 내력을 살펴보면, 케네디 대통령 가문은 아일랜드의 가난한 농부의 삼 형제 중 막내아들 패트릭 케네디에서 출발한다. 케네디 대통령의 증조부인 패트릭은 22살 때 당시 흉년으로 인해 아일랜드를 휩쓸었던 기근으로 앉아서 굶어 죽느니 차라리 신대륙에 가기로 작정하고 미국행을 결정했다. 그 당시 미국으로 이민 간 사람들 대부분이 그랬듯이 패트릭 케네디 역시 가난을 벗어나기 위한 몸부림이었다. 당시에는 우리나라도 일명 ‘보릿고개’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봄에는 한 끼 식사를 해결하는 것조차 힘들었다. 더욱이 흉년이 들면 더 심해 굶어죽는 사람들이 속출했다. 그것은 아일랜드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때가 1848년으로 마르크스가 ‘공산당 선언’을 내세웠던 바로 그 역사적인 해였다. 산업혁명의 여파로 가난한 노동자들이 농촌에서 도시로 쏟아져 나오던 시절이었다. 패트릭은 영국 지배하에 있던 아일랜드의 가난한 농촌에서는 더 이상 미래를 기약할 수 없어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며 2개월이나 걸리는 미국행 배에 몸을 실었다. 그것도 돈을 사취(詐取)해 애인과 함께 조국을 떠났다. 요즘 우리말로 하자면 야반도주한 셈이다. 미국 보스턴에 정착한 케네디 대통령의 증조부인 패트릭은 위스키 통을 만들어 팔면서 점차 재산을 늘려 갔다. 그는 외아들 패트릭 조셉 케네디(P. J. 케네디)과 세 명의 딸을 두었지만 가난을 벗어나지 못한 채 그만 이민 온 지 10년 만인 32살의 나이로 죽고 말았다. 조셉의 어머니는 남편이 죽자 문방구점을 차려 생계를 꾸려갔다. 아들은 초등학교를 중퇴하고 막노동판에 뛰어들었다. 졸지에 소년가장이 된 어린 조셉은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돌아가신 아버지를 생각하며 억척스럽게 돈을 벌었다. 조셉은 술장사를 하면서도 이민 온 아일랜드인들의 일이라면 발벗고 나섰다. 어려운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면서 차츰 이웃사람들에게 신망을 얻어나갔다. 술장사를 하면서도 선행을 베풀고 어려운 이웃사람들을 앞장서 도와주었던 것이다. 그렇게 하자 아일랜드계 이민사회에서 그는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존재가 되었다. 이민사회에서 신망을 얻은 조셉은 주의회의 의원에 당선되면서 정치인으로 변신했다. 주의회 의원은 우리나라로 보면 경기도 도의원 정도에 해당한다. 1등을 위한 경쟁을 즐겨라 그의 정치인 변신은 케네디 가문이 처음으로 정치가의 가문이 됐음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그는 훗날 사돈지간으로 하원의원과 보스턴시장을 역임한 존 프란시스 피츠제랄드 가문과 함께 아일랜드 이민자들의 성공모델이 되었다. 케네디 가문과 피츠제럴드 가문은 처음에는 서로 정치적으로 대립했다. 더욱이 미래에 자신의 아들 딸이 결혼을 하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러나 마치 셰익스피어의 로미오와 줄리엣처럼 정적의 가문끼리 결혼을 했다. 특히 외할아버지는 외손자 케네디에게 존 피츠제럴드라는 자신의 이름을 물려주면서 정치가로 큰 인물이 되기를 기원했다. 그래서 케네디 대통령의 이름이 존 피츠제럴드 케네디(존 F. 케네디)가 된 것이다. 하지만 이들 가문은 영국에서 먼저 미국에 이민을 와 부와 명성을 쌓은 보스턴의 영국계 명문가들로부터 늘 배척을 당했다. 다 같이 부와 명성, 권력을 갖고 있었지만 아일랜드계 가문은 영국계 가문들로부터 무시를 당했던 것이다. 수백 년 동안 아일랜드를 지배한 영국인들은 아일랜드 사람들은 열등민족이라는 편견을 갖고 있었다. 이러한 역사로 인해 보스턴에 살고 있는 영국계와 아일랜드계 이민자들은 서로 대립할 수밖에 없었다. 이는 일제시대 우리나라 사람들을 열등한 민족이라며 탄압한 일본을 상상하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일본인은 오히려 우리나라에서 문화를 전수받은 민족이지만 식민지로 우리나라를 지배하면서 자신들이 더 우수한 민족이라고 강변하면서 우리나라 사람들을 무시했던 것이다. 그래서 케네디 가문이 채택한 자녀교육의 첫 번째 원칙이 다름 아닌 ‘일등주의’이다. 즉, “이등은 없다. 오직 일등만이 있다”는 원칙이다. 케네디의 할아버지는 아일랜드계 후손이 미국 사회에서 당당하게 대접받기 위해서는 자신들을 무시하는 영국인들을 반드시 이겨야 한다고 생각했다. 학교에서든 사회에서든 항상 1등이 되어야 한다고 자녀들에게 강조했다. 1등을 해야 아일랜드계 사람들을 열등민족 취급하는 영국계 사람들의 콧대를 꺾을 수 있기 때문이다. “오직 1등이 돼라”는 원칙은 민족적 설움을 이겨내기 위한 역사적 맥락에서 나온 것이다. 케네디 할아버지는 아일랜드인이 미국 사회의 명문가로 발돋움하기 위해서는 먼저 늘 영국인들에게 무시당하는 아일랜드계의 울타리를 벗어나는 것이 시급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아들(케네디 대통령의 아버지)만큼은 명문대에 들어가 당당하게 영국계 명문가 자녀들을 친구로 사귀며 공부하게 하고 싶었다. 아일랜드 사람들끼리만 공부해서는 큰 인물을 만들 수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래서 아들을 하버드대학에 입학시키겠다는 목표를 세웠다. 다행히 아들은 아버지의 바람대로 하버드에 들어갔다. 아들은 모든 면에서 경쟁하기를 즐겼고 또 경쟁을 통해 이겨야만 직성이 풀렸다. 아버지의 뜻을 완벽하게 소화해내는 아들이었던 셈이다. 이렇게 되면 아버지도 아들 뒷바라지에 신이 날 수밖에 없다. 서로 잘 따라주어야 아버지도 신이 나서 더욱 뒷바라지에 열성을 올리는 것이다. 이때부터 하버드대학은 케네디 가문과 특별한 인연을 맺게 되었고 케네디 아버지-케네디 4형제 등 5부자가 하버드대의 동문이 되었다. 독특한 밥상머리 가정교육 둘째, 좋은 인맥만들기를 꼽을 수 있다. 이러한 일등주의 원칙은 결과적으로 자녀들에게 더없는 인맥네트워크를 만들어주는 계기가 되었다. 세상을 살아가는데 가끔 인연만큼 중요한 게 없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조셉이 은행장이 된 사연을 보면 명문대 인맥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다. 그는 아버지의 권유로 하버드대학에 다녔고 은행에 근무한 것도 아버지의 조언이 크게 작용했다. 이 역시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로 들어가야 한다는 아버지의 세상살이의 철학을 아들이 충실하게 따른 것이다. 어느 나라에서나 마찬가지지만 사업을 해서 돈을 벌려면 은행을 통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런데 당시 보스턴에서 대부분 은행들은 영국계가 장악하고 있었다. 아버지는 아들을 그 호랑이굴에 들여보냈다. 때마침 아들이 다니던 은행이 재정난으로 영국계 은행에 팔릴 위기에 처했다. 이때 그는 하버드대학 인맥을 활용해 돈을 끌어모아 은행을 위기에서 구했다. 이러한 공로로 그는 입사 3년 만에 은행장으로 추대되면서 아일랜드계로서는 최초의 은행장이 될 수 있었다. 은행장으로 성공한 조셉은 사업가로서 수완도 탁월했다. 그는 일찍 부동산에 눈을 돌려 엄청난 재산을 모았고 재테크의 귀재가 되었다. 그렇지만 남들이 살 때는 사지 않았고 남들이 사지 않을 때 매입하는 방법을 썼다. 그게 비결이었다. 예컨대 그는 플로리다가 강풍으로 쑥대밭이 되어 땅값이 폭락하면 그때 땅을 헐값으로 매입했다. 지금도 그렇지만 주식이나 부동산은 남들이 살 때는 이미 거품이 일기 시작한 이후다. 값은 오를 대로 올라 잘못하면 상투를 잡기 일쑤다. 하지만 아버지로부터 배운 일등주의가 몸에 밴 그는 자신만의 비법으로 주식과 부동산에 투자해 큰 돈을 벌었다. 또 영화와 경마 등 신흥산업에도 눈을 돌려 재벌이 되었다. 셋째, 아버지는 바깥에서 일어난 이야기를 식사시간에 반드시 자녀들에게 들려주었다. 이는 자녀들이 세상에 대한 안목을 넓힐 수 있는 시간이다. 케네디 아버지(조셉 패트릭 케네디)는 당대의 재벌 회장이었고 나중에 대통령이 된 루스벨트의 후원회장을 지낼 정도로 막대한 재력을 갖고 있었다. 한때 대통령 후보 물망에도 오를 정도로 정치적 영향력도 막강했다. 그렇지만 그는 바쁜 와중에도 식사 때에는 바깥에서 일어난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아이들에게 자연스럽게 들려주었다. 아이들은 부모들이 만난 사람이나 사업과 관련된 부모들의 이야기를 통해 세상에 대한 안목을 키울 수 있기 때문이다. 또 그는 출장 중에도 자녀와 전화통화를 하며 수시로 관심을 보이면서 좋은 관계를 유지하려고 애썼다. 넷째, 아버지뿐만 아니라 어머니도 철저하고 계획적으로 자녀교육에 나섰다. 그중에서 식사시간을 자녀교육의 장으로 최대한 활용했다. 오늘날에도 가족 간의 대화 위해서는 식사시간에 TV 안 보기가 필수적이다. 케네디의 어머니 로즈 여사는 식사시간을 엄수하지 않으면 밥을 주지 않았다. 이는 아이들에게 약속과 시간의 소중함을 알게 하기 위해서다. 또 식사시간에는 뉴욕타임즈의 기사를 읽고 토론할 수 있도록 이끌었는데, 이는 훗날 케네디가 닉슨과의 토론에서 압도하는 결정적인 무기가 되었다. 자녀들이 자녀들이 처음부터 일등을 할 수 없고 처음부터 토론을 잘할 수 없는 일이다. 이때 로즈 여사는 자녀들에게 “처음에는 서툴러도 열심히 반복 하다 보면 나중에는 최고가 될 수 있다”고 자녀들에게 자신감을 심어주었다. 끝으로, 케네디가의 자녀교육의 특징은 목표를 정하고 세대를 이어 단계적으로 접근했다는 점이다. 케네디 할아버지는 사업을 하면서 신망을 얻어 주의회에 진출해 정치 가문의 초석을 쌓았다. 케네디 아버지는 하버드대에 들어가 인적네트워크를 확대했고 재벌회장에다 대통령후보 물망에 오를 정도로 정치가로서의 야망도 컸다. 마침내 그의 아들인 존 F. 케네디는 국회의원에 이어 최연소 미국 대통령이 되었다. 아일랜드 농부가 미국에 이민 온 지 4대 110년 만의 일이었다. 대를 이어 이룩한 명문가의 꿈 세계적인 명문가들은 부모의 힘만으로, 또는 자녀의 힘만으로 명문가가 된 경우는 결코 없다. 부모와 자녀, 세대 간에 힘을 모으고 의기투합을 해야 명문가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명문가는 궁합이 잘 맞는 부모와 자녀, 세대 간의 합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결국 케네디 대통령을 배출한 것은 할아버지와 아버지로 이어지는 치밀한 노력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것은 우물 안 개구리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더 큰 세상으로 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어느 사회에서나 명문가가 된다는 것은 결코 한 세대가 해낼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또 한 세대에서 부자가 된다고 명문가로 대접해주지도 않는다. 케네디가는 이런 점을 잘 알고 있었다. 케네디가는 4대에 걸쳐 단계적으로 접근한 것이다. 명문가를 이룬다는 것은 한 세대와 다음 세대의 공동작업이지 결코 한 세대가 이룰 수 있는 게 아닌 것이다. 한 세대에서 모든 것을 이루려고 하면 조급증에 의해 스트레스를 받고, 자칫 모든 것을 이룰 수 없게 된다. 특히 여기서 중요한 것은 부모와 자녀 간에 목표를 공유하는 것이다. 아버지가 명문가를 만들기 위해, 자녀를 훌륭하게 키우기 위해 아무리 노력해도 자녀가 이를 따라주지 않으면 뜬구름과 같이 부질없는 것이다. 부모와 자녀가 함께 목표를 세우고 세대를 이어면서 노력할 때 더 나은 미래를 기약할 수 있다. 우리나라도 미국 이민이 100여 년이 지났는데, 아직도 미국 주류사회에 깊숙이 뿌리내리지 못하는 원인 중의 하나가 바로 한국계 이민 사회의 울타리를 벗어나려고 하지 않는 데 있을 것이다. 미국 사회에서 성공신화를 이루기 위해서는 적극적인 도전정신과 함께 세대에 걸친 치밀한 접근이 필요한 것이다. 자녀를 키우는 부모 입장에서 미국의 케네디가만큼 교훈을 주는 가문도 없다. 보잘것없는 농부출신의 가문에서 100여 년 만에 대통령을 만든 케네디가는 우리에게 무한한 잠재력을 일깨워준다. 가난을 딛고 4대, 110년에 걸쳐 완벽하게 세계 최고의 자녀교육 성공모델을 만들어낸 가문. 자녀를 둔 부모의 입장에서 케네디 가문의 역사를 들여다보면 가슴이 용솟음치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비록 지금은 가난해도 세대를 이어 노력하면 누구도 숭고하게 살 수 있다는 희망을 준다.
최근 한국 사회의 새로운 계층으로 떠오르고 있는 가족 형태가 다문화가정이다. 다문화가정이란 한 가족 내에 다양한 문화가 있다는 의미가 담겨있으며 한국인 남성과 결혼한 이주여성 가족, 한국인 여성과 결혼한 이주남성 가족, 이주민 가족(이주노동자, 유학생, 새터민)을 포괄하는 용어로 쓰이고 있다. 이러한 다문화가정의 형성은 국가 간 인적 교류의 확대, 외국인 근로자 유입, 국제결혼 증가 등으로 인해 날로 늘어나고 있는 현실이며, 나라별로 보면 중국과 베트남이 가장 많고 일본, 필리핀, 몽골, 우즈베키스탄, 태국 등 동남아지역이 많다. 다문화가정은 다양한 문화가 공존하므로 적절한 교육 환경을 제공하여 그들의 문화를 우리 문화와 접목시켜 문화의 다양성을 높이고 나아가 국제경쟁력의 원천으로 연결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다. 그들을 보는 사회의 시각은 차별과 편견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며 그들 자녀들은 언어, 생활습관, 외모의 차이로 인하여 학교생활 적응이 힘들고 공동체에서 화합하지 못하며 스스로 위축감에 젖어 있다. 이렇게 자란 아이들이 성인이 되었을 때 사회문제 요인 중 하나가 될 것은 기정사실이다. 이에 우리는 다문화가정으로 인한 사회문제가 발생하기 전에 다문화교육의 필요성이 절실함을 알아야 할 것이다. 단일민족으로 구성된 우리나라 사람들은 다문화교육에 대한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였고 다문화교육에 대한 이해나 교육자료 개발도 잘 이루어지지 않았다. 근래에는 다문화가정을 위한 교육자료 개발과 개선책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시민단체에서는 다문화 국제대안학교 설립을 추진 중에 있으며, 교육부에서는 다문화가정지원정책연구를, 시·도 교육청에서는 다문화교육 프로그램을 개발하여 집중 지도할 계획이며 지자체에서는 부모교육, 문화교육에 많은 예산을 지원하고 있다. 이러한 다양한 다문화교육 프로그램 적용으로 다문화가정 구성원이 정체성을 확립하여 바람직한 우리 사회인으로 거듭나기를 바란다 그러기 위해서는 교육을 직접 담당하는 교육자들의 이해와 노력이 절실히 필요하다. 아직은 학급 내, 학교 내 다문화가정의 수가 적고 다문화가정이 경제력과 사회적 지위가 낮아 상대적으로 교육에 대한 관심이 적다. 그들에게 관심과 사랑을 줄 수 있는 1차 지원자는 사회도 아니고, 단체도 아닌 지도교사이다. 다문화가정 대부분은 언어 소통, 문화적 편견, 교육 문제, 경제적 곤란 등 크고 작은 고통을 겪고 있다. 이에 대하여 교육을 책임지고 있는 교육자는 이들의 어려움을 덜어주고, 우리 사회의 소중한 인적자원으로 대우 받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고민을 해야 할 것이다. 다문화가정 자녀들이 정규 교육으로부터 소외되지 않고 학교에 잘 적응할 수 있도록 교육의 가장 기본적인 역할을 해주는 것이 교육자인 우리의 책임이다. 이에 교육자는 정책 개발보다도 인간적인 사랑의 관심으로 시작하여 다문화 학생교육, 부모교육, 사회교육을 실천해야 하며 그 주체가 되어야 한다. 한국계 미국 풋볼스타 하인스 워드가 세계적인 스타가 된 것이 어머니 교육의 힘이었다면 지금 다문화가정 속에서 자라는 아이들 중 한국의 인재로 거듭날 수 있는 아이들이 또한 얼마나 많을 것인가. 다문화교육을 통해서 세계 속의 한국 인재를 육성 하는 것, 이것이 교육을 담당하고 있는 교육자가 먼저 해야 할 일이다. 또한 이 속에서 느끼는 자긍심도 교육자만이 가질 수 있는 매력이다. 이제는 우리 생각의 전환이 필요한 때이다.국제결혼을 통해 이 나라에 정착한 결혼이민자나 산업현장에서 묵묵히 일하고 있는 외국인근로자는 우리 사회의 한 일원이고 우리 이웃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또한 단일민족, 백의민족이라는 자긍심과 더불어 사회 현실과 함께 이루어진 다문화가정을 우리의 새로운 문화로 끌어안고 지도해야 한다.
실생활에서 엽전이 사라진 지 오래 되었지만, 엽전이라는 말은 지금도 드물지 않게 쓰인다. “엽전들 같으니라고!” “엽전들은 어쩔 수 없다니까.” “이런 엽전들!” 등등의 말을 심심찮게 들을 수 있는 것이다. 도대체 누굴 두고 엽전 같다고 하는가. 이 말에 익숙한 기성세대들은 알아차리겠지만, ‘엽전’이라는 말은 한국 사람을 비하할 때 쓰이는 말이다. 엽전이 ‘못난 한국인’을 가리키는 말이 된 것이다. 엽전이라는 말이 이런 뜻으로 쓰이는 걸 막상 엽전이 안다면 얼마나 억울하고 서운해 할 것인가. 엽전이란 말의 뜻이 이렇게 고약하게 쓰이게 된 연유를 《우리말 유래 사전》에서 찾아보았더니, 그 사연이 이러하다. 개화기 무렵, 사용하기에 좋은 화폐인 종이돈[지전, 紙錢]이 새로 나왔는데도, 우리 한국 사람들이 종이돈에 익숙해지지 않고, 옛날에 쓰던 엽전을 그냥 쓰기를 고집했다고 하는 데서 생긴 말이란다. 즉 이렇듯 낡고 낡은 인습에서 탈피하지 않으려고 했던 한국 사람을 낮추어서 빗대어 쓰던 말이라고 한다. 그러니까 종이돈이 처음 생겨나던 개화기라는 시대적 배경 속에서, ‘엽전 같은’이라는 말이 생겨난 셈이다. 말이라는 것이 ‘발 달린 짐승’과 같아서 이런저런 맥락에 따라 그 뜻이 움직여 다니게 된다. 원래의 뜻이 묘하게 변하기도 하고, 다른 뜻으로 전이되기도 한다. ‘엽전 같다’는 말도 일제 식민지 시대를 만나 그런 기구한 운명을 만나게 된다. 즉 이 말은 일제 식민지 시대에 일본인과 일부 친일 부류들이 우리의 민족성의 열등함을 강조하기 위해서 왜곡하여 사용된 면이 강하다는 것이다. 일제는 이런 말의 용법을 의도적으로 널리 퍼뜨려서 일제의 지배가 정당한 것처럼 꾸미기 위해 애를 썼던 것 같다. 그런 연유를 아는지 모르는지 해방 이후에도 마치 굳어진 관용어처럼 사람들 입에 오르내렸다. 그런데 이 말은 아무래도 ‘제 얼굴에 침 뱉기’의 꼴을 면치 못한다. ‘엽전 같다’라는 말에는 이미 한국 사람을 깔보는 뜻이 들어 있는 말인데, 한국 사람이 한국 사람더러 ‘엽전 같다’고 말해 버리면, 그것이야말로 제 동포를 욕한 것이고 제 형제를 헐뜯는 격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는 저는 한국사람 아닌 별나라 사람이라도 된다는 말인가. 남들이 우리더러 엽전 같다고 한들 또는 지전 같다고 한들 그 까짓것 무시하면 그만이지만, 제 욕인 줄 모르고 우리가 우리더러 스스로 ‘엽전 같다’고 하면, 그렇게 말하는 우리 자신이 한량없이 희화화(戱畵化)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왜 모른단 말인가. 설사 ‘엽전’이라는 말이 민족의 자존(自尊)에 상처를 주고 있음을 모르고 쓴다 하더라도, 이 말을 즐겨 쓰고 싶은 사람의 우월심리를 건강하다고 볼 수는 없다. 머리에 지식푼이나 들었다고, 주머니에 돈냥이나 있다고, 명품깨나 걸치고 다닌다고 해서, 저만 못한 사람을 향하여, 한 자락 깔고 한심하다는 듯이 ‘쯧쯧 엽전들’ 하고 혀를 차는 족속들이 지금도 없지 않아 있기 때문이다. 알량하고 얄팍한 우월감을 주체하지 못하여 꼭 그렇게 ‘나 잘났다’는 티를 내어야 성이 차는 속물성(俗物性)을 여실하게 보여 주는 경우라 아니 할 수 없다. 자기 딴에는 그럴싸한 쾌감을 즐기는지 모르겠지만, 그야말로 속물의 전형이다. 속물적 속셈이 훤히 다 들여다보이는 것이다. 동화에 나오는 ‘벌거벗은 임금님’이 달리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이런 사람이 바로 벌거벗은 임금님이다. 진정으로 자기를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은 그러지 않는다. 자존심의 두께가 얇으면 얇을수록, 겉으로 드러나는, 남에게 보여주고 싶은 자존심의 강도는 터무니없이 강한 것이 자존감 부족한 사람들의 행태이다. 자기 못난 꼴을 도무지 모르고 있다는 데에 ‘벌거벗은 임금님의 성격적 비극’이 있는 것이다. 어쨌든 한번 잘못 배운 말의 잠재적 부작용은 이렇듯 인격에 침투되어 오래 간다. 그래서 말이란 무서운 것이다. 그런가하면 스스로 엽전임을 자처하는 사람도 있다. ‘그래, 나 원래 엽전이야! 나 원래 그런 놈이라구.’ 이렇게 말하거나, ‘나 같은 놈, 뭐 누가 알아나 줍니까.’ 이런 자세를 아예 깔고 사는 사람들이다. 말 꺼낼 때마다 ‘한국사람 뭐 제대로 하는 게 없어요.’ 이렇게 말한다. 말끝마다 ‘뻔할 뻔자이지요.’, ‘별 수 있겠습니까. 뭐.’라는 말을 아예 달고 다니는 사람들이 있다. 이런 사람들에게선 될 일도 안 될 것이라는 게 너무도 뻔히 보인다. 사실 이런 사람들이 어쩌다 강자에게 빌붙어 조금 우쭐해지면 남에게 거침없이 쓰고 싶은 말이 있다. 그것은 바로 “엽전들 같으니라고!” “엽전들은 어쩔 수 없다니까.” 하는 말일지도 모른다. 남을 엽전이라고 지적해야 속이 시원한 사람들이 있는 한, 그리고 스스로 엽전이 되기를 자처하는 사람들이 있는 한, ‘엽전 같다’라는 말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얼마 전 한 인터넷 자료에서 흥미로운 자료를 보았다. “조금 억지스러운 부분도 있지만 정말 대단합니다.” 이렇게 시작된 그 자료에는 내가 생각해도 우리 스스로가 대견스러워지는 내용들이 있었다. 소개하면 이렇다. 우리나라처럼 국민의 90%가 국기를 가정에 보관하고 있는 나라가 지구상에 그리 많지 않다는 것이다. 또 우리나라가 문맹률 1% 아래인 나라로서 세계 유일의 국가라는 것이다. 그뿐인가 문자가 없는 나라들에게 UN이 문자를 제공하는데, 바로 그 제공하는 문자에 한글이 들어 있다는 것이다. 또 지하철에 노약자 보호석이 있는 다섯 나라 중의 하나라는 것이다. 평상시 좀 수치스럽게 생각했었는데 각도를 달리하여 보니까 그런대로 용납할 만한 것도 있었다. 이를테면 교통사고율이 1위지만 차량대수를 비례해서 본다면 교통사고율이 24위인 나라이라는 것이다. 또 극심한 외환위기에 빠졌으나 가장 단기간에 IMF 통제 체제를 극복한 나라도 우리나라라는 것이다. 이런 것들은 여태 알고는 있었으나 그냥 열등감으로만 받아들인 것이었는데 자랑의 시각으로 볼 생각을 못한 것이다. 좀 코믹한 것들도 있었다. 미국도 무시하지 못하는 일본을 무시하는, 가장 배짱 있는 나라가 우리나라이고, 중국 옆에 있는 나라 중 한 번도 지도에서 중국이라고 표기된 적이 없었던 나라가 우리나라라는 것이다. 사소한 것에서도 자부심을 찾으려는 노력이 있었다. 예컨대 양치질을 세 번 하라고 가르치는 나라가 우리나라라는 것이다. 다른 나라에서는 오전에 한번, 잠자기 전에 한번, 이렇게 두 번 하라고 가르친단다. 남녀평등을 위해 여성가족부 장관이 있는 나라도 우리나라이고, 분단국가들 가운데 통일 지지율이 50%를 넘는 유일한 국가가 바로 우리나라라는 것이다. 필자는 이 내용을 읽으면서 조금은 묘한 기분에 빠져들었다. 아! 나는 왜 이처럼 긍정적으로 생각해 보지 못했을까. 막연히 우리나라가 그런 수준임은 헤아리고는 있었지만, 그래서 우리나라가 그저 그럴 뿐, 대견하고 대단하다는 마인드로 접근해 보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고 보면 필자도 일종의 엽전 의식을 무의식의 영역에서 지니고 있었다는 것일까. 말의 환경이 결국 의식을 결정하는 것이다. 우리들 마음의 영역에서, 그것이 의식이든 무의식의 영역이든, ‘엽전’을 몰아내는 일이 중요하다
일과 사랑, 그 어느 쪽도 포기할 순 없다고 여자들은 말합니다. 제발 “행복이냐, 불행이냐” 하는 이분법으로, 19세기 식으로 진부하게 ‘일과 사랑’을 나누진 말아주세요, 라고 당당하게 말입니다. 하지만 여전히 이런 이야기들은 여자들만의 희망이자, 로망인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커리어 우먼의 새 취향을 대변한다는 영미권의 소설들. 소위 치크리트(chick-lit: 젊은 여성을 의미하는 속어 chick와 문학 literature를 결합한 신생 합성명사)라고 하는, 요즘 대유행인 소설들에서도, 성공한 그녀들의 고민은 한결같습니다. 여전히 일과 사랑(일과 결혼)을 양손에 잡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호소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치크리트’의 교과서 격인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문학동네)만 봐도 그렇습니다. 최고 패션잡지 편집장 미란다의 비서가 된 앤드리아. 앤드리아는 미란다의 뒤치다꺼리에 신경을 쓰느라 남자친구 네이트와 갈등을 빚습니다. 전형적인 ‘일’과 ‘사랑’의 갈등입니다. 그리고 그 갈등은 앤드리아가 “난 이런 삶을 원치 않았어요.”라고 말하면서 미란다를 떠나는 것으로 매듭 지워집니다. 물론 영화에서는 그녀가 원하던 기자로서의 ‘일’과 남자친구와의 ‘사랑’도 다시 찾은 것으로 끝이 납니다. 하지만 엔딩 크레디트가 내려간 한참 후에도 머릿속에는 미란다의 “아니, 넌 원했어. 모두 우리처럼 살기 원해.”라는 한 마디가 못 박혀 계속 지워지지가 않습니다. 그녀의 갈등은 정말 끝이 난 것일까, 하고 말입니다. 제인 스프링 다이어리(노블마인)란 책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서른네 살 싱글이자 뉴욕 지방검사보인 제인 스프링. 그녀는 어려서 어머니를 잃고 군인 아버지 밑에서 두 오빠와 함께 엄격한 군대식 교육을 받고 자랐습니다. 일을 할 때도 데이트를 할 때도 항상 철저한 준비로 당당하고 자신만만합니다. 하지만 예상과는 달리 남자들한테 차이고, 동료 검사들에게 환영받지 못합니다. 너무 똑똑하고 독선적인 게 탈이었던 거죠. 독립적이고 주관이 뚜렷한 제인이지만 사랑하는 남자와의 로맨스를 갖고 싶습니다. 제인은 결심합니다. 남자들이 원하는 여자가 되어 자기만의 그 남자를 찾겠다고. 그녀가 말하는 ‘완벽한 여자’ 되기의 네 가지 조건은 ‘섹시, 우아, 능력, 지적일 것’ 등이랍니다. 글쎄, 그렇게 완벽해지면 과연 사랑과 결혼도, 얻을 수 있게 되는 것일까요? 설령, 그렇게 노력해 두 가지를 다 얻었다고 해도 도처에 암초 투성이입니다. ‘일’과 ‘사랑’, ‘일’과 ‘결혼생활’의 양립이란 쉽지가 않기 때문입니다. 그 대단한 여자, 미란다조차도 ‘사랑’과 ‘결혼’에는 실패하는 것을 보면 말입니다. 애초에 두 가지를 모두 잘하겠다는 것, 자체가 욕심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노력이 부족해서인 것이 아니라, 모두 다 가지겠다는 자체가 ‘과욕’이라는 말입니다. 하지만, 뭐 어쩌겠어요. ‘그레이 아나토미’(미국 TV시리즈)의 크리스티나처럼 최상의 의사이자 최고의 아내, 두 가지를 다 할 수는 없으니 “와이프를 고용하자”고 말할 발칙한 (?) 용기가 생길 때까진, ‘일’과 ‘사랑(결혼생활)’의 두 마리 토끼를 오늘도 쫓아볼 밖에요.
[문] 괄호 안에서 알맞은 말을 고르시오. 1. 황금 보기를 (돌|돌멩이)처럼 하라. 2. 구르는 (돌|돌멩이)에는 이끼가 끼지 않는다. 3. 누구든지 죄가 없는 자는 이 여인에게 (돌을|돌멩이를) 던져라. 4. 형은 내게 주먹만 하고 납작한 (돌을|돌멩이를) 주워 오라고 했다. 5. 저 산은 예로부터 (돌이|돌멩이가) 많고 험하기로 유명하다. 6. (돌|돌멩이) 갖다 놓고 닭알 되기를 바란다. 7. (돌을|돌멩이를) 차면 내 발부리만 아프다. [풀이] ‘돌’은 문명과 역사의 재료 세상 어디를 가나 흙먼지 속에서 흔하디 흔하게 굴러다니는 것이 돌이지만, 인류가 돌과 맺어온 관계를 돌이켜보면 돌이야말로 인간의 문명과 역사를 구성해온 기본적인 재료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우선 돌은 고대로부터 우주를 이루는 4대 원소로 불려온 물, 공기, 불, 흙 가운데 흙에 속한다. 학교 역사 시간에 우리는 돌도끼, 돌괭이, 돌창, 돌낫, 돌화살촉, 돌칼 등 인류 역사의 시원을 이루는 석기시대의 유물들에 대해 귀에 더께가 앉도록 들었다. ‘석기시대’는 인류가 아직 금속을 다룰 줄 몰랐던 유년문명 시절의 이름이다. 그뿐인가. 정취 어린 덕수궁의 돌담, 팔방으로 뻗어나간 로마도로의 포석(鋪石)에서부터, 아직도 그 신비를 풀지 못한 피라미드 군(群), 달에서도 보인다는 만리장성, 미얀마의 앙코르와트 사원 같은 찬란한 인류의 문화유산들이 모두 돌로 되어 있음은 두말 할 필요도 없다. 한마디로 인류의 문명과 역사를 이루어온 것이 바로 돌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과연 ‘돌’이란 무엇일까? 너무도 자명한 것으로 여겨온 돌을 새삼 낯설게 바라보면서 돌의 정의를 살펴보기로 하자. ‘돌멩이’는 ‘돌’의 한 종류 국어사전들은 ‘돌’을 크게 세 가지 측면에서 정의하고 있다. 첫째, 재질이다. ‘돌’은 흙 따위가 굳어서 된 단단한 광물질 덩어리다. 무기물이기에 생명이 없고 고체이기에 딱딱하다는 말이다. 둘째, 크기다. ‘돌’은 바위보다 작고 모래보다는 크다고 되어 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사람이 한 손이나 두 손으로 들 수 있는 크기여야 하는데, 여기서 이 정도 크기가 되는 돌에는 여러 종류가 있을 수 있다는 점을 짐작할 수 있다. 셋째는 속성이다. 돌은 애초부터 자연에서 생겨나야지, 사람의 힘으로 만들어낸 것이어서는 안 된다. 돌은 어디까지나 천연 물질이다. 따라서 현대에 들어 생산․사용되고 있는 인공 숫돌이나 인공 대리석 같은 것은 본래적 의미의 돌이라고 하기는 어렵다. 이런 점에서 보면, 자연에서 인간의 생활 속으로 끌려 들어와 감상과 매매의 대상으로 전락한(?) 수석(壽石)도 자연 상태의 돌과는 자격이 사뭇 다르다고 해야 할 것이다. 이에 비해 ‘돌멩이’는 재질이나 속성에서 보자면 ‘돌’과 다를 것이 없으나 다만 크기에서 차이가 난다. ‘돌멩이’는 손에 쥘 수 있을 만한 크기로 ‘돌덩이’보다 작고 ‘자갈’보다 크다는 것이 사전들의 풀이다. 그러니까 물수제비를 뜰 때 던지는 납작하고 자그마한 돌이 전형적인 ‘돌멩이’의 이미지라 하겠다. 결국 ‘돌멩이’는 ‘돌덩이’보다 작은 돌의 한 종류임을 알 수 있다. ‘돌’은 수많은 복합어의 재료가 된다는 점에서도 ‘돌멩이’와 다르다. 돌계단, 돌기둥, 돌길, 돌다리, 돌담, 돌더미, 돌덩어리, 돌무더기, 돌문, 돌바닥, 돌밭, 돌부리, 돌부처, 돌산, 돌섬, 돌솥, 돌조각, 돌층계, 돌탑, 돌투성이, 돌팔매, 돌하르방 등 돌이 앞에 붙은 낱말에서부터 잔돌, 조약돌, 부싯돌, 맷돌, 고인돌, 숫돌, 머릿돌, 디딤돌, 댓돌, 다듬잇돌, 갈돌(갈판 위에 곡물이나 열매를 올려놓고 갈 때 쓰는 물건으로, 절구의 절굿공이 구실을 하는 석기) 등, 돌이 들어간 복합어는 셀 수 없이 많다. 황금 보기는 ‘돌’같이 해야 ‘돌멩이’가 ‘돌’에 속한다는 것은 두 낱말의 정의를 따졌을 때 그렇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일상 언어생활에서 둘은 어떤 관계에 놓여 있을까? 고려시대의 최영 장군에게서 실마리를 빌려와 보자. 자본주의 사회를 살고 있는 현대인들에게는 더더욱 실천하기 어려운 말이 되고 말았지만, “황금 보기를 돌같이 하라”는 그의 말은 여전히 금과옥조로 여겨지고 있다. 그러면 황금 보기를 ‘돌같이’ 하는 것은 황금 보기를 ‘돌멩이같이’ 하는 것과 어떻게 다를까? 최영 장군의 금언에서 ‘황금’은 크고 작은 금붙이뿐만 아니라 금이라는 물질 자체, 더 나아가 인간의 물질적 욕망의 대상이 되는 모든 재물을 일컫는다. 만약 어떤 사람이 눈앞에 놓인 조약돌만한 금붙이를 가리키면서 이 금언을 되새긴다면 “금붙이 보기를 돌멩이같이 하라”고 해도 크게 이상하지 않을 것이다. 또는 어떤 사람이 자기 머리통만한 금덩이를 앞에 놓고 이 말을 되뇐다면 “금덩이 보기를 돌덩이같이 하라” 정도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눈에 보이는 금붙이나 금덩이가 아니라 금 일반, 혹은 금이 상징하는 커다란 부나 많은 재화에 갈음할 수 있는 것은 ‘돌멩이’도 ‘돌덩이’도 아니고 ‘돌’뿐이다. 물, 술, 가루처럼 낱개로 셀 수 없는 물질의 이름을 물질명사라고 하는데, ‘돌’ 역시 개체나 구체적인 사물이 아니라 일정한 속성을 지닌 물질을 가리킨다는 점에서 물질명사에 속한다. 이에 비해 ‘돌멩이’는 같은 종류의 모든 사물에 두루 쓰이는 보통명사 혹은 일반명사다. 돌산에 많은 것은 ‘돌’이지 ‘돌멩이’가 아니며, 옛날에 이웃마을끼리 돌싸움할 때 던졌던 것은 그냥 ‘돌’이라 아니라 ‘돌멩이’였다. 개구쟁이는 ‘돌멩이’를, 죄 없는 자는 ‘돌’을 던져라 테레사는 벵골만 바닷가를 거닐며 바다에 돌멩이를 던지면서, 인간이 돌멩이를 던진다고 바다가 꿈쩍할 리 없겠지만 적어도 작은 파문은 일으킬 수 있다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작은 파문이 사라지기 전에 계속해서 파문을 일으킨다면 바다도 굴복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오마이뉴스 2002. 8. 29.). 이렇게 사람이 바다, 호수, 강 같은 데 집어던지는 물건은 ‘돌’이 아니라 ‘돌멩이’다. 물론 바다를 메워 간척지를 만들려 한다면 ‘돌멩이’만으로는 벅찰 터이니 이런저런 ‘돌’을 가리지 않고 쏟아 부어야 할 것이다. 한편 성경에는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요한복음 8:7)는 예수의 말씀이 나온다. 이때 만약 예수가 ‘돌멩이로 치라’고 했다면, 사람들은 근처에 있는 돌 가운데 돌멩이가 될 만한 것을 찾느라 바빴을지도 모른다. ‘돌로 치라’는 것은 곧 ‘단죄하라’는 말의 상징적 표현이다. 따라서 이때 ‘돌’은 처벌의 도구를 상징하고 있기 때문에 ‘돌멩이로 치라’가 아니라 ‘돌로 치라’가 된 것이다. 둘의 차이가 이러하다면, 냇물에 물결을 일으켜 누나 손을 간질이려는 개구쟁이 동생은 ‘돌’이 아니라 ‘돌멩이’를 던져야 마땅하다. 만약 누나에게 ‘돌’을 던지는 동생이 있다면 뭇 사람들의 힐난에서 자유롭지 못할 것이다. 그렇다고 우리가 어려서부터 입에 익혀온 “퐁당퐁당 돌을 던져라, 누나 몰래 돌을 던져라”하는 노랫말을 “퐁당퐁당 돌멩이를 던져라”로 바꿔 부른다면 운율도 어그러지고 작사자의 마음도 편치는 않을 터이니, 이건 이것대로 놔둘 수밖에 없을 듯하다. 인터넷에서 검색을 해보면 “내 인생에 돌멩이를 던져라”, “죄 없는 자 공무원노조에 돌멩이를 던져라”, “담론의 파문 만드는 돌멩이를 던져라” 같은 표현이 적잖이 눈에 띈다. 성경 구절에 ‘돌로 치라’로 되어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런 경우에는 모두 ‘돌을 던져라’로 쓰는 편이 자연스럽다. ‘돌’이 된 사람들 전 세계의 신화나 전설에서는 돌이 된 사람이나 동물의 이야기를 심심찮게 찾아볼 수 있다. 신라의 충신 박제상의 부인이 일본으로 떠난 남편을 기다리다 망부석(望夫石)이 되었다는 전설도 있고, 그리스 신화에서는 아틀라스가 메두사의 머리를 보는 순간 큰 바위산으로 변했다고 한다. 또 어떤 스님이 착한 며느리에게 마을이 물에 잠길 테니 몸을 피하되 뒤를 돌아보지 말라고 했는데 며느리가 결국 뒤를 돌아보는 바람에 돌이 되고 말았다는 ‘장자못 전설’도 있다. 그런데 이런 이야기들에서는 왜 사람이 ‘돌멩이’나 ‘돌덩이’가 아니라 ‘돌’로 변하는 것일까? 물론 사람이 ‘돌멩이’나 ‘돌덩이’로 변하기에는 그 크기가 어울리지 않기도 하겠거니와, 더 근본적인 해답은 ‘돌’이 지닌 상징성에서 찾는 쪽이 옳을 듯싶다. 동서를 막론하고 ‘돌’은 안정성, 영속성, 신뢰성, 불사(不死), 불멸성, 불후성, 영원성, 응집력 따위를 함축한 것으로 여겨져 왔다. 기독교에서 ‘반석’은 교회의 든든한 기반을 상징하고, 생명수는 바위가 기적적으로 갈라졌을 때 흘러나오곤 한다. 옛 사람들은 흠 많고 어리석은 인간들이 초자연적이고 신성한 존재, 즉 인생의 완성태(完成態)이자 영원한 생명의 상징인 ‘돌’로 화하는 이야기들을 되새기면서 팍팍한 세상을 살아가는 힘을 얻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요약] 돌 • 바위, 돌덩이, 돌멩이, 자갈, 조약돌 등을 두루 가리킴 • 재질을 가리키는 물질명사|비유나 상징으로 잘 쓰임 돌멩이 • 한 손으로 집을 수 있는 정도 크기의 돌 • 구체적 대상을 가리키는 보통명사|비유나 상징으로는 잘 쓰이지 않음 [답] 1. 돌 2. 돌 3. 돌을 4. 돌멩이를 5. 돌이 6. 돌멩이 7. 돌을
우리나라 사람은 산을 좋아하는 사람이 많다. 아름다운 자연과 벗할 수 있는 매력도 있지만 고즈넉이 자라잡고 있는 산사를 구경하는 재미가 산을 찾는 의미를 배가할 때가 많다. 종교적 의미를 제쳐놓고서라도 누구나 여행을 할 때면 우리나라 역사와 함께 한 사찰을 구경하는 것은 필수코스처럼 되어 있다. 2년 전 2005년 양양 낙산사의 화재가 뉴스로 생생하게 전달되어 많은 사람들에게 충격을 주었다. 화염에 녹아버린 낙산사범종의 형체는 그것을 보는 내내 나 역시 표현하기 힘들 정도로 가슴이 답답했던 기억이 난다. 녹아내린 낙산사범종을 보면서 항상 휙 지나쳐버린 사찰의 범종에 대해 궁금증을 가지게 되었다. 사찰을 방문하게 되면 대웅전의 불상, 사찰단청, 불화, 역사적인 석탑 등 유물을 만나기도 하고 오래된 보호수와 주변 경관을 음미하기도 한다. 그러나 대체로 범종은 보호각에 들어 있어 수박 겉핥기식으로 대충 보거나 안내문을 읽는 정도이다. 보물이기 때문에 보호하려는 것으로만 인식하고 범종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한국적인 특징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이 흔치 않다. 그리고 몸 전체에 새겨진 아름다운 조형미를 놓치는 수가 많다. 소란스럽지 않게 언제나 늘 그 자리에서 모든 사람들을 편안하게 해주는 역할을 하는 범종. 한국의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불교문화 중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고 희망적 의미를 지닌 범종의 한국적 조형미감을 살펴보자. 시대의 독창적 조형미를 간직한 범종 범종은 불교 의식에 사용되는 불교공예품 가운데 가장 중요한 의식 법구로 금고(金鼓), 운판(雲版), 목어(木魚)와 함께 불전사물(佛前四物)의 하나이다. 범종은 경종(警鐘), 조종(釣鐘), 당종(撞鐘), 범종(梵鐘)이라고도 하며, 하늘과 땅 그리고 지옥의 모든 중생을 구제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흔히 범종 종신의 상부에는 용종의 ‘뉴(鈕)’에 해당하는 천판(天板), 즉 종정(鐘頂)을 두 발로 딛고 머리를 숙여서 종 전체를 물어 올리는 듯한 용뉴가 만들어져 있으며, 구부린 용의 몸체에 철색을 끼워서 용뉴에 매달아 놓는다. 유곽에는 볼륨감 있는 아홉 개의 유두가 배치되어 있으며, 유곽 아래에는 보상살이나 비천상 그리고 연화문 당좌 등이 새겨져 있다. 우리나라 범종은 크기와 모양이 일정하지 않으나 신라시대의 종이 조형미로 으뜸이다. 고려시대와 조선시대로 갈수록 다소 변화하였으나 어느 시대든 나름대로 독창적인 조형미를 읽을 수 있으며 중국이나 일본 종의 형태와는 다른 독특한 형식을 가지고 있다. 형태는 매달기에 편리하도록 용뉴(龍鈕)와 음향의 효과를 위한 용통(甬筒)이 종의 맨 윗부분에 있고, 그 아래 몸체는 상대(上臺), 중대(中臺), 하대(下臺)로 구분되고 이들 사이로 유곽(乳廓)과 당좌(撞座)를 배치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또한 당좌 사이에는 비천(飛天)이나 불상, 보살상, 나한상들이 표현되기도 하는데 특히 비천상은 신라시대 종의 조각수법이 뛰어나다. 보통 청동으로 만든 것이 많지만 드물게 철로 주조된 예도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문헌상으로 《삼국유사》 권4, 〈황룡사종조(皇龍寺鐘條)〉에 신라 경덕왕이 754년 황룡사에 길이 1장 3촌, 무게 49만 근에 달하는 큰 종을 주조하였다는 기록이 있어 당시 금속공예의 주조기술과 규모가 상당한 수준에 이르렀음을 알 수 있다. 실제로 남아 있는 유물 중에서는 신라시대의 상원사 동종이 가장 오래 되었다. 또 크기와 형태미를 대표하는 신라 성덕대왕신종이 있으며 실상사 범종과 선림원지 동종은 현재 파손된 상태로 남아 있다. 고려시대에도 신라 범종의 전통을 이어 많이 제작되었으나 형태가 투박해지고 문양표현을 위한 주조기술이 정교하지 못한 점 등 약간의 퇴보를 보이면서 크기도 작아져서 30㎝ 정도의 공예적인 성격이 강한 소종(小鐘)이 나오게 되었다. 그리고 조선시대 범종은 고려종의 형식을 계승하면서 약간의 변화를 보인다. 시대가 변천함에 따라 독창적인 한국의 아름다움도 차츰 퇴보되는 양상을 보이고 있는데, 시대별로 그 조형미감을 알아보기로 한다. 신라범종의 백미 상원사동종 신라의 범종은 그 형식이 중국이나 일본종과 크게 다르기 때문에 ‘한국종(韓國鐘)’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종의 전체 형태는 대포 포탄의 머리를 잘라버린 것처럼 전체적으로 위로 좁아지는 원추형으로 되어 있다. 종신(鐘身)의 아랫부분 3분의 2 정도 되는 곳이 가장 넓고 그 밑은 다시 약간 축약되어 매우 안정되고 견고하고 매듭 지워진 외형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종신의 상단에는 상대(上帶), 하단에는 하대(下帶)라고 불리는 무늬띠가 있다. 상대에는 사각형의 무늬띠로 둘러싼 유곽(乳廓)이 네 군데 똑같은 간격으로 배치되어 있으며, 유곽 속에는 아홉 개의 유두(乳頭)가 3열로 박혀 있다. 종신의 상부로 올라가면 천판(天板) 즉 무(舞)라고 불리는 부분에는 사지로 땅을 밟고 머리를 숙여 땅바닥을 물어뜯고 있는 듯한 용형상의 꼭지(龍形鈕)를 만들어 그 구부러진 구멍에 철색(鐵索)을 끼어 종루에 매달도록 하였다. 또 용뉴(龍鈕) 옆에는 음관(音管) 또는 용통(甬筒)이라고 불리는 가운데가 빈 대롱 모양의 유통(鈕筒)을 만들었다. 그런데 유곽을 보면 중국종은 ∧형의 꼭지끈(鈕) 뿐이고, 탁(鐸; 방울)에는 ∧형 대신 용(甬; 대롱)이 있을 뿐이다. 중국종의 용(甬)은 외형적으로는 우리나라 용통과 똑같이 보이나, 내부가 비워있지 않기 때문에 순전히 손잡이 역할만 한다. 신라종(新羅鐘)은 종(鐘)과 탁(鐸)을 혼합한 형식이긴 하지만 용(甬)의 내부를 비워서 종신과 서로 맞뚫리게 한 독창적인 형식이다. 한국종이 언제 어디에서 먼저 만들어졌는지는 현재 고구려나 백제의 자료가 전혀 없기 때문에 현재로서는 725년에 주조된 오대산 상원사의 종이 가장 오랜 작품으로 남아 있다. 이 외의 신라종은 경주박물관의 성덕대왕신종(771년), 파편만 남아 있는 선림원종(국립중앙박물관, 804년), 일본에 있는 상궁신사종(常宮神社鐘, 832년) 등이 있다. 어느 해 겨울 잔설이 제법 많이 남아 있을 즈음 오대산 상원사 사찰 마당에 창살로 된 범종각 사이로 좀 더 자세히 비천상을 보려고 애썼던 기억이 난다. 상원사종은 신라 성덕왕 24년(725), 신라의 지혜와 아름다움을 모아 이룬 종으로 우리나라 종 중에서 조형적으로 가장 아름답고 오래된 종이다. 종신 상부 천판의 명문에 의하면 725년 휴도리(休道里)라는 귀부인이 기증한 것으로 문양띠는 모두 당초문과 반원형 구획 속의 천인상(天人像)으로 장식되어 있다. 높이가 1.67미터이니 한국 남자 보통 키나 되는 큰 종이며 종의 어깨부터 종구(鐘口)에 이르는 종신의 긴 곡선은 은근스러우면서도 단아한 기품을 보이고 있어 소위 한국적인 선의 아름다운 기조를 보여주고 있다. 종신에는 당초문대(唐草文帶)를 갓장식으로 한 연화문당좌와 나란히 마주 앉은 주악천인상을 두 군데 배치하고 있다. 또 유통에는 상하연판대와 화엄사 석등 간석(竿石)과 같은 꽃문양을 교대시키고 있다. 상원사종의 전체 모습과 무늬의 수법은 천인(天人)의 바람에 날리는 천의(天衣)자락의 선 등 모두 봉덕사종에 비해 부드럽고 간결하며 여러 점에서 현존하는 신라종의 백미라고 할 수 있다. 봉덕사종(성덕대왕신종)은 일명 에밀레종으로도 불리는데, 높이가 3.28미터이고, 아래 종통의 지름이 2.27미터, 두께가 23센티미터나 되는 거대한 종이다. 종에 새겨진 1000여자나 되는 긴 명문에 의하면 성덕왕의 명복을 빌기 위해 경덕왕과 혜공왕의 2대에 걸쳐 유아를 희생시켰다는 전설까지 낳는 고심 끝에 주조된 것이다. 형태는 상원사종과 크게 다르지 않으나 유두가 편평한 연화문으로 되어 있고 종 하단은 당나라의 여덟 개 모서리를 가진 거울 즉, 팔릉경(八稜鏡)처럼 팔릉화형(八稜花形)으로 되어 있으며 판단마다 연화문을 한 개씩 배치하고 있다. 종의 맨 위에는 소리의 울림을 도와주는 음통(音筒)이 있는데, 이것은 우리나라 동종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독특한 구조이다. 종을 매다는 고리 역할을 하는 용뉴는 용머리 모양으로 조각되어 있다. 종 몸체에는 상하에 넓은 띠를 둘러 그 안에 꽃무늬를 새겨 넣었고, 종의 어깨 밑으로는 4곳에 연꽃 모양으로 돌출된 9개의 유두를 사각형의 유곽이 둘러싸고 있다. 유곽 아래로 2쌍의 비천상이 있고, 그 사이에는 종을 치는 부분인 당좌가 연꽃 모양으로 마련되어 있으며, 몸체 2곳에는 종에 대한 내력이 새겨져 있다. 특히 종 입구 부분이 마름모의 모서리처럼 특이한 형태를 하고 있어 이 종의 특징이 되고 있다. 종을 치는 당좌(撞座)는 유곽 사이의 아랫부분에 한 개씩 두 개가 있으나 긴 명문을 비천(飛天) 위치에 두었기 때문에 한 자리에 있어야 할 쌍비천을 둘로 갈라놓았다. 그 결과 유곽 아랫부분 공간에 하나씩 비천에 놓여 있다. 봉덕사종은 문양띠의 보상화문은 도안이라기보다는 그림처럼 사실적으로 힘 있게 묘사되어 있으며, 비천의 모습도 매우 입체적으로 되어 있으며 화려한 문양과 조각수법은 신라 전성기의 원숙한 미술을 보여주는 걸작이다. 그러나 이러한 활력 넘치는 정교한 아름다움과 숙련미는 804년 선림원종(禪林院鐘)에서 섬세함이 떨어지고 무력화되고 있음을 알 수 있고, 832년 일본의 상궁신사종상궁신사종(常宮神社鐘)에 이르러서는 쇠퇴의 모습이 역력하게 나타나고 있다. 이전의 상하대 당초문은 파문(波文) 같은 세선문(細線文)으로 바뀌고 비천도 약화되어 조잡해져 봉덕사종에 비하면 후퇴된 양상이 현저하다. 신라종을 대표하는 상원사종이나 봉덕사종은 용뉴의 섬세한 용 형상도 빼어나지만 종신의 공간과 비천, 당좌의 크기, 위치 등 공간 구성도 매우 빼어나 종교적 의미를 떠나서 한국적 조형미가 잘 표현된 미술사적 가치도 크다. 조각수법이 빼어난 고려 탑산사동종 고려시대에는 종을 만들기 위해 구리로 만든 그릇 등을 기부하도록 강요를 하여 불가사리라는 괴물 전설까지 낳게 하였다. 그러나 종의 크기는 작아지고 시대가 내려가면서 제작이 조잡해져서 화려하고 독창적인 통일신라 종의 전통을 제대로 잇지 못하였다. 고려 종의 특징으로는 첫째, 경구에 대한 종의 높이의 비율을 보면 신라종의 경우는 1대 1.3 내외인데 비해, 고려종은 전기에는 1.2 내지 1.1로 내려가며, 그것도 12세기 이후에는 입지름이 40센티미터 미만의 소형으로 변하고 구경과 종의 높이가 대략 비슷해진다. 둘째, 상대상반부에 연판대가 부가되다가 12세기에는 그것이 더 올라가 밖으로 차양처럼 돌출하며, 12세기경부터 유통 위 끝에 구형의 장식이 부착된다. 그리고 비천상 대신 여래상이나 보살상 등 입상(立像)이 나타난다. 현재 남아 있는 고려종은 모두 합해 최소 70구를 넘을 것인데, 그 중 대표적인 것은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는 1010년에 주조된 천흥사종과 1058년에 주조된 여주 상품리의 청녕4년명종(淸寧四年銘鐘)이 있으며 1222년 주조된 내소사종, 1223년의 월봉사종이 있다. 그리고 1249년에 만든 오성사종은 경주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이밖에 연대명이 없는 것으로 해남 대흥사의 탑산사종, 고려대학교박물관의 두정사종(頭正寺鐘), 숭실대학교박물관의 매산고고관종(梅山考古館鐘) 등이 있다. 고려범종 중 성거산천흥사동종(聖居山天興寺銅鐘)은 국보 제280호로 11세기 초의 작품이다. 국내에 남아있는 고려시대 종 가운데 가장 커다란 종으로 크기는 종 높이 1.33미터, 종 입구 96센티미터이다. 종위에는 종의 고리 역할을 하는 용뉴가 여의주를 물고 있는 용의 모습으로 표현되었다. 소리 울림을 도와준다는 용통은 대나무 모양이며, 편평한 부분인 천판 가장자리에는 연꽃무늬를 돌렸다. 몸체의 아래와 위에는 구슬무늬로 테두리를 한 너비 10센티미터 정도의 띠를 두르고 꽃과 덩굴로 안을 채워 넣었다. 유곽 아래에는 종을 치는 부분인 당좌를 원형으로 2곳에 두었고, 구슬로 테두리하고 연꽃으로 장식하였다. 당좌 사이에는 2구의 비천상을 두었는데, 1구씩 대각선상에 배치하여 신라종과는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 용뉴나 유통, 유곽, 상하문대, 비천 등 모두 신라종 그대로이며 충실하게 모방한 고려종 중 빼어난 조형미를 갖춘 종이다. 그리고 여주출토 청녕4년명동종(驪州出土 淸寧四年銘銅鐘)은 1967년 경기도 여주군 금사면 상품리에서 고철 수집 때 우연히 발견된 것으로, 종을 매다는 고리인 용뉴는 한마리의 용이 고개를 들고 있는 모습이며, 소리의 울림을 돕는 용통은 6단으로 구분되어 있다. 용통의 각 부분마다 덩굴무늬를 양각하였다. 종의 상단과 하단, 9개의 돌출된 모양의 유두를 둘러싼 사각형의 유곽에는 가늘게 연이은 구슬 모양의 띠를 돌리고, 그 내부에 모란 덩굴무늬를 장식하였다. 유곽내의 유두는 꽃으로 도드라지게 표현하였다. 종 몸통에 있는 비천상은 천흥사종(국보 제280호)과는 달리 4곳에 있으며, 특히 대칭대는 곳에 보관을 쓴 2구의 보살상이 있는 것이 특징이다. 종을 치는 부분인 당좌 역시 종 몸통에 보살상과 교대로 4곳에 있다. 내소사고려동종(來蘇寺高麗銅鐘)은 고려 시대 동종의 양식을 잘 보여주는 종으로 종의 아랫부분과 윗부분에는 덩굴무늬 띠를 둘렀고, 어깨부분에는 꽃무늬 장식을 하였다. 종의 어깨 밑에는 사각형의 유곽이 4개 있고, 그 안에는 9개의 돌출된 유두가 있다. 종을 치는 부분인 당좌는 연꽃으로 장식했고, 종의 몸통에는 구름 위에 삼존상이 새겨 있다. 가운데 본존불은 활짝 핀 연꽃 위에 앉아 있고, 좌·우 양쪽에 협시불이 서 있다. 종 정상부에는 소리의 울림을 돕는 음통과 큰 용머리를 가진 종을 매다는 고리인 용뉴가 있다. 1222년(고려 고종 9년)에 청림사 종으로 만들었으나, 1850년(조선 철종 원년)에 내소사로 옮겼다. 한국 종의 전통을 잘 계승한 종으로, 그 표현이 정교하고 사실적이어서 고려 후기 걸작으로 손꼽힌다. 이 외에도 탑산사동종(塔山寺銅鍾)은 신라 형식을 계승하면서 고려시대에 새로 나타난 특징들을 잘 보여주는데, 전체 형태는 상원사 동종을 연상시킬 만큼 아름다운 선을 갖고 있으며, 각종 조각 수법이 빼어나 고려시대 걸작으로 손꼽힌다. 독창성과 변화의 조화 조선 화계사동종 조선시대 범종은 고려종의 형식을 계승하면서 약간의 변화를 보이고 있다. 상대 아래에 새로운 범자대(梵字帶)가 돈다든가 그러한 부가된 문양대에 의해 유곽이 부득이 상대에서 떨어져나가 종신 쪽으로 내려오는 등의 변화가 있다. 현재 남아 있는 조선 범종은 상당수 있지만 그 중 대표적인 것은 1462년의 천흥사종, 1468년의 보신각종, 1491년의 해인사적광전종, 1584년의 공주갑사종 등이 있다. 갑사동종(甲寺銅鐘)은 조선 초기의 종으로 국왕의 만수무강을 축원하며, 갑사에 매달 목적으로 1584년(선조 17년)에 만들어졌다. 종의 어깨에는 물결모양으로 꽃무늬를 둘렀고, 바로 밑에는 위 아래로 나누어 위에는 연꽃무늬를, 아래에는 범자를 촘촘히 새겼다. 그 아래 4곳에는 사각형모양의 유곽을 만들고, 그 안에는 가운데가 볼록한 연꽃모양의 유두를 9개씩 두었다. 종의 몸통 4곳에는 종을 치는 부분인 당좌를 따로 두었고, 그 사이에는 구름위에 지팡이를 들고 있는 지장보살이 서 있다. 종 입구 부분에는 덩굴무늬 띠를 둘렀다. 이 종은 일제강점기 때 헌납이라는 명목으로 공출되었다가, 광복 후 갑사로 옮겨온 민족과 수난을 같이 한 종이다. 2005년에 소실된 낙산사동종은 보물 479호로 강원 양양군에 1469년(조선 예종 1년)에 그의 아버지인 세조를 위해 낙산사에 보시(布施)한 종이다. 종 꼭대기에는 사실적이고 기품 있어 보이는 용 2마리가 서로 등지고 있어 종의 고리역할을 하고 있다. 어깨 부분에는 연꽃잎으로 띠를 둘렀다. 몸통에는 가운데 굵은 3줄을 그어 상·하로 나누고, 위로 보살상 4구를 새겼다. 보살상 사이사이에는 가로로 범자를 4자씩 새기고, 보살상 머리 위로는 16자씩을 새겨 넣었다. 몸통 아래로는 만든 시기와 만들 때 참여한 사람들에 대한 기록이 남아있다. 종의 밑 부분에는 너비 9.5센티미터의 가로줄이 있어, 그 안에 당시에 유행하던 물결무늬를 새겨 넣었다. 큰 종으로는 조각수법이 뚜렷하고 모양이 아름다워 한국 종을 대표하는 걸작품으로 손꼽혔으나 안타깝게도 전소되었다가 다시 복원하였다. 서울 화계사동종과 경기도 의왕시에 있는 의왕 청계사동종(儀旺淸溪寺銅鍾)은 조선 숙종 때 경기도와 경상도 지역에서 활동한 승려인 사인비구에 의해서 만들어진 조선시대 종이다. 사인비구는 18세기 뛰어난 승려이자 장인으로 전통적인 신라 종의 제조기법에 독창성을 합친 종을 만들었다. 보물 제11호인 강화동종, 포항 보경사의 서운암동종, 문경 김룡사동종, 홍천 수타산동종, 양산 통도사동종, 안성 청룡사동종 등 현존하는 그의 작품 8구가 서로 다른 특징을 보이는데 그의 작품들은 우수성을 인정받아 8구 모두가 보물로 지정되었다. 그 중 의왕청계사동종의 높이는 115센티미터, 입지름은 71센티미터이며, 무게가 700근이나 나가는 큰 종이다. 종의 꼭대기에는 두 마리의 용이 종을 매다는 고리 역할을 하고 있고, 어깨와 종 입구 부분에는 꽃과 덩굴을 새긴 넓은 띠가 있다. 어깨 띠 아래로는 연꽃모양의 9개의 돌기가 사각형의 유곽 안에 있고, 그 사이사이에는 보살상들이 서있다. 종의 허리에는 중국에서 영향을 받은 듯한 2줄의 굵은 횡선이 둘러져 있고, 그 아래로 글이 남아 있어 만든 사람과 시기를 알 수 있다. 조선 후기 종의 형태를 잘 보여주는 것이다. 우리나라 방방곡곡 사찰마다 먼저 눈에 띄는 범종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곡선의 아름다움과 전통문양을 알 수 있는 독창적인 아름다움을 발견하게 된다. 불교를 믿는 사람이건, 다른 종교인이든 간에 이러한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것은 우리나라 역사를 읽어내는 것이다. 우리 국민 모두의 복됨과 좋은 길로의 구제를 기원하며 가까이 있는 범종을 한 번 찾아보는 것도 좋을 듯하다.
진실게임, 누가 아이들을 괴물로 만드는가? 세기 말의 암운이 드리워진 지난 1999년, 미국의 콜롬바인 고등학교에서 두 명의 학생이 총기를 난사해 다른 13명의 학생과 교사를 살해하고 자살한 충격적인 사건이 발생한다. 사건 직후 각종 언론 매체와 거기에 출연한 전문가들은 범행을 저지른 아이들이 악마숭배적인 음악과 퍼포먼스를 일삼는 ‘마릴린 맨슨’과 폭력적인 영화 '매트릭스‘에 심취했던 것을 근거로, 대중문화의 선정성과 폭력성이 이런 끔찍한 사건의 배후라고 입을 모아 주장하였다. 이는 당시 거의 공황 상태에 빠져 있던 미국인들은 물론, 이 사건에 주목하고 있던 대다수 사람들에게 여과 없이 받아들여졌고, 이후 상당기간 동안 폭력과 섹스를 주요 표현양식으로 사용하는 영화나 컴퓨터 게임 그리고 음반 등의 각종 대중문화 컨텐츠는 청소년 범죄의 주요 원인으로 지목받게 된다. 하지만 이후에도 주로 미국을 중심으로 한 청소년의 총기관련 사건은 꼬리를 물고 이어졌고, 일부 가해 학생들의 경우 폭력적인 게임이나 대중문화와의 연관성을 입증할 수 없는 경우가 허다하였다. 이에 다큐멘터리 영역의 새 장을 연 ‘개척자’ 혹은 ‘악동’으로 찬사와 비난을 한 몸에 받고 있던 마이클 무어(Michael Moore) 감독은 특유의 역발상적인 태도로 대부분의 사람들이 믿어 의심치 않던 ‘콜롬바인 사태’의 진단과 처방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기 시작한다. ‘정말 그 아이들을 그렇게 만든 것이 타락한 대중문화의 탓이었을까? 혹시 매체들이 선동하듯 늘어놓는 이런 표면적인 이유들 말고 진짜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니었을까?’ 콜롬바인 총기 난사사건을 다루어 아카데미를 비롯해 각종 영화제의 상을 휩쓴 논쟁적인 다큐멘터리 영화 볼링 포 콜롬바인(Bowling for Columbine)은 이렇게 다소 삐딱해 보이는 질문에 대한 나름의 답을 찾아나가는 일련의 과정으로 만들어진 작품이다. 문제 학생 뒤에 문제 학교가 있다?! 일종의 탐사 리포트 형식을 지닌 다큐멘터리 영화로서 볼링 포 콜롬바인은 ‘콜롬바인 고교 사태’라는 특수한 사례를 다루고 있는 작품이지만, 보는 관점에 따라 우리의 교육현실 그리고 그 가운데 이루어지는 교사와 학생 사이의 관계를 되돌아보게 하는 성찰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 머물러 있지 않고 끊임없이 변화하는 존재로서 사람과 사람의 만남을 전제로 하는 교육의 장은, 이런 이유로 예측할 수 없는 문제들이 파생되는 가변적인 공간이라 할 수 있다. 살아가면서 겪게 되는 대개의 인생사 일들이 그러하듯 교육현장에서 학생 상호간, 혹은 교사와 학생 사이에 발생하는 문제들도 겉으로 드러나 보이는 표면과 그렇지 않은 이면의 세계가 존재하게 마련이다. 어떻게든 학생과 관련한 문제를 다루어 판단하고 나름의 처방을 모색해야 하는 교사의 어려움이 바로 여기에 있다. 마이클 무어 감독은 ‘콜롬바인 사건’에 대한 사후 처방 중 가장 큰 실패가 참사의 주된 책임을 눈에 보이는 표면적인 원인, 예를 들어 과격한 표현형식을 가진 영화나 음악의 몫으로 돌려 버린데 있다고 주장한다. 그렇게 일견 명확해 보이는 원인에 일체의 책임을 돌림으로서 보다 근원적인 책임을 져야하는 해체된 가정, 폭력을 조장하는 사회 그리고 피 말리는 경쟁과 낙오자에 대한 왕따 문화 등이 일반화 되어 있는 학교를 비롯한 교육기관들의 책임은 회피되는 결과를 가져왔다는 것이다. ‘문제 학생의 뒤에는 문제 가정이 있다’는 경구가 말해주는 것처럼, 청소년 음주, 흡연, 성적문란, 폭력, 금전갈취, 게임중독, 왕따 등등의 청소년 문제들은 단순한 금지와 처벌 그리고 현장정리 등의 미시적인 처방을 통해 근본적인 해결을 기대할 수 없는 복잡한 성격을 지닌 일종의 ‘징후’들이다. 적잖은 교사들이 이를 다루기 위한 거시적 안목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미시적인 처방에 머무르게 되는 가장 큰 이유는 이러한 ‘징후’를 야기 시킨 원인을 다룬다는 것이 현실적으로 너무나 큰 희생과 노력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법은 멀고 주먹은 가깝다’는 자조어린 말처럼 교사 개인이 가정과 사회 그리고 교육현장의 문제를 절차와 체계에 따라 총체적 안목에서 다루어가기란 불가능에 가깝기에, 어쩔 수 없이 눈에 보이는 문제들만 시정해 나가는 수준에 머무르게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볼링 포 콜롬바인을 통해 마이클 무어 감독은 이런 ‘어쩔 수 없는 상황’을 변화시키기 위해 책임 있는 영역 주체들이 결단하고 실천해 나가지 않는 한, 피의 악순환의 고리는 결코 끊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두려움이 우리를 구원할꺼야 볼링 포 콜롬바인이 다루는 또 다른 중요한 주제는 ‘두려움’에 관한 것이다. 마이클 무어 감독은 미국 내에서 발생하는 총기 사고에 관한 흥미로운 결과를 발견했다. 인구 대비 총기보유량이 미국보다 훨씬 많은 캐나다의 총기 사고가 연간 300여건에 불과한데 비해, 미국에서는 1만1천여 건 이상이 발생하여 캐나다에 비해 거의 35배 이상 많은 사고율을 기록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물론 여기에는 캐나다의 총기관리가 상대적으로 철저한 편이며, 총의 종류도 사냥용 등 제한된 용도의 것을 주로 판매하는 등의 차이가 반영되지 않아 단순비교에 일부 무리가 따른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이를 감안한다 해도 미국의 총기 관련 사고가 지나친 수준이라는 것을 부인하기 어렵다. 마이클 무어 감독은 이런 기이한 현상의 원인을 미국 사회가 의식적으로 또 무의식적으로 조장하는 ‘두려움’의 문화에서 기인한 것으로 진단한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자신의 생존 영역이 타인에 의해 침해를 받을 때 소극적으로는 방어적인 태도를 취하며 적극적으로는 공격적인 입장을 가지게 된다. 이러한 침해의 정도가 심각하여 생명을 위협하는 수준으로 여기게 된다면 그만큼 대응수준도 과격해 지기 마련이다. 문제는 대중 매체들이 시청률 확보를 위해, 또 여타 상업적인 영역의 기업들은 보다 많은 매출을 올리기 위한 손쉬운 방법으로 ‘공포 마케팅’ 기법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 보험을, 이 약품을, 이 제품을 사지 않으면 당신의 미래가, 건강이, 인생이 치명적인 위험과 끔찍한 불편에 처하게 될 것이라는 반 협박식의 광고들은 그 구체적인 예들이라 할 수 있다. ‘두려움’을 방법적인 수단으로 활용하는 것은 교육 영역이라고 예외이지 않다. 여전히 일선 교육현장에서는 학생 상호간의 경쟁을 유발하여 전체적인 학업성취도를 높이기 위한 ‘좋은 의도’에서 지금 열심히 공부하지 않으면, 경쟁에서 승리하지 않으면, 좋은 대학에 진학하지 못하면 인생을 망치고 말 것이라는 공포감을 암암리에 조장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심각한 것은 이러한 압력이 학교에서 뿐만 아니라 가정과 사회 전체에 편만해 있는 현실이다. 자신에게는 물론 타인과의 관계에 있어 ‘두려움’이 끼치는 가장 큰 해악은 상대방의 입장을 먼저 생각해 볼 수 있는 여유를 잃어버리게 한다는 점이다. 타인에 대한 공포심은 자기 중심적인 태도를 극대화하도록 만들고 모든 에너지를 오직 자신의 안위에 사용하게 되는 이기적인 상태를 조성하게 된다. 그리고 볼링 포 콜롬바인이 보여주는 것처럼 이런 ‘두려움’은 결국 폭력적 태도를 낳는다. 이렇듯 ‘공포 권하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학생과의 관계에 있어 진정한 교사가 가야 할 길은 오히려 명확해 보인다. 그것은 일상의 바람직한 인간관계의 기초와 마찬가지로 ‘역지사지(易地思之)’의 심정으로 상대방을 긍휼히 바라보는 마음의 여유를 유지해 나가는 것이다. 획일적인 성공의 길과 다른 학생 개개인의 특별한 차이점을 격려하며 두려움이 아닌 자신감을 북돋워 주는 것, 이를 통해 학생들 간에 그리고 학생과 교사 사이에 서로 들을 수 있는 귀를 열어 참된 소통과 만남의 토대를 만들어 가는 노력만이 시대의 흐름을 바르게 거슬러 올라가는 교육 현장을 만들어 낼 수 있다. 살펴본 바와 같이 자칫 주제의 진지한 무게에 짓눌릴 수 있을 것 같은 심각한 내용을 마이클 무어 감독은 특유의 풍자와 해학의 가벼운 방식을 이용해 역설적으로 풀어낸다. 예쁘장한 캐릭터에 욕설과 폭력적 표현을 가미한 문제 애니메이션 ‘사우스 파크’ 제작진이 폭력을 조장하는 미국사회를 풍자해 만든 단편 애니메이션의 삽입이라든지, 전설적인 재즈 뮤지션 루이 암스트롱의 ‘What a wonderful world'에 맞춘 영상으로 전쟁과 학살로 점철된 미국 근, 현대사를 개관하는 등의 창의적인 시도는 그의 작품이 다큐멘터리 수준을 넘어 하나의 영상예술작품으로 인정되는 이유를 짐작하게 해 준다. 이제 3월, 새 학기가 시작과 함께, 일선 교육현장에서 새롭게 만나게 될 아이들과의 보다 속 깊은 만남을 준비하려는 교사에게 적잖은 자극과 도전이 될 수 있는 영화 볼링 포 콜롬바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