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검색결과 - 전체기사 중 80,593건의 기사가 검색되었습니다.
상세검색초등학교 남학생 10명중 1~2명이 담배를 피워본 경험이 있는 것으로 나타나는 등 청소년 흡연이 심각한 것으로 것으로 조사됐다. 대구가톨릭의대 예방의학교실 박순우 교수팀이 지난 해 10월부터 2개월간 대구지역 초등학교 5학년생부터 고등학교 2학년생까지 9천579명을 대상으로 흡연실태 조사를 실시한 결과, 초등학교 5학년 남학생 15.9%(여학생 7.4%)가 흡연을 경험했으며 이 비율은 고학년으로 갈수록 점차 높아져 고등학교 2학년 남학생의 52.9%(여학생 34.2%)가 흡연을 해본 것으로 나타났다. 또 현재 흡연율은 초등학교 5학년 남학생이 0.9%(여학생 0.3%)였지만 이 역시 학년이 올라갈수록 높아져 고등학교 2학년 남학생의 경우 17.7%(여학생 9.9%)가 담배를 피우고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첫 흡연의 동기에 대해서는 51.3%가 호기심을 들었으며 이밖에 친구의 권유(15.1%), 아버지 등 주변 어른의 권유(6.7%), 스트레스 해소(6.6%), 재미(6.4%) 등도 흡연의 주요 동기로 꼽혔다. 현재 흡연자 중 28.3%는 스트레스 때문에 담배를 피운다고 답했고 나머지는 심심해서(16.3%), 친구 등의 권유(16.3%), 습관(13.8%) 때문에 흡연을 계속한다고 응답했다. 흡연과 일탈행위간 상관관계를 조사한 결과 최근 한달간 1회이상 음주 경험은 고등학생 흡연 무경험자의 경우 32.8%인 데 반해 흡연자는 89.9%로 높았으며, 전체 흡연자 중 33.2%(무경험자는 3.6%)가 가출을 한 적이 있고 15.8%(무경험자는 9.9%)가 자살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해본 것으로 나타났다. 또 중.고등학생 흡연 무경험자의 성관계 경험률은 0.6%인 반면 흡연자는 22.9%가 성관계를 경험한 것으로 조사됐다. 연구팀은 "많은 학생들이 초등학교 시절부터 흡연을 경험하고 있는 데다 스트레스가 흡연의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하고 흡연과 일탈행위간 연관성이 높은 점 등으로 미뤄 흡연 예방과 해소를 위한 교육적 사회적 환경 조성이 절실하다"고 지적했다.
21세기 지식, 정보화와 세계화 시대에 요구되는 교육 개혁의 요소 중에 우리가 가장 관심을 가지고 염두에 두어야 할 핵심과제는 교실 속에서 이루어지는 교수-학습 과정의 문제, 즉 교실수업의 질이다. 이 문제는 그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실제적으로 교육개혁이 지난 수십 년간 지속적으로 추진되어 왔으면서도 가시적이지 못하고 실행에 어려움이 있다는 이유로 다른 요인에 비해 우선순위에서 뒷전으로 밀리거나 소홀히 취급되었음은 부인할 수 없다. 이제는 다른 무엇보다도 수업의 질을 높이기 위한 각고의 노력이 필요하며 어떠한 문제에서 장애가 되는지, 패러다임의 변화에 따른 학교교육의 변화와 교실수업의 도약을 위하여 특히 학교현장에서 관리자가 어떻게 노력해야 할 것인지에 대한 진지한 논의가 필요하다. 敎室授業跳躍, 管理者의 役割은 무엇인가? 학교 경영의 책임자인 교장이나 중간 관리자인 교감은 학교의 전반적인 활동을 지원하고 조정하는 학교 경영자로서, 학생을 교육하는 일과 학교 교육 전반에 걸친 실제적 운영자로서의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는 관리자로서 교실수업도약의 주역인 교사의 전문성 향상은 물론 학교 교실수업의 제 문제점을 개선하고, 미래지향적인 학교경영이 되도록 다음과 같은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여야 할 것이다. 첫째, 수업의 질 향상을 촉진하는 학교 경영 방식을 추진해야 한다. 직원회의를 연수 위주의 회의로 전환하고 교사의 담임 및 업무 배정은 물론 교무실을 교과 중심의 연구실화 하는 등 관리자가 앞장서서 교실수업도약을 경영중점 과제로 설정 추진해야 한다. 둘째, 교실수업도약을 위한 기본 정보화 인프라를 구축해야 한다. ICT, LAI 수업 등 교실수업도약을 위한 기본적 여건 조성은 물론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 그리고 휴먼웨어의 세 가지 요소가 유기적인 관계를 가진 인프라가 구축될 때 참다운 교육개혁이 이루어 질 수 있고 수업의 질이 향상 될 수 있음을 인식하고 다. 셋째, 자율장학을 활성화하여 전교사의 '수업★STAR化' 분위기를 확산해야 한다. 수업의 질 향상을 위한 현직연수, 외부강사 초빙 연수, 선진학교 견학, 교과 연구회 활동의 활성화, 교사 1인 1연구 활동, 공개 수업 등 교사 간 수업 기술을 공유하는 체제를 구축하는 등 자율장학의 활성화하여 교사들의 전문성을 신장시켜야 한다. 넷째, 학생 중심의 교육과정을 만들어가야 한다. 도서관, 탐구실, 실험실, 자습실 등을 개방적으로 운영하여 학생들에게 선택 기회를 넓히고 자발적인 탐구의 기회를 많이 제공함으로써 자율과 창의성을 신장하고, 학생 수준을 고려하는 다양한 교육과정을 편성·운영함으로써 학습자 중심의 자기주도적학습 능력을 신장시켜야 한다. 학교에서 교실수업도약의 과제는 교육환경과 여건의 개선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교사 개인의 교과에 대한 전문적 역량을 개발하고 열정을 갖는 일이다. 이를 위한 교사 아니 스승의 역할이 그 어느 때보다 필요하며, 학교현장에서 이루어지는 교실수업의 도약이 절실한 시기이다. 따라서 교장과 교감은 행정가로서만이 아니라 전문직으로서 교사들의 전문성을 보다 높여주기 위하여 노력하여야 한다. 교사들의 전문성 신장을 위한 자율적인 노력과 신념의 배양, 교과에 대한 전문적 소양과 깊은 이해, 학생에 대한 애정, 교육의 가치에 대한 열정, 교육활동 전 영역에 대한 바른 이해와 협조 분위기 조성에 노력함으로써 궁극적으로는 교실수업이 한 단계 도약할 수 있도록 그 역할을 다해야 할 것이다.
경북대와 상주대간 통합 논의가 대학 구성원 갈등을 비롯한 풀어야할 과제만 남긴 채 8개월여만에 완전 무산됐다. 교육부 관계자는 "지난달 30일 경북대가 제출한 경북대-상주대 통합지원신청서에 대해 상주대 총장의 직인을 포함한 문서보완을 요청했으나 정해진 기일 내에 보완이 이뤄지지 못했다"고 1일 밝혔다. 이로써 지난해 12월 '경북대-상주대 통합추진 공동연구단' 구성으로 본격화된 양 대학간 통합 논의는 8개월여만에 완전 무산됐다. 경북대는 이날 '상주대와의 통합무산에 즈음하여'라는 제목의 성명서를 통해 "상주대 총장의 독선으로 인해 대학 통합논의가 무산됨으로써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면서 "상주대 총장의 일방적인 통합거부 선언은 경북대학교의 여타 기회를 원천적으로 차단하는 비도덕적 해교행위"라고 강력히 비난했다. 경북대는 또 "통합 파트너 대학에 막대한 피해를 입힌 상주대 총장에 대해 관계기관에 철저한 조사 및 책임추궁을 요구해 나갈 것"이라고 밝혀 양 대학간 갈등도 당분간 지속될 전망이다. 그러나 양대학은 통합 논의 과정에 교수와 학생, 교직원들이 찬반 양측으로 나뉘어 극한 대립을 보인 상태여서 갈등은 쉽사리 해소되기 어려울 전망이다. 상주대 교수협의회 등으로 구성된 통합추진비상대책위원회는 문서보완 시한(이날 오후 6시)을 3시간 가량 앞두고 본관 애일당에서 비상총회를 개최, 비대위를 해산하는 대신 비대위의 모든 권한을 평교수 등으로 구성된 교수협의회 평의회에 위임키로 했다. 특히 평의회는 비대위가 그 동안 추진해온 김종호 총장을 대상으로 한 직무정지가처분신청을 비롯, 총장 퇴진 운동을 계속할 것으로 알려졌다. 비대위 관계자는 "통합 추진 과정에 보여준 김 총장의 무관심과 무책임은 대학을 큰 혼란에 빠뜨렸기 때문에 상주대학교의 경영권한을 더 이상 부여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판단된다"고 밝혔다. 경북대 총학생회와 직원노동조합 등으로 구성된 민주단체협의회도 보도자료를 통해 김달웅 총장을 맹비난하고 조속한 대학 정상화를 촉구했다. 민주단체협의회는 "통합 논의 과정에 대학 구성원과 사제간에 학자적 양심을 걸고 한 약속을 파기하고 상주대 총장과 상주 시민을 일방적으로 무시하는 듯한 경북대의 모습을 보면서 교수의 학자적 양심과 대학을 대표하는 총장의 인격을 걱정하게 된다"고 밝혔다. 민주단체협의회는 "대학은 하루빨리 정상적으로 운영되어야 한다"면서 "대학의 진정한 민주화를 위해 교수, 학생, 직원은 본연의 자세로 돌아와주기를 희망한다"고 촉구했다. 또 경북대와 상주대는 이번 통합 무산으로 각각 자체구조조정, 신입생 충원에서 앞으로 상당한 어려움이 예상되고 경북대와 상주대간 갈등도 풀어야할 숙제로 남았다. 최근 수년간 신입생 충원율이 60%대에 머물렀던 상주대는 경북대와의 통합 논의가 시작된 2005학년도에는 충원율이 80%까지 치솟은 점을 감안할 때 통합 무산으로 또다시 신입생 충원율이 크게 하락할 것으로 전망됐다. 경북대도 교육부 대학구조개혁방안에 따라 2007년까지 입학정원의 10%(440여명)를 자체적으로 줄여야 해 통폐합 대상 학과 선정과 추진 과정의 반발도 만만치 않을 전망이다.
1일 실시된 충북교육감 보궐선거에서 과반수 득표자가 없어 1, 2위를 차지한 박노성 후보와 이기용 후보가 3일 결선투표를 벌이게 됐다. 이날 선거에서 박 후보는 1367표(33%), 이 후보는 1173표(28.3%)를 각각 얻었다. 류태기 후보(495표 12%), 이승업 후보(454표 11%) 등 나머지 6명의 후보는 결선 진출에 실패했다. 개표뒤 결선투표에 진출한 2명의 후보는 "끝까지 깨끗한 선거가 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약속했다. 박 후보는 "1위 여세를 몰아 결선투표에서도 승리하겠다"고 의욕을 보였으며 이 후보는 "상승추세를 보인 만큼 결선에서는 다른 결과가 나올 것"이라며 역전에 대한 자신감을 보였다. 이날 선거는 4763명의 선거인단 가운데 4142명이 투표해 87%의 투표율을 기록, 2002년 4월 보궐선거 투표율 95.1%, 2003년 11월 12대 교육감 선거 투표율 93.6%에 비해 투표율이 낮았다. 도선관위는 결선투표를 앞두고 선거인 매수행위를 막기 위해 후보자들에 대한 감시를 강화키로 했다.
이해찬(李海瓚) 총리는 1일 "두뇌한국21(BK21) 2기 사업은 평가에 따라 중도탈락할 수 있다는 인식을 갖도록 해야 한다"고 밝혔다. 이 총리는 이날 오전 확대간부회의를 주재한 자리에서 최근 문제가 된 서울대 연구비 유용문제를 거론하면서 "제도를 정비해서 이런 사건이 다시는 재발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면서 이같이 말했다고 이강진(李康珍) 총리 공보수석이 전했다. 이 총리는 "시대의 잘못된 유죄들이 하나씩 정리되기 시작하고 있다"면서 "연구비 유용문제가 온정주의에 의해 지속되지 않도록 제도를 정비해 철저히 관리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는 특히 새로 시작되는 BK21 2기 사업과 관련해 "지난번 1기때는 SCI(국제과학논문색인) 연구논문을 많이 써 내는 정도의 성과를 얻었는데 이제는 특허, 산학협정, 기술이전 등 원래의 BK21 목적에 좀더 가깝게 갈 수 있도록 사업계획을 세우고 관리할 수 있는 체계를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이어 "적어도 사업단이 평가에 따라 중도탈락할 수도 있다는 인식을 갖도록 해야하며 한번 받아 7년 무한정 가면 그 과정에서 누수가 발생한다"면서 "하위 5%(실적 부진한 대학)에 대한 온정주의 때문에 탈락을 시키지 못하면 나머지 95%가 평균 80점 밖에 받지 못하게 된다"고 지적했다. 이 총리는 "그런 점에서 냉정하게 평가를 해야되고 냉정한 평가는 전체의 질을 높이게 위해 도리가 없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 총리는 이와 함께 부동산대책과 관련, "금융을 바로잡고 세제를 정비하며 불로소득을 방지해 수요에 맞춰 공급하는 그런 종합적인 대책을 만들고 있다"면서 "그동안 막연한 수요예측으로 수요와 공급의 미스매칭이 있었는데 소득계층별로 원하는 평형에 대한 수요조사를 정밀하게 해서 공급대책에 포함시켜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 총리는 이밖에 "지난번 당정 협의회에서 사회적 일자리 10여만개 만들기로 했는데 이제는 일시적인 공공근로가 아니라 간병인 등 계속적으로 필요한 사업이 무엇인지를 발굴해 사업에 반영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고려대와 고려대병설보건대학, 삼육대와 삼육의명대학 등 8개 사립대학이 이르면 2006학년부터 4개 대학으로 통ㆍ폐합된다. 교육인적자원부는 2005년도 대학구조개혁 지원사업의 하나로 추진하고 있는 사립대학의 통ㆍ폐합 신청을 마감한 결과 8개 대학이 신청서를 냈다고 1일 밝혔다. 통ㆍ폐합 신청 대학은 고려대학교-고려대병설보건대학, 삼육대학교-삼육의명대학, 가천의과대학교-가천길대학, 을지의과대학교-서울보건대학 등이다. 학교법인 고려중앙학원은 고려대병설보건대학의 입학정원 474명(60%)을 감축, 고려대와 통합한 뒤 고려대에 보건과학대학을 설치해 보건ㆍ의학 기술 분야 고급 인력을 양성한다는 계획서를 제출했다. 학교법인 가천학원은 가천길대학의 입학정원 1201명(61%)을 줄여 가천의과대학교와 통합한 뒤 가천의과대학에 가천생명과학연구소 등을 설립해 이를 통한 의학-생명과학-보건과학 분야의 특성화를 추진할 예정이다. 또한 학교법인 삼육학원은 삼육의명대학의 입학정원 676명을 감축해 삼육대학교와 통합하고 학교법인 을지학원은 서울보건대학의 입학정원 1천315명을 줄여 을지의과대학교와 통합하기로 했다. 이들 대학이 통ㆍ폐합되면 전문대학 입학정원 3646명이 줄어든다. 신청서를 내지는 않았지만 조선대학교-조선간호대학은 통ㆍ폐합을 위한 법적 절차를 밟고 있으며 동명정보대학교-동명대학, 탐라대학교-제주산업정보대학, 연암공업대학-천안연암대학 등은 통ㆍ폐합에 대한 구성원들의 의견을 모으고 있는 것으로 교육부는 파악했다. 교육부는 앞으로 수시로 통ㆍ폐합 신청을 접수받기로 했으며 이번에 통ㆍ폐합을 신청한 대학에 대해서는 이달중 심사를 거쳐 허용 여부를 최종 결정할 예정이다. 이에앞서 국립대학 통ㆍ폐합과 관련해서는 전남대-여수대, 강원대-삼척대, 경북대-상주대, 부산대-밀양대, 충주대-청주과학대 등 10개 국립대학이 신청했다.
맞벌이 부부 자녀들을 위해 종일반을 운영하는 공립유치원이 3년 사이 배 이상 늘어난 것으로 나타났다. 1일 충북도교육청에 따르면 도내 공립유치원 235개 가운데 140개가 종일반을 운영해 59.6%를 차지했다. 이는 3년전인 2002년 62개에 비해 배가 넘는 78개가 늘어난 것이며 4년전인 2001년 40개에 비해서는 3배 이상 증가한 것이다. 이 가운데 청주 산성유치원과 덕성유치원 등 8개 유치원은 오후 8시까지 종일반을 운영하고 있다. 사립유치원도 90개 가운데 70% 63개 유치원이 종일반을 운영하고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도교육청 관계자는 "맞벌이 부부들의 요구에 따라 종일반 운영이 늘고 있는 추세"라며 "다양한 프로그램 개발을 통해 종일반이 알차게 운영될 수 있도로 지도할 방침"이라고 말했다.
방학이라 모처럼 한가한 시간을 내어 관사 주변을 산책하기로 하고 우리집 꼬맹이와 함께 동행을 했다. 강화도는 유적지가 많기로 이미 알려진 역사의 고장이다. 그러기에 옛 전적지의 잔해 하나하나가 그 흔적을 말해 주곤 한다. 내가 기거하는 관사에서도 얼마 떨어져 있지 않는 도로 옆에 낯선 사당이 있어 우연히 들려 보았다. 그 곳은 장무사 황현장군의 위패를 모시는 곳이었다. 황현 장군의 묘를 향해 풀에 가득 달려있는 이슬을 털면서 묘소 앞에 당도하여 장군의 큰 업에 고개숙여 감사하는 마음으로 묵념을 하였다. 한 민족이 유구한 역사를 면면히 지켜 오면서 수많은 멍에를 안고 있지만, 그 속에서 민족을 위해, 국가를 위해, 자신의 몸을 헌신짝같이 바친 성인들의 자취와 얼이 담긴 유적지를 찾는 것은 그 분들의 인품이 후손들에게는 인성 교육의 장이 되기 때문이요, 역사의식을 아로새겨 조국애를 길러 가기 때문이다. 황현 제당을 관리하는 후손과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는 가운데 황현 장군은 북방 오랑캐를 퇴치시키는 일과 왜구 토벌에 큰 공이 있는 인물임을 알게 되었다. 그의 17대 후손 황사영은 백서사건으로 고초를 당하였지만, 그는 황현 장군의 위대한 공적 덕에 임금께서 고초를 사면해 준적도 있다고 후손은 덧붙여 말하곤 했다. 역사의 인물을 보존하고 지켜가는 우리의 인식이 아직도 부족한지 인물의 보존에 필요한 땅이 국가에서 내려졌어도 그 땅을 잘 지켜가는 곳은 드물고, 종중의 관리로 이어지면서 서서히 사라지고 어떤 인물은 무덤이 차지하는 좁은 땅을 간직하고 있는 경우도 허다하다. 특히 인물들의 유적지는 현대식 가옥으로 개조된 곳도 있어 아쉬울 때도 있다. 여태껏 두루두루 다녀 역사 인물들의 자취를 찾아볼 때마다 두드러진 인물만이 그 존재 가치를 높이 평가받고 있는 느낌이었다. 일제시대 이전에 작고하신 분들의 평가는 그가 차지하고 있는 무덤의 넓이로 추산되었다. 하지만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오늘의 우리들의 역사는 무명의 한 사람 한 사람의 힘에 의해 이룬 것이지, 결코 위대한 인물 한 사람의 힘에 의해 지켜온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후학들에게 인식시켜 주어야 한다. 황현 묘소 앞에 서서 아래를 보며 많은 방문객이 찾지 않은 탓인지 묘소에 이르는 곳이 깨끗하게 다듬어져 있지 않고 제당에 이르는 길도 잡초로 얼룩져 있는 것 같아 아쉬움만 더해갔다. 강화도 불은면쪽에 있는 역사 인물 이규보의 묘소도 찾는 이가 많지 않지만 그 옆에 제각이 있고 관리해 주는 흔적이 있어 묘소 주변에 우거진 풀들이 묘를 침범하지 않도록 잘 다듬어 놓았다. 하지만 역사의 성터와 전적지를 나타내는 곳들은 아직도 방치되어 있는 곳이 있다. 예산이 부족하다 인력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그 관리가 소홀해지는 느낌을 받지 않도록 했으면 하는 바람이 불현듯 느껴지기도 했다. 바캉스를 위해 도로가 미어져 짜증내면서도 휴양지 곳곳을 찾아가는 것도 여름에 맛볼 수 있는 진풍경이라 누구나 그런 환희에 젖고 싶은 생각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초등학교를 둔 부모와 중학생을 둔 부모님은 역사 인물 기행전을 패키지로 만들어 전국을 순례형식으로 다녀보는 것도 일거양득이 아닐까 싶다. 물론 인터넷에 들어가면 다 있는 것을 굳이 찾아가느냐고 하는 이도 있을지 모르나 백문이 불여일견이라고 했다. 역사에 알려지지 않는 인물들의 터전을. 최근에 인성교육의 부재가 온 나라를 시끄럽게 굴게 하는 우리 사회의 도덕 불감증이 이성의 불감증으로 생각하는 인물들은 많지 않는지. 바른 자녀교육에 바른 부모가 있고, 위대한 인물 뒤에 훌륭한 스승이 있음은 고금을 통해 전해오고 있는 격언이 아닌가? 황현장군의 묘소를 찾아보고 인천 영종도 해변가에 있는 영화 촬영 세트장을 찾아 보았다. “슬픈 연가”를 촬영한 곳이라는 팻말이 배에서 내려 자동차를 타고 갈 때 누구나 알 수 있게 안내판에 크게 써 놓았다. 그런데 정작 황현장군의 묘소가 어디에 있는지는 강화도에 들어와도 안내판 어디에도 없다. 나 역시 관사에서 1키로 정도 떨어져 있는 곳에 그 분의 묘소가 있는 곳을 모르고 지낸 것도 들어가는 입구 500미터 앞에도 안내판이 없다는 이유 아닌 이유를 덧붙이고 싶다. 세트장은 뭇 사람에게 알려 장사를 해야 생계를 유지해 나간다는 미명하에 우선시되는 것은 인정한다고 하자. 하지만 황현장군의 입구에 팻말 하나 없는 아쉬움에, 영종도 바닷가 모래 위에 만들어 놓은 조각공원의 조각품들이 관리 소홀로 망가지고 부서져 있는 것을 보면서, 이형기의 시 “폭포”를 연상해 보았다. 폭포의 물기둥이 떨어지는 곳의 푸른 물은 인간의 일상사에서 당하는 멍에와 같은 것이라고. 그 멍에가 있기에 인간은 고뇌하며 삶에 대한 애환를 맛보기도 한다고.
방학을 맞아 선생님들의 연수 열기가 삼복더위보다 뜨겁다. 한국교총에서도 올여름 300명의 교원들이 현장교육연구방법론 등의 연수를 받는다. 게 중에는 지방에서 올라와 하숙방을 얻어놓고 수고하는 열성파도 있다. 노력과 시간은 물론, 경제적 부담도 적지 않을 것임은 짐작하고도 남는다. 모두들 학점, 또는 승진점수를 따기 위해 자발적으로 연수에 참여하고 있다. 하지만 교육청에서 연수 경비를 지원받은 교원은 별로 없는 것 같다. 그런가하면 최근 3년동안 연수를 한번도 받지 않았다는 교원들이 20%가 넘는다는 연전의 조사결과도 있었다. 현행 체계로는 승진에 관심이 없고, 연수의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 사람은 교직생활 3년이 지나면 받게되는 1급정교사 자격연수만 받고 나면 나머지 30여년 동안을 연수한번 받지 않아도 교직을 유지할 수 있도록 돼 있다. 실제로 그런 교원은 한사람도 없겠지만, 한마디로 승진에 목마른 사람은 스스로 돈들여 가며 우물을 파고, 싫으면 관두라는 식이다. 지식기반 사회, 평생학습 시대를 맞이하여 온 국민들이 생애교육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고, 기업체에서는 직원연수에 명운을 걸고 투자를 아끼지 않는 이 때, 정작 가르치는 일을 업으로 삼고 있는 교원들의 연수 체계가 이렇게 허술해서야 될 일인가? 교원 연수의 중요성은 재론의 여지가 없는 만큼 정부는 교직 생애에 걸쳐 단계별로 자기가 필요로 하는 내용을 시간적, 경제적 부담없이 받을 수 있는 체제를 서둘러 갖추어야 한다. 4년 이상을 공들여 양성한 교직인재들이 2, 30년이 지나도 변함없는 열정으로 시대를 이끌어갈 수 있도록 인력관리를 해야 할 책임이 국가에 있다. 연수체제 개편에 관해서 교육부는 올해 대통령 업무보고에서 -교직 전생애에 걸친 전문성 개발에 중점을 두고 연수프로그램 개선, - 교직수행 필수분야에 대한 주기적 연수이수제 도입 추진, -연수기회 확대 및 연수비 지원 등을 계획하였다. 기실, 이같은 계획은 표현만 달리하면서 수년동안 거듭되고 있다. 문제는 실천이다. 하반기를 넘어선 이 시점에서 제대로 진행되고 있는지 궁금하다. 교육부의 답변을 기다린다.
앞으로 가짜 단속카메라 사라질 것으로 보인다. 모형 무인카메라 9월까지 철거된다고 한다. 내용인즉 경찰청은 “전국의 모형 무인단속 카메라 2466대 중 경찰이 설치한 1109대를 모두 철거할 방침”이고 나머지 1357대의 모형 카메라도 조속히 철거하도록 지방자치단체와 한국도로공사에 협조를 요청할 계획이라는 것이다. 이는 모형 카메라가 교통사고 예방에는 기여하지만 법을 집행하는 기관이 결과적으로 국민을 속이는 셈이어서 인권침해 요소가 있다는 시민단체 등의 지적에 따른 것이라고 한다. “허허, 내가 너무 구세대인지, 세상이 빨리 변하는 건지? 내가 세상을 못 쫒아가는건지?” “인권이라는 단어 희한하게 갖다 붙이네….” “시민단체의 말 잘도 먹혀 들어가네.” 가치관이 급변하고 있다. 어찌보면 혼돈의 세상이다. 모형 카메라가 교통사고를 예방하여 국민들의 수많은 소중한 생명을 구한 것이 사실이라면 그대로 두어도 괜찮을 법도 한데 철거를 한다니 아쉽기만 하다. 그것이 인권을 침해한 것인지? 인권이 사람의 생명보다 더 중요한 것인지? 그렇다면 경찰청에 묻고 싶다. 과속을 방지하기 위하여 아파트와 사람 통행이 많은 곳, 사고 다발지역에 마치 도로의 과속방지턱처럼 보이게 한 노란색 페인트칠은 어떻게 할 것인지? 그러면 이것도 결국엔 사람을 속인 결과가 되므로 모두 없애야 되는지? 우리 교육자들은 학생들에게 가치판단을 가르치고 있다. 예컨대, 환자가 있어 의사의 정밀진단에 의해 불치의 암에 걸려 시한부 생명이라는 결과가 나왔을 때 이 사실을 환자 본인에게 알려 주어야 하느냐 마느냐의 문제가 있다. 환자의 나머지 행복한 삶을 위하여 본인에게 알리지 않고 쉬쉬하는 것이 좋은지? 거짓말은 나쁘니까, 환자의 알 권리도 있으니까, 인권을 중시하여 사실대로 알리는 것이 좋은지…. 참여정부에서 하는 일, 이번 일 뿐만 아니라 심사숙고가 부족한 듯 싶다. 대통령부터 연정(聯政)이니 대통령의 권력 이양이니, 정권을 내놓는다는 둥 헌법을 자의로 해석하고 대통령으로서 해서는 안 되는 ‘막가는 듯한 말’을 줄줄이 하고 있다. 국민들의 살림살이를 걱정하는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국민이 공감하지 못하는 독선과 오만, 때로는 협박으로 들리는 말도 서슴지 않는다. 대통령으로서 냉철한 균형 감각을 잃고 외곬으로 빠져드는 느낌이 들어 이대로 가다간 나라가 위태로워질 것 같기만 하다. 잘하리라 기대하진 않았지만 나라를 말아먹으라고 국정을 맡긴 국민은 하나도 없을 것이다. 국민을 편안하게 해 주는 대통령, 국민의 생명을 보호하고 안전을 지켜주는 경찰. 이것이 그렇게 어려운 일일까? 작은 일이지만 국민의 편에 서서, 국민의 삶의 질 향상이라는 입장에서 일을 처리할 수는 없을까? 어느 한쪽의 말만을 일방적으로 듣고 가볍게 처리하는 것이 아니라 그 반대편에 서서 한번쯤 심사숙고해야 하지 않을까? 참여정부는 집권 반이 지나도록 ‘시행착오를 반복하는 아마추어 정부’라는 말을 여전히 듣고 싶을까? 참여정부는 그렇게 자존심도 없나? 리포터는 가짜 단속 카메라에서 교육을 생각하고 우국(憂國)까지 이르렀다. 교육자가 교육을 생각하고 교육에만 전념하는 세상이 그립다.
글 | 박하선/사진작가·여행칼럼니스트 불교문화의 자긍심 '아잔타와 엘로라' 불교가 인도 대륙에서 발생한 이래 아시아 전역으로 확산되었고 곳곳에서 그 꽃을 활짝 피워 왔다. 그리고 오늘날까지도 그 열기가 대단하다. 하지만 정작 그 본고장에서는 오래 전에 이슬람이나 힌두교 등에 밀려서 발생지 일원에서나 겨우 피폐해진 흔적들을 부둥켜안고 명맥만을 유지해 오고 있는 형편이다. 그만큼 인도 대륙에서는 불교가 현지 사람들에게 잊혀진지 오래되었고 찬란했던 많은 문화유산들도 함께 버려지고 잊혀져 왔던 것이다. 그 버려진 불교의 문화유산 중에서 엄청난 규모를 자랑하는 석굴 군이 인도 대륙의 남과 북을 갈라놓고 있는 '데칸고원'에서 발견되어 세인의 이목을 집중시키게 만들었는데, 그것이 바로 '아잔타'와 '엘로라' 석굴이다. 당시 이 두 석굴의 발견은 곧 인도 대륙 내의 불교문화에 대한 자긍심을 심어 주고도 남을 만한 사건이었다. 그러니까 인도에서 불교가 발생했다는 면모를 과시하는데 한몫을 한 셈이라고나 할까. 밀림 속에 잠들어 있던 석굴 사원 '아잔타' 아잔타 석굴이 발견된 것은 참으로 우연한 일이었다. 1819년 영국 관리들이 이 데칸고원 일대에서 사냥 중에 호랑이를 쫓다가 밀림에 묻혀 있던 암벽 사이의 동굴을 발견하게 된 것인데, 그 안에는 휘황한 채색벽화, 각종 조상(彫像)들이 있었고, 그 일대가 온통 그와 같은 석굴의 집합소라는 것을 알고 놀라움을 금치 못했던 것이다. 당시 거의 대부분이 매몰되거나 야생의 넝쿨 때문에 접근이 불가능하였지만 몇 군데는 비교적 원형을 잘 보존하고 있었다고 한다. 이후 영국 정부에 의해 한 차례, 인도 독립 후 두 차례에 걸친 발굴·복원이 있어 그 결과 세계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오래된 불교 유적지의 하나로서 알려지게 된 것이다. 말발굽처럼 휘어진 '와고르(Waghore)' 천변(川邊)의 암벽 지대를 따라 펼쳐져 있는 이곳은 대략 500m에 걸쳐서 30개의 석굴 사원이 뚫려 있는데, 모두 자연 암벽을 뚫고 들어가면서 기둥을 만들고 불상이나 불탑을 만드는 수법으로 완성한 석굴이다. 근래에 들어서 입구에서부터 순서대로 번호를 매겨 놓고 있는데, 1번부터 26번까지가 완성된 석굴이고 27번부터 30번까지는 미완성이다. 석굴 하나 하나가 입구에서만 바라볼 때는 별것이 아닌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막상 안으로 들어가 보는 순간 그 엄청난 규모, 현란한 조각, 벽화들이 소문을 사실로 증명하고 있다. 당시 별다른 기계도 없었을 텐데 무슨 재주로 이렇게 어마어마한 일들을 해낼 수 있었단 말인가! 이곳의 역사는 기원전 2세기경에 남북을 오가던 불교 승려들이 우기에 비를 피해 수행을 계속할 수 있도록 석굴 승원(비하라)과 탑원(차이타야)을 판 것에서 비롯되었다고 보고 있다. 이곳을 수행지로 선택한 것은 남북을 연결하는 교역로가 가까이에 있어서 식료품과 물자 구입이 그만큼 손쉬웠고, 교역로에서 적당히 떨어져 있어서 수행과 명상을 방해받지 않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곳에 거주해 오던 승려들이 기원전 1세기경에 돌연 자취를 감추게 되어 일시적으로 이 석굴들은 버려진 신세가 되고 말았다. 이 초창기에 조성된 석굴이 제8, 9, 10번과 제12, 13번 굴로 이른바 소승불교 시대를 말해 주고 있는데, 이중에서도 가장 오래된 것은 제9번과 10번 굴이다. 이 시대에는 무불상 시대의 특징대로 부처님의 모습을 직접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본당 중앙에 거대한 돔을 연화대 위에 안치하였다. 그것은 그냥 종을 엎어놓은 듯한 형태로서, 높다란 천정과 장중한 안정미를 주고 있다. 또 좌우에는 회랑의 형식으로 기둥을 깎아 놓고 사람이 걸을 수 있도록 하였으며, 그 벽면에는 부처님의 발자취를 그림으로 표현해 놓았다. 수도승들의 노력이 이뤄낸 문화 유산 그 후 4세기에 들어오면서 다시 승려들이 이곳 아잔타에서 수행을 시작하며 석굴을 파기 시작했다. 이 시대는 이른바 대승불교 시대로 부처님이 불상의 모습으로 표현되고 있다. 그러니까 석굴의 입구에 들어서면 여러 개의 기둥으로 떠 받혀 있는 큰 홀이 있고 그 뒤로 작은 감실(龕室)이 있어 그곳에 부처님을 모셔놓고 있는 형태가 일반적이다. 그 중에서 19번 굴의 불상이 특이하고 26번 굴의 거대한 열반상이 인상적이다. 이 아잔타의 석굴들은 대개 자연의 빛을 이용하기 때문에 상당히 어둡다. 특히 오전에는 거의 볕이 들지 않고 오후에야 한 가닥 석양빛이 문틈을 타고 내려앉는다. 또 이곳 아잔타에 남아있는 유명한 벽화들도 거의가 후기에 그려진 것들이다. 특히 1번 굴의 연꽃을 들고 있는 보살상은 아잔타의 벽화를 대표하고 있으며, 2번과 4번 굴에 남아 있는 석가모니의 일대기는 상당 부분이 훼손되기는 했지만 세밀함은 물론이요, 색감과 질감에 있어서도 완벽 그대로다. 원래 기둥들과 천장 그리고 벽면들마다 모두 벽화가 빽빽이 들어서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에 와서는 천장이나 기둥들에 있었던 것들은 거의가 없어지고 벽면에만 주로 남아있는 형편이다. 하지만 이것들도 훼손의 정도가 심해 아쉬움을 자아내고 있다. 그러나 이렇게 엄청난 역사를 이루었던 이 아잔타 석굴이 8세기에 접어들면서 불교가 쇠퇴함에 따라 모두들 어디론가 떠나버려 천년이 넘는 세월 동안 밀림에 묻혀 잠자고 있었던 것이다. 수많은 낮과 밤에 돌을 깎으면서 불은(佛恩)을 생각하였을 수도승들을 생각해 본다. 그들에게 있어 결과보다는 과정이 더욱 중요했을 것이다. 어쩌면 이것은 우리 모두에게도 해당되는 사연일지도 모른다. 어쨌든 그들은 이 엄청난 문화유산을 남겼고, 지금은 모두 떠나고 이 자리에 없다. 이 몸이 무슨 인연으로 이 자리에 서게 됐는지는 몰라도 그분들의 사연을 어찌 다 알 수 있겠는가! 하지만 덧없는 시공을 뛰어넘어 느껴 보는데는 부담이 없다. 엘로라의 대표적인 사원 '카일라사나트' 아우랑가바드에서 서쪽으로 30㎞밖에 떨어져 있지 않는 '엘로라' 석굴은 아잔타와는 달리 시야가 확 트인 바위 구릉 지대에 조성되어 있는 34개의 석굴사원이다. 이 엘로라 석굴 또한 아잔타와 거의 비슷한 시기에 이루어진 것이지만, 6세기 이후 점차 불교가 쇠퇴해감을 틈타 힌두교와 자이나교 사원이 옆에 들어서게 되어서 약 200년쯤 후대에까지 이른다. 그래서 불교 석굴, 힌두교 석굴, 자이나 석굴이 정연하게 나열되어 있다. 아잔타의 석굴이 아름다움으로 사람을 사로잡는다면, 이 엘로라 석굴은 그 엄청난 규모 면에 있어서 우선 사람을 사로잡는다. 그 대표적인 석굴이 중앙에 위치하고 있는 '카일라사나트' 사원이다. 엘로라에 와서 이 카일라사나트 사원을 먼저 봐 버리면 다른 곳이 재미없어진다고 할 정도로 보는 이들을 압도하는 곳이 바로 이 힌두교 사원이다. 작은 산처럼 눈앞에 우뚝 솟아 있는 이 사원은 힌두의 신 '시바'를 상징하고 있는데 본당의 높이가 33m, 넓이가 47m에 이른다. 그리고 그 정문, 법당, 석탑 등이 모두 하나의 돌로 이루어졌고, 그 건물들의 외벽은 모두 현란한 부조와 힌두신상 등이 빽빽이 들어서 있다. 이 엄청난 규모와 섬세함이 당시 인간의 힘으로 이루어졌다고는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다. 거대한 암벽을 위에서부터 차츰 아래로 파 내려오면서 이루어 낸 이 사원은 756년에 공사를 시작하여 완성하기까지 100년 이상이 걸렸다고 하니 수 세대에 걸친 대공사였을 것이다. 보는 이들마다 탄성을 연발하는 이 카일라사나트 사원! 인간의 힘이 얼마나 위대한 가를 유감없이 보여주는 현장이다. 너무도 상대적이지만, 동시에 위대한… 이 엘로라 석굴을 아잔타 석굴과 비교해 본다면, 아기자기한 여성적인 면을 지니고 있는 것이 아잔타이고 엘로라는 우람한 남성미를 지니고 있다. 또 아잔타가 벽화를 들고 나온다면 엘로라는 조각을 말해 줄 것이다. 이처럼 상대적인 멋을 지닌 이 두 곳을 보고 나면 실로 종교의 힘이 위대하고, 인간의 능력은 무한하다는 것을 실감한다. *고대 불교 유적의 신비로움을 새교육 8월호를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글 | 김연수/생태사진가 미조(迷鳥)에서 서산시의 상징으로 변신 흐르는 강물 위에서 다리가 붉고 긴 롱다리 수컷들이 혈투를 벌이더니 이내 짝을 지어 쌍쌍이 사랑을 나누고 있다. 희귀조 장다리물떼새가 올해도 충남 서산시 천수만의 부남호 상류에 찾아와 귀여운 2세를 낳기 위한 짝짓기에 여념이 없다. 이들은 짝짓기가 끝나면 부리를 맞대고 서로를 다시 확인한다. 몸길이 36cm에 비해 키는 67cm정도로 습지에서 잘 적응 되도록 긴 다리로 진화됐다. 날개와 등, 머리 위가 검푸른 빛깔이고 배, 목, 뺨은 흰색이다. 간척지·습지·바닷가·논·호수·삼각주 등지에 찾아와 얕은 물에서 먹이를 찾아 조용히 걸어다니다가 멈출 때는 몸을 위아래로 흔든다. 헤엄을 잘 치고 날 때는 긴 다리를 꽁지 밖으로 길게 뻗는다. 4∼8월에 3∼5개의 알을 낳는다. 물에 들어가 개구리와 올챙이·도마뱀·물고기·곤충·조개 따위를 잡아먹는다. 국내도감에는 제주 성산포나 낙동강하구에 봄·가을에 이따금씩 나타나는 길 잃은 새로 표시되어 있으나, 11년 전 이해순씨(서산농장연구원)가 천수만 상류에서 번식하는 10여 쌍을 처음 발견했다. 그 후에 매년 조금씩 늘어 한 때 100여 쌍 이상의 장다리물떼새들이 이 곳에서 둥지를 틀고 번식했었다. 천수만은 일반 농경지와 달리 모내기를 하지 않고 볍씨를 비행기로 직파했었고 일반인들의 출입이 제한되어 벼가 어느 정도 자라기 전에는 인간의 손길이 미치지 않았었다. 따라서 자연습지와 비슷한 천수만 논은 이들에게는 천혜의 번식 장소였던 셈이다. 이에 서산시에서는 가창오리와 함께 장다리물떼새를 시의 상징새로 선정하였다. 환경 개발로 점점 개체수 감소 그러나 천수만의 장다리물떼새는 2002년을 기준으로 점차 줄고 있다. 2005년 6월 겨우 10여 쌍 정도가 둥지를 틀고 있다. 현대건설에서 영농하던 간척지가 일반인들에게 분양되면서 농약과 화학비료의 사용량이 증가하고, 비행기 직파가 아닌 모내기로 벼를 심고 있어 천연습지의 모양이 사라졌다. 장다리물떼새 유조(留鳥)의 먹이인 깔다구들의 대규모 무리도 보이지 않는다. 그들이 이 곳에 정착을 하여 매년 개체수가 불어나는가 싶더니 불과 몇 년 사이에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고 있다. 자연을 사랑하고 천수만을 아끼던 사람들은 새들의 낙원 천수만이 이제는 더 이상 낙원이 아니라고 걱정하고 있다. 불과 몇 년 사이에 천수만 자연환경은 이렇게 급격하게 악화되었는데 개발론자들은 천수만을 산업, 위락단지로 전환시키려는 계획을 꾸준하게 추진 중이다. 급기야 지난 5월 개발이익을 맛보려는 일부 주민들까지 가세해 천수만 철새도래지를 불살라버리는 시위도 벌어졌다. 전국에 불어닥친 부동산가격 폭등의 광풍 속에서 생태보전지역으로 개발이 제한된다면 그로 인해 재산가치가 떨어진다는 땅 소유자들의 하소연은 이해가 된다. 그러나 이 땅은 본디 갯벌로 그 누구의 땅도 아닌 지역주민과 갯벌생태계 속 생물들이 공유하는 삶의 터전이었다. 땅 가치하락의 손해배상책임은 자연이 아니라 정부에 있다. 아니 오히려 오염 안된 곳이 후세에는 땅의 재산가치가 몇 십 배 높을지도 모른다. 우리 땅에서 쉴 수 있도록 해야… 가냘픈 몸매로 먼 남쪽에서 긴 여행 끝에 비교적 오염되지 않은 천수만을 찾아 둥지를 쳤던 장다리물떼새들은 더 이상 이곳을 찾지 않을 것이다. 좀더 멀리 북상하여 인접한 북한이나 러시아 연해주로, 아니면 더 멀리 아무르습지로 보다 길고 험난한 여행을 할 지도 모른다. 이 땅에 둥지를 트고 번식했던 새들이 한 때 지나가다가 길 잃은 미조(迷鳥)로 기록된 조류도감이 역시 맞는 것일까? 장다리물떼새들의 천수만 번식은 역시 한여름 밤의 꿈에 지나지 않았는가? 그래서 이 몇 장의 사진이 기록의 가치를 더할지도 모르겠다. *매혹적인 모습의 장다리물떼새! 8월호에서 만날 수 있습니다.
김연수 | 생태사진가 미조(迷鳥)에서 서산시의 상징으로 변신 흐르는 강물 위에서 다리가 붉고 긴 롱다리 수컷들이 혈투를 벌이더니 이내 짝을 지어 쌍쌍이 사랑을 나누고 있다. 희귀조 장다리물떼새가 올해도 충남 서산시 천수만의 부남호 상류에 찾아와 귀여운 2세를 낳기 위한 짝짓기에 여념이 없다. 이들은 짝짓기가 끝나면 부리를 맞대고 서로를 다시 확인한다. 몸길이 36cm에 비해 키는 67cm정도로 습지에서 잘 적응 되도록 긴 다리로 진화됐다. 날개와 등, 머리 위가 검푸른 빛깔이고 배, 목, 뺨은 흰색이다. 간척지·습지·바닷가·논·호수·삼각주 등지에 찾아와 얕은 물에서 먹이를 찾아 조용히 걸어다니다가 멈출 때는 몸을 위아래로 흔든다. 헤엄을 잘 치고 날 때는 긴 다리를 꽁지 밖으로 길게 뻗는다. 4∼8월에 3∼5개의 알을 낳는다. 물에 들어가 개구리와 올챙이·도마뱀·물고기·곤충·조개 따위를 잡아먹는다. 국내도감에는 제주 성산포나 낙동강하구에 봄·가을에 이따금씩 나타나는 길 잃은 새로 표시되어 있으나, 11년 전 이해순씨(서산농장연구원)가 천수만 상류에서 번식하는 10여 쌍을 처음 발견했다. 그 후에 매년 조금씩 늘어 한 때 100여 쌍 이상의 장다리물떼새들이 이 곳에서 둥지를 틀고 번식했었다. 천수만은 일반 농경지와 달리 모내기를 하지 않고 볍씨를 비행기로 직파했었고 일반인들의 출입이 제한되어 벼가 어느 정도 자라기 전에는 인간의 손길이 미치지 않았었다. 따라서 자연습지와 비슷한 천수만 논은 이들에게는 천혜의 번식 장소였던 셈이다. 이에 서산시에서는 가창오리와 함께 장다리물떼새를 시의 상징새로 선정하였다. 환경 개발로 점점 개체수 감소 그러나 천수만의 장다리물떼새는 2002년을 기준으로 점차 줄고 있다. 2005년 6월 겨우 10여 쌍 정도가 둥지를 틀고 있다. 현대건설에서 영농하던 간척지가 일반인들에게 분양되면서 농약과 화학비료의 사용량이 증가하고, 비행기 직파가 아닌 모내기로 벼를 심고 있어 천연습지의 모양이 사라졌다. 장다리물떼새 유조(留鳥)의 먹이인 깔다구들의 대규모 무리도 보이지 않는다. 그들이 이 곳에 정착을 하여 매년 개체수가 불어나는가 싶더니 불과 몇 년 사이에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고 있다. 자연을 사랑하고 천수만을 아끼던 사람들은 새들의 낙원 천수만이 이제는 더 이상 낙원이 아니라고 걱정하고 있다. 불과 몇 년 사이에 천수만 자연환경은 이렇게 급격하게 악화되었는데 개발론자들은 천수만을 산업, 위락단지로 전환시키려는 계획을 꾸준하게 추진 중이다. 급기야 지난 5월 개발이익을 맛보려는 일부 주민들까지 가세해 천수만 철새도래지를 불살라버리는 시위도 벌어졌다. 전국에 불어닥친 부동산가격 폭등의 광풍 속에서 생태보전지역으로 개발이 제한된다면 그로 인해 재산가치가 떨어진다는 땅 소유자들의 하소연은 이해가 된다. 그러나 이 땅은 본디 갯벌로 그 누구의 땅도 아닌 지역주민과 갯벌생태계 속 생물들이 공유하는 삶의 터전이었다. 땅 가치하락의 손해배상책임은 자연이 아니라 정부에 있다. 아니 오히려 오염 안된 곳이 후세에는 땅의 재산가치가 몇 십 배 높을지도 모른다. 우리 땅에서 쉴 수 있도록 해야… 가냘픈 몸매로 먼 남쪽에서 긴 여행 끝에 비교적 오염되지 않은 천수만을 찾아 둥지를 쳤던 장다리물떼새들은 더 이상 이곳을 찾지 않을 것이다. 좀더 멀리 북상하여 인접한 북한이나 러시아 연해주로, 아니면 더 멀리 아무르습지로 보다 길고 험난한 여행을 할 지도 모른다. 이 땅에 둥지를 트고 번식했던 새들이 한 때 지나가다가 길 잃은 미조(迷鳥)로 기록된 조류도감이 역시 맞는 것일까? 장다리물떼새들의 천수만 번식은 역시 한여름 밤의 꿈에 지나지 않았는가? 그래서 이 몇 장의 사진이 기록의 가치를 더할지도 모르겠다.
조현호 | 울산 옥현초 교사 청계천, 서울의 역사 이번 호에서는 서울의 다리를 찾아 옛 궁궐도 찾아보고 한창 마무리 공사 중인 청계천도 찾아 나서고자 합니다. 옛날 서울의 모습은 어땠을까요? 도성이 둘러쳐 있고 명당자리에는 궁궐이 먼저 자리 잡았습니다. 특히, 도성 서쪽에서 동쪽으로 흐르는 청계천은 서울 사람들에게는 이런저런 애환이 담긴 생활의 터전이었습니다. 지금 청계천 주변에 남아있는 지명으로 청계천의 옛 모습을 상상해 봅시다. 종로는 도성의 중앙에 자리한 보신각종에서 유래하였으며 이 일대는 사람들이 홍수를 이루어 운종가(雲從街)라고 불리었습니다. 마장동은 조선 초기에 설치되어 말을 팔고 사던 목마장에서 유래하였습니다. 다동은 다방골로 불렸는데 주로 광교를 중심으로 생활하던 민중들의 주거지였다고 합니다. 이에 반해 중인들은 장통교 및 수표교 일대에 많이 살았다고 합니다. 관수동은 관수교에서 유래하는데 청계천의 수위를 관측하였다는 데서 유래합니다. 장교동은 장통교에서, 수표동은 수표교에서, 무교동은 모전교에서 유래하였습니다. 청계천 일대에는 이렇듯 다리와 관련한 지명이 많습니다. 서울에 도읍을 정한 이래 서울 사람들의 생명수로, 배설구로, 위정자들의 정치적 무 대로 활약했던 청계천이 어느 때부터인가 빈곤과 비위생이라는 오명을 뒤집어 쓴 채 복개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리고 오는 10월 1일이면 약 6킬로미터에 이르는 청계천이 다시 태어납니다. 청계천의 역사는 곧 서울의 역사였고, 서울의 현재이고, 서울의 미래입니다. 청계천의 다리들 청계천의 원래 이름은 ‘개천(開川)’입니다. 이 말에는 자연 그대로의 하천을 파서 새롭게 물길을 정비했다는 개척정신이 숨어있습니다. 현재 서울시장이 저돌적으로 추진하는 복원사업 또한 또 다른 개척의 역사가 아닐까 합니다. 지금 쓰고 있는 청계천이란 말은 1910년대 이후 붙여진 왜색 짙은 말입니다. 안타까운 것은 복원을 진행하면서도 지금까지 약 90년 동안 공식적인 하천명칭이었고, 어의가 나쁘지 않고, 혼란을 야기한다는 이유로 청계천이란 이름을 그대로 쓰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중량포가 일제에 의해 중랑천이 된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이라는 책에는 백악·인왕·목멱산 여러 골짜기의 물이 합하여 동쪽으로 흘러서 도성 가운데를 가로 지나서 세 수구(水口)로 나가 중량포(中梁浦)로 들어간다고 말합니다. 개천에 있던 다리로 송기교, 장통교, 태평교, 혜정교, 대광통교, 통운교, 연지동교, 동교, 광제교, 하량교, 영풍교, 송첨교, 영도교, 제반교, 청파신교, 경고교, 홍제교 등이 보입니다. 그중에서 광통교, 장통교, 수표교, 관수교, 오간수교, 영도교 등은 옛 이름을 되찾고 새로운 다리로 탄생합니다. 이에 반해 삼일교, 배오개다리, 새벽다리, 나래교, 버들다리, 맑은내다리 등은 새로 만들어낸 이름입니다. 청계천 발굴과정에서 드러난 광통교지, 수표교지, 오간수문지를 합한 ‘서울 청계천유적’은 지난 3월 25일자로 사적 제461호로 지정되었습니다. 당시 토목기술 수준을 알 수 있고 아울러 도시기능의 확대를 엿볼 수 있는 소중한 자료이기 때문입니다. 정월 대보름에 다리를 밟아주면 그해 재앙을 받지 않고 각기병에도 걸리지 않는다고 하여 답교놀이가 성행하였습니다. 청계천에서 광통교(廣通橋), 즉 광교(廣橋)는 정월대보름에 답교놀이가 성행했던 곳입니다. 대보름이면 동네사람들이 너 나 할 것 없이 모두 나와 청계천의 다리를 밟고 연날리기를 하였는데, 젊은 남녀가 깊은 밤까지 나돌아 다님으로써 풍기문란을 이유로 금지하기에 이른 적도 있답니다. 이 다리에 쓰인 돌들은 태조의 계비 강 씨의 능을 옮기면서 당초 묘에 썼던 것들이라 합니다. 광통교는 ‘광통방에 있던 크고 넓은 다리’라는 의미인데 성종임금의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하루는 성종 임금이 달 밝은 밤에 평복 차림으로 광교를 찾았습니다. 마침 다리 밑에는 경상도 흥해 땅에서 올라온 사내가 보퉁이를 짊어진 채 다리 밑에서 하루 묵으려던 참이었지요. 신분을 속인 임금이 자초지종을 들어본즉, 그 사내는 임금이 어질다 하여 죽기 전 꼭 알현하고자 어렵게 서울을 찾아온 것이었습니다. 사내의 고장에서 생산되는 해삼과 전복도 정성들여 준비했지요. 내가 요순임금이라도 된단 말인가, 성종은 자신을 이첨지라고 소개하고는 이틀을 기다리면 임금을 알현하도록 주선하겠다고 약속합니다. 임금님을 만나려면 벼슬자리가 있어야 하는 법, 이 사정을 잘 알고 있는 성종은 그에게 충의초사라는 벼슬을 하사합니다. 얼떨결에 벼슬도 받게 된 이 사내가 임금님께 인사를 드리려 궁에 들어가니 자신이 알고 있던 이첨지가 바로 그토록 뵙고자 하던 임금님이 아니었겠습니까. 임금을 만나기 위해서 며칠을 걸어 찾아왔던 순박한 시골 사내는 광교의 인연으로 금의환향하였답니다. 청계천 일대에는 큰 시장이 여럿 있습니다. 방산종합시장, 광장시장, 평화시장, 신평화시장, 세운상가, 동대문 시장 등. 그중 평화시장은 1970년 11월 23일, 피복공장 재단사로 일하면서 근로기준법 준수를 항변했던 전태일의 이야기가 있는 곳입니다. 그래서 전태일기념사업회에서는 나래교에서 오간수교에 이르는 거리를 전태일거리로, 버들교를 전태일교로 바꿔줄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고향 잃고 이산가족으로 수표교(水標橋)는 세종 때 놓인 다리입니다. 치수를 위해 수중지석표(水中之石標), 즉 수표를 설치하였는데 그래서 수표교입니다. 지금 수표는 세종대왕기념관 마당에 보존되어 있습니다. 수표교는 1958년 청계천 복개 공사로 철거되어 현재 장충공원에 옮겨 놓았습니다. 영조 때는 수표교 북쪽 냇가에 준천사(濬川司)라는 관청을 두어 토사를 걷어 둑을 쌓게 하고 양쪽 언덕에 버들을 심어 무너지는 것을 방지하였습니다. 이 때 쌓아놓은 모래가 긴 뱀처럼 쌓여 있어서 현재 장사동(長沙洞)이 유래하였으며, 쌓아놓은 모래가 산을 이루었는데 그곳에 꽃을 심으니 향기로운 산이 되었다는 데서 방산동(芳山洞)이 유래하였습니다. 지금도 가운데 교각 한 곳에는 ‘경진지평(庚辰地平)’이라 새겨두어 준천사업을 하는 기준점으로 삼았습니다. 또한 장희빈의 집이 수표교 인근이었다고 합니다. 이전에는 수표교 건너에 왕의 영정을 모신 영희전이 있었답니다. 하루는 숙종이 영희전을 가러 수표교를 건널 때 갑자기 바람이 세게 불었습니다. 그 바람 때문에 떨어진 발을 창가에 걸어놓던 장희빈과 눈이 마주쳤다는 것 아닙니까. 두 사람의 만남이 수표교에서 시작된 것입니다. 서울시에 문의해 보니 수표교는 장기적인 관점에서 원위치로 복원할 계획이랍니다. 다리를 관찰해 보면 멍엣돌 끝부분을 둥글게 처리한 것이 방형의 다른 석교와 차별화 되고 특히, 교각을 이루는 위아래 두 돌기둥이 물살을 향해 마름모 모양으로 틀어져 있어 물살의 저항을 막으려는 의도를 엿볼 수 있습니다. 아름드리 성장한 나무를 싹둑 잘라 만든 것처럼 자연스런 조형미가 돋보입니다. 민간의 다리이지만 궁궐에서나 볼 수 있는 난간이 있어서 한껏 품위 있어 보이네요. 이 수표교는 청계천 복개시 유일하게 살아남아 이건된 다리로 홍수를 대비한 수표를 두고 준설을 위한 지표까지, 게다가 빼어난 외모까지 더했으니 청계천의 대표교량이라 해도 무난할 것입니다. 비록 제 살던 고향을 잃고 타지에 옮겨지고, 수표마저도 딴 곳에 시집보내 이산가족이 되었지만 말입니다. 금천(禁川)너머 임금님이 이제 우리 궁궐 속 다리를 찾아갑니다. 경복궁 근정전 가기 전에 영제교를 건너야 합니다. 다른 궁궐의 다리와 달리 다리 양 옆으로 돌짐승이 두 마리씩 떡 버티고 물길을 지키고 있는 모습이 독특합니다. 해태일까, 사자일까, 다른 짐승일까. 사람들은 그냥 서수(瑞獸)라 일컫습니다. 혀를 날름거리고 입맛을 다시는 놈도 있습니다. 사악한 것은 아예 침범을 마라며 눈을 부라리는 모습이 제법 진지합니다. 엄지기둥 네 곳에는 주작으로 보이는 동물이 조각되어 있지요. 경복궁 경회루는 그 규모면에서나 역할 면에서나 경복궁의 자랑입니다. 이름도 끝내 줍니다. ‘경회(慶會)’라, 덕있는 임금과 충정심 많은 신하들이 함께 국정을 논하고자 하니 그보다 더 큰 기쁨이 있겠습니까. 하지만 무절제한 절대 권력에 의해 기쁨의 정도가 왜곡되어 ‘흥청망청’이란 말이 유래되기까지 한 곳입니다. 이 경회루는 바깥쪽에 사각 돌기둥이 서고 안쪽에 둥근 기둥이 서 있습니다. 천원지방(天圓地方)의 우주관을 말해 주고 있지요. 작은 우주인 이 인공섬에 닿으려면 동쪽에 있는 돌다리를 건너야 합니다. 금천 건너 임금님 나라에 들어왔어도 다시 다리를 건너야 도달할 수 있는 곳, 경회루의 몸값이 여기 있습니다. 경복궁 뒤편에 자리한 향원정도 방형 연못에 둥근 섬을 두어 그 위에 만든 정자입니다. 그곳을 가기 위해서는 취향교라는 나무다리를 건너야 합니다. 취향교(醉香橋), 향기에 취해 다리를 건너간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이 얼마나 환상적인 궁궐생활일까 마는 실은 아픈 역사가 배인 곳이랍니다. 원래 취향교는 향원정과 건청궁을 잇는, 그래서 북쪽으로 난 다리였습니다. 하지만 건청궁에서 명성황후가 죽음을 맞고 다리는 전쟁 와중에 사라져 버립니다. 건청궁이라는 원래 주인을 잃고 관광객을 새 주인으로 맞아 새롭게 남쪽으로 지은 것입니다. 아름답기만 한 취향교와 향원정에는 이렇듯 우리를 몸서리치게 하는 슬픈 이야기가 담겨 있습니다. 창덕궁에는 금천교(禁川橋 혹은 錦川橋)가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궁궐내 다리를 통틀어 금천교라 이르는데 하늘같은 임금님이 계시는 성역임을 말해 줍니다. 창덕궁 금천교는 남북 양쪽에 귀면을 새겨두고 남쪽에는 귀면상 아래에 해태를 닮은 석상을 두고 북쪽에는 현무로 추정되는 석상을 두었습니다. 멍엣돌마다 공하(蚣蝦)로 보이는 용을 돌출시켜 놓았습니다. 공하는 범공(帆蚣)이라고도 하는데 용의 아홉 아들 중 물을 좋아하여 다리 기둥에 세우는 녀석을 말합니다. 흔히, 이무기돌[龍頭石]이라고 하지요. 한편, 창경궁에 있는 금천교인 옥천교(玉川橋)는 그 형태와 구조는 창덕궁의 것과 흡사하지만 창덕궁의 거북상과 해태상과 달리 금천을 바라보며 수호하는 동물상은 없고 받침돌만 남아 있습니다. 경복궁 근처 서울지방경찰청 옆에는 종침교(琮琛橋) 표지석이 있습니다. ‘종침교-조선 성종때 우의정을 지낸 허종과 허침 형제가 갑자사화의 화를 면한 일화가 얽혀있는 경복궁 입구 다리터’라고 안내되어 있습니다. 성종 때 유명한 재상 허종(許琮)과 그의 아우 허침(許琛)이 연산군의 생모 윤 씨를 폐출할 어전회의에 참석하러 가다 종침교에 이르러 다리 밑으로 일부러 굴러 떨어져 회의에 불참하게 됩니다. 성종이후 왕위에 오른 연산군은 이날 회의에 참여한 대신들을 가려 참화를 맞게 하는데 이른바 갑자사화입니다. 고의적으로 회의에 불참한 두 형제는 무사하였지요. 그들의 이름을 따서 종침교라 한 것입니다. 물은 흘러 살곶이로 살곶이다리는 한양대학교 인근에 있습니다. 세종 2년(1420)에 가교 공사를 시작하여 성종 14년(1483)에 완성되었습니다. 현재 일부만 옛 모습이 남아있네요. 살곶이다리를 전관교(箭串橋)라고 합니다. 전관교란 청계천과 중랑천이 만나는 합수지점에 위치하여 ‘물살이 세다’는 물살의 ‘살’과 뾰족하게 튀어나온 곳을 이르는 ‘곶’이 합쳐진 곳에 위치한 다리를 말합니다. 이 다리를 제반교(濟盤橋)라고도 함은 어느 스님이 이 다리를 놓고 난 후 그 탄탄함이 반석과 같다하여 유래합니다. 남아있는 멍엣돌을 보면 홈이 파져 있어 귀틀석이 빠지지 않도록 배려하였습니다. 이렇게 물살이 센 곳의 뾰족한 땅이라는 의미의 살곶이[箭串坪]는 선조 때 무사들이 매를 사냥하며 심신을 단련하던 곳으로 태조 때는 응방(鷹坊)이라 하여 매 사냥을 위한 기관도 설치하였다고 합니다. 응봉산이나 매봉산의 지명이 이곳이 옛날 매사냥 터였음을 뒷받침하고 있습니다. 『신증동국여지승람』「한성부」에서는 ‘국도의 동쪽 들로 땅이 평평하고 넓으며, 물과 풀이 매우 넉넉하고 주위는 둑으로 둘렀는데, 나라 말을 기르며 넓이가 34리이다. 처음에는 나무우리를 만들고 해마다 개수하니 백성은 이속들의 농간질에 피폐하고, 말도 도둑맞아 도망갔는데, 명종조에 와서 상진이란 자가 정부에 건의하여 돌을 쌓아 제방을 만들고 냇물이 흐르는 곳에는 철색으로 열고 닫게 하니, 그 후로 폐단이 제거되었다’고 기술하였습니다. 이 다리는 난간이 따로 설치되어 있지 않습니다. 난간은 격식을 갖춘 다리에만 세웠는데 살곶이다리는 민간의 다리였기에 난간을 두지 않았던 것입니다. 수표다리가 난간을 둘렀던 것과 대비되는군요. 현대식 다리를 달리는 지하철 소리에, 자동차 소음 소리에 지칠 만한데 오늘도 서울사람들에게 넉넉한 인심을 베풀고 있습니다. 어떻게 평가받을까 며칠 후면 아이들이 성취도평가를 치른다고 합니다. 아이들을 평가하는 것은 교사의 몫입니다만, 교사평가제가 도입되면 아이들이 교사를 평가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교사평가제, 누가 누구를 평가하겠단 말입니까. 청계천 복원사업을 두고 다양한 평가가 쏟아질 것입니다. 정답이 없는 평가가 되겠지만 점차 순기능이 더 많이 부각되는 것 같습니다. 무엇보다 물이 흐르고 물고기가 돌아오고 다리 이름을 되찾게 된 것은 매우 흡족합니다. 이왕이면 이름까지도 ‘개천’이나, ‘맑은 내’ 라고 했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지만 말입니다.
신동호 | 코리아 뉴스와이어 편집장 이 미라의 주인공은 문정왕후의 종손녀. 부검 결과 미라의 태아는 머리가 질 입구까지 내려와 있었고 산모의 자궁은 파열된 끔찍한 상태였다. 자그마한 몸집의 이 여성은 출산의 고통 속에 아기와 함께 인생을 마감한 것이다. 요즘에는 이렇게 목숨을 걸고 출산하는 여성이 없다. 하지만 옛날에는 미라가 된 ‘윤씨’처럼 죽어간 산모와 태아가 부지기수였다. 20세기 초에만 하더라도 우리나라의 유아 사망률은 4명 중 한 명 꼴이었다. 출산 과정에서 죽는 것까지 합치면 거의 절반가량이 세상에 태어나 걷지도 못하고 죽은 것이다. 출산의 고통은 커진 뇌와 좁아진 골반 때문 우리는 흔히 출산의 고통을 당연한 일로 받아들이지만 동물의 출산은 사람보다 훨씬 수월하다. 고통스런 출산은 지난 수백 년 동안 인간이 원숭이에서 사람으로 진화하는 과정에서 두뇌가 커져 생긴 부작용이다. 인간은 두뇌가 커지면서 고도의 기술을 만들고, 추상적 사고 능력과 언어 능력을 키워 복잡한 사회생활을 할 수 있게 됐지만 그 부작용도 만만치 않았던 것이다. 인간은 같은 몸 크기의 포유류에 비해서는 두뇌의 크기가 6배나 크며, 가장 가까운 친척인 침팬지나 고릴라에 비해서도 3배가 크다. 인간은 머리 큰 기형적 생물체인 셈이다. 인간은 머리가 그렇게 크지 않았던 숲 속의 원숭이 시절에는 누가 도와주지 않아도 외진 곳에서 혼자 아기를 낳을 수 있었다. 침팬지는 골반이 크고 아기의 머리가 작기 때문에 출산이 쉽다. 게다가 침팬지는 산도에서 빠져 나올 때 아기와 엄마가 서로 얼굴을 마주보는 자세로 나오므로 엄마가 자신의 두 손으로 아기의 머리를 잡아당겨 빼낼 수 있다. 하지만 250~180만 년 전 사람(Homo) 속의 영장류인 인간이 출현해 두뇌가 급팽창하기 시작하면서 출산의 고통은 갈수록 커졌고 누군가가 옆에서 도와줘야 아기를 낳을 수 있게 됐다. 세계 어느 문화권이나 조산원이 그 사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해온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침팬지와 사람이 공통의 조상에서 갈라진 것은 600만 년 전. 인간은 침팬지보다 뇌의 크기가 3배나 커졌다. 사람의 아기는 큰 머리로 자궁경부를 압박해 열고 나온 뒤 머리를 옆으로 돌려 모체의 골반 뼈를 통과하므로 아기를 잡아 뺄 수 없다. 이런 상황에서 아기를 자기 손으로 무리하게 잡아 빼면 척추나 목을 다치게 할 가능성이 크다. 아기는 임신 9개월이 되면 골반 개구부의 산도를 통해 머리부터 나온다. 산도를 비집고 나오는 아기의 머리는 0.5∼1㎝나 찌그러질 만큼 큰 압력을 받는다. 지난 300만 년 동안 인간의 뇌는 무려 3배나 커졌다. 반면 골반은 오히려 좁아졌다. 네 발로 걷던 원숭이가 직립보행을 하면서 다리와 다리 사이가 좁아진 것이다. 서서 배와 히프를 지탱하려면 두 다리 사이가 점점 좁아져야 한다는 것은 간단한 물리 법칙으로도 이해할 수 있다. 골반이 좁아지면서 아기가 나오는 골반의 개구부도 따라서 좁아졌다. 갈수록 커지는 뇌와 좁아지는 골반 때문에 생겨난 출산의 부작용은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호모속의 인류가 출현한 이래 태어난 무수한 아기가 좁은 산도를 빠져 나오면서 질식해 죽었다. 이는 세상에서 가장 가혹한 생존 경쟁이자 자연선택의 과정이었다. 이 과정에서 미숙성한 뇌를 가진 태아만이 살아남았다.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우리 자신은 수만 세대에 걸쳐 모두 무사히 좁은 골반을 통과한 선조의 후예인 셈이다. 조상 가운데 단 한 명이라도 골반 통과에 실패했다면 지금 이 순간의 나는 존재할 수 없다. 인간은 뇌 미숙아 상태에서 태어나 보통 침팬지나 포유류는 뇌가 성체 뇌 용적의 45% 정도 됐을 때 세상에 나온다. 하지만 인간은 어른 뇌 용적의 25%일 때 태어난다. 걷지 못하는 것은 물론 기어 다니지도 못할 정도로 미숙한 상태에서 세상에 태어나는 것이다. 1993년 침팬지와 인간의 뇌를 비교해 발표한 미국 노틀 데임 대학의 제임스 맥케나 박사는 만일 다른 동물처럼 태아가 충분히 성숙한 상태에서 세상에 나온다면 임신 기간이 21개월은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뱃속에서 9달, 태어나서 12달을 합쳐 21개월이 되어야 아기는 겨우 혼자서 걷기 시작하고 뇌도 어느 정도 성숙하기 때문이다. 태어난 아기의 뇌는 만 한 살이 될 때까지 뱃속 태아와 똑같은 빠른 속도로 성장하다가 비로소 성장이 둔화된다. 세상에 어떤 영장류도 이처럼 특이한 뇌 성장 패턴을 가진 동물은 없다. 그래서 앨런 워커와 팻 쉽맨은 1996년 에서 인간이 고등한 지적 존재로 진화할 수 있었던 결정적인 요인은 뇌의 75%가 출산 뒤에 크는 특이한 성장 패턴을 갖게 됐기 때문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이처럼 사람의 어머니는 새끼의 두뇌 성장을 위해 다른 포유류보다 극도로 많은 에너지와 자원을 장기간에 걸쳐 투자해야 한다. 동물 가운데 포유류는 암컷의 양육 부담이 무겁다. 그 포유류 가운데서도 인간은 더욱 더 양육의 부담이 크다. 사실 세상의 어느 동물도 인간처럼 자식 양육에 많은 시간과 자원을 투자하는 동물은 없다시피 하다. 인간은 엄마에 의해 미숙아에서도 생존 인간의 어머니는 생물학적으로 보면 극도로 미숙한 아기를 돌보게 디자인되어 있다. 엄마는 자궁과 태반 속의 따스함, 영양, 보호를 아기에게 제공할 수 있도록 유전적으로 프로그램 되어 있다. 특히 아기에게는 엄마의 젖가슴이 제2의 자궁이다. 거기에는 엄마가 음식을 먹고 소화를 해 만든 고농도의 영양물질을 빨대처럼 빨아먹을 수 있는 젖꼭지가 달려 있다. 또 엄마의 젖가슴은 체온이 1∼2도 가량 높아 따뜻하다. 보드라운 엄마의 젖가슴은 촉감을 먹고 사는 아기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감촉을 준다. 엄마가 아기에게 주는 모유는 단순한 영양물질이 아니라 사회적 영양물질이다. 엄마의 젖가슴은 아기가 울고 보채면 자동적으로 젖이 나온다. 처음에 아기와 엄마는 서로 다른 존재이지만 울기 시작하는 순간부터 아기와 엄마는 하나가 된다. 아기는 탄생 직후부터 웃으면서 엄마의 관심과 사랑을 끊임없이 자극한다. 엄마가 웃으면 아기도 웃고 엄마가 실망하면 아기의 기분도 우울해진다. 아기와 엄마의 관계는 세상에서 가장 깊은 인간관계이다. 이때 엄마와 아기 사이에 맺어진 관계가 커서 어른이 될 때까지 인간관계와 행동의 틀이 된다. 출산 전 아기는 유전적 프로그램에 의해 성장한다. 하지만 탄생 뒤 아기는 엄마와의 사회적 관계 속에서 이처럼 다시 한번 창조된다. 미숙아로 태어남으로써 인간의 행동은 본능보다는 교육에 의해 사회적으로 형성되도록 운명을 타고나는 것이다. 현대 사회에 접어들면서 아기는 엄마의 품에서 떨어져 나오고, 혼자서 잠을 자고, 보모의 보호를 받는다. 하지만 이런 환경 속에서 자란 아이는 무언가 불안한 존재가 되기 쉽다. 미숙아로 태어난 것이 뇌 발달에 결정적 그렇다면 언제부터 인간은 미숙아로 진화하기 시작했을까? 인간이 직립하면서부터다. 인류학자 리처드 리키는 1984년 아프리카의 케냐에서 180만 년 전의 완벽한 호모 에렉투스 화석을 발견했다. ‘나리오코톰 소년’으로 불리는 이 호모 에렉투스의 뇌 용적과 골반의 크기를 조사해 본 결과 이때부터 이미 사람은 미숙아로 태어났다는 것이 밝혀졌다. 미숙아로 태어난다는 것은 매우 위험하지만 호모 에렉투스에게는 역설적으로 엄청난 이점을 가져다주었다. 뇌세포가 왕성하게 자라는 시기에 어둡고 재미없는 엄마의 자궁 속에서 있는 것보다 1년 빨리 세상에 나와 엄마와 세상이 주는 자극을 맛볼 수 있게 된 것이다. 비록 기어 다니지도 못하지만 아기는 다양한 자극을 통해 감각신경이 매우 예민하게 발달한다. 그렇게 됨으로써 호모 에렉투스는 사회적 지능이 매우 발달하게 되었고 복잡한 협동 사회를 만들 수 있었던 것이다. 두뇌가 커지면서 인간은 상대의 마음을 읽을 수 있는 사회적 지능이 특히 발달했다. 상대방의 마음을 읽을 수 있게 됨으로써 인간은 서로 도움을 주고받고, 상대를 속이고, 또 상대가 나를 속이는지 그렇지 않은지도 분별하고, 없는 데도 있는 척하고, 다른 사람의 행동을 모방하고, 상대의 행동을 예측하고, 상대의 심리를 읽고, 협동 행동을 유도해 복잡한 사회를 만들 수 있게 됐다. 게다가 직립보행으로 손까지 자유롭게 쓸 수 있게 된 호모 에렉투스는 힘을 합쳐 사냥을 하기 시작했고, 사냥 기술이 날로 발전함에 따라 음식도 고단백으로 업그레이드됐다. 이로 인해 아기들은 뇌가 한창 자랄 때 충분한 단백질을 공급받게 됐다. 호모 에렉투스가 등장한 200만 년 전쯤 최초의 돌도끼나 박편이 나오고 석기 사용이 시작된다. 100만 년 전에는 매우 우수한 공예술이 나타났다. 이 시기는 뇌의 용적이 커지는 시기와 일치한다. 미숙아로의 진화로 부부 관계도 달라져 짧은 시간 동안에 매우 빠른 속도로 뇌의 용적이 늘어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진화 과정에서 이처럼 인간의 미숙아 전략이 성공했기 때문이다. 최근에는 네안데르탈인이 멸종한 것도 현생인류보다 더 큰 머리를 갖고 있어 출산의 부작용이 훨씬 컸기 때문이라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인간이 미숙아를 낳게 되고 유인원 가운데 자녀의 양육을 위한 투자가 극대화되면서 부부 관계에도 큰 변화가 일어났다. 양육의 부담을 혼자서 지는 것이 어렵게 된 엄마가 아버지를 자녀 양육의 동반자로 끌어들인 것이다. 일반적으로 자식에게 시간 투자를 많이 하는 동물은 일부일처제가 많다. 포유류 가운데 일부일처제는 3∼5%에 불과하다. 소나 말 같은 대부분의 포유류는 낳자마자 걸어 다니기 때문에 부모의 도움이 그다지 필요 없다. 따라서 굳이 일부일처제가 필요 없다. 반면 지구상에서 사람 못지않게 자식에게 공을 많이 들이는 동물인 새는 90%가 일부일처제다. 새들은 알을 품어야 하고 또 새끼가 나오고 난 뒤에도 스스로 날 수 있을 때까지 먹이를 물어다 줘야 한다. 초기 원시인류도 처음에는 인간과 가장 가까운 친척 동물인 침팬지처럼 난교 생활을 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미숙아를 낳게 되면서 상황은 달라졌다. 비록 바람을 좀 피우더라도 일단 가정을 이루면 일정 기간 동안 부부가 힘을 합쳐 미숙아를 잘 돌보는 경우에만 아기가 살아남았다. 부부가 사랑해 아기를 돌보지 못하는 유전자를 가진 사람은 진화의 무대에서 도태될 수밖에 없었다. 요즘 많은 부류가 성 해방을 외치고 또 포르노가 판을 치지만 우리의 몸속에는 어느 정도 일부일처제의 DNA가 있다. 이 DNA는 부부간의 사랑과 함께 아기를 키우는 기쁨을 준다. 아이를 키워 본 사람이라면 아이를 기르는 것이 얼마나 큰 행복인지, 얼마나 큰 사랑의 기쁨을 우리에게 주는지 잘 안다. 자식에 대한 과도한 시간 투자 말고도 일부일처제 동물의 또 다른 특징이 있다. 암컷의 ‘배란 은폐’가 바로 그것이다. 대부분의 동물은 암컷이 배란기에만 발정을 해서 성교와 임신을 한다. 하지만 사람은 예외적으로 발정기가 아닌 때도 섹스가 가능하다. 자주 섹스를 하는 게 공고한 일부일처제 가정을 이루는 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일부일처제가 바람피우기와 반드시 대립하는 것은 아니다. 일부 학자들은 여성이 배란을 은폐함으로써 자녀 공동 양육의 대가로 성을 제공했고 아버지를 자녀 양육에 끌어들여 일부일처제를 정착시켰다고 본다. 하지만 최근 연구를 통해 새나 사람은 기본적으로 일부일처제 동물이지만 몰래 바람을 많이 피운다는 사실이 밝혀지고 있다. 국내에서는 조사가 없지만 미국에서 유전자 검사를 해본 데 따르면, 태어나는 7명 중 1명이 아버지와 전혀 다른 유전자를 갖고 태어난다. 원앙도 부부간의 금실이 좋기로 유명한 새이지만 암컷 원앙이 낳는 새끼 가운데 40%가 지아비가 아닌 다른 수컷의 새끼이다. 새가 일부일처제 동물이기는 하지만 바람기는 어쩔 수 없는 것이다. 요즘 바람피우는 남편과 아내가 많아 사회 문제가 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정이 파괴되는 것을 원치 않는 부부들이 매우 많다. 그리고 이들이 이혼을 하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자녀 양육이다. 자녀에 대한 사랑과 보호의 본능은 수십 년 동안 지속되는 부부애만큼이나 인간성을 규정하는 중요한 본능인 것이다. [PAGE BREAK]인류의 진화는 여성이 주도했다. 여성의 배란 은폐 인류는 성적인 측면에서 보면 다른 포유류 동물과 여러 면에서 다르다. 문명을 만들었다는 점에서만 차이를 보이는 게 아니다. 섹스 행태도 아주 독특하다. 임산과 출산을 목적으로 하지 않고 발정기가 아닌데도 섹스를 하는 거의 유일한 동물이다. 이를 전문 용여로 '배란 은폐'라고 한다. 거의 모든 포유류는 암컷이 배란기가 되면 냄새를 풍기고 자극적인 행동을 함으로써 수컷에게 자신이 임신할 수 있다는 것을 동네방네에 알린다. 하지만 인간 여성에게는 외부로 드러나는 배란기가 없다. 배란기가 아닌데도, 다시 말해 임신을 할 가능성이 없는데도 여성은 남성을 유혹하고 향수를 몸에 뿌린다. '시간'에 대한 통찰 그렇다면 왜 인간 여성은 배란을 은폐하게 되었을까? 최근 국내에도 번역된 책 의 저자인 미국 캘리포니아대 외과 쉴레인 교수(인류학자)는 젊었을 때 의대생으로서 여성이 남성보다 15% 정도 적혈구가 적은 데 주목한다. 철 결핍의 요인은 월경이다. 여성이 월경으로 잃는 피는 평생 40리터. 출산과 수유 등으로 잃어버리는 양까지 포함한다면 56.8리터에 이른다. 산소를 나르는 적혈구의 작용에는 헤모글로빈이 핵심 역할을 하며, 그 주성분은 철이다. 다른 포유류는 월경이 없거나 아주 소량에 그친다. 여기서 질문은 시작된다. '왜 우리 종은 없어서는 안 되는 필수 체액을 그렇게 많이, 흥청망청 내버리도록 진화한 것일까?' 쉴레인의 책은 이 물음에 대한 답을 하나씩 찾아 나선다. 지난 250만년 동안 인간의 뇌는 3배가 커졌다. 특히 15만 년 전 호모 사피엔스의 출현으로 뇌가 급격한 팽창 과정을 거치면서 문제가 심각해졌다. 여성 골반이 뇌의 크기를 따라가지 못하면서 아이를 낳다 죽는 산모가 늘어났다. 출산 시 태아가 산도에 막히거나 산모가 과다출혈을 일으켜 산모와 태아 모두가 사망할 확률이 어느 생물보다 높아졌다. 고통과 죽음의 가능성을 수반하는 임신과 출산은 인류 여성에게 엄청난 스트레스가 아닐 수 없다. 이런 위협적인 상황에서 자연 선택은 여성의 호르몬 사이클을 급격히 재조직화 하는 길을 택했다. 여성의 발정이 사라지고 월경은 달의 주기적인 움직임에 맞춰 일어나게 되었다. 여성은 '달'이라는 시간의 개념을 섹스와 임신 사이에 도입했고, 이런 시간의 비법을 배우면서 고대의 여성들은 배란을 할 때에는 섹스를 거절하는 힘을 갖게 되었다. 남자는 이런 새로운 여성에 적응할 수밖에 없었다. 초기 인류 여성은 자궁이 달의 주기에 따라 피를 흘린다는 것을 알아차렸고, 섹스와 임신의 함수 관계도 눈치를 챘다. 이들은 또한 큰 뇌 덕분에 다른 동물에게선 볼 수 없는 '자유의지'를 갖게 되었다. 발정기만 되면 꼼짝없이 짝짓기에 돌입하는 여타의 종과 달리 여성은 섹스를 이용하고 거부할 수 있는 유일한 암컷이 된 것이다. '현명한 여자'는 섹스의 기쁨과 9개월 뒤의 고통스럽고 위험한 분만을 통해 '시간'에 대한 결정적인 통찰을 갖게 됐다. 여성은 달의 주기에 맞춰 29.5일마다 다량의 피를 흘린 덕분에 시간의 차원을 발견한 것이다. 여성들은 섹스와 임신의 연결고리를 파악했고, 다음에는 섹스와 분만 중 사망 가능성, 그리고 섹스와 태어날 아기에 대한 평생 책임의 관계를 인식했다. 그리고 마침내 '시간'에 대한 결정적인 통찰을 갖게 됐다. 그리고 남성에게 이 관념을 주입했다. 이로 인해 인류는 다른 동물을 앞지를 수 있는 기회들을 늘려나갔다. 여성의 짝짓기 전략 여성에게 부족한 철분은 오직 사냥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다. (녹슨 쇠와 고기 덩어리가 붉은 것은 철분이 많기 때문이다) 여성의 짝짓기 전략의 변화에 적응할 수밖에 없게 된 호모 사피엔스(남성)는 배고픔보다는 성적 욕망을 해결하기 위해 사냥하는 동물이 되었다. 이를 통해 인류는 지구에서 가장 유능한 포식자가 되고 자연을 지배하게 됐다는 주장이다. 게다가 인류 남성은 성교를 거부하는 여성을 설득하기 위해 언어를 발전시켰다는 가설도 제시한다. 요컨대 여성 섹슈얼리티의 변화가 인간 진화의 기본이라는 것이다.
곽해선 | 경제교육연구소 소장(www.haeseon.net) 저금리와 유동성 함정 이자율 곧 금리가 낮아지면 기업은 싼 이자로 자금을 빌릴 수 있다. 그만큼 전보다 자금을 많이 빌려 사업을 확대할 수 있다. 그러면 전체적으로 생산이 늘어난다. 금리가 낮은 자금이 시중에 풍부하면 가계 소비도 부추겨진다. 늘어나는 소비는 생산 증가와 맞물려 경기를 확대시킨다. 이 과정을 요약하면 이렇다 금리 저하와 통화량 증가 →기업 투자, 가계 소비 확대 →경기 확대 그런데 저금리가 경기를 확대시킨다고 하는 이 일련의 과정이 현실에서 반드시 공식대로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금리가 낮아 자금을 얻기 쉬운 상황에서도 기업들이 투자에 의욕을 보이지 않을 수 있다. 경제가 ‘유동성 함정(liquidity trap)’에 빠졌을 때 그런 일이 생긴다. 유동성 함정이란 금리가 충분히 낮은데도 경기가 좋아지지 않아 마치 함정에 빠진 것처럼 보이는 경제 상태다. 현금을 구하기도 쉽고 예금해봤자 이자도 못 버는데 투자와 생산, 소비가 요지부동 늘어나지 않는 경우다. 유동성 함정은 금리가 매우 낮을 때 생긴다. 경기도 좋아졌다가는 나빠지고 나빠졌다가는 다시 좋아지듯이 금리도 경기와 함께 올랐다 내렸다 한다. 보통 금리가 낮으면 투자가 늘어나기에 유리하다. 그런데 금리가 이미 충분히 낮다면 금리는 더 이상 투자 결정을 좌우하는 변수가 못 된다. 심지어 금리가 바닥에 와 있으니 앞으론 오르리라는 기대까지 생긴다. 만약 경기 전망이 나쁜 와중이라면 현금을 투자하거나 소비해 없애기보다는 계속 갖고 있으려는 성향이 강해진다. 이럴 때는 중앙은행이 공정금리, 콜 금리를 내리고 통화 공급을 늘려도 소용없다. 통화 공급을 늘려도 금융시장에서는 현금을 보유하려는 수요에 흡수되고 만다. 가까운 미래에 경기가 나아질 전망이 있다면 현금을 보유하려는 성향은 강하게 유지되지 못할 것이다. 경기가 좋아진다면 투자를 해야 경기가 나아지는 덕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까운 시일 내에 경기 전망을 낙관하지 못할 때는 기업들은 계속 투자를 미룬다. 금리가 낮아서 자금을 쉽게 빌릴 수 있더라도 마찬가지다. 가계는 가계대로 벌이가 한동안 나아지지 않을 테니 소비를 늘리지 않고 저축한다. 결국 중앙은행이 금리를 내려 경기를 부양하려 해도 투자와 소비가 늘어나는 효과는 나타나지 않는다. 금리를 내리면 경기가 좋아져야 정상인데 아무리 금리를 내려도 소비와 투자가 살아나지 않아 경기는 마치 함정에 빠진 듯한 상태가 된다. 경제가 유동성 함정에 빠지는 이유는 여러 가지다. 전형적인 것은 경제 주체들이 미래 경기가 지금보다 좋지 않으리라고 예상하는 경우다. 장차 경기가 상당 기간 더 나빠진다고 생각하면 소비자나 생산자나 소비와 생산에 적극 돈을 쓰지 않는다. 그러면 경기는 실제로 더 나빠진다. 경제적인 이유가 아닌 다른 이유로 기업이 투자를 꺼릴 수도 있다. 기업에게는 일정 기간 사업이 순조롭게 지속될 수 있으리라는 전망이 서야 투자가 가능하다. 그런데 가령 국내 정치 상황이 불안해 사업상 불리한 급격한 개혁조치 같은 것이 떨어질지도 모른다고 하자. 불안해하는 기업들은 돈이 많아도 투자를 꺼릴 게 당연하다. 유동성 함정에 빠진 우리 경제 우리나라 경제도 지금 유동성 함정에 빠진 상태로 생각된다. 최근 한국은행이 금리를 계속 내렸고 또 계속 저금리 상태를 유지하고 있으나 기업의 투자는 오히려 줄어들고 있다. 2004년 상반기까지 10%를 웃돌던 예금은행의 대출 증가율이 2004년 하반기 이후 5% 안팎으로 줄었고, 2003년 3/4분기에 11.7%의 증가세를 보였던 기업 시설자금 대출은 올해 1/4분기에 1%대로 떨어졌다. 반면 시중 부동자금(浮動資金)은 계속 늘어나고 있다. 만기 6개월 이내로 금융권을 떠도는 시중 부동자금은 올해 1/4분기 말 현재 414조 5천억 원. 그나마 전년도 같은 기간 대비 4%대로 증가하던 이 자금이 2004년 하반기를 넘겨서는 5~6%로 증가 속도가 빨라졌다. 물론 이 자금은 실물경제 곧 기업이 주도하는 생산적 투자로 흘러들지 않고 있다. 기업들이 투자를 안 하는 가장 큰 이유는 금명간 경기 회복이 어려워 보여서다. 하지만 기업들 가운데는 불황 속에서도 미래의 호황을 대비한 투자를 하는 곳이 늘 있게 마련이다. 특히 자금 사정이 좋고 지금도 수출이 잘 되어 실적이 괜찮은 대기업은 상대적으로 투자의욕이 높다. 그러나 국내 기업들의 투자의욕은 단기적으로 여러 경우에서 정부 규제에 부딪쳐 있다. 주로 수도권 집중 억제와 국토의 균형개발, 환경 문제 등이 이유다. 그렇다면 생산적 부문으로 흘러갈 이유를 찾지 못하는 자금이 갈 곳은 재테크 쪽이다. 주식·부동산으로 몰리는 투자 금리는 재테크에도 큰 영향을 미친다. 금리가 높거나 장차 높아지리라고 예상될 때는 금융기관에서 판매하는 예금상품이 인기를 끈다. 반대로 금리가 낮거나 떨어지는 추세일 때는 예금해봤자 별로 이자를 못 받기 때문에 다른 투자 수단을 찾는다. 대안은 주로 주식이나 부동산이다. 저금리 때는 기업도 여유자금 재테크에 나선다. 금리가 낮을 때는 돈을 빌려서라도 투자를 늘리는 게 정상이지만 그것도 경기가 좋거나 좋아질 전망이 있을 때 얘기다. 장차 경기가 나쁘다면 투자해봤자 손해 보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가계와 기업의 여윳돈이 주식, 부동산으로 몰리면 전체 경기가 좋지 않은 와중에도 주식, 부동산 시세가 뛰는 수가 있다. 주식이나 부동산이나 경기가 좋을 때 투자가 몰리는 게 정상이다. 다만 주식은 경기가 나쁠 때라도 장차 경기가 좋아진다는 전망만으로 수요가 몰려 시세가 뛰기 쉽다. 그런 만큼 경기 전망이 흐리면 즉시 시세가 침체하기도 한다. 부동산보다는 미래 경기 전망에 따라 투자 수요와 시세가 민감하게 움직인다. 2001~2003년 우리나라에서는 경기가 위축된 가운데 시중 여유자금이 주식과 부동산으로 몰려 비상한 재테크 열풍이 불었다. 2001년 초반을 전후로 우리 경제는 해외 경기 침체로 수출이 부진해 경기가 침체한 상태였다. 한국은행은 기업들이 사업자금을 쉽게 마련해 투자를 늘릴 수 있도록 금리를 낮게 유지하는 정책을 지속했다. 그러다 하반기 들어서자 미국 등 선진국 수출시장 경기가 살아나리라는 전망이 나타났다. 그러자 2001년 말부터 2002년 봄까지 주식으로 투자가 몰렸다. 곧 경기가 회복되리라는 기대심리와 저금리 상황을 업고 수요가 몰린 것이다. 당시 주식은 시세가 몇 달 사이 두 배로 뛰었다. 그러나 해외 경기 회복은 예상보다 늦어졌다. 그러자 수출과 국내 경기 회복도 늦어지리라는 예상이 우세해졌고 주가는 도로 주저앉았다. 이후 주가는 2003년 초 반짝 좋아지는 듯 했던 것을 제외하면 내내 부진을 면치 못했다. 부동산은 2002년 봄 주식 시세가 고개를 숙일 무렵부터 불이 붙었다. 2001~2002년에 정부는 1980년대 말 부동산 시세가 폭등했을 때 도입한 각종 규제를 풀어 아파트 등 부동산 투자를 부추기는 정책을 썼다. 새로 분양하는 아파트의 분양권을 당첨 즉시 전매하지 못하게 했던 규제를 푼 것이 대표적인 조치다. 이로부터 신규 분양 아파트의 프리미엄을 노린 투기가 창궐했다. 새 아파트 프리미엄을 노린 투기가 일자 기존 아파트 가격도 따라서 폭등했다. 집값이 뛰는 걸 보자 가계는 다투어 은행 등에 집을 잡혀 빚을 내서는 주택 매매에 동참했다. 은행들이 집값의 90%까지 담보로 인정해가며 위험한 대출 경쟁을 벌이고, 신용카드회사가 무모할 정도로 신용카드를 남발하면서 신용대출을 마구 늘렸다. 하지만 정부 금융감독기구는 금융 감독을 관대하게 했다. 부동산 투기를 부추긴 정부 정책 이런 현상을 보면서 일각에서는, 정부가 부동산 투기의 부작용이 있더라도 부동산 경기를 살려 국내 경기를 띄우자는 의도를 갖고 있다는 비판을 제기하기도 했다. 해외 경기가 되살아나 수출이 늘 때까지 국내수요를 부추겨 경기를 붙들어보려는 궁여지책을 쓰고 있다는 분석이었다. 결과적으로 경기는 나쁜데 시중 자금은 흘러넘치는 상황이 빚어졌다. 자금은 넘치는데 경기가 나빠 투자할 곳은 마땅찮은 가운데 부동산 투기 규제가 풀리자 넘치는 자금이 흘러갈 곳은 부동산밖에 없었다. 은행 등이 대출에 열을 올린 결과 2001년과 2002년 가계의 부채 증가율은 전년 대비 30% 이상 급증했다. 가계대출은 2001~2002년 1년간 새로 67조원이 늘었다. 그 중 50~60%에 해당하는 40조원 정도가 2002년 봄부터 맹렬한 기세로 아파트 등 부동산시장으로 몰려 부동산 가격을 폭등시켰다. 투기가 심했던 서울 강남과 수도권 일대 인기지역에서는 집값이 불과 한 두해 사이에 두, 세배로 뛰었다. 서울, 수도권과 지방의 땅 값, 집값은 그만큼 크게 벌어졌다. 부동산의 투기 열풍과 시세 폭등은 2003년에도 가속됐고, 시간이 흐르면서 경기 부양 효과보다는 부동산 값 폭등이 서민의 생활고를 가중시키는 효과가 더 부각되었다. 국민들 사이에는 부동산 시세 폭등을 막지 못하는 정부와 여당에 대한 불만이 고조됐다. 2년간 이어진 부동산 투기 열풍은 2004년 들어 안정세로 돌아서는 듯했다. 2003년 10월 말 정부가 비교적 강력한 부동산 투기억제대책을 내놓았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이 시기엔 이미 투기 자금이 에너지를 분출할 대로 분출하고 단기적으로 스스로 잦아드는 단계에 이르고 있었다. 가계도 이미 이전의 투자에 소요된 빚 부담에 짓눌리고 있었다. 이 시기의 부동산 가격 폭등은 저금리 상황 아래 넘치는 자금이 생산 활동으로 흘러가지 않아도 되게 하고, 가계를 빚 부담에 눌리게 해 소비를 부진하게 함으로써 그렇지 않아도 부진한 국내 경기를 한층 내리눌렀다. 그 탓에 2004년엔 해외 경기가 살아나 수출이 잘 됐음에도 불구하고 국내 경기는 내내 내리막길을 걸어야 했다. 결국 국민의 불신만 높아져 그보다도 우리 국민경제가 입은 더 큰 타격은, 정부가 부동산 투자를 부추겨 경기를 띄워보려 한 데 따라 가계가 정부의 경제정책을 불신하게 된 점이다. 가계는 적어도 부동산에 관해서는 정부가 표명하는 정책의지를 깊이 의심하게 됐다. 가계는 2000년대 전반기의 경제 학습을 통해, 언제 또 부동산 시세가 폭등할지 몰라 불안해하는 한편 여차하면 부동산 투기에 끼어들어야 뒤처지지 않는다는 생각을 강박관념처럼 갖게 됐다. 시장이 정부의 정책의지를 불신하게 됨에 따라 부동산 시장은 한층 자기논리를 고집하는 체질이 강해졌다. 그만큼 정부 정책은 시장에 제대로 먹혀들기 어렵게 됐고, 시장은 전보다 더 큰 부동산 투기 의욕을 갖게 됐다. 저금리와 시중 부동자금이 흘러넘치는 상황에서는 정부가 부동산 경기 부양을 경기부양 수단으로 써먹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는 한, 가계도 부동산 시세 폭등에 따른 불안이나 투자수익 기대를 갖는 것이 당연하다. 저금리 정책에 대한 일대 수정이 필요한 시기이지만 막상 정부는 사태를 그리 심각하게 보지 않는 듯하다.
박경민 | 역사칼럼니스트 cafa.daum.net/parque 불가피했던 충돌의 시작 오리엔트를 두 번째로 통일한 페르시아! 이란에서 발흥하여 리디아와 신 바빌로니아를 정복하더니 기원전 525년에는 제26왕조의 이집트도 멸망시키고 메소포타미아와 나일 강 일대를 자신의 영역으로 편입시키니 펠로폰네소스 반도와 나아가 발칸 반도에 둥지를 틀고 있는 그리스의 폴리스가 잔뜩 긴장하게 되었다. '빛은 동방에서(Lux ex Orient)'가 아니라, '전운(戰雲)은 동방에서(Guerra ex Orient)'가 된 것이다. 거대한 통일제국 페르시아는 전성기인 다리우스 1세 치세에 그 여세를 몰아 그리스를 원정하게 되었는데, 그의 눈에 지중해가 눈에 들어오니 바다 건너편에 있는 발칸반도와 펠로폰네소스의 폴리스를 평정하지 않고서는 마음이 편할 날이 없었던 것이다. 그것은 그리스의 입장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폴리스는 대내적으로 정치·경제·사회 각 부문에 걸친 체제정비를 통해서 문화적으로는 성취기반을 확립하면서 식민지 개척에 적극적으로 나서는 입장에서 페르시아라는 존재는 눈엣가시와 같았다. 식민지 개척에 열을 올리는 아테네를 비롯한 폴리스와 흑해와 지중해 방면으로 팽창하려는 페르시아가 만났으니, 이렇게 동서양의 충돌은 불가피했던 것이다. 강력한 전제군주체제하의 페르시아와 그리스 연합군은 전쟁을 통한 문제해결에 합의(?)하고 진검승부를 위한 칼을 빼어 들었다. 다리우스 1세의 엄청난 착각 여기서 페르시아의 정치·외교의 기본 틀을 알아보자. 우선 페르시아는 단명의 아시리아를 반면교사로 삼아 정복지의 관습을 존중하고 자치를 인정하는 관대한 정책을 폄으로써 무단통치 때문에 스스로의 명운을 재촉한 아시리아의 경우와는 달리, 민심수습에 성공하여 안정된 토대 위에서 전체 오리엔트 세계를 다스릴 수 있었다. '흐흐흐… 세상에서 날 대적할 자가 누구냐! 서쪽 편에 있는 그리스 녀석들은 통일조차 이루지 못하고 밤톨만한 폴리스로 서로 분열되어 살고 있지 않은가!' 다리우스 1세는 엄청난 착각을 하고 만다. 그는 오리엔트에 만족하지 않았다. 교통망의 정비로 광범위한 교역과 문화교류로 그리스 인과 접촉하면서 그들의 문명에 대해서 호기심, 나아가서 정복욕이 발동하였고 페르시아의 통일된 내부적 역량이 능히 그리스를 도모하는데 조금도 부족함이 없을 것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그는 이미 수사에서 사르데스에 이르는 '왕의 길'을 닦아 새 도읍지로 페르세폴리스를 건설한 바 있었으므로 자신만만에 야심만만의 군주였던 것이다. 다리우스 1세는 첫 번째 군사행동을 시작하였는데, 소아시아 서안 이오니아 지방의 그리스 식민도시를 압박하고 본국인 그리스 측이 어떻게 나오는지 반응을 기다렸다. 적대행위를 하면 그것을 트집을 잡아 침략의 구실로 삼겠다는 뜻이었다. 마치 1875년 일본이 운양호사건을 일으키고 조선 조정이 어찌 나오나 보는 것처럼 말이다. 이렇게 다리우스 1세가 전쟁이라는 모험을 감행하게 된 배경에는 앞에서 그가 착각한대로 '그리스'라는 정치적 실체가 없었다는 데에 있었다. 이 말은 독립된 폴리스가 지방정부라면 각 폴리스를 전체 그리스 차원에서 통제할 연방정부 내지 중앙정부가 없다는 데에 있었는데, 그것은 착각이었다. 그리스인들에게는 정치적인 '그리스'라는 것은 없었을지라도 '헬레네스', 즉 헬렌의 후손이며 '헬라스(그리스인들의 땅)'는 스스로의 힘으로 지켜낸다는 정신적인 힘을 간과하고 있었던 것이다. 마라톤의 기원, 마라톤 전투 다리우스 1세는 기원전 499년 식민도시의 하나였던 밀레토스가 아테네의 지원을 받아 반(反)페르시아 운동을 일으키자 기원전 494년 이를 무력진압하고 테러집단(밀레토스)를 지원한 아테네를 비롯한 그리스의 폴리스를 불량집단(국가로 인정하지도 않고)으로 낙인찍고 페르시아 함대에 발진명령을 내렸다. 우선 페르시아 함대는 트라키아 해안을 경유하여 그리스 본토를 친다는 작전을 세웠지만 폭풍을 만나 페르시아 해군이 궤멸당함으로써 실패로 끝나고 본격적인 전쟁은 페르시아의 2차 침공부터 시작되었다. 마침 그 당시 페르시아에 나라를 팔아먹은 매국노가 있었다. 전직 아테네의 참주 히피아스였다. 그는 독재로 일관하여 아테네 시민들의 도편추방에 의해서 쫓겨난 인물이었는데, 엉뚱하게 페르시아 원정군을 도움으로써 조국에 복수하려고 하였다. 매국노의 길 안내로 페르시아군은 발칸반도에 상륙했지만 그리스측은 밀티아데스를 지휘관으로 하는 아테네의 중무장 보병대를 마라톤 평원으로 보내어 격전 끝에 페르시아 군대를 격파하였는데(기원전 490년), 총사령관인 밀티아데스는 전에 트라키아 지방에서 페르시아군과 싸운 전투경험이 있어 적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피지기(知彼知己)면 백전불태(百戰不殆)라는 손자병법이 맞다. 마라톤 평원은 그리스 영웅들이 무용을 겨루던 장소로도 유명하다. 후세의 로마 역사가 플루타르코스(Plutarchos)는 그의 에서 마라톤의 승리를 아테네 시민들에게 전하기 위해서 한 사람의 전령이 아테테까지 쉬지 않고 계속 뛰어 승전보를 알림과 동시에 숨을 거두었다는 일화를 기록하여 마라톤 경주의 유래가 되었다. 실제 아테네에서 마라톤까지의 거리는 39.909km이다. 그러나 마라톤 경기가 42.195km가 된 것은 윈저 궁을 출발점으로 삼은 제4회 런던대회의 코스를 기준으로 하고 있으며 1924년 제8회 올림픽 이후부터는 42.195km가 공식거리로 굳어지게 되었다. 세계 4대 해전, 살라미스 해전 마라톤 전투의 패배로 충격을 받은 다리우스 1세가 대규모 병력을 동원하여 재침을 준비하였으나 기원전 486년 갑자기 죽고 말았다. 마음의 병이 너무 깊어서였을 것이다. 복수혈전은 대를 잇게 되는데, 그의 아들 크세르크세스 1세(Xerxes : BC 486∼465)는 복수하기 위해서 전쟁준비를 했지만, '페르시아는 사실 덩치만 컸지, 별 볼일 없더라'는 소문이 전체 페르시아 제국으로 퍼져 나가 이집트와 바빌론이 반란을 일으키는 바람에 그리스 침공을 늦추어야 했다. 드디어 기원전 480년 크세르크세스 1세가 그리스 원정을 감행하였는데, 이제 페르시아와 그리스는 서로를 너무 잘 아는 사이가 되었다. 그리스 측은 전쟁에 대비해서 아테네는 데미스토클레스가 주장한 해군력 강화, 스파르타는 육군을 동원하여 대 페르시아 방어전선을 구축한다. 충무공 이순신의 한산대첩과 더불어 세계 4대 해전 가운데 그 첫 번째가 페르시아 전쟁 당시에 벌어졌다. 페르시아 대군이 임전무퇴와 필사즉생의 각오로 그리스에 상륙하여 여러 폴리스를 굴복시키면서 파죽지세로 진격하였지만 이는 자발적이 아니라 물러서면 참수하겠다는 자기네 왕이 더 무서웠기 때문이다. 크세르크세스 1세는 속전속결로 전쟁을 결말지으려고 하였다. 물론 자신의 승리로 말이다. 만약 이번에도 진다면 아케메네스 왕조가 창업된 이래 지금까지 쌓아왔던 모든 것을 잃게 되는 것이며, 돌아가는 귀로에 어떤 봉변을 당할지 모른다는 위기감에 사로잡혀 있었다. 기원전 480년 페르시아군은 '테르모퓔레 전투'에서 그리스 연합군의 중심이었던 스파르타의 레오니다스 왕이 이끄는 군대와 치열한 싸움을 벌여 3백여 명의 스파르타군을 전멸시켜 버렸다. 승리가 눈앞에 보이는 듯 하였다. 페르시아군은 방어선이 뚫린 아테네로 진군하여 도시를 함락시키고 철저한 복수를 하였다. 신상을 무너뜨리고 신전을 유린하면서 도시 곳곳에서 철저한 살육전을 벌였는데 페르시아군의 무자비한 살상극은 오히려 자신들에게 독이 되어 돌아왔다. 일단 민주주의와 자유의 맛에 길들여진 아테네 시민은 전제적인 페르시아의 압제 하에서는 도저히 살아갈 수 없다고 생각하여 최후의 일전을 벌이기 위해서 살라미스 앞 바다로 필사적으로 탈출하여 아테네를 수복하기 위한 전선을 구축하였다. 과연 현명한 판단이었다. 어차피 육전에 강한 스파르타의 방어선이 무너진 마당에 구태여 아테네를 사수한답시고 아까운 목숨을 버릴 필요가 없었다. 해전에 강한 아테네인들은 차라리 적을 바다로 끌어내어 섬멸하겠다는 전략을 세웠다. 일순간의 승리에 도취한 페르시아군은 바다에서 약을 살살 올리고 있는 아테네 해군을 보고 분을 참지 못하고 그만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다. 아테네 시민들은 자발적으로 배 밑바닥에서 노를 젓고 전투요원들은 배 위에서 페르시아 함대를 상대로 불화살을 날려 좌충우돌하는 페르시아 함대를 수장시켜 버렸다. 페르시아 함선의 노를 젓던 노예들이 달아날 궁리만 하니 지휘관의 전투수행에 차질이 생겨 마치 훈련이 잘된 이순신 장군의 판옥선과 귀선에 섬멸당하는 일본수군과 같았다. 지상전도 물론 그렇겠지만, 특히 해전은 전체적인 팀웍을 중요시하는 전투이다. 이렇게 아테네 시민과 해군은 살라미스 해전에서 페르시아 함대를 격파하고 대승을 거두었다. 만약에 아테네에서 민주정치가 이루어지지 않았더라면(비록 노예를 기반으로 한 제한적 민주정이었지만) 그토록 자유시민들이 결사적으로 싸웠겠는가? 아마 '아테네의 독재나, 페르시아의 전제나 그것이 그것이며 목숨만 부지하면 된다'는 생각을 했을 것이다. 결론적으로 아테네의 승리는 동방 전제세력의 침략에 대한 서방 민주주의의 수호였으며 최초의 동·서 충돌이었다. 전쟁 후에 나타난 승자의 분열 양대 축을 중심으로 세력균형을 유지하면서 발전하다가 어느 한쪽이 힘을 잃게 되면 선의의 경쟁심이 없어짐으로써 둘 다 공멸하게 된다는 것을 그리스 역사를 통해서 알 수 있다. 페르시아의 침공으로부터 그리스를 구한 아테네는 발언권이 세졌다. 따라서 종전의 아티카 계열의 아테네를 중심으로 하는 폴리스와 스파르타를 중심으로 하는 라코니아 계열의 폴리스간의 힘의 균형이 깨지고 말았던 것이다. 스파르타 계열의 폴리스는 아테네 측의 공금횡령을 규탄하면서 물고 늘어졌는데, 전쟁이 터지자 그리스는 아테네를 중심으로 '델로스 동맹'을 구축하고 기금을 모아 델로스 섬의 아폴론 신전에 비축해 두었고 의장격인 아테네가 관리했던 것이다. 살라미스 해전에서 페르시아를 물리친 아테네는 그리스의 맹주가 되어 크게 번영하였는데, 공동으로 출자한 델로스 동맹의 비축자금을 각 도시국가에 돌려주지 않고 그 돈을 아테네로 옮겨 오로지 아테네 해군력 강화에 유용하고 말았다. 물론 다른 도시국가도 페르시아 전쟁 이후에 번영하였으나 아테네의 융성을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어 이를 질투한 스파르타가 반 아테네 동맹인 펠로폰네소스 동맹 을 결성함에 따라 패권을 다투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일어났다. 승자는 없고 패자만 남았다. 물론 스파르타가 이겨 일시적 전성기를 누렸으나 자신에게도 독(毒)이 되었다. 아테네의 쇠퇴는 그리스 전체의 침체를 가져와 소아시아에 대한 직접적인 지배권을 상실하였을 뿐만 아니라, 세계사의 주역이 될 수 있었던 기회를 잃고 말았다.
국어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은 ‘이 말은 어떻게 생긴 말일까?’, ‘언제부터 쓰였을까?’ 하는 궁금증을 품어 본 적이 있을 것이다. 실제로 어원에 대한 궁금한 점을 물어오는 분들이 적지 않다. 그런데 어원에 대해서는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게 많은 것이 현실이다. 예전에 우리말이 어떻게 쓰였는지를 알기 어렵기 때문이다. 특히 조선 시대 이전의 우리말에 대해서는 전체의 모습이 어떠했는지 파악하기가 쉽지 않다. 비교적 우리말의 옛 모습을 알아볼 수 있는 시기는 훈민정음이 창제되면서 우리말을 온전하게 기록할 수 있게 되면서라고 할 수 있다. ‘행주치마’의 어원은 누구나 한 번쯤 들어 본 적이 있을 만큼 널리 알려져 있는 편이다. 아래는 인터넷에서 찾은 것인데 예전에 교과서에 실렸던 내용이라고 한다. "이 싸움의 경과를 살펴보면, 비단 실전(實戰)한 장졸(將卒)만이 아니라 백성들의 단결된 국토 수호의 정신을 찾아볼 수 있으니, 부녀자들이 일제히 앞치마를 해 입고, 그 치마폭으로 돌을 날라 다투어 석전(石戰)을 도운 것이 그것이다. 이로 하여 앞치마를 행주치마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행주 대첩에서 행주치마가 유래했다는 내용은 백과사전에도 올라 있다. 아래는 인터넷 백과사전에 올라 있는 ‘행주산성’의 뜻풀이다. 경기도 고양시(高陽市) 덕양구(德陽區) 행주동에 있는 삼국시대 토축 산성. 둘레 약 1000m. 강 연안의 돌출된 산봉우리를 택하여 산꼭대기를 에워싼 소규모 내성(內城)과, 북쪽으로 작은 골짜기를 에워싼 외성의 이중구조로 되어 있다. 1593년(선조 26) 임진왜란 때 권율(權慄) 장군이 대첩을 이룬 옛 싸움터로, 임진왜란 3대첩에 꼽히는 하나인 행주 대첩으로 유명하다. 이 전투는 부녀자들까지 치마 폭으로 돌을 날라 싸움을 도와 <행주치마>라는 이름이 생겼을 정도로 격전이었다. 행주 대첩에서 부녀자들이 치마를 덧입고 돌을 날라 왜적을 물리쳤다는 내용은 감격스럽다. 그렇지만 행주 대첩에서 ‘행주치마’라는 이름이 생겼다는 것은 나중에 덧붙여진 것으로 보인다. 무엇보다도 ‘행주치마’라는 말이 행주 대첩이 있기 전에 이미 존재했다는 증거가 있다. 아래는 조선시대의 언어학자 최세진이 1527년에 편찬한 《훈몽자회(訓蒙字會)》라는 책에 나오는 말이다. 帍 쵸마 호 1527년에 펴낸 책에 ‘행주치마’가 들어 있다는 것은 이 말이 그 이전부터 쓰였다는 뜻이다. 행주 대첩이 1593년이었으니까 ‘행주치마’는 이미 70년 전에 쓰이던 말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행주치마와 행주 대첩을 연결한 것은 대단히 재미있는 생각이기는 하지만 국어사적으로 볼 때는 그리 근거가 있다고 하기는 어렵다. 게다가 ‘행주치마’는 그 당시에는 ‘쵸마’이었으므로 ‘’와 ‘幸州’ 사이에는 읽을 때도 적지 않은 차이가 있어 보인다. ‘’가 그 이후에 어떤 연유로 ‘행주’가 되었는지는 알기 어렵지만 적어도 ‘행주 대첩’에서 행주치마가 유래한 것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사람들이 그럴듯하게 지어낸 어원을 ‘민간 어원’이라고 한다. 고등학교 시절에 ‘담배’의 어원에 대해 배운 적이 있었는데 그때 국어 선생님이 얘기해 준 민간 어원의 한 사례가 아직 기억에 남아 있다. 수업 시간에 배운 ‘담배’의 어원은 포르투갈 어 ‘Tobacco’가 일본에서 ‘타바코’가 되고 다시 ‘담파고’, ‘담바귀’ 등을 거쳐 ‘담배’가 되었다는 것이 주된 내용이었다. 한 마디로 무척 재미없고 따분한 것이었는데 선생님은 민간 어원에 대해 설명하면서 ‘담배’의 민간 어원에 대한 그럴듯한 이야기를 해 주었다. “담배가 들어오기 시작하면서 애연가들이 늘어나서 담배가 늘 부족하게 되었다. 그래서 담배를 실은 배가 항구에 들어오면 늘 담배를 구입하려는 사람들로 붐볐다. 담배는 순식간에 동이 났고 뒤늦게 담배를 사러 온 사람들은 ‘다음 배에 오시오’라는 말을 듣고 발길을 돌려야만 했다. 바로 담배를 사지 못한 사람들이 들었던 말인 ‘다음 배’가 줄어들어 ‘담배’가 되고 그것이 바로 그 물건의 이름으로 굳어지게 되었다. 이것이 ‘담배’의 어원이다.” ‘담배’의 어원에 대한 국어학적 설명보다 민간 어원이 훨씬 재미있고 기억에도 오래 남는다. 그렇다고 해서 민간 어원이 진실일 거라고 믿어서는 안 된다. 재미있지만, 진실을 알 수 없는 알쏭달쏭한 존재가 민간 어원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