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고한 소설가 이문구(李文求) 선생은 길고 구수한 만연체 문장으로 우리에게 익숙한 작가이다. 그의 성장 소설 관촌수필(冠村隨筆)은 그런 문체로 그의 성장 공간 안에 있는 시대와 역사를 응시하게 한다. 나는 이 작품에서 넝쿨처럼 엮여진 만연체 문장의 매력을 만끽했다. 그의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과 사건들은, 그가 구사하는 긴 호흡의 울퉁불퉁하고도 유장한 문장에 실려서 독특한 인간적 향기를 머금고 형상화된다. 나는 1980년대 초반, 이문구 선생을 직접 나의 일에 모시게 되는 기회를 가졌다. 이문구 선생이 40대 초반쯤이었을 게다. 내가 근무하는 기관에서 개최하는 전국 단위 문학 백일장 행사를 가졌는데, 그를 심사위원으로 두어 번 모실 수 있었다. 그 무렵 나는 30대 초반의 문학교육연구자였는데, 선생을 만나고 모시는 마음이 요즘으로 치면 마치 유명 연예인을 좋아하는 팬의 마음 같았다. 선생에 대한 기대와 호감이 마음에 가득했다. 백일장이 진행되고, 다 쓴 글들이 제출되고, 심사가 끝나고, 시상 행사가 이어졌다. 이어서 심사위원의 심사 강평이 있어야 했다. 행사를 진행하던 나는 이문구 선생께 부탁드렸다. 그런데 웬일인가. 선생은 심사 강평의 역할을 사양하시는 것이
2018-04-02 09:00헌법개정 과정에서 소외되고 있는 교육과 교원 알려진 대로 현재 헌법 개정 논의가 한창 진행 중이다. 예정대로 간다면 6월 13일 지방선거 날 헌법개정안도 국민투표에 붙여질 것이다. 현행 헌법은 1987년 10월 개정된 이래 30년간 시행돼 오고 있다. 그러나 그동안 정치·경제·사회적으로 급격한 변화가 있었고 국민의 의식도 당시와 많이 달라진 만큼 헌법에도 이를 반영해야 한다는 요구도 있어왔다. 이렇게 해서 탄생한 것이 「국회 헌법개정특별위원회」(2016.12 〜 2017.12)이며 이를 확대·개편하여 논의를 이어가고 있는 것이 현재의 「국회 헌법개정 및 정치개혁특별위원회」다. 그러나 헌법개정 논의 과정에서 교육과 교원에 관한 사항이 소외되고 있다는 것은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다. 이러한 우려는 특별위원회에서 실질적인 업무를 담당하는 자문위원단 구성에서부터 이미 예견됐던 것이다. 위원장 3명과 위원 46명으로 구성된 자문위원단은 1, 2소위원회로 나눠 각각의 업무영역을 구분했지만 교원과 교육에 관한 사항은 없었다. 물론 특별위원회가 대통령 권한의 분산 등 주로 권력관계 변화에 초점을 두고 출범 했지만 이번이 교육계로서도 교직사회의 염원을 헌법에 반영할 모처럼
2018-04-02 09:0016년 동안 특수교사로 근무하면서 기억에 남는 순간들이 참 많다. 그런데 유독 이날 의 기억은 떠올리는 즉시 그 장소, 그 시간으로 이동하는 느낌을 받을 정도로 생생하 다. 아마도 내 교직 경력에서 가장 가슴 아프고, 절망적이었던 순간이기 때문일 것이 다. 그 날은 나의 첫 발령지에서의 2년 차, 2003년 어느 날이었다. 통합학급 속 내 아이는 외딴 섬 같았다 경수(가명)가 울면서 특수학급을 찾아왔다. 왼쪽 얼굴이 살짝 붉어진 채로 온 것을 보니 친구와 다툰 것 같았다. 이유를 설명하는데, 울면서 말을 하니 무슨 말인지 알아 듣기가 힘들었다. 그 상태로 교실에 보낼 수는 없어 담임교사와 교과담당교사에게 상 황을 알린 후, 경수의 울음이 그치기를 기다렸다. 그때까지만 해도 통합학급 친구들이 장난을 쳤거나, 서로 오해가 있어 다퉜나 하며 평소처럼 아이를 달랬다. 하지만 그 아이 입에서 나오는 이야기는 나의 예상을 한참 벗어나 버렸다. “친구가 손가락으로 오라 했어요. 갔더니 제 얼굴을 때렸어요. 제가 째려봤더니 ‘어 제 꿈에서 네가 내 뺨 때렸잖아. 아 씨~, 아직도 짜증 나’라고 했어요.” 경수가 겨우 울음을 그치고 훌쩍이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경수의 두서없
2018-04-02 09:00요즘 읽은 책 가운데, 오래도록 생각의 그늘을 드리우게 하는 책이 있다. 시대의 소음(The Noise of Time)이라는 책이 그러하다. 세계적인 전기 작가 줄리안 반스(Julian Barns)가 소련 체제하의 천재 작곡가 쇼스타코비치(Shostakovich, 1906~1975)의 생애를 소설 방식으로 재구성한 책이다. 나는 이 책과 더불어 참으로 오랜만에 ‘자유’를 생각하는 시간을 가졌다. 이 책은 ‘자유’라는 주제를 인간존재·이데올로기·예술·권력 등의 주제들과 서로 맞물리게 하면서, 인간의 의미·자유의 의미를 다성적(多聲的) 울림으로 빚어낸다. 이 책의 서두는 이렇게 시작한다. “그(쇼스타코비치)는 세 시간 동안 아파트 승강기 옆에 내내 서 있었다. 줄담배를 다섯 대 피웠고, 마음은 어지러웠다. 아파트에서 의자를 가져올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의자가 있더라도 초조해서 서 있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앉아서 승강기를 기다리는 모습은 누가 보아도 이상하게 보일 테니까.” 도대체 이 장면은 무엇인가. 왜 주인공은 이렇게 밤마다 마치 여행을 떠나는 사람처럼 가방을 챙겨 들고 아파트 승강기 옆에서 오랜 시간 서 있는가. 떠나지도 않으면서 매일 밤 이러고 있단 말
2018-03-02 09:00새 학기가 시작된 3월이다. 겨우내 얼어있던 계곡물이 강으로 바다로 용솟음치며 격하게 흘러가듯 학교현장 이곳저곳에서도 활력이 넘친다. 하지만 교사나 학생의 마음 한편에는 또 어떻게 바뀔지 모르는 교육정책에 대한 경계심도 감출 수가 없다. 교육부가 정책 변화를 이미 예고한 탓도 있지만 지난 수십 년간 정권이 바뀌면 교육정 책도 바뀌는 것을 경험해 왔기 때문이다. 문재인 정부도 출범한지 10개월째 접어들었다. 그동안 추진한 정책들의 공과를 평가하기에는 다소 짧은 기간이다. 또한 문재인 정부의 교육정책의 진면목을 다 보여 준 것도 아니다. 그러나 새 학기를 기점으로 그동안 누군가의 손에서 담금질해왔던 교육 정책을 내놓고 학교현장과 국민을 대상으로 진검승부를 펼칠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정부의 교육정책 방향의 기조는 무엇이며 또 추진할 대표적인 정책에는 어떤 것이 있는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정부의 교육정책 기조 ‘국가가 책임지는 교육’ 문재인 대통령은 대선에서 ‘교육의 국가 책임 강화’를 공약으로 내세웠으며 당선 뒤 인수위원회를 대신한 국정기획자문위원회에서도 국정과제로 ‘국가가 책임지는 교육’을 내걸었다. 단어의 배열위치만 다를 뿐이지 ‘국가가 교육을 책임지겠
2018-03-02 09:00새학기를 맞아 사람들은 저마다 계획을 세우고 각오를 다짐한다. 그런데 매번 맞이 하는 새학기이지만 올해는 과거와 다르게 더 분주해지고 걱정이 앞선다. 점점 예측하 기 어려워지는 미래에 대한 불안감도 원인이 될 수 있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새로운 지식과 기술이 등장하고 사회가 변화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그 변화 속도가 점점 빨라 지고 있다는 것이 문제이다. 현재보다 더 큰 변화의 시대를 살아가야 하는 우리 청소년 들에게 미래를 대비하여 살아갈 수 있는 힘을 키워주려면 어떤 역량을 가르쳐야 할까? 협력적 문제해결력과 우리나라 학생의 특성 OECD가 주관하는 국제학업성취도평가인 PISA는 참여국의 만 15세 학생을 대상 으로 현대 사회의 시민으로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지식과 기술활용능력을 평가한다. PISA가 측정하는 주요 핵심 평가영역은 읽기·수학·과학 영역이지만 그 밖에도 미래 사회를 적극적으로 대비하기 위한 특정한 역량을 주기별로 평가하고 있다. 기술과 사회 전반의 급격한 변화가 지식과 정보의 양을 폭발적으로 증가시키고 있고 기존의 교육방식으로는 이러한 지식을 모두 전달해주기는 불가능하다는 판단 아래 PISA 2003 은 첫 번째 혁신평가영역으로 문제해결력을
2018-03-02 09:003일에 1명꼴로 연쇄살인이 일어난다면? 아마도 나라가 난리가 났을 것이다. 알다시피 우리 나라는 OECD 국가 중 자살률이 10년 이상 최상위를 유지하고 있다. 학업 및 입시 스트레스로 자살하는 학생의 숫자는 20여 년 전부터 3일에 1명꼴을 웃돈다. 자살예방교육을 위해 가정· 학교· 사회가 관심 가져야 학생들이 3일에 1명꼴로 자살을 한다면 이는 분명히 초대형 사건임이에 틀림없다. 하지만 이를 예방하기 위한 죽음준비교육이나 대책은 예나 지금이나 지지부진하기만 하다. 실제로 국민건강보험공단 건강보험정책연구원의 연구보고서에 의하면, 2015년 현재 자살로 인한 사회경제적 비용은 무려 6조 5천억 원 정도이다. 그런데 정부의 자살 방지 관련 예산은 50 억 원도 되지 않는다. 사회경제적 비용을 따지자면 차라리 자살예방을 위한 죽음교육(death education)을 학교 내외에서 체계적으로 시행하는 것이 훨씬 더 낫지 않을까 싶다. 영국 속담에 ‘예방의 1온스는 치료의 1파운드보다 낫다’라는 말이 있다. 개인적 문제로 인 한 자살이든 사회적 문제로 인한 자살이든 관계없이 자살은 예방이 가능하다. 국가가 자살방지를 위한 적극적 의지만 있다면, 행·재정적 지원을 충
2018-02-01 09:00몇 해 전 교감으로 근무하고 있을 때 보건교사가 면담을 신청했다. 평상시 교육경력도 많고, 항상 친절한 모습과 큰누이처럼 다정하신 모습을 보이시는 분이시다. 또한 남편도 인근 초등학교 교장으로 재직하고 있어 왠지 친근감이 들었다. 상담실에 앉자마자 눈물을 보이며, 성과급에 대한 서운함을 토로했다. “교육경력과 나이도 학교에서 제일 많은데 성과급을 B등급 받았다며 너무 서운하고 창피하다”고 한다. 참으로 안타깝고 안쓰러운 모습이다. 교원들을 향한 ‘조삼모사’ 국가교육정책, 교원성과급전국시대 송나라 때 원숭이를 좋아하여 많은 원숭이를 키우고 있는 저공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살림이 어려워지자 원숭이들의 식량을 줄이기 위하여 한 가지 꾀를 내었다. 원숭이들을 모아 놓고 “아침에 세 개의 도토리를 주고 저녁에는 네 개를 주겠다” 하자, 원숭이들이 저녁보다 아침에 적게 받으면 배가 고파서 생활할 수 없다며 일제히 반발했다. “그럼 아침에 한 개 더 주어서 네 개주고 저녁에는 세 개를 주겠다”고 했더니 원숭이들이 모두 기뻐했다. 살림이 어려워져서 전체적으로는 먹이가 줄어들었지만, 아침에 한 개 더 먹는다는 생각때문에 적어진 먹이를 인지하지 못하는 원숭이들의 불만을 무마시
2018-02-01 09:00작년 이맘때쯤(2016년 12월)에 ‘판도라’라는 영화가 개봉되어 대박이 난 일이 있었습니다. 대통령 탄핵 사건과 함께 경주 지진 그리고 원전을 둘러싼 위기감이 맞물려 많은 관객들이 이 영화를 보았습니다. 이 영화의 제목 ‘판도라’는 대재앙으로 번역하면 무난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리스 신화에서 유래된 이 말은 모든(pan)과 선물(dora)의 합성어입니다. 판도라는 제우스가 여러 신들이 준 능력들을 종합하여 창조한 최초의 여인의 이름입니다. 예를 들면 아프로디테가 준 아름다움, 헤르메스가 준 언어사용 능력, 아폴론이 준 음악과 지혜의 능력같은 것들을 선물로 받아 제우스는 ‘판도라’라는 여인을 완성하였습니다. 그런 점에서 판도라는 신들의 종합선물세트 정도로 이해하면 무난할 것입니다. 엄밀히 따지면 판도라가 재앙의 상징으로 쓰이게 된 것은 판도라 그 자체 때문이 아니라, 호기심 때문에 판도라가 연 상자때문이며, 이후로 이 상자는 ‘판도라의 상자’로 일컬어집니다. 그러니까 ‘판도라의 상자를 연다’는 말은 기아, 질병, 전쟁, 질투, 시기와 같은 상자 속에 갇혀 있던 온갖 재앙들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오는 것과 같이 예기치 않았던 일련의 나쁜 사건들이 연달아 발생
2018-01-02 14:40신년 설날, 일출을 보러 새벽부터 정동진으로 달리던 추억이 생각나는 계절. 1월은 소한과 대한이 있어 산천이 꽁꽁 얼어붙지만 그래도 겨울 휴가를 만끽하기에 안성맞춤인 때다. 전국의 모든 학교는 방학 중이어서 거의 휴교의 상태다. 하지만 인문계 고등학교에서는 보충학습 때문에 방학이래야 2주 남짓밖에 쉬지 못하고 수업을 하게 된다. 그렇다 하더라도 겨울방학은 우리에게 삶의 위안과 안식을 주기에 충분하다. 그간 미루어왔던 일, 가족과의 국내 또는 해외여행이라든지 밀린 숙제 아니면 독서를 하며 재충전할 수 있다. 그러나 ‘4차 산업혁명 시대’의 학교는 한가하지만은 않다. 2015 개정 교육과정도 준비 해야 하고 교육청에서 내려오는 각종 공문서에 회의까지 참석해야 한다. 최근에는 무슨 연수가 그리 많은지 툭하면 출장을 나가야 한다. 방학이라 해도 맘 편하게 쉬지 못하는 현실이다. 또한 졸업식을 앞둔 담당부서에서는 식순을 점검하고 기획하느라 바빠지는 때다. 신년도 업무가 바뀐 선생도 마찬가지, 자리를 이동하고 업무 인수인계와 마무리로 패닉에 빠진다. 그러나 정작 중요한 것은 바로 초지식 산업혁명 시대를 대비하는 우리의 자세이다. 향후 15년 뒤에는 첨단 로봇과 나노의…
2018-01-02 14: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