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학교육 : 국가수준 교육과정 규정·규칙 정해놓고 교육 기술교육 : 전문 분야 교육 위해서 태종 때 ‘십학’ 설치 여성교육 : 가부장제 유지하기 위해 ‘열녀’, ‘내조’ 강조 과거에도 오늘날과 같은 국가 수준의 교육과정이 있었을까? 우선 조선시대에는 지금의 ‘제○차 교육과정’이나 ‘○○학교 교육과정’처럼 국가 수준의 공식적 교육과정은 없었다. 하지만 교육과정의 편성과 운영에 관한 내용이 법령이나 규정·규칙들이 존재했고 과거 제도를 통해 국가적인 인재 선발의 표준을 제시했기 때문에 그것이 미치는 영향은 오늘날의 국가 수준 교육과정만큼 지대했다. 조선시대의 초·중등 및 고등교육을 관통하는 유학 교육과정은 형식상으로는 특정 교재들로 교육과정을 구성하는 교재 중심 교육과정이며, 내용상으로는 문(文)·사(史)·철(哲)을 겸비한 인문·교양 중심 교육과정이라는 점이 특징이다. 이런 유학 교육과정을 통해 추구한 목표는 인간다운 삶의 길을 찾고 실천하는 도학(道學)이자, 인간다움의 최고 경지를 실현하는 성학(聖學)이었다고 할 수 있다. 흔히 잡과 교육으로 칭하는 전문교육과 여성교육 또한 국가 주도했거나 적어도 국가가 안내한 형태로 활발하게 ‘교육과정’을 형성해왔다. ◆ "도
2011-03-29 17:071961년 5·16쿠데타로 인해 교육자치가 폐지된 이후 2년이 지난 1963년 11월 당시 국가통치기구인 국가재건최고회의는 교육법을 개정하여 교육자치를 부활시켰다. 1964년 1월 1일부터 임기가 시작되는 교육위원회 교육감과 교육장 등이 선출되었고, 새한신문(한국교육신문 전신)은 이들의 임기 초에 벌어진 일들을 보도하고 있다. 1964년 2월 10일자 새한신문에는 유진오 대한교련(한국교총 전신) 회장이 교육자치 부활과 더불어 임명된 11개 시·도교육감을 초청하여 10만 교육자의 염원으로 완전한 교육자치의 구현을 위해 노력해 줄 것을 요청한 내용이 실려 있다. 11명의 교육감 중에는 홍일점으로 제주도 최정희 교육감이 있었다. 새한신문(2월 10일자) 인터뷰에서 그는 “의외의 일이라 처음엔 놀라기도 하였고, 또 사양도 하였다. 그러나 교육위원들이 수많은 후보자를 제쳐 놓고 이 사람을 추천해 준 후의라든지 교육동지들의 성원에 보답하는 길은 정성껏 교육발전을 위해 노력하는 것이라 생각하고 앞으로 열심히 연구해 나갈 결심이다”라는 겸손하며 소박하고 진심어린 소감을 밝히고 있다. 지금으로부터 46년 전 일이다. 당시 상황과 달리 초중등교원들 중 여성이 절대 다수를 차지
2011-03-21 11:40호반의 도시 강원도 춘천은 문화예술의 도시인 동시에 향토적 정서가 짙은 작가 김유정의 삶과 문학이 고스란히 스며 있는 곳이다. 웃음과 해학 속에서 소박한 농촌 사람들의 진솔한 삶을 구수한 강원도 사투리로 담아낸 김유정 문학의 고향 실레마을을 찾아간다. 북한강을 끼고 달려가는 경춘가도의 아름다운 풍경은 20대의 젊음을 충동질하며 들뜨게 하는 묘한 매력이 있었다. 이제는 열차 운행이 폐지되고 전철이 개통되어 옛날처럼 기차에 몸을 싣고 통기타를 치며 흥겨워하던 모습은 찾아볼 수 없다. 하지만 경춘가도에 가장 잘 어울린다는 정태춘의 ‘북한강에서’를 들으며 넉넉한 마음으로 북한강을 끼고 달리는 것도 재미가 솔솔 느껴진다. 웃음 속에서 진솔한 농촌 사람들의 소박한 삶을 담아냈다는 김유정 소설의 배경이며, 작가의 고향인 실레마을을 찾아가는 것은 그래서 더 즐거운지도 모른다. 소설의 배경, 작가의 고향 실레마을 가평 지나 의암댐을 건너 춘천 나들목 방향으로 달리다 보면 도로 왼쪽에 자리 잡은 작은 마을을 만나게 되는데 이곳이 춘천시 신동면 증리, ‘동백꽃’의 작가 김유정의 고향인 실레마을이다. 초행길이어도 걱정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이정표가 잘 준비돼 있어 김유정을 사랑하
2011-03-14 14:30지금은 상상하기 어렵지만 60~70년대까지 교원들은 박봉과 생활고에 시달리다 자살하는 일이 많았다. 새한신문(한국교육신문 전신) 63년 8월 5일자에는 교직경력 10년의 광주 한 초등학교 김 모 교사가 기차선로에 뛰어든 자살사건이 실렸다. 양친과 4명의 처자식, 집을 뛰쳐나간 형의 가족들, 그리고 동생들까지 월 5000원, 박봉으로 부양하느라 늘 점심을 굶었다는 김 교사, 그 버거운 삶이 품에 안긴 어린 자녀들의 손을 놓게 했다고 신문은 전했다. 또 68년 4월 15일자에는 생활고를 비관한 경남 모 초등교장의 투신자살 소식이 실려 교단을 비탄에 빠뜨렸다. 교직경력 23년, 월 1만4000원(17호봉)으로 3남 4녀의 학비를 감당하지 못해 10여만원의 빚에 쪼들려온 그는 일주일 전에도 음독자살을 기도했었다는 가슴 아픈 사연이었다. 비단 자살 교원만 궁핍하지는 않았다. 대한적십자사 청소년회는 정년퇴직 후 끼니를 걱정하는 노 스승을 위해 매년 쌀 모으기 운동을 전개했다. 65년 당시, 건설노동자의 일주일 치 일당이 약 4000~5000원이었던 점을 감안하면 교직은 고단하고 비전 없는 직업이었다. 그 실례로 67년 서울시 교위가 교원 1만2600여명을 진단한 결과,
2011-03-14 09:22“독립협회 이후 혁명 영수(領袖)들의 일관된 신념은 민족의 주체적 역량 그 정치적인 경제적인 문화적인 도덕적인 수준을 높이는 일외에 민족의 독립을 보존하는 길이란 없다고 생각한 대단정이었다…민족의 주체적 역량의 제고 이것이 다름아닌 민족의 교육일 것이다. 겨레 독립이 오늘에 이르러 아직도 견정(堅貞)하지 못하고 우리의 민주주의가 남의 경우에 비하여 어지러운 시궁창에서 있는 것은 그 원인이 단순히 헌법이나 정당이나 행정수반이나 국제적 제약에 있는 것이 아닐 것이다. 한토에서 버러지고 있는 현 상황의 총책임은 구경(究竟) 교육에 있음을 알아야 할 것이다. 오늘의 한국의 교육은 단순한 학원(學園)주의 단순한 교육학주의에서 버서나 웅건활달(雄建濶達)한 그 본래의 원상(源床)인 ‘민족의 주체적 역량을 제고시키는’ 대원류에로 귀환되어야 할 것이다. 이제 우리들은 이 같은 한국교육의 긴박한 대전회(轉廻) 대귀환(大歸還)을 위하여 여기에 민족의 문교신문 새한신문을 창간하기로 한다.” 새한신문이 주창하는 한국교육의 새로운 기치는 다음과 같다. ▲민주주의의 동방적 이념을 파지(把持) 선양하는 교육 ▲정치 및 산업과의 긴밀한 연계(聯繫)를 확립 전진시키는 교육 ▲총
2011-03-08 10:231930년대 한국의 전통 시가를 계승하며 현대 시조의 새로운 장을 열었던 가람 이병기 시인의 고향을 찾아가는 길은 답사객의 마음을 설레게 한다. ‘따뜻한 석탑’으로 국어 교과서에 실렸던 미륵사지, 서동과 선화공주의 추억을 간직한 서동공원, 두 사람의 영혼이 잠들어 있는 쌍능을 간직한 익산. 그 곳에 가면 전통을 사랑하고 난초처럼 고결한 삶을 살다간 이병기의 고향이 있다. 시인이 태어나고 생을 마감한 생가 ‘수우재’를 비롯하여 대나무 숲에 잠든 시인의 묘소, 묵묵히 고향 들녘을 지키는 동상, 별처럼 아름다운 동심을 노래한 문학비가 있어 발걸음을 가볍게 한다. 수우재 - 난초 향기가 듬뿍 묻어나는 생가 익산시 여산면 원수리 진사마을 573번지. 이병기는 이 집에서 태어나 이 집에서 생을 마감했다. 생가에는 안채와 사랑채, 고방채와 모정(茅亭)이 있다. 고방채는 세간이나 기타 물건들을 보관하는 곳이며 모정은 짚이나 풀로 지붕을 얹은 정자를 말한다. 모정 앞에는 작은 연못이 있고, 그 연못 앞에는 배롱나무가 수줍은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전라북도 기념물 6호를 지정되었다는 생가의 안내판 옆으로 1995년에 세운 문인협회의 표징이 시인의 문학적 업적을 소개하고 있다.
2011-01-27 16:28이상도 하지 묘한 버릇이 생겼어 풀과 나무를 바라보며 숨은 그림 찾는 버릇이 생겼지 햇살은 바람 끝에서 방울방울 떨어지는데 참새 한 마리 모과 향에 취해 퍼덕이더니 사라졌지 더위에 달달 볶여 붉게 멍든 잎이 미온微溫으로 남은 참새 족적足跡을 덮는 시간. 허공으로 뻗은 뿌리 따라 하늘도 붉은 꿈을 꾸기 시작했어 노을을 향해 고개 숙인 채 가게 앞을 기웃대던 저 노인 자벌레처럼 늘어진 그림자가 유모차에 끌려가고 있더군 그림자 속에 구겨진 일상이 종이상자로 유모차에 쌓이고 파지로 남은 생흔生痕은 느릿느릿 뒤를 따르는데 원주율 따라 언덕길 오르는 저 바퀴의 정점은 어디일까 그믐달처럼 나뭇가지 끝에서 망설이고 있을 노인 숨소리 바람은 풍경 속에서 그믐달을 몹시도 흔들어대더군 유모차 바퀴 소리에 깔려 휘청거리는 밤이 오는데 숨소리는 폐지廢紙로 빈 골목을 헤매겠지. 액자 속에서 한 남자가 다가오더군 데칼코마니처럼 오른손을 들면 왼손으로만 답하는 꽤 닮았지만 전혀 닮지 않은 모습이야 액자 속에서 남자가 노인의 숨소리를 따라 걷고 있어 나는 이렇게 또 다른 액자 속에 갇혀 있는데 정말 이상도 하지.
2011-01-26 11:51엄마가 주신 만 원짜리 돈을 만지작거리며 선생님께 다가섭니다. “선생님, 날갈이 해도 돼요?” “시간 없다. 그냥 신어라.” 나는 집에서 가져온 스케이트를 든 채 쭈뼛거립니다. 날갈이를 해야 잘 나가는데 그냥 신으라니 짜증이 납니다. 긴 파마머리를 뒤로 묶은 선생님께서는 친구들이 스케이트 신는 걸 도와줍니다. 그냥 내 스케이트를 신고 얼음 위에 서니 자꾸만 엉뚱한 곳으로 미끄러지는 것 같습니다. “우리 안전모 타고 갈까?” “동민아, 그거 재밌겠는데.” 준혁이가 오른손 엄지손가락을 세워 흔들더니 안전모를 벗습니다. 나를 따라 안전모를 엉덩이에 깔고 앉습니다. 쭉 미끄러져 나갑니다. 빙글 돌기도 하고 기우뚱하며 아이들과 부딪히려고도 합니다. 스케이트 타는 것과는 색다른 아슬아슬한 맛이 있지요. 선생님께서 호루라기를 불어 우리를 부릅니다. 준혁이는 재빨리 안전모를 머리에 쓰더니 스케이트를 타고 갑니다. 나는 안전모를 깔고 앉아 두 발로 중심을 잡고 선생님 앞까지 미끄러져 갑니다. “동민아, 너 지금…….” 선생님은 어이없다는 듯 말을 잊지 못합니다. “기분 짱이예요!” “뭐?” 이상하게 선생님의 얼굴이 굳어집니다. 그러고는 아직도 내가 깔고 앉은 안전모를 곁눈질
2010-12-23 13:322010 교
2010-12-23 13:31우리 집에 실란이 이사 온 지는 5년이 좀 넘었나 봐요. 정확히 표현하면 공원에 버려진 말라가는 실란이 가여워 주어다가 우리 집 화분에 심은 지가 그 정도 됐다는 거죠. 빈 화분에 거름흙을 섞어서 정성껏 심었습니다. 그렇지만 첫해에는 몸살을 앓는지 꽃을 피우지 않았습니다. 다음 봄에도 꽃을 피우지 않아서 이젠 그러려니 생각하며 지냈습니다. 3년 째 되는 봄이었습니다. 우연히 베란다를 바라보던 나는 마치 조화처럼 올라온 3개의 꽃대에 피어난 하얀 꽃이 생소하여 깜짝 놀랐습니다. “아! 네가 꽃을 피웠구나.” 나도 모르게 베란다 문을 열고 나갔습니다. 수줍은 듯 약간 오므린 꽃을 보고, 또 보았습니다. 다시 살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버리지 않아 꽃도 피웠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5년째 되는 올 봄엔 지난해보다 더 많은 20여 개의 꽃대를 올렸습니다. 봄마다 분갈이를 해 주는 나의 정성을 잊지 않았구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올해에는 봄에 꽃을 피운 것도 모자랐는지 10월쯤에 또 쉴 새 없이 많은 꽃대를 올리며 꽃을 피웠습니다. ‘이게 무슨 일 일까? 좋은 일이 있으려나?’ 막연히 꽃을 보며 생각했습니다. 특별한 일이 없이 11월을 맞이했고, 그날은 18일
2010-12-23 13: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