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의 시인으로 ‘가을의 기도’를 비롯해 주옥같은 작품을 남긴 다형 김현승 시인과 ‘사평 역에서’로 사랑을 받는 곽재구 시인을 들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들보다 앞서 한국 문학의 선도적인 역할을 하며 1930년대 절친한 문학의 동반자인 김영랑과 함께 ‘시문학’을 창간하고 순수 서정시의 세계를 정립한 용아 박용철을 빼놓을 수 없다.
광주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민주화 운동의 본산’이라는 말이 가장 먼저 생각난다. 그 민주화의 현장에서 1930년대 한국 순수 문학의 새 지평을 연 용아(龍兒) 박용철의 추억과 삶을 찾아 나선다. 광주시 광산구에는 박용철이 태어나 살던 집과 송정공원의 시비, 시인의 유년 시절을 간직한 황룡강이 맑게 흐르며 답사객의 발길을 기다리고 있다.
도심 속 작은 원림, 소촌동 생가
빛고을 광주에서 박용철 시인의 생가를 찾는 것은 꽤나 어려운 일이다. 더욱이 그 길이 초행길이라면 더 말할 나위도 없다. 어설픈 지도 한 장을 들고 시인의 고향을 찾아가기 시작한다. 그 흔한 내비게이션을 사용하지 않는 것은 지도 한 장이 주는 묘한 매력과 마을 주민들의 정감어린 안내를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호남고속도로 광산나들목을 나와 나주로 향하는 13번 국도를 달린다. 송정공원을 끼고 우회전해 1㎞ 정도를 달리면 광산구청 직전 삼거리에서 금호타이어 공장 앞으로 다시 우회전하는 길이 나오는데 22번 국도인 이 도로가 소촌동으로 이어지는 어등로이다. 삼거리에서 500m 정도 가면 송정초등학교 뒤편 주택가에서 박용철 시인의 생가를 찾을 수 있다.
마을 안쪽 골목길로 들어서자 옛 향기 물씬 풍겨나는 초가가 마치 한 폭의 동양화처럼 시야에 들어온다. 광주시 광산구 소촌동 363-1번지. 이곳이 바로 ‘시문학’을 창간하며 한국 시단에 순수 서정시의 꽃을 피운 용아 박용철의 생가이다. 시인의 생가를 보는 순간 21세기의 도심 속에서 만나는 초가의 모습에 설레는 마음을 달랠 수 없다. 야트막한 돌담 사이를 돌아들어 가면 ‘용아 생가’라는 글씨가 새겨진 기념비가 가장 먼저 답사객을 맞는다.
닫혀 있는 대문을 들어서는 순간 ‘이곳이 정말 별천지구나’하는 탄성이 나온다. 어떻게 도심 속에 이런 공간이 존재할 수 있는 것일까. 생가의 대문 안쪽에는 온갖 종류의 나무와 꽃이 어우러져 있어 마치 작은 원림 속에 있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인공의 조경이면서도 인공의 냄새가 묻어나지 않는 것은 시공을 초월한 오랜 세월의 증거이리라.
안채에는 현재 박용철 시인의 6촌 여동생이 생활하며 생가를 지키고 있다. 낯선 불청객의 방문을 따뜻하게 맞아주는 모습에서 넉넉한 인심을 느껴본다. 박용철 시인의 고조부가 지었다고 전해지는 이 생가는 현재 시인의 아들인 박종달 씨의 소유로 돼 있으나 서울에서 거주하기 때문에 6촌 여동생이 맡아 관리하고 있다. 툇마루에 걸터앉아 지친 몸을 쉬어 본다. 정원의 나무 사이로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이 송골송골 맺힌 땀방울을 씻어 낸다.
광주시기념물 제13호로 지정된 박용철 생가는 2975㎡ 정도의 대지에 안채와 사랑채, 행랑채, 사당과 서재 등이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생가의 맨 앞쪽에 있는 건물이 행랑채이고, 그 안쪽에 사랑채가 있는데, 이곳은 주로 남자들이 거주하는 공간으로 박용철 시인도 이곳에서 많은 작품들을 지었다고 한다. 사랑채와 안채 사이에는 화단이 조성되어 있어 계절별로 변화하는 자연의 모습을 감상할 수 있다.
안채는 돌로 높게 기단을 쌓은 후 그 위에 정면 다섯 칸, 측면 두 칸의 가옥으로 건립했는데 오른쪽에는 부엌이 자리 잡고 있다. 안채 앞에 있는 곱게 정돈된 장독대가 고향의 소박한 정취를 드러내고, 그 뒤로 낯선 손님의 움직임에 애써 목청을 높이는 강아지 소리가 유난히 정겹다. 안채의 앞마당 왼쪽에는 1996년 6월 한국문인협회에서 세운 문학 표징이 세워져 있다.
안채 뒤로 돌아가면 파수꾼처럼 생가의 뒷면을 호위하는 아름드리의 나무와 해장 죽이 푸름을 간직한 채 시인의 곧은 정신이 살아 있음을 이야기한다. 대나무 숲 앞에는 정면 세 칸, 측면 한 칸의 사당이 자리 잡고 있어, 이 집안의 오랜 역사와 가문의 전통을 가늠하게 해 준다.
수학 공부하던 용아, 영랑을 만나다
박용철의 일본 유학 생활은 그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변화의 시기라고 할 수 있다.
일본에 건너가 청산학원에 편입해 학교생활을 하던 박용철은 역시 청산학원에 재학 중인 김영랑을 만나면서 새로운 인생을 살게 된다. 그때까지만 해도 수학 공부에 전념하던 박용철이 문학에 관심을 가질 수 있도록 이끈 인물이 바로 김영랑이다. 박용철은 김영랑을 통해 문학에 깊은 관심을 가지게 됐고 그 영향으로 청산학원을 졸업한 후에는 도쿄외국어학교에 입학해 독문학을 전공하게 된다. 간토(關東) 대지진으로 학업을 마치지 못하고 1923년 9월에 귀국한 박용철은 연희전문학교에 편입해 위당 정인보 시인에게 시조를 배우기도 하지만 얼마 후 학업을 중단하고 다시 고향으로 돌아오게 된다.
아름다운 황룡강이 맑게 흐르는 고향에서의 생활은 오히려 문학적 관심을 더 높이는 시기였다고 할 수 있다. 그는 김영랑이 있는 강진을 오가며 교류 관계를 맺고, 김영랑의 도움을 받아 1930년 3월에 ‘시문학’을 창간한다. 박용철이 사재를 털어 창간한 ‘시문학’은 1920년대 후반부터 불기 시작한 ‘카프’파의 목적 문학에 정면으로 반발해 일어난 순수 문학 운동을 대변하는 전문 문학지라고 할 수 있다. 계급주의 문학을 철저히 배격하고 ‘예술을 위한 예술만이 진정한 예술’이라는 ‘시문학’의 정신은 당시 시단에 신선한 바람을 불어넣었다.
광주공원은 이런 사연을 가지고 있는 용아와 영랑의 시비가 함께 있는 곳이다. ‘광주 제1호 공원’인 광주공원은 일제 강점기에는 신사(神社)가 있었는데 현충각과 시민회관, 광주시립박물관이 생기면서 광주 시민을 위한 공원으로 새롭게 태어난 곳이다.
공원 계단을 오르면 시민회관 옆으로 조지훈 시인의 4·19혁명 추모 시비를 만나게 되고 현충탑에서 오른쪽으로 난 오솔길을 걸어가면 박용철․김영랑 시인의 시비가 그 모습을 드러낸다. 1970년 12월에 세워진 두 시인의 시비는 좌우 대칭이 되도록 조성해 박용철 시인의 ‘떠나가는 배’와 김영랑 시인의 ‘모란이 피기까지는’의 일부를 나란히 새겨 놓았다. 10대의 젊은 시절에 만나 평생 문학의 동반자로 살다간 두 시인의 고귀한 삶을 되짚어 보는 좋은 계기가 될 듯싶다. 시비 주변의 의자에 앉아 이야기꽃을 피우는 노인들의 모습에서 두 시인의 잔영이 떠오르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광주 시민의 휴식 공간 중의 하나인 송정공원에도 시비가 있다. 송정공원을 오르는 길옆에 세운 박용철의 시비 ‘떠나가는 배’가 제법 멋스럽게 답사객을 맞는다. 시 제목에 걸맞게 삼단 돛을 높이 단 배 모양의 시비가 인상적이다. 약간의 바람이라도 불어오면 금방이라도 넓은 바다를 향해 힘껏 물살을 가르고 나갈 것만 같다. 배 모양의 기단에는 ‘용아 박용철 시비’라는 글씨가 또렷하고, 돛의 하단 오석에는 시 ‘떠나가는 배’의 전문을 새겨 놓았으며 윗부분에는 시인의 얼굴을 조각해 놓았다.
송정공원 역시 일제 강점기에 신사가 있던 곳으로 해방되면서 신사는 모두 헐리고 이제는 포교원이 자리 잡고 있으며, 현충탑이 그 위용을 자랑하고 있다. 공원 안에는 송정도서관이 있어 학생들이 즐겨 찾는 곳이다.
광주에 왔다면 사직공원을 둘러보는 것도 좋다. 사직공원은 도심 속에 있으면서도 울창한 숲과 꽃을 불 수 있는 곳으로 광주공원과 함께 광주시민들이 즐겨 찾는 명소이다. 특히 사직공원 내에는 경찰충혼탑, 정자인 연파정, 활터인 관덕정 등이 있고, 정상에는 시가지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팔각정이 있어 도심 속에서도 자연과 함께할 수 있는 여유가 묻어나는 곳이다.
사직공원의 가장 큰 매력은 시와 함께할 수 있는 공원이라는 점이다. 공원을 오르다 보면 길섶에 세워진 멋스러운 시비들을 볼 수 있다. 윤선도의 시비인 ‘오우가’를 비롯해 김덕령, 이순신, 임제, 정충신 등의 시조비와 박상의 한시를 적은 시비가 있고, 박봉우의 ‘조선의 창호지’와 이수복의 ‘봄비’를 새겨 놓은 시비도 만날 수 있어 즐겁다.
유년 시절의 추억 간직한 황룡강
황룡강은 전남 장성군 북하면 신성리 입암산성 서북쪽 골짜기에서 발원해 임곡동을 거쳐 광주시 광산의 용진산과 어등산 사이로 흘러 송정동에서 영산강의 본류인 극락강과 합류해 나주로 흐르는 강이다.
‘광산 8경’ 중 하나인 황룡강은 주변 경관이 아름답기로 유명한 곳이다. 최근에는 황룡강 주변을 공원으로 조성해 가족 나들이의 휴식 장소가 되고 있다. 강가를 따라 끝없이 펼쳐진 유채꽃밭에서 백로가 거니는 모습을 보거나 낚싯대를 드리우고 자연의 정취에 취한 사람들을 보고 있노라면 황룡강의 아름다움을 오롯이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박용철은 유년 시절에 이곳을 자주 찾았다고 한다. 일제 강점기의 암울한 현실에서 그에게 위안을 준 것이 황룡강이다. 그는 이곳에서 ‘떠나가는 배’를 구상했을지도 모르리라. 강의 물살을 가르는 고깃배의 모습에서 고향을 떠날 수밖에 없는 젊은이들의 비애를 본 것은 아니었을까.
■ 문학답사를 위한 여행 코스
광주 도착 ⇒ 소촌동 생가 ⇒ 송정공원(시비) ⇒ 황룡강 ⇒ 광주공원(시비) ⇒ 사직공원 ⇒ 광주 출발
■ 문의
광주 광산구청 문화관광과=062-960-8255
광산문화원=062-941-337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