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로 데뷔 42주년을 맞는 최민식 배우가 <파묘>(감독 장재현)에서 40년 경력의 풍수사로 분했다. 누울 자리를 봐달라는 부탁을 들으면 일단 단가부터 계산하지만, 자연과 땅에 대한 철학만은 절대 타협하지 않는 캐릭터다. 거액의 돈을 받고 수상한 묘를 이장한 이들에게 벌어지는 기이한 사건을 담은 오컬트 미스터리 영화 <파묘>는 개봉하자마자 한국 영화의 활력을 불어넣고 있다.
시놉시스는 다음과 같다. 미국 LA, 거액의 의뢰를 받은 무당 ‘화림’(김고은)과 ‘봉길’(이도현)은 기이한 병이 대물림되는 집안의 장손을 만난다. 조상의 묫자리가 화근임을 알아챈 화림은 이장을 권하고, 돈 냄새를 맡은 최고의 풍수사 ‘상덕’(최민식)과 장의사 ‘영근’(유해진)이 합류한다. “전부 잘 알 거야…. 묘 하나 잘못 건들면 어떻게 되는지.” 절대 사람이 묻힐 수 없는 악지에 자리한 기이한 묘. 상덕은 불길한 기운을 느끼고 제안을 거절하지만, 화림의 설득으로 결국 파묘가 시작되고, 나와서는 안 될 ‘험한 것’이 나오는데….
최민식 배우는 1982년 연극 <우리 읍내>로 데뷔했다. 1989년 KBS 드라마 <야망의 세월>로 브라운관에 얼굴을 알렸고, <서울의 달>(1994)에서 시청자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연기의 귀재는 충무로에서도 알아봤다. <쉬리>(1999), <올드보이>(2003), <악마를 보았다>(2010), <범죄와의 전쟁>(2012), <신세계>(2013), <명량>(2014) 등 다양한 작품에서 실감 나는 연기로 호평 받았다. <파묘>의 장재현 감독은 “최민식 배우의 얼굴로 담는 순간 모든 것이 진짜가 되는 묘한 마법이 있다”라며 깊은 신뢰를 드러내기도 했다. 최민식 배우가 생각하는 오컬트·무속신앙·풍수지리란 무엇인지, 그의 연기 철학과 함께 들어봤다.
<파묘> 시나리오의 첫인상이 어땠는지 궁금해요. 바로 출연을 결심하셨나요?
저는 함께 작업을 한다는 결심을 내리기 전에 감독과 시간을 많이 보내는 편입니다. 이 사람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어떤 마음으로 시나리오를 썼는지 알아봐야 하니까요. 대본을 받고 장재현 감독과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눴어요. 하루는 장재현 감독이 “우리 땅의 트라우마를 치유하고 싶다”라는 말을 했어요. ‘땅의 트라우마’라는 표현은 처음 들어봤는데, 그 정서가 마음에 들더라고요. 장 감독은 전작 <검은 사제들>(2015), <사바하>(2019)에서 신과 인간, 자연과 종교를 다뤄요. 인간과 종교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 같아요. 무신론자라고 해도 우리가 나약해질 때면 신에게 매달리잖아요? 하나님이든 부처님이든요. 종교라는 소재는 자칫 잘못 건드리면 위험해지거나 고루해질 수 있는 형이상학적이고 관념적인 부분인데, 장 감독이 그런 부분에서 열려 있더라고요. 영화적인 실력도 있고요. 아, 이거 너무 띄워 주나?(웃음) 그런 게 좋았습니다.
오컬트라는 장르 자체가 마니아적 요소가 강합니다. <파묘>는 여기에 풍수지리와 무속신앙까지 버무렸어요. 거부감이 들진 않던가요?
아니요. 오히려 친근함이 느껴졌어요. 오컬트다, 아니다가 아니에요. 무속과 풍수지리는 어릴 때부터 늘 옆에서 보던 문화예요. 지금도 남아있죠. 이사 때 손 없는 날을 택하거나, 현관 정면에 거울을 두지 않는다는 것처럼요. 미신이라고 부정적으로 생각하기보다는 재밌잖아요? 하면 좋다는데.(웃음) 물론 너무 거기에 매몰돼서 전 재산을 날린다든가 하면 문제겠죠. 살면서 논리적으로나 이성적으로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분명 있습니다. 저는 그냥 우리만의 고유한 문화와 풍습으로 즐기면 좋을 거 같아요. 사실 저도 그런 경험이 있습니다.
어떤 경험인가요?
열 살 무렵 폐결핵으로 죽을 고비를 넘겼어요. 의사도 살릴 방법이 없다며 포기했는데, 어머니가 절에 가셔서 기도했어요. 희한하게 나았습니다. 지금도 사주를 보면 열 살 이후 인생은 안 나와요. 그런 신비로운 경험을 직접 몸으로 겪은 겁니다. 그런데 저는 그걸 신에 대한 믿음이나 감사로 여기기보다는 어머니의 정성으로 받아들여요. 왜 손주가 군대 가면 할머니가 매일 장독대 위에 정화수를 떠 놓고 기도하잖아요. 우리 손주 제대 날까지 다치지 않고 무사히 돌아오게 비는 마음이 왜 미신인가요? 할머니의 그런 마음이 종교 아닐까요?
묫자리를 찾고 이장을 하는 건 우리의 오래된 관습인데 지금 ‘화장’으로 바뀐 장례문화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개인적인 생각입니다. 돌아가시고 어디에 어떻게 모시는가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고 봐요. 좋은 묫자리를 찾는 건 이승에 남은 후손들이 조상 덕을 보려는 거잖아요? 살아계실 때 잘해드리지도 않고서 돌아가시니 좋은 땅 찾는 건 어찌 보면 좀 얄밉죠. 아, 내가 왜 이렇게 흥분하지.(웃음) 제 부모님도 화장해서 모셨습니다. 매장이 좋다, 화장이 나쁘다를 떠나서 어떤 마음으로 모시는가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40년 넘게 연기하면서 수많은 역할을 맡았지만, 풍수사 역할은 처음이죠. 캐릭터 구축이 쉽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상덕’은 평생 자연을 관찰하면서 산 사람이에요. 보통 사람들이 산에 가서 ‘야호’하고 외치는 것처럼 산을 바라보진 않았을 거로 생각했어요. 인간의 길흉화복을 터의 모양·형태·질감으로 연구하면서 길지와 흉지를 구분했을 겁니다. 그런 사람이라면 산새 한 마리,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도 깊게 바라보는 태도를 가졌을 거라고 상상했어요. 그것을 상덕 캐릭터의 가장 큰 줄기로 표현하려고 노력했죠. 거창하게 말하긴 했지만, <파묘>는 사실 김고은 배우가 다 했어요.(웃음)
대살굿 장면의 김고은 배우는 정말 혼을 담은 연기를 펼치더라고요.
김고은은 <파묘>의 손흥민입니다!(웃음) 사실 배우들이 ‘예쁘다’, ‘잘생겼다’는 이미지에 갇히는 경우가 많아요. 특히 여배우가 무속인 역할을 한다는 게 쉽지 않은데요. 김고은 배우는 스스럼없이 자신을 내려놓고 용감하게 뛰어들었어요. 선배로서 너무 대견하더라고요. 앞으로의 김고은 배우가 더 기대되는 이유죠. 김고은 배우뿐 아닙니다. 유해진 배우와는 일제강점기에 봉오동에서 한번 싸워보기도 했고요.(웃음) 이도현 배우 역시 예전부터 함께 작업한 친구처럼 느껴졌어요. 리딩 때부터 우리 네 명은 어벤저스가 아니라 ‘묘벤저스’가 될 때까지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죠.(웃음)
영화 후반부에 ‘험한 것’이 등장합니다. 차마 사람이 범접할 수 없는 압도적인 모습인데 어떤 기분이 드셨는지, 또 연기하기는 어렵지 않으셨는지 궁금합니다.
아유, 저 같으면 안 싸워요. 바로 도망가야죠.(웃음) 영화 초반에 계속해서 나오는 할아버지 귀신은 관객들이 잘 알아채지 못하게 나오죠. 희미하고 뿌옇게요. 그런데 ‘험한 것’은 진짜 눈앞에 확 다가와요. 야구로 치면 직구죠. 눈앞에 보이니 연기하기는 더 쉬웠습니다. ‘험한 것’을 맡은 배우가 정말 고생했어요. 6~7시간씩 분장을 해야 하는데 군소리 하나 없더라고요. 제가 뭘 해줄 수 있겠어요? 바나나우유 하나 까서 빨대 꽂아 주면서 말했죠. “미안하다. 그런데 내가 너를 죽여야 한다”라고요.(웃음)
40년 넘게 다양한 드라마·영화·연극에서 선 굵은 연기를 이어오고 있습니다. 최민식 배우만의 연기 노하우가 있을까요?
그건 영업 비밀인데요.(웃음) 사실 그런 노하우는 없어요. 배우는 허구의 캐릭터를 현실에 있을 법하게 그리는, 그러니까 그럴듯하게 사기를 치는 일을 하죠.(웃음) 촬영에 들어가기 전에 캐릭터 구축을 위해 감독과 셀 수 없이 대화해요. 이런저런 레퍼런스도 찾아보죠. 하지만 카메라 앞에 설 때는 무슨 일이 있어도 저 혼자서 감당해야 합니다. 마치 절벽에 떠밀려 서 있는 듯한 느낌이랄까요. 어떻게든 이 인물을 표현해내야 한다는 절박함도 있고요. 물론 감독이 연기 디렉션은 줄 수 있겠죠. 하지만 배우라는 직업에서 가장 외로워지는 순간을 오롯이 스스로 이겨내야 해요. 이 캐릭터는 어떤 말투를 쓸까 상상하면서 자꾸만 무형의 인물에 다가가는 거죠. 어느 정도 그렇게 캐릭터와 밀착된 상태로 카메라 앞에 서는 것이 정말 중요합니다. 슛이 들어가면 더 이상 좌고우면할 수 없어요. 거기서 고민을 하면 영화가 산으로 갑니다. 망해요. 일단 캐릭터에 올라타면 그때부터 몰입해서 즐기는 겁니다. 그렇게 후반부로 갈수록 캐릭터와 더 견고하게 붙어버리는 거고요.
지금까지의 연기 인생을 되돌아보면 스스로를 어떻게 평가하세요?
기자들이 데뷔 35주년이다, 연기 경력 42년이다 이렇게 말하는데, 제가 그걸 세면 안 되죠. 그건 자꾸 뒤로 주저앉으려고 하는 거예요. 훗날에, 아주 나중에 죽기 전에나 한번 되돌아보는 거죠. 내가 왕년에 이랬지 하고 싶지 않아요. 그건 배우나 창작하는 사람이 가질 태도가 아니라고 생각해요. 후배들에게 귀감이 되고 존경받는 예술가들을 보면 절대 그러지 않아요. 얼마 전에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 보고 왔어요. 신구, 박근형 선생님 연기를 보는데 눈물이 나더라고요. 그분들도 아직 하시는데, 저는 뭐 핏덩이죠.(웃음) 저는 앞으로도 하고 싶은 영화가 너무 많습니다. 나이가 들수록 의욕도 더 생기고요. 제 인생도 작품도 한정돼 있어요. 앞으로 제가 겪을 영화적 세상은, 지금까지 한 작품의 빙산의 일각도 안 됩니다. 이걸 다 못해보고 죽는 게 얼마나 아쉬워요?
그렇군요. 이미 많은 역할을 하셨지만, 혹시 도전해 보고 싶은 배역이 있다면요?
일단 멜로를 못해봐서 하고 싶습니다.
방금 한 답변을 <파이란>의 장쯔이 배우가 들으면 실망할 것 같습니다.(웃음)
아이, 얼굴도 못 봤잖아요. 얼굴도 보고 밥도 먹고 차도 마셔야 멜로죠. 그런 게 멜로면 다시 안 하죠.(웃음) 멜로는 사랑의 감정을 표현하는 건데. 과연 사랑이 뭘까요? 내가 저 사람을 사랑한다는 거 자체가 진짜 사랑일까요? 달달한 카페라테 같은 것이 사랑일까요? 이성 간의, 선남선녀의 사랑만이 사랑일까요? 또 사랑의 형태는 무엇일까요? 서로 공감하고 교감하는 냄새와 모양이 어떤 사랑의 형태로 표현될 수 있을까요? 수십만 갈래의 인간 감정을 어찌 다 표현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저는 아직도 궁금한 게 너무 많습니다. 어찌 보면 인간에 대한 호기심이겠죠. 그래서 하고 싶은 역할도 많습니다. 그런데 멜로 영화 시나리오가 안 들어오네요. 다들 뭐 하고 있는 건지.(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