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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벽 칼럼] 교육이 정말로 백년대계인가

우리는 툭하면 ‘교육이 백년대계’라고 말합니다. 그냥 멋있는 미사여구일까요? 과연 추상적인 문구일까요? 아닙니다. 우리 집 거실에는 교육이 정말 백년대계임을 확실하게 보여주는 매우 귀한 사진이 하나 걸려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어떤 교육을 받는가에 따라 어떻게 백 년이 극명하게 달라지는지를 보여주는 사진입니다. 


거의 백 년 전에 찍은 사진인데 흰 도포에 정자관을 쓴 어르신이 가운데 앉아있고 양쪽으로 까만 두루마기에 중절모를 쓴 신사와 검정 교복에 사각모를 쓴 학생이 서 있습니다. 사람들은 조선시대에서 일제강점기를 거쳐 현대를 아우르는 옷차림에서 할아버지, 아버지, 아들, 이렇게 삼대냐고 묻습니다만 사실 사진 속의 인물은 제 큰아버지, 작은아버지, 아버지. 이렇게 삼 형제입니다.


삼 형제가 한 시각에 한 장소에 모였는데 서로 완전히 다른 시대 복장을 하고 있으니, 백 년 전 한국이 얼마나 심한 격변기였는가를 여실히 보여주는 사료입니다. 또한 오늘날 한국 교육현실에 대해서 매우 중요한 교훈을 주는 사진이기도 합니다. 그 당시 삼 형제가 택한 교육에 따라 그들에게 극과 극으로 다른 삶이 펼쳐졌고, 심지어 그들의 자손에게도 대대로 영향을 미쳤기 때문입니다. 

 

결과적으로 큰아버지와 작은아버지 집안은 많이 기울었습니다. 지금 되돌아보면 너무 당연하지 않나요. 아니, 시대가 어느 시대인데, 그깟 정자관이 뭐라고 도포까지 차려입고 에헴 에헴 헛기침하면서 공자왈 맹자왈을 읊어대고 있었으니 미래가 암울해진 게지요. 


시대가 변하면 그 시대가 요구하는 교육을 받아야 성공하는 것입니다. 신식공부를 한 저희 아버지만 훗날 인재로 인정받고 대우받으며 살게 되었습니다. 그 당시 어르신들 눈에는 흉하기 짝이 없어도 상투를 싹둑 잘라버리고 까까머리 한 용기 있는 결단으로 결국 새로운 시대에 성공한 것입니다.


큰아버지와 작은아버지는 시대가 변하고 있다는 사실을 몰랐을까요. 아닙니다. 그들도 확실하게 알았다고 합니다. 막내만큼은 신식공부를 받게 해야 한다고 할아버지를 설득한 분이 바로 큰아버지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정작 본인은 정자관을 벗어 던져버리지 못하였습니다.

 

시대가 더 이상 용납하지도 않고, 그래서 그 기세가 얼마 가지 못할 것임을 알았음에도 평생 누리고 살아온 기득권의 상징을 스스로 포기하기는 어려웠나 봅니다. 어쩌면 그들은 그리하는 게 옳은 선택이라고 합리화했을 수도 있습니다. 전통을 고수하는 게 외세와 침략에 맞서는 정의로운 항쟁이라고 여겼을 수도 있겠습니다.

 

요즘에도 우리 사회에 시대적 생명을 다한 기득권을 내려놓지 못하는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그들 역시 정의를 부르짖으며 자신들의 입장을 고수합니다. 심지어는 거리로 나와 데모하면서 오히려 변화의 바람을 불의라고 규정하고 부당함을 외칩니다. 얼핏 보면 그들의 말이 맞는 것 같고, 그들의 행동에 용기가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일부는 아닐 것입니다. 불의에 맞서는 용기가 아니라 기득권을 잃을까 겁내는 비겁함인 경우도 있습니다.


거리에 나간 행동은 같더라도 무엇을 위함인가에 따라 평가는 달라집니다. 저희 선친은 일제시대에 일본에서 유학하며 의학을 공부하였고, 해방 후에는 다시 미국에서 유학하였습니다. 그러나 무작정 대세에 따르거나 쫓은 게 아닙니다. 일본에서 반일운동을 하다가 그 악명 높은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징역을 치른 애국지사입니다. 저희 선친도 거리로 나가 데모를 하였지만, 자신의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모두의 자유와 독립을 쟁취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니 시대가 바뀌었다고 무조건 변하고 시류에 따라야 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지켜내야 할 것과 버려야 할 것을 구분할 줄 알아야 하며, 과감하게 실천할 수 있어야 합니다. 지켜야 하는 것은 일류보편적인 가치관이며, 이는 시대 흐름과 무관하게 소중합니다. 반면 버려야 하는 것은 자기중심적 이득이며, 이 역시 시대 흐름과 무관하게 비열합니다. 선택은 기득권 유지가 아니라 인류보편적인 가치관 추구가 판단기준이 되어야 하며, 이 역시 교육이 배양해야 하는 역량입니다.

 

지금 한국 교육이 처한 상황은 백 년 전과 유사한 대격변기입니다. 최근에 코로나 팬데믹으로 인하여 등교하는 학교의 종말이 예고되었습니다. 예기치 않게 전 세계 82% 초·중·고·대학이 동시에 장기간 문을 닫는 대규모 교육 실험이 진행되었지요. 실험의 결론은 충격적입니다. 학교가 문을 닫아도 교육이 가능하다는 것이 확인되었습니다.


챗봇의 등장은 정답을 추구하는 교육의 종말을 예고합니다. 이제는 질문을 잘하기 위한 브레인스토밍과 집단지성을 위한 하트스토밍 역량이 중요해졌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여전히 암기력과 분석력을 평가하는 수능시험 점수에 따라 기득권을 부여하고 있습니다.


공장형 대량교육체계에 인공호흡기를 달아서 수명을 연장하지 맙시다. 오늘날 학교의 처지는 백 년 전 서당이나 흡사합니다. 서당을 리모델링하고 사서삼경에 오경을 추가한다고 달라졌을 리 없었듯이 오늘날 학교를 업그레이드하고 교과과정을 손본다고 될 일이 아닙니다. 학동 몇 명 모아 가르치던 한옥 서당이 사라지고 학생 수백 명이 집합하는 신식 건물로 바뀌었듯이 이제 다시 새로운 형태의 학교가 신축되고 새로운 교과과정이 도입되어야 하겠습니다. 

 

완전히 새로운 교육시스템을 설계합시다. 이미 공교육의 울타리는 여기저기 터지고 운동장은 기울었습니다. 구멍 나고 기운 게 문제가 아니라 끝없이 땜질하며 유지하려는 게 문제입니다. 마치 안전진단 불합격을 받은 아파트를 보수공사 하느라 헛수고하는 대신 완전히 허물고 재건축하듯이 공교육도 새롭게 설계되고 신축되어야 합니다. 


새로운 교육 마스터플랜에 가장 먼저 고등교육의 학위 독점을 깨는 방안을 마련합시다. 독점은 기득권의 최대 이득입니다. 대학입시의 병목현상을 해결해서 교육흐름을 원활하게 하고 학생들의 숨통을 트여주어야 합니다. 한국의 교육문제는 모두 입시로 귀결된다는 것은 삼척동자도 다 아는 사실이잖아요. 그러니 입시문제에 수시와 정시 비율을 조정하는 미시적 차원이 아니라 아예 우회하는 진로를 활짝 열어젖혀야 합니다.


우리 모두 용기를 냅시다. 쓸모없어진 정자관을 붙들고 있는 저희 큰아버지와 작은아버지처럼 자신의 복지부동을 합리화하지 맙시다. 시대변화가 무엇을 요구하는지 우리 모두 다 알고 있잖아요. 아무리 아까워도 철 지난 것을 과감하게 손 놔야 새로운 희망찬 미래를 손에 쥘 수 있습니다. 함께 하면 두렵지 않습니다.

 

교육은 진정 백년대계입니다. 오늘날 우리의 선택에 모두의 미래가 달렸습니다. 다 함께 희망찬 미래로 나아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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