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권의 책이 불러낸 30년 전 호남예술제
낯설게 볼 수 있을 때 우리는 익숙한 것들 속에 숨어 있던 새로움을 발견한다. 그리고 그제야 비로소 보이지 않던 것들을 볼 수 있게 된다. 당장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가장 중요한 것, 말하자면 본질 같은 것. 이것이 바로 우리 시대가 요구하는 창조성의 핵심이기도 하다. -프롤로그 中에서
가끔 지역 도서관에서 예술 분야의 책을 일부러 빌리거나 들여다본다. 내게는 그림의 떡과 같은 미술 분야는 실물을 접할 수 없으니 아쉬움을 갖게 하는 책들이다.
실물을 접할 수 없으니 모조품이라도 보며 대리만족을 하고 싶어서다. 내게 미술 상식이란 중학교와 고등학교 졸업자격 검정고시를 위해 책으로 외운 미술사 정도가 고작이니 더욱 그러하다. 시대별로, 작가별로 외워대던 미술 상식이 아직도 익숙하게 생각나서 신기하다. 기초적인 단순 암기 지식도 때로는 얕은 포만감을 안긴다.
그리고 30여 년 전 6학년 우리 반 35명을 데리고 호남예술제 회화와 글짓기 부문 참가를 위해 석 달 동안 사비를 들여 서양화 수채화 개인지도를 받으며 실기를 배운 게 전부다. 나의 미술 시간은 국민학교 때 크레파스로 그림을 그리던 시절에 멈추어버렸으니 우리 반 학생들을 위한 실기 능력 향상을 위해서는 땜질이 필요했다.
실기 지도에 자신감이 생긴 나는 용기를 내서 우리 반 아이들을 그림 그리기 대회에 출전시키기로 했다. 호남예술제가 열리는 중외공원을 찾아 배경이 아름다운 장면 여러 컷 사진을 찍어서 A4 용지 크기로 뽑아서 우리 반 학생들에게 제공하고 똑같이 그리는 연습을 시켰다. 글쓰기 주제는 예상되는 글감을 주고 쓰게 하거나 관련된 책들을 골라 읽게 하였다.
그렇게 한 달 가까이 틈만 나면 똑같은 장면을 수채화로 그리기 연습을 하는 동안 아이들의 그림이 놀랍도록 발전하는 모습에 감동을 받던 35년 전 오래 전 장면이 생각나는 책이라서 반가웠다. 회화의 시작이 스케치를 시작으로 수없는 연습이 아니던가. 화가들의 그림이 실린 책이나 화보집을 돌려보게 하는 것도 큰 도움이 되었다.
학부모를 설득하여 좋은 수채물감과 붓을 사게 했고 4B 연필이나 그림 전용 지우개, 화판까지 모두 준비하게 했다. 토요일까지 공부하던 시절이라 6월 6일 현충일이나 일요일에도 나오게 했다. 산문과 운문 분야는 내가 직접 지도했고 그림은 사진을 보고 똑같이 그리기 연습을 시켰다. 붓질의 방향과 밑그림의 중요성, 채색 기법 등 거의 1년 동안 가르칠 회화의 모든 것을 한 달 동안 다 가르친 셈이었다.
시골 아이들이라 광주에 있는 그 공원을 가 본 적 없으니 예술제 당일에 찾아가면 장소물색을 하다 시간을 버릴 게 분명하므로 사전 예비 학습을 시킨 것이다. 당일 날은 사진으로 본 장소로 데려가서 그림을 그리게 했다. 마음을 다한 노력 덕분인지 우리 반은 전체 학생이 상을 받는 기염을 토했다. 장래 희망이 화가라고 자랑스럽게 말하던 아이도 생겼다.
산문 부문 최고상을 비롯해 회화 부문에서 최우수상을 시작으로 우수상도 여러 명, 입선이나 특별상 장려상까지 참가자 전원이 모두 상을 탔다. 학부모와 아이들의 기쁨이 얼마나 컸던가! 교실 뒷벽 자랑판 가득 아이들의 상장을 복사해서 그림처럼 붙여놓았던 기억이 생생하다. 입상자 중에서는 회화를 전공하려는 제자들도 여러 명 생겼고 작가 지망생도 생겼다. 한 번의 실전이 재능을 발견하고 인정 받게 할 수 있음을 증명해내며 행복했던 기억을 떠올리게 하는 회화에 대한 오래된 추억 한 자락이 튀어나오게 한 책이다.
그때도 가장 힘들었던 것은 전체 학생이 전부 참가하면 교과 공부는 언제 하냐며 나만 따로 불러 반대했던 교장 선생님을 설득하는 일이었다.
"교장 선생님, 학교에서 6년 간 미술 공부를 했습니다. 교실에서 배운 공부를 실전에 나가서 직접 그리면 얼마나 실감나는 학습이 이루어지겠습니까? 장소만 옮겨질 뿐, 최고의 미술 시간, 국어 시간이 될 것입니다. 참가비와 버스 대절 비용까지 모두 학부모가 부담하겠다는데 얼마나 좋은 기회입니까. 특히, 호남예술제는 지역에서 알아주는 큰 대회인데 입상을 하면 학생들이 얼마나 좋아하겠습니까. 장래 희망이 바뀔 정도로 자신의 재능을 알아보는 소중한 기회가 될 것입니다. "
"그럼 장 선생님은 몇 시간이나 비는 학교 수업 시간을 어떻게 메꿀 생각입니까. 다른 교과 시간까지 침해할 것 아닙니까. 학습결손 계획은 세웠습니까?"
"가져다 쓴 미술이나 국어 교과 시간은 다른 교과 시간으로 대체하고 그래도 학습결손이 나면 일요일이라도 나오게 해서 보충학습을 시키겠습니다. "
그런데 학급에서 여러 명이 빠져나가면 어차피 그날 교과 공부 진도는 제대로 나갈 수 없다. 개인적인 일로 나간 것도 아니고 학습의 연장선에 있는 참가인데 그 아이들만 빼고 진도를 나가면 그것도 문제가 될 여지가 있다. 차라리 전체 학생이 사전에 철저히 연습하여 전체로 참가하면 뜻깊은 체험학습이 된다고 생각했다. (그 시절엔 체험학습은 소풍이나 수학여행 정도고 비용도 학부모가 부담하던 시절임.)
다른 반 학생들은 학급에서 대표 학생 몇 명씩만 참가하는데, 우리 반만은 전원이 참가하니 학교장 입장에서는 걱정이 앞선 건 당연했을 것. 그러나 다른 4개 반 참가자가 전세버스 한 대, 우리 반 전체를 태운 전세버스도 한 대로 참가하는데 성공했다. 글쓰기 분야에 참가한 학생들에게는 글감 찾는 법, 구성하는 법, 맞춤법, 원고자 쓰는 법 등 산문과 운문 쓰기에 필요한 기본지식을 꼼꼼히 가르쳤다. 특히 산문부 학생에게는 생활문과 동화를 지도하였는데 초등학생이 동화를 쓰는 일은 드물기에 최고상의 영예를 안을 수 있었다.
동화를 써서 최고상을 탄 학생의 부모가 너무나 기쁜 나머지 감사하고 싶다며 전체 선생님을 식당으로 초대하여 대접했다. 교직원 수도 많았었는데 읍내에서 병원을 하던 집에서 통크게 한턱을 냈으니 돌이켜 보니 즐거운 추억이다. 지금 같으면 민원을 야기할 수도 있을 텐데 그 시절에는 그렇게 선생님을 위하는 모습이 어색하지 않았다. 그 학생의 꿈도 아버지처럼 의사였는데 작가로 꿈을 바꾸었다. 의사를 하고 있는지, 작가가 되었는지 궁금하다. 이 책을 읽다가 딸려나온 추억 한 자락이 어제 일처럼 생생하여 놀랍다.
'아트인문학 여행'은 피렌체 Firenze에서는 브루넬레스키와 보티첼리, 밀라노 Milano에서는 다 빈치, 로마 Roma에서는 미켈란젤로를 만나는데 이탈리아 예술의 정수인 도시와 예술가를 만나게 되는 책이다.
브루넬리스키와 그 일당의 이야기를 하나하나 만나보면서 머리 속에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단어는 '도전'이다. 이들은 남에게 머리를 숙이거나 타협하지 않는 이른바 '무식한 도전자'들이었다. - 63쪽
창조는 타협하는 것이 아니다. 세상에 없던 무언가가 만들어지는 일이니 익숙한 것들과는 완전히 다른 생각과 아이디어가 필요하다. 브루넬레스키와 그의 일당들은 창조성의 가장 첫 단계가 다름 아닌 태도의 문제라는 것을 보여준다. 자기 생각대로 해보기 위해서는 많은 어려움과 만나야 한다. 주위의 몰이해와 선입견도 장벽이 된다. 하지만 르네상스의 선구자들을 보면 세상의 모든 핑계가 갑자기 초라해진다. - 65~66쪽
다음은 이 책의 중요 내용을 요약해 본 글이다. 눈으로는 본 적 없는 예술 공간을 책 속 문장으로 상상하는 것도 즐거운 일이다. 글은 실제로 보는 것보다 더 강한 상상력을 자극한다는 점에서 문학의 위대성을 발휘한다. 노벨 문학상은 있으나 미술상이나 영화상, 조각상이 없는 이유가 아닐까. 메모하는 것도 뇌를 썩지 않게 한다니 좋은 일이다.
1. 피렌체에서 -1401년, 두오모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의 청동문 제작 공모전에서 기베르티 와 브루넬레스키가 대결하여 기베르티 승리함. 브루넬레스키는 공동작업자로 제안되지만 거절한 후, 건축 공부를 위해 로마로 유학하여 고대 로마 유적을 통해 "돔"의 원리 공부함. 1417년, 산타마리아 델 피오레의 쿠폴라 제작 공모전 (당시 건축 기술로는 거대한 돔을 올리기 힘들었음)에서 브루넬레스키가 당선하며 공동작업자(감시자)로 기베르티도 참여함. (둘 사이의 재미있는 일화가 이 책에 소개됨.)
브루넬레스키와 함께 한 첫 번째 제자인 도나텔로는 기베르티에게 청동 주조 기술을 익혔고, 조각에 전념하여 인체 균형과 비례의 아름다움 추구했으나 브루넬레스키에 의해 조각의 대상에 내면을 표현하는 중요성 깨닫게 됨. 그는 메디치 가문(코시모) 후원으로 많은 작품 활동을 함.
두 번째 제자인 마사초는 원근법을 마스터하여 인간다움을 표현함. 메디치 가문은 예술, 인문학 투자로 천재들을 대거 양성함.(보티첼리, 레오나르도 다빈치, 미켈란젤로, 라파엘로 등. 보티첼리는고전과 신화를 소재로 그림을 그려 당시 교양인의 기준을 제시함.)
2. 밀라노에서 -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스승인 베로키오를 뛰어 넘는 청출어람으로 독립, 완벽을 위해 연습에 몰두하여 사물의 본질을 꿰뚫음 → 그는 과학 기술에도 일가견이 있어 탁월한 실력을 보임. 루도비코의 후원으로 밀라노 두오모 공사, 루도비코 결혼식 무대 연출 등 <최후의 만찬>, <모나리자> 등 역작을 남김.
3. 로마에서 - 미켈란 젤로의 고대 조각 모조품 사건 <잠자는 큐피드>로 교황에게 알려짐. 인류 역사상 최고의 조각이라 일컬어지는 <피에타> 제작함. 시스티나 예배당 <천정화> <최후의 심판> - 라파엘로 <아테네 학당>
4. 베네치아 : 물류의 중심으로 다양한 문화 교류 활발함. 조르조네는 유화, 캔버스의 발견, 풍경의 의미 부여 - 티치아노는 화려한 색, 생생한 표현 . 틴토레토는 베네치아 + 피렌체, 그림 구도의 다양화를 시도함.
이 책의 중요 내용을 시험 공부하듯 메모하니 그나마 지식을 채운 듯하여 포만감에 젖는다. 내 생애 어느 날 이탈리아를 여행할 행운이 찾아온다면 이 책을 들고 복습하듯 찾아가리라. 아름다움의 근원을 찾아서, 천재들의 사유와 감각이 머물다 간 흔적을 더듬고 싶다. 아름다움을 영원히 남기고 싶어 한 화가들의 위대한 정신을 눈으로 볼 수 있는 날을!
퇴직하기 1년 전, 전남교육청 홍보기자에게 주어지는 특전으로 독일 연수 일정이 잡혔지만 갑작스런 가족의 일로 부랴부랴 취소하며 연수 일정을 접어야 했다. 팀장으로서 연수 일정을 위한 보고서도 거의 완결하고 팀원들과 역할 분담까지 마쳤지만, 이미 지불한 예약금도 상당한 금액을 손해보면서 취소할 수밖에 없었던 독일 연수 여행은 아직도 아쉬움으로 남았다.
집값의 1% 정도는 미술품이나 책으로 채워야 한다는 글을 접한 적이 있다. 아쉽게도 책값으로는 충분히 채우고도 남은 듯한데 이름난 화가의 작품은 없고 이름 없는 동양화나 서양화 몇 점으로나마 벽의 허전함을 채우고 있다. 퇴직하면 회화 공부를 하겠노라고 다짐했건만 외손녀 육아로 3년을 보내고 나니 심신이 지쳤다. 아니 그마저도 핑계다!
글과 그림, 회화나 조각, 사진, 음악 등 모든 예술 활동은 일회뿐인 인생의 어느 한 순간을 기록으로 남기고 싶은 염원에서 비롯된 것은 아닐까. 영원히 살 수 없는 인생의 허무함을 이기고 불멸의 존재로 남고 싶은 비원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한 책이다. 그럼에도 시간이 지나면 그 책도 사라지고 명화도 퇴색하며 위대한 건물도 부식되겠지만.
한 권의 책을 그림 한 점으로 표현하는 화가, 영화 한 편으로 만들어 내는 위대한 영화감독, 한 순간의 감동을 음악적 상상력으로 눈물겹도록 환상적인 음악을 만들어내는 작곡가와 연주자들! 세상은 그들이 있어 단 한 번뿐인, 잠시 머물다 가는 동안 행복하게 해주는 고마운 사람들이다.
이 글을 쓰는 동안에도 잔잔하고 아름다운 선율에 마음을 빼앗겨 순간적으로 눈물이 솟는다. 음악은 3초 이내로 사람의 마음을 울린다던가. 감상할 수 있는 음악이 있어서 자판 위를 피아노치듯 날으는 손끝이 가볍다. 분노할 일이 많은 세상, 슬픔이 많은 소식들 속에서도 마음의 끈을 붙잡게 해주는 좋은 책과 음악이 있어 참 다행이다. 또 살아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