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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문 100억 장학금, 최대 과학중점학교 … 개교 80년 ‘용산고의 힘’

 

서울 도심 한복판, 4만여 동문을 배출한 전통의 명문고 용산고등학교가 올해 개교 80주년을 맞았다. 1946년 9월 9일, 6년제 용산공립중학교로 문을 연 이래 80년 간 격동의 한국 현대사를 관통한 학교다. 광복 직후 남녀공학으로 출발했고, 6·25 전쟁 때는 부산 송도 바닷가 천막 교사에서도 수업의 끈을 놓지 않았다. 당시 많은 학생이 학도의용군으로 참전해 조국을 위해 희생했고, 4·19혁명 때는 3학년이던 이한수 열사가 종로경찰서 앞에서 시위를 주도하다 진압 경찰의 총에 맞아 세상을 떠났다. 지금도 교정에는 그의 넋을 기리는 비석이 세워져 후배들의 귀감이 되고 있다.


‘학문의 용산’이라는 별칭에 걸맞은 성취도 있었다. 1954년 5회 졸업생이 서울대 전체 수석에 올랐고, 1971년 22회 졸업생들은 한 해에만 서울대 102명, 고려대 66명, 연세대 77명을 합격시켰다. 또 걸출한 스타들을 배출한 농구부는 여전히 전국대회 우승을 휩쓸고 필드하키와 정구부 역시 학원 스포츠의 선두주자로 자리를 굳건히 한다. 명실공히 지·덕·체(智·德·體)가 조화를 이룬 명가(名家)의 전통을 이어오고 있다.

 

100억 원 장학기금, ‘동문의 힘’
용산고를 찾으면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이 동문회의 존재감이다. 동문회는 1990년 재단법인 용산동문장학회를 세운 뒤 1998년부터 매년 학년별로 장학생을 선발해 왔다. 지금까지 조성된 장학기금만 100억 원, 연간 110명의 학생에게 100~150만 원의 장학금이 지급된다. 성적 우수자만이 아니라 효행·선행·봉사 등 다양한 분야에서 모범이 되는 학생도 대상이다.


개인적으로 큰 기금을 기탁한 동문의 사연도 남다르다. 16회 김상일 동문은 학력 증진과 인성교육을 위해 써달라며 장학기금을 내놓았고, 18회 김종률 동문도 별도의 장학기금을 기탁했다. 이한수 열사의 조카인 이주백 동문은 후배들의 자치활동을 위해 장학금을 기탁했다. 학창 시절 가정 형편 때문에 수학여행을 가지 못했던 한 동문은 “경제적 이유로 수학여행을 못 가는 후배가 있다면 돕고 싶다”며 5,000만 원을 쾌척했고, 학교 앞에서 분식집을 운영했던 한 할머니는 오랫동안 모은 수익금 1억 원을 장학금으로 내놓기도 했다.


지원은 장학금에 그치지 않는다. 60명 규모의 기숙사는 고 정상영 KCC 명예회장이 지어 기증했고, 운영비와 사용료 전액은 동문회가 부담한다. 학생들은 돈 한 푼 내지 않고 생활한다. 겨울방학이면 학생들을 미국으로 보내 실리콘밸리나 엔비디아 같은 선진 문물을 경험하게 하는 ‘글로벌 인재 육성 프로그램’도 전액 동문회 지원으로 운영된다. 1994년부터는 매년 20여 명씩 교직원 해외연수도 지원해 왔다.

 

 

더 인상적인 것은 동문회의 오래된 원칙이다. ‘후배들에게는 최고의 환경을 만들어 주되, 교육은 현장의 전문가들에게 맡기고 절대 간섭하지 말라’는 철학이 초창기부터 지금까지 흔들림 없이 이어져 왔다. 비평준화에서 평준화로 넘어가며 후배들을 차별하는 학교들이 생겨날 때도, 용산고 선배들은 “용산의 교문을 드나든 사람이라면 모두가 소중한 후배이니 구별하거나 단정 짓지 말자”는 태도를 지켰다.

 

전국 최대 과학중점학교, 위기를 기회로
강남 개발 이후 인근 인구가 빠져나가며 지역 공동화를 겪던 용산고가 선택한 생존 전략은 ‘과학’이었다. 2013년 과학중점학교 지정을 신청한 것이 학교의 체질을 바꾼 전환점이 됐다. 현재 학년당 4개 학급, 총 12개 학급으로 전국 최대 규모를 자랑한다. 일반고의 수학·과학·정보교과 비중이 30% 이내인 데 비해 용산고는 45%까지 편성해 과학고(60%)와 일반고의 중간 수준을 유지한다.


물리·화학·생명과학·지구과학 전 영역의 첨단 실험이 실제로 이뤄지고, 축제 때는 40여 개 과학·수학 동아리가 부스를 운영하는데 서울 시내 초·중학생들이 참관하러 올 정도로 수준이 높다. 삼성 과학상 등 대회에서 과학고를 제외한 일반고 중 유일하게 수상자를 배출하는 학교가 용산고다. 이 같은 성과는 과학고 출신 전문 교사 영입, 실험 부담을 덜어주는 영역별 실무사 배치, 그리고 주말에도 실험 지도에 나서는 교사들의 열정이 맞물린 결과다.

 

 

진로와 리더십을 잇는 독보적 프로그램
용산고만의 색깔이 가장 또렷하게 드러나는 곳은 ‘점프업’과 ‘창의융합 리더십 아카데미’다. ‘점프업’은 법관·기업인·교수·언론인은 물론 가상화폐 지갑 개발자나 마켓 대표처럼 다양한 분야에서 최고 전문가로 성장한 동문 선배들이 재능기부 형태로 찾아와 후배들에게 생생한 경험을 전하는 특강이다. 학창 시절 성적과 무관하게 사회에서 자리 잡은 선배들의 이야기는 재학생들에게 깊은 동기 부여가 된다. ‘창의융합 리더십 아카데미’는 일반적인 수련회 틀을 깨고, 대학이나 연구소에 재직 중인 동문 교수·연구원과 학생들을 직접 연결해 관심 분야의 현장을 탐방하고 지도받게 하는 프로그램이다.


올해부터 용산고는 등교 시 휴대폰을 전량 수거했다가 하교 때 돌려주는 ‘폰프리 학교’ 정책을 시행 중이다. 기숙사와 자율학습실에서도 마찬가지로 엄격하게 적용된다. 아직은 어린 학생들이기에 불만을 가질 만도 하지만 학생들은 충실히 이 원칙을 지킨다. 성공 비결은 ‘민주적 의사결정’이었다. 교직원들이 정책 방향을 논의한 뒤, 학생회 대의원들과 함께 앉아 고민을 나누고 학생들과 오랜 시간 토의를 거쳐 최종 결정했다. 학교 측은 “충분한 공감과 토의를 거쳐 정책이 확정되자 학생들이 기꺼이 따라주었다”며 “덕분에 시행 이후 학생이나 학부모 민원이 아직 단 한 건도 없다”고 귀띔했다.


인사에서 시작하는 사람 중심 교육
용산고가 전통의 명문으로 명맥을 이어 올 수 있었던 데에는 동문의 힘과 교사들의 열정, 학부모의 신뢰가 삼위일체가 됐기 때문이다. 여기에 지난해 부임한 김진효 교장의 전인교육 리더십이 큰 역할을 했다. 김 교장은 학생들에게 늘 인사를 잘하자, 늘 감사하는 마음을 갖자고 강조한다.


“기술이 고도로 발전하는 AI 시대일수록 그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 결국 사람과 사람 사이의 따뜻한 온기라고 생각한다”는 김 교장은 학생들에게 선생님과 학교 구성원 모두에게 따뜻하게 인사하는 태도를 가져달라고 당부한다. 교내에서 마주치는 선생님을 비롯해 따뜻한 밥을 해 주시는 급식실 조리원분들, 물품을 배달해 주시는 기사님들, 깨끗한 환경을 만들어 주시는 청소원분들 모두 학생들을 위해 존재하시는 분들이자 누군가의 소중한 부모님이라고 생각하고 항상 공손하게 인사하도록 했다. 따뜻한 미소와 인사가 인성교육의 시작이라는 소신에서다. 또 선배와 모교에 대한 감사한 마음을 강조한다. “나를 응원하고 이끌어주는 공동체에 감사할 줄 아는 마음, 그리고 땀방울의 정직한 가치를 아는 학생이 용산고가 추구하는 학생상”이라고 말했다.


학교 곳곳을 자로 잰 듯 연결한 캐노피도 눈에 띈다. 김 교장은 학생과 교직원들이 불편하지 않도록 산책로·본관·별관 이동 통로에 캐노피를 설치해 학생들이 비를 맞지 않고 교실을 오갈 수 있게 했다. 겨울밤 늦게 퇴근하던 교사가 차에 쌓인 눈을 떨어내던 모습을 보고는,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교직원 주차장에 차양막을 세웠다.


김 교장은 서울사대 체육교육과를 나와 평교사로 시작해 중학교 교장, 교육청 장학관, 성동광진교육장 등 서울교육의 요직을 두루 거쳤다. 우리나라 학교체육의 기틀이 되는 「학교체육진흥법」 제정의 산파 역할을 했고, ‘학생 선수’라는 용어를 처음 만들어낸 인물이기도 하다. 체육교육 전문가답게 현행 학교체육 정책에 쓴소리도 아끼지 않았다.


그는 학생 선수들에게 적용되는 ‘최저학력제’를 이제는 시대에 맞게 손질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학생 선수들은 일반 학생들과 동일하게 국어·영어·수학·사회·과학 등 제반 과목 전체에서 일정 수준 이상의 점수를 얻어야 하는 엄격한 최저학력 기준을 적용받고 있는데 이것이 선수들에게 과도하고 비현실적인 부담이 된다는 것이다. 특히 골프·탁구처럼 리그전이나 대회 출전을 통해 점수를 쌓아 프로로 진입해야 하는 종목의 경우, 최저학력제와 출석 일수 제한에 묶여 정상적인 학교생활이 불가능해 많은 학생 선수가 학교를 그만두고 검정고시나 방송통신고로 떠나고 있다고 분위기를 전했다. 


최근 불거진 스포츠 응원 문화 논란에 대해서도 김 교장은 단호한 진단을 내놓았다. “이번 사태의 근본적인 원인은 오직 이기는 것만을 최우선으로 두는 승리 지상주의에 있다”며 “상대의 멘탈을 흔들려는 그릇된 응원 문화가 현장에서 오랜 기간 방치되다가 이번에 결정적으로 드러난 것”이라고 했다. “스포츠는 정정당당하게 땀 흘려 승부를 겨루고, 이긴 사람은 존중받고 진 사람은 결과에 복종하며 서로를 발전시키는 교육의 장이어야 한다”는 그는 “우리 어른들과 지도자들이 그동안 스포츠 현장의 왜곡된 문화를 방치해 온 것은 아닌지 다 함께 깊이 반성해야 할 시점”이라고 말했다.

 

내년 8월 정년을 앞둔 김진효 교장은 새로운 100년을 향한 첫걸음을 용산고 동문들과 선생님들, 그리고 아이들과 함께 내딛는다는 사실 자체가 영광이라고 했다.


“100년 후든 200년 후든, 후배들이 받았던 사랑을 또 베풀고 또 베풀어 모교와 후배를 사랑하는 마음이 영원히 이어지는 학교여야 합니다. 그때도 아이들과 부모님, 선생님들이 내가 속한 용산고 구성원이라는 것을 자랑스러워하는 학교가 됐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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