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장시간 길고 기억용량 엄청나
도서관 책과 같은 방식으로 저장
먼저, 다음의 아홉 단어를 외워 보십시오. 몇 번 읽고 암송해 보시기 바랍니다. 순서는 관계가 없습니다.
축구 만년필 수박 야구 사과 연필 사인펜 참외 농구
선생님들은 졸업한 지 4-5년 지난 졸업생의 이름과 얼굴을 기억하고 계실 것입니다. 더 오래로 거슬러 올라가서 학창시절 일이라든가 초등학교 때 친하게 지낸 짝꿍의 이름과 얼굴을 기억하고 계실 것입니다.
우리의 기억이 앞서 본 감각기억과 단기기억밖에 없다면 우리는 자신의 이름을 기억하기 위해 하루에도 수백 번 이름을 되뇌어야 할 것입니다. 아니면 두꺼운 공책을 들고 다니면서 보고 들은 것을 일일이 기록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겐 장기기억이라는 것이 있기 때문에 이와 같은 수고는 하지 않아도 됩니다.
장기기억은 감각기억으로 들어와 단기기억에서 처리된 내용이 암기나 정교화의 단계를 거쳐 저장되기 때문에 보다 오랫동안(어떤 경우에는 평생 동안) 저장할 수 있고 기억할 수 있는 용량도 엄청납니다. 100기가바이트까지 저장할 수 있는 컴퓨터일지라도 우리의 장기기억에 비하면 상대가 되지 않습니다. 영화 한 편은 CD 한두 장에 저장됩니다. 평균 약 1기가바이트쯤 되겠군요. 하지만 우리가 어제 하루 동안 겪은 일을 영상과 음향으로 만들어 컴퓨터에 저장한다면 몇 십 기가바이트를 훌쩍 넘어설 것입니다. 최고급 고성능 컴퓨터라 하더라도 우리 생활의 며칠만을 저장할 수 있을 뿐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엄청난 기억의 재료를 어떻게 우리의 머릿속에 저장하고, 또 그렇게 수많은 기억이 들어 있는 창고에서 우리가 어떻게 재빨리 필요한 것을 찾아낼 수 있을까요? 이를 알아보기 위해 이제 앞에서 외운 아홉 단어를 회상해 보십시오. 아마 선생님은 ‘축구, 야구, 농구’, ‘만년필, 연필, 사인펜’, ‘수박, 사과, 참외’ 식으로 종류별로 묶어서 생각해 내었을 것입니다.
요약하면, 우리의 장기기억은 도서관의 책과 같은 방식으로 저장됩니다. 그래야 쉽게 찾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어떤 질문을 받았을 때 즉시 대답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이 때문입니다. 어떤 기준도 없이 책이 배열되어 있다면 도서관에서 책 찾기란 엄청난 고역이 될 것입니다. 또 심리학책과 역사책을 여러 권 찾아야 할 때 심리학 서가에서 한 권, 역사 서가에서 한 권 하는 식으로 반복하여 찾는다면 찾는 시간도 오래 걸리고 노력도 많이 들 것입니다. 심리학 서가에서 필요한 것을 다 찾고 난 다음 역사 서가에서 필요한 것을 찾는 것이 효율적입니다. 그래서 위의 단어를 회상할 때에도 종류별로 묶어서 끄집어낸 것입니다.
그러면 이렇게 체계적으로 저장하지 않고 아무렇게나 저장하면 어떻게 될까요? 수업을 진행하다가 분명히 알고 있는 것인데, 갑자기 생각이 나지 않아 애를 먹은 경험이 있을 것입니다. 아니면 길을 가다가 친구 혹은 가르치는 학생을 만났는데 갑자기 그의 이름이 생각나지 않아 당황한 경험이 있을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분명히 알고 있기는 하나 어디에 저장해 놓았는지 알지 못해 끄집어내지 못하는 것입니다. 순간적으로 망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혀끝에서 맴돈다 하여 이러한 것을 설단현상(舌端現象)이라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