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의 날’이라고 하면 그분들의 뜻을 기리는 날로 알고 있다. ‘어버이날’ 하면 부모님의 은혜에 감사하고 ‘경찰의 날’에는 경찰관의 노고를 생각해 봐야 한다. 그래야 제정 목적도 알 수 있다. 그런데 정작 기려야 할 ‘스승의 날’은 그렇지 못하니 안타까운 마음이다.
얼마 전 서울 지역 초·중·고 교장협의회에서 올해 스승의 날을 자율휴업일로 정하자고 결의한 바 있다. 국민들이 은사님을 찾아뵙고 스승의 은혜를 기리는 날로 추진하겠다는 뜻이 명분이라지만 실제는 그렇지 않은 것 같다.
이제 스승의 날에 대해서 교사, 학부모, 학생 모두가 다시 한 번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이 필요한 것 같다. 원래 스승의 날은 병환 중에 계신 선생님을 위로하고, 퇴직하신 스승님을 찾아뵙는 아주 소박한 활동에서 시작되었다. 우리는 임금과 스승과 부모님을 한결같이 받드는 아름다운 전통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요즘의 스승의 날은 그게 아니다. 산업화 사회가 되면서 정신보다 물질을 중시하는 풍조가 만연했다. 스승의 날이 선물이나 촌지를 받는 날로 인식되고 있다. 언론은 그 부작용을 보도하기에 바쁘다. 그러다 보니 학부모님이나 선생님 모두 이 날을 부담스럽게 여기는 것은 사실이다.
제자가 스승께 감사하는 마음을 갖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스승’은 단순한 지식의 전달자가 아니라 삶의 지혜를 일러주는 어르신이다. 그러나 스승에 대한 일반의 시선은 그렇지 않다. 당국에서는 교육정책을 세우는데 정치와 경제 논리로 접근하기 시작했다. 초·중등 교원의 정년을 획일적으로 단축하더니 최근에는 교원 평가제 등 충분히 논의되지 않은 현안들이 교사의 자긍심을 훼손하고 있다.
부적격 교원은 당연히 교단을 떠나야 한다. 집을 짓는 데에도 부적격 재목을 쓰면 안 되는데 하물며 사람을 가르치는 일에 부적격 교원이라니 말도 안 된다. 그간 교직사회에서 일부 사도(師道)를 벗어나 사회적 물의를 일으킨 사례가 있었던 점을 솔직히 인정한다. 정말 국민에게 송구스럽고 지탄받아 마땅한 일이다. 그들은 제도나 법의 심판에 앞서 교육자로서의 엄숙한 양심의 옷을 벗고 물러나야 한다. 하지만 대부분의 선생님들은 오늘도 제자들을 가르치는 일에 묵묵히 최선을 다하고 있다.
생물학 박사인 한 아버지가 중학생 아들이 세포에 관해 물어 왔을 때 “나는 잘 모르니 학교에 가서 생물 담당 선생님께 여쭤 보라”며 돌려보냈다는 일화가 있다. 그 아버지가 세포에 관해 몰라서가 아니다. 자식의 바른 교육을 위해서는 선생님의 말씀을 들어야 한다는 판단에서였다. 백 번 옳은 생각이다. 교사에게는 ‘권위’가 생명이다. 그렇다고 권위주의적이어서는 안 된다. 선생님들의 어깨가 쳐져서도 안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는 교육이 안 되고 교육이 안 되면 나라의 미래가 밝지 않다.
얼마 전 교직에 만족하는 이유를 물은 한 여론 조사에서 “보람 때문”이라고 답한 선생님들이 제일 많았다고 한다. 신분·경제적 안정성이나 사회적 존경심도 교직의 매력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선생님들은 그것보다 ‘보람’을 택한 것이다. “선생님의 말씀 한 마디에 제 인생이 바뀌었습니다”하고 느꺼워하는 제자의 모습에서 선생님들은 보람을 느낀다. 이것이 바로 스승의 길이다. 그 이상 무엇을 바라겠는가.
스승의 날을 학년말인 2월로 옮기면 오해가 덜 할 것 아니냐는 제안도 있다. 어떤 극단론자들은 스승의 날 폐지를 주장한다. 둘 다 근본적인 해결책이 아니다. 고마워해야 할 사람에게 고마워하고, 도와야 할 사람을 도울 줄 아는 인간을 길러내는 것이 진정한 교육이다. 교육에 관한 인식의 변화와 스승을 존경하는 풍토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결과는 마찬가지이다. 그것은 교사 자신들의 뼈를 깎는 자정 노력이 전제될 때 가능한 일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