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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양

<동화 당선>고라니의 구두 한 짝

눈이 왔다. 집도, 배추밭도, 산도 온통 하얀 솜옷을 입었다. 나는 썰매를 타러 배추밭으로 갔다. 배추밭은 산을 깎아 만들었기 때문에 눈썰매 타기에 딱 좋았다.

몇 번 안 탄 것 같은데도 벌써 해가 넘어가고 있었다. 배추밭 위에 있는 잣나무 숲 안은 이미 어스름해져 푸른빛까지 감돌았다.

마지막으로 한 번 더 타려고 배추밭 꼭대기로 올라갔다. 어디선가 ‘닥닥’ 긁는 소리가 들렸다. 멈칫 서서 보니 잣나무 숲 속에서 나는 소리였다. 혹시 멧돼지? 와락 겁이 났다. 멧돼지라면 옴짝달싹도 못한다. 섣불리 움직였다간 사납게 쫓아온다고 아빠가 말했다.

잔뜩 겁을 먹은 채 숲 속을 자세히 살폈다. 무언가가 나무껍질을 떼어먹고 있었다. 덩치로 보아 멧돼지는 아닌 것 같았다. 갈색 털, 뾰족한 귀, 까만 눈, 까만 코…. 맞다, 고라니!

고라니가 나무껍질을 먹다 말고 문득 날 쳐다봤다. 고개를 갸웃거리며 오른쪽 앞발을 들었다. 앗, 앞발에 까만 구두가 없다. 다리도 뭉툭하다. 혹시 봄에 만난 그 고라니? 갑자기 가슴이 쿵쾅쿵쾅 뛰었다.

지난봄이었다.
“하이고 마, 지근지근 밟아 뭉개고 쏙쏙 뽑았다 카이.”
이른 아침부터 엄마가 큰소리를 냈다. 나는 자다가 깜짝 놀라 잠도 깨버렸다.
“배추 모 심은 기 어젠데 하마 고라니가 나타났나?”
아빠가 대꾸했다.

고라니는 배추 모 심은 날을 귀신같이 알아챈다. 한밤중에 밭으로 내려와 갓 심은 배추모를 통째 뽑아 간다. 우리 동네는 고라니를 쫓기 위해 작년부터 밭에다 뻥대포를 놓았다. 폭죽처럼 ‘뻥’ 소리를 내며 터지는 가짜 대포 말이다. 그게 터지면 고라니는 밭으로 내려오다가 놀라서 되돌아간다고 했다. 나는 작년 이맘때 시끄러워 잠도 못 잤던 기억이 났다.

“엄마, 또 뻥대포 놓을 거지? 오늘부터 잠은 다 잤다.”
“니는, 잠이 문제나? 배추가 살아야 우리도 살지.”
엄마가 버럭 화를 냈다. 이럴 때 엄마는 꼭, 나보다 배추를 더 아끼는 것 같다. 나도 모르게 입이 삐죽 나왔다.




배추 밭에 뻥대포를 놓은 지 이틀이 지났다.
“올개(올해) 고라니는 이래 지랄발광인가 모르겠네. 고라니가 아니라 아주 웬수래요. 내가 이놈들을 마커 때리 잡아야 속이 시원할 긴데.”

엄마는 고라니가 눈앞에 있기라도 하는 것처럼 소매를 득득 걷어 붙였다. 밤 내내 5분 간격으로 뻥대포를 터트렸지만 고라니들은 속지 않았다. ‘뻥’인 줄 어떻게 알았을까?

“고라니 지도 먹고 살아야겠지만 해도 너무 했다카이. 그래 심술부리는 기 어딨나. 에이! 나쁜 자슥. 기훈이, 니 오늘 학교 갔다 빨리 온나. 배추 다시 심어야 하니까네.”

좀처럼 화를 내지 않던 아빠도 잔뜩 화가 나셨다.
점심 때 우리 가족 모두 배추밭으로 갔다. 정말 이빨 빠진 자리처럼 군데군데 배추 모가 쑥 빠지고 없었다. 고라니 똥과 발자국도 발견했다. 발자국은 하트 모양이었고, 똥은 까맣고 동글한 게 구슬같이 예뻤다. 말로만 듣던 고라니의 흔적을 보니 한편으로는 신기했다.

배추모를 다 심고 내려오는데 자꾸만 뒷머리가 당겼다. 고라니가 잣나무 숲속 어딘가에 숨어서 날 지켜보고 있는 것 같았다.

아빠는 읍내에서 까만 그물망을 사왔다. 뻥대포를 치우고 대신 그것을 배추밭 가장자리에 치셨다.
“동물들은 울타리를 보면 피하니 까네, 이래 하면 괜찮을 기다. 배추 모가 뿌리내릴 때까지 만이라도 잘 견뎌야 할 낀데.”
아빠의 말 속에는 기대와 걱정이 뒤섞여 있었다.

“고라니 때문에 돈 드는 기 을마나? 대포 값에, 그물 값에…. 배추농사가 잘 돼야 빚도 개리는데….”
엄마는 늘 돈, 돈 걱정 뿐이다.

울타리를 치고 나서 하루 이틀은 배추 모가 멀쩡했다. 하지만 삼일 째가 되자 울타리가 넘어지고 말뚝이 뽑혀 있었다. 그물에 구멍도 뚫렸다. 그걸 본 엄마와 아빠는 아예 입을 다무셨다. 나는 그게 더 무서웠다. 뻥튀기기계가 언제 터질지 모른 채, 달달 돌아가고 있는 것 같았다. 밥을 먹을 때에도 한마디 말이 없으니 목이 자꾸 메어왔다.

저녁 식사를 마칠 때쯤이었다. 아빠가 숟가락을 탁, 소리 나게 놓으며 말했다.
“이제부턴 내가 직접 지킬거구마.”
우리 가족은 밥 먹다말고 멀뚱멀뚱 아빠를 봤다.
“배추밭에서 밤 세우는 기라. 고라니자식 왔단 봐라.”
“참내, 잠도 많은 당신이 하모 지키겠다.”

엄마 말이 맞았다. 아빠는 잠이 많아서 피곤한 날엔 밥을 먹다가도 졸았다.
“밤새 트럭에 시동 걸어놓고 서치라이트 비추면 안 되겠나?”
“차 안에서 쿨쿨 잠만 자면 무슨 소용 있소? 기훈이를 데려가면 어때요? 아가 야무니까네 당신과 교대하면 좀 낫지 싶은데….”

‘그럼 잠은 언제 자냐?’는 말이 불쑥 나오는 걸 꾹 삼켰다. 엄마는 분명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잠이 문제가? 배추가 살아야 우리도 살지.”

아빠와 함께 한밤중에 배추밭으로 갔다. 밤에 배추밭에 가보긴 처음이었다. 6월이라지만 오소소 소름이 돋을 만큼 춥기도 했다. 아빠는 트럭을 밭 중간쯤에 세우고 서치라이트를 연결했다. 서치라이트가 비추는 곳은 아주 환해서 생쥐도 다 보일 것 같았다.

“고라니놈, 나타나기만 해보래이.”
“나타나면은 어찌할 긴데요?”
“때리 잡아야지.”
“으.”
상상을 하니 소름이 돋았다.

“아빠, 고라니는 왜서 배추모만 먹나?”
“저거들 맛있는 거 먹을라고 그러지. 배추 모는 마이 부드럽거든. 씹을수록 단맛도 나니 까네 좋아하는 기라. 배추가 크면 농약냄새도 나고 꺼칠꺼칠해서 못 먹는 기야.”
내가 맛있는 반찬 골라 먹듯이 고라니도 배추모를 골라먹는가 보았다.
“아빠, 고라니는 왜서 뻥대포를 안 무서워하나?”
“고라니도 약아빠져서 안 속는가 보지.”
“아빠, 고라니는 왜서 ….”

아빠가 입이 찢어져라 하품을 했다.
“아흠, 기훈아 내 조금 잘테니까네 니 잠깐 지키고 있으래이. 졸려서 도저히 못 참겠다.”
“벌써 졸려요? 그럼 난 언제 자라고?”

아빠는 대꾸도 안하고 서치라이트를 나한테 넘기고는 눈을 감자마자 잠이 드셨다. 하여간 못 말리는 아빠다. 나는 여기 저기 불빛을 비추다가 오줌이 마려워서 차에서 내렸다.

볼일을 마치고 밤하늘을 올려다봤다. 별들이 내 얼굴 위로 우수수 쏟아질 것 같았다. 가만 들어보니 트럭의 시동소리 말고도 ‘부우 부우’ 수리부엉이소리, ‘또로록 또로록’ 풀벌레 소리, ‘개륵 개륵’ 산개구리 소리…. 별별 소리가 다 들렸다. 모두 어디에 숨었다가 나타났는지 나방과 날벌레들도 차 전조등 앞에 와글와글 몰려들었다. 깜깜한 밤에 사람만 잠을 잤지, 하늘도 깨어있고 동물들은 더 바쁘게 움직이는 같았다.

‘고라니도 안자고 있을 긴데, 왜서 안 나타나나? 우리가 온 걸 알고 있나?’
막 차에 올라탈 때였다. 잣나무 숲 쪽에서 동그란 빛이 하얗게 반짝였다. 더럭 겁이 나서 아빠를 깨우려고 보니 코까지 골면서 주무셨다. 나는 아빠를 놔두고 차에서 내려 서치라이트를 비춰봤다.

‘앗, 저건 고라니?’

갑자기 심장이 풍선처럼 부풀어 올랐다. 진짜 고라니를 본 것은 처음이었다. 고라니는 큰 것 한 마리, 작은 것 두 마리, 모두 세 마리였다. 작은 것 한 마리는 오른 쪽 앞다리를 들고 고개를 갸웃거리며 서있었다. 내 주먹만큼 작은 얼굴에 달린 큼직한 귀, 까만 코. 당장 가서 쓰다듬어주고 싶었다.

고라니들이 천천히 밭으로 내려왔다. 그런데 조금 이상했다. 새끼 고라니 한 마리는 몸을 기우뚱거리며 걷는 것이다. 배추밭에 다다르자 어미 고라니가 먼저 배추를 먹었다. 새끼들도 고개를 주억거리며 먹기 시작했다.

‘어? 안 되는데.’
생각은 이렇게 하면서도 숨죽인 채 보고만 있었다. 신기하고 재미있었다.

어미고라니는 자꾸만 먹다 말고 새끼들을 핥아주는데 새끼 고라니들은 쉬지 않고 입을 오물거렸다. 새끼들이 고개를 들어 꿀꺽 삼키고는 입을 싹 벌리며 웃는 것 같았다. 새끼 고라니가 어미고라니를 보고 뭐라 하는 것도 같았다.

‘엄마, 이게 뭐야?’
‘배추 모야. 사람들이 심어놓은 것.’
‘우리들 먹으라고 심었어? 참 맛있네.’
나도 모르게 씩 웃음이 나왔다.

“저, 저거이 고라니 아니나?”
차 안에서 아빠가 크게 소리쳤다. 깜짝 놀라 몸이 움찔했다. 고라니들도 화들짝 놀라더니 우리를 바라봤다.

“저놈 저리 안 가나?”

아빠 목소리가 우렁우렁 울려 퍼졌다. 산이 울리고 배추밭이 흔들렸다. 고라니들은 겅중겅중 뛰어 달아나기 시작했다. 어미 고라니는 새끼보다 앞서 뛰었다. 그런데 새끼 고라니 한 마리는 기우뚱하더니 밭고랑 아래로 데구루루 굴렀다. 어미 고라니는 그것도 모르고 저만치 달아났다. 넘어진 새끼 고라니는 벌떡 일어나려다가 균형을 잡지 못하고 도로 폭 고꾸라졌다.

“왜서 저러나? 발목 다칬나? 기훈이 니 서치 잘 비추고 있으래이. 저 놈을 잡아야겠다.”
아빠는 차 안에서 준비해 둔 괭이를 꺼내 들고 밭 위로 뛰어 올라갔다.
“우~애애~앵.”
고라니의 울음소리가 가느다랗고 슬프게 울려 퍼졌다.

새끼 고라니는 일어나는가 싶더니 도로 옆으로 넘어져 버둥댔다. 아빠는 새끼 고라니 가까이에서 괭이를 높이 쳐들었다.

“안 돼, 아빠!”
나도 모르게 힘껏 소리쳤다. 아빠가 휙 뒤를 돌아보더니 휘청거리며 아래로 넘어지셨다.
“아이고, 발목이야! 삔 기가, 부러진 기가?”

나는 아빠한테 달려갔다. 아빠는 밭고랑에 앉아 발목을 주무르고 계셨다. 나 때문에 다친 걸 생각하니 아빠얼굴을 똑바로 볼 수가 없었다. 아빠가 있는 밭고랑 조금 위에 새끼고라니가 옆으로 누운 채 가슴만 빠르게 팔딱거렸다. 고라니와 눈이 마주쳤다. 눈물이 가득 고인 눈은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것 같았다. 고라니의 다리를 보았다. 회초리 같이 가늘고 긴 다리 끝에 까만 구두 같은 발굽이 보였다. 어? 그런데 한쪽 다리에는 까만 구두가 없고 뭉툭했다. 왜 그럴까?

“새끼 저 놈은 도망 못 갈기다. 기훈이 니 차에 가서 끈 좀 가져와라.”

‘아빠는 새끼고라니를 죽일 거야.’
차로 내려오는데 머릿속에 이 생각만 가득했다. 나는 차에서 끈을 찾지 못했다. 아니 사실은 찾고 싶지 않았던 거다.

“아빠 못 찾겠어요.”
“에이, 자식 그것도 못 찾나?”

아빠는 괭이를 지팡이 삼아 절뚝거리며 내려 왔다. 그러자 어디서 숨어있었는지 어미 고라니가 새끼한테 다가왔다. 어미 고라니는 머리로 새끼 엉덩이를 쿡쿡 치받았다. 신기하게도 새끼 고라니가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는 어미를 따라 기우뚱거리며 깜깜한 잣나무 숲 쪽으로 올라갔다.

‘고라니야, 빨리 도망가라!’
아빠가 뒤돌아볼까봐 가슴이 조마조마했다. 아빠는 차에 다 와서야 고라니들이 도망가는 걸 알아차렸다.

“에헤이, 저놈들 도망가네.”
아빠는 돌멩이 하나를 주워 힘껏 던지고는 소리쳤다.

“에라이 배추 도둑놈들아. 우리 밭에 얼씬도 말거라. 퉤!”
고라니들이 완전히 사라졌다. 나는 그제야 참았던 숨을 아빠 몰래 토해냈다.

“에잇, 다 잡았다 놓쳤다. 새끼는 덫에 걸렸는지 발목도 잘맀든데.”
“네? 덫이라고요?”
“그래 지대로 도망도 못가고 그랬지. 쯧쯧, 그 몸으로 오래 못 살 긴데.”
갑자기 날카로운 칼에 베인 듯 발목이 아파왔다.

‘그 고라니가 맞을 거야. 구두 한 짝이 사라진 고라니! 아직까지 살아있다니….’
나는 고라니가 놀라지 않게 살금살금 뒷걸음질 치면서 집으로 내달렸다. 허겁지겁 창고로 들어가 배추며 감자, 당근을 비닐봉지 한가득 담았다.

잣나무 숲으로 다시 가니 고라니는 가버리고 없었다. 나는 가지고 온 것들을 숲 속에 하나씩 던졌다. 하얀 눈 속에 채소들이 폭폭 파묻혀 구덩이를 만들었다.

‘잘 찾아먹을 수 있을까? 끈이 있었다면 나무에 하나씩 매달면 좋을 텐데….’
나는 채소를 봉지에 도로 넣고 봉지 채, 바위위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크게 소리쳤다.
“고라니야, 맛있게 먹어.”
내 목소리가 잣나무 숲속에 메아리쳤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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