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세 때 ‘고무지우개’(페네옹상 수상, 1953)란 소설을 발표하여 문단에 데뷔한 알랭 로브그리예(1922~)는 프랑스 ‘누보 로망’(새로운 소설)을 대표하는 가장 뛰어난 작가로 평가되고 있다. 그는 1978년 11월과 1997년 10월 두 차례에 걸쳐 한국을 방문한 적이 있는 친한파 작가이기도 하다.
‘어떤 주어진 환경 속에서 정념으로 인하여, 혹은 정념의 부재로 인하여 생기는 갈등’을 그리는 전통소설 기술방법에 정면으로 반기를 든 그의 소설은 오브제로서의 사물과 현상만을 정확하게 객관적으로 묘사할 뿐, 이야기의 줄거리도 인물의 성격도 묘사하지 않는다. 그는 “인간의 행동과 오브제들은 그 무엇이기 이전에 ‘여기에’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사물은 어디까지나 사물이고 인간은 인간이기’ 때문에, 세계를 인간이 멋대로 인간화하여 묘사하기를 그만두고, 대상을 순순하게 외면적인 것으로 규정하여 그려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독특한 소설관을 가진 로브그리예가 1975년에 발표한 소설 ‘아름다운 포로’는 초현실주의 화가 르네 마그리트(1898~1967)의 복제화 80점을 배열하여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특이한 작품이다. 전체 150페이지 중 대부분이 80점에 이르는 마그리트의 복제화로 채워져 있어서, 언뜻 보기에는 마그리트의 화집에 로브그리예의 해설을 곁들이고 있는 것 같은 인상을 준다.
그러나 흔히 볼 수 있는 통속적인 영상소설과는 전혀 다른, 이미지(마그리트의 그림)와 텍스트(로브그리예의 소설)의 기발한 연계를 보여주고 있음을 주목해야 할 것이다. 로브그리예는 소설 ‘아름다운 포로’의 실마리를 최초로 제공해 주고 있는 마그리트의 그림 ‘피레네의 성’(1959·사진)을 두고, 지극히 환상적인 꿈을 이렇게 펼쳐나간다.
“그것은 아주 높은 곳으로부터 낙하하는 운석으로서, 묵직한 바위 덩어리, 표면이 울퉁불퉁한 일종의 커다란 달걀과 같다.(중략) 그 바위 덩어리가 당장 금빛 나는 모래밭에 떨어지려는 것인지 아니면 수면에 부딪히려고 하는 것인지 알 수 없다. 그것이 수면이라면 바위 덩어리는 삼켜질 것이고, 그 충격으로 솟구쳐오른 물보라는 일단 내려앉아 동심원의 파문을 일으키다가 마침내 전체적인 고정성(固定性) 한 가운데 정지된 채 잠잠해질 것이다.”
사물에 대한 인간중심적인 자의적 묘사를 그토록 철저하게 배척했던 로브그리예가 이렇듯 자유로운 몽상의 전개를 펼칠 수 있었던 것은 ‘있는 그대로의 사물’을 제시할 뿐인 마그리트의 비정한 즉물적 리얼리즘의 세계에 깊은 공감을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