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양 온천초등교 2학년 때 공주사범학교를 갓 졸업한 통통하고 예쁜 김용화 선생님. 눈이 동그랗고 속눈썹이 새까만 보조개가 있는 통통한 얼굴, 항상 한복 통치마에 까만 가운만 입고 다니셔도 내겐 너무 예뻐 보이기만 한 선생님이셨다. 60~70명 아이들이 너무 떠들고 통제가 안되면 혼자 화가나 교실을 떠나셨던 선생님. 철부지만 같은 대학생 내 딸보다 5살이나 아래였던 20살 나이에 속상한 마음을 그렇게 표현하시던 선생님을 잊을 수가 없다. 4학년 때 나는 읍내에서 떨어진 분교로 가게 되었다. 다시 김용화 선생님이 담임을 하셨다. 형편이 넉넉지 못해 중학교 진학을 꿈꾸지도 못했던 내게 선생님은 방과후 틈틈이 공부를 시켜 주셨다. 그러나 선생님의 갑작스런 예산 전근으로 이들은 담임선생님이 세 번이나 바뀌는 혼란을 겪었다. 너무 섭섭하고 그리웠다. 선생님은 떠나시기 전 전과며 문제집을 모두 나에게 주고 가셨다. 문제집 하나 없이 공부하던 그 시절 나는 틈만 나면 편지를 썼고 선생님은 예쁜 글씨로 정성껏 답장을 해주셨다. 방학중 아이들이 보내는 편지의 답장을 부담스러워 하는 내 자신이 늘 부끄럽기만 하다. 공부하다 모르는 것을 편지로 질문하면 그 때마다 자세히 5~6장의 내용을 설명해 보내 주셨던 선생님. 오십이 넘은 지금도 그 정성스러운 선생님의 해답의 편지를 간직하고 있다. 가을 어느 일요일 고구마를 캐고 있을 때 2학기 수련장을 가지고 온양역 까지 오셨던 선생님. 기차역 한적한 창고 옆의 그늘에 앉아 나를 기다리시던 선생님의 모습이 40년이 훨씬 지난 지금도 눈에 선하다. 중학교 배정원서를 쓸 때 다시 올라오셔서 전형료를 내 주셨던 선생님의 정성으로 중학교에 수석 합격해 3년 동안 장학금으로 졸업하게 되었다. 대전에서 고등학교를 다닐 때 선생님은 학교로 찾아오셨다. 아기 어머니가 되신 선생님은 내 손을 붙들고 "공연히 내가 네 인생을 바꾸어 놓았구나"하시며 힘들게 공부하는 나를 안쓰러워하시던 선생님을 생각하면 지금도 눈물이 핑 돈다. 그 당시 선생님 같은 딸을 둔 많은 인생의 경험을 겪은 초로의 교사지만 아직도 나는 선생님을 마음이 지표로 삼고 있다. 선생님의 손길을 떠올려 나를 채찍질한다. '정말 내 인생을 바꾸어 놓으신 선생님!' 그러나 가끔 나를 뒤돌아보면 나의 제자들에게 내가 어떻게 그려지고 있을지 부끄럽고 두렵기만 하다. 김숙자 서울 갈현초 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