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과 국가를 위한 절대주의자
민족사의 무대를 대륙으로 확장해
타협 없는 이상주의는 옥의 티
날카로운 필력(筆力)으로 계몽 나서
단재 신채호는 1880년 충청도 회덕에서 태어나 1936년 중국 여순(旅順) 감옥에서 타계했다. 어린 시절을 회덕 어남리에서 보낸 단재는 여덟 살 되던 1887년 부모의 고향인 청주 귀래리로 옮겨가서 형 재호와 함께 서당을 시작으로 학업에 정진했다. 가난했지만 10여 세에 사서삼경을 읽을 정도로 명석했던 그는 다른 학생보다 빠르게 1898년 성균관에 들어가서 1905년 성균관의 박사가 된다.
냉정하면서도 열정적인 청년이던 단재는 1905년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던 전후에 국권회복운동의 일환으로 ‘황성신문’과 ‘대한매일신보’에 논설을 쓰기 시작했다. 민족사를 통하여 국운을 일으켜 보고자 한 그의 노력은 1908년 ‘독사신론’과 같은 논단으로 정리되었는데 이러한 정신은 훗날 민족주의 사관을 정립하는 기초가 된다. 단재는 풍전등화의 국가를 구하고자 하는 일념으로 구국의 영웅을 소설로 표현하기도 했다. 역사 속에 존재하는 민족영웅을 통하여 위급한 국가를 구할 수 있다는 희망이 ‘을지문덕전’과 같은 전기소설로 창작된 것이다. 논리적으로 보자면 단재의 소설창작과 논설쓰기는 상통한다. 그리고 신민회 가입이나 국채보상운동 역시 상통한다. 모두 민족과 국가를 위한 절대주의였던 것이다.
1909년 단재를 포함한 지사(志士)들이 친일매국단체인 일진회를 성토했지만 일제의 마수가 조선의 운명을 끊어 가고 있었다. 이듬해 4월, 일제강점을 예견한 단재는 중국의 청도(靑島)로 망명했다가 다시 러시아의 블라디보스톡으로 옮겨갔다. 이처럼 단재는 조국을 떠나 유랑의 일생을 살면서 오로지 민족해방을 위한 일념으로 정신과 육체를 불태웠으니 참으로 장렬하고 참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1913년 신규식의 주선으로 상해로 옮겨간 단재는 박은식, 조소앙 등과 박달학원을 세워 교육운동을 전개했다. 그는 1915년 무렵부터 조선사를 집필하기 시작하는 한편 고대 한국의 영토였던 고구려의 역사를 연구하기 시작했다. 이 일은 훗날 민족사의 무대를 반도 중심에서 대륙 중심으로 확장시킨 출발 지점이었으며 김부식을 사대주의로 인식하도록 만든 민족주의 사관의 이정표가 되었다.
1919년 삼일운동 이후 상해에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의정원 의원으로 일을 했지만 이승만의 외교론에 대립하다가 공직을 사퇴한다. 당시 단재는 “이완용은 있는 나라를 팔아먹었지만 이승만은 없는 나라를 팔아먹는다”라고 하면서 외교론의 허상을 통렬히 질타했다. 단재가 외교론, 준비론 그리고 자치론을 비판하고 또 이광수나 최남선의 문학을 비판했던 것은 그의 사상이 무장투쟁과 민중직접혁명에 놓여 있었기 때문이다.
옥중에서 더욱 빛난 저항정신
단재의 논리에 의하면 정부가 없다는 것은 권력이 없다는 것이고, 권력이 없으면 제국주의와 같은 지배와 피지배가 성립하지 않는다. 그런 토대에서 1922년, 무정부주의 사상을 가진 의열단 선언문으로 유명한 ‘조선혁명선언’을 썼음은 잘 알려진 일이다. ‘기미독립선언서’와 비교되는 단재의 ‘조선혁명선언’은 민중의 직접혁명과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을 설파했다. 이 선언에서 단재는 일본 제국주의자를 타도하기 위해서는 폭력과 테러로 아가 비아에 대한 무장투쟁을 전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단재가 어떤 경로로 무정부주의자가 되었는가에 대해서는 여러 견해가 있지만 분명한 것은 초기의 민족주의에서 사회주의를 거쳐서 무정부주의자가 되었다는 점이고, 그 무정부주의는 이론적 무정부주의가 아니고 현실에 토대한 민족해방의 방략이었다는 점이다.
한편 단재는 1927년 조선 국내에서 일어난 신간회 발기인으로 참여하면서 해외와 국내의 해방전선을 모색하고 사회주의와 민족주의의 좌우합작을 위해서 노력했다. 그는 민족해방운동의 군자금을 마련하고자 노력하다가 1928년 대만의 기륭항에서 체포되고 말았다. 이렇게 그는 조선, 러시아, 중국, 일본을 오가면서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 몸을 바쳤다. 이 사건으로 10년형을 언도받았고 1936년 옥중에서 죽었으므로 그의 대외 활동은 여기까지가 끝이다. 하지만 그의 역사연구와 집필과 저항은 옥중에서 더욱 빛난다.
옥중에서나 죽음을 맞이해서도 그는 강철 같았다. 아니 칼날 같았다. 원래 병약했던 데다가 오랜 수감생활로 죽음이 임박했을 때 단재에게 뜻밖의 제안이 들어왔다. 병보석이었다. 1936년 이국 땅 감옥에서의 죽음은 돌이킬 수 없는 고황(膏肓)에 들었고 조선에서의 지원이나 지지도 끊겨 그야말로 천애절벽(天涯絶壁)에서 고통의 나날을 보내고 있는 즈음이었다. 단재는 병보석을 단호히 거절했다. 친일파가 주선하는 보석보다는 차라리 감옥에서 죽겠다는 것이 그의 정신이었다.
그해 2월 21일, 그렇게 단재는 죽었다. 이튿날 여순감옥의 어느 곳에서 화장되어 몇 줌의 잔뼈와 재로 파란만장한 일생을 마감했다. ‘독립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쟁취하는 것이다’라던 그는 한 줌 재가 되어 버린 것이다.
현실참여와 이상을 넘나들다
단재는 죽어서도 편치 못했다. 그의 한 줌 유골이 압록강을 건너고, 2월 24일 경성역을 지나 청주에 이르러 고향 귀래리로 운구되었다. 당시 단재는 호적이 없었다. 일제의 조선통치를 부정한 단재가 일제의 호적이 올라 있을 수가 없었다. 호적에 올리는 순간, 단재가 일제의 신민이 되는 것이므로 단재는 단호히 호적을 거부했던 것이다. 그런데 1945년 해방 이후, 한국 정부는 일제의 호적법을 그대로 이어받았기 때문에 국적을 부여하지 못했다. 살아서 환국(還國)한 경우에는 새로운 국적과 호적을 취득했지만, 단재와 같은 경우에는 이미 사망했기 때문에 법률상으로는 대한민국 국적과 호적을 취득할 방법이 없었다. ‘국적법 개정안’이 논의 중이므로 곧 국적을 회복할 것이지만 2008년 현재까지 단재의 국적이 공란이라는 것은 참으로 수치스런 일이다.
단재가 민족주의자이면서 무정부주의자였다는 사실은 많은 것을 시사한다. 사회주의나 공산주의 운동보다는 국가나 제도 자체를 부정하는 무정부주의가 조선해방의 방략으로 타당하다는 믿음이 곧 단재사상의 핵심이다. 단재에게는 피압박 민중이 연대하여 제국주의에 대결한다는 공산주의 운동보다는, 원론적으로 지배나 피지배가 성립하지 않는 무정부이론이 타당한 것으로 보였던 것이다. 철학과 역사에 대한 통찰과 혜안이 있던 단재로서는 무정부주의야말로 조선의 해방과 더불어 모든 피압박 민중의 진정한 해방을 이룰 수 있는 최후의, 그리고 최선의 방법이었다.
단재의 사상은 절대주의다. 단재에게는 조선 독립을 위한 것이라면 그 어떤 방법도 타당했다. 조선혁명선언서에 ‘일본천황, 관리, 친일주구’ 등을 지목하여 살해해야 한다고 지목한 것은 원론적으로는 테러리즘이다. 전쟁이나 외교가 아닌 테러를 통해서라도 조선을 해방시키고, 피압박 민중을 해방시켜야 한다는 것은 물론 비현실적이다. 그렇지만 그 방법이 가장 이상적이다. 이처럼 단재는 현실참여적이면서 이상주의자였다.
이러한 단재의 단호한 태도는 여러 문제를 남기기도 했다. 민족해방이라는 목적을 절대화시키면서 비타협 노선을 걸었기 때문에 현실적 조건에 대해서는 다른 사람들과 의견을 달리했다. 칼날 같은 강직한 성품 때문에 적이 많았고, 투쟁 이외의 다른 방법을 고려하지 않았기 때문에 다소 무모한 것처럼 비치기도 했다. 아마도 단재와 같이 일을 한다는 것은 쉽지 않았을 것이다.
또한 단재는 양반계급 출신의 계급의식을 완전히 극복하지 못했다. 몰락한 양반이었지만 그는 여전히 지배계급의 자세와 태도를 견지하고 있었다. 깨어 있는 역사의식이 아니었다면 지조와 충절을 소중히 여기는 봉건양반으로 폄하되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깊은 고뇌와 휘황한 이상과 단호한 성정을 함께 가진 단재는 한국인의 영원한 스승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