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모든 것에는 양면성이 있지만 우리에게 허락된 기회는 한 번이기에 선택은 하나 일 수밖에....
한 영화가 이렇게 상반된 평가를 받을 수 있을까. 라스 폰 트리에의 '어둠 속의 댄서(Dancer in the Dark)'는 작년 5월 칸 영화제에서 최고상인 황금종려상과 여우주연상을 받았다. 하지만 타임지는 ‘2000년 최악의 영화’에 선정했다고 한다. 도대체 이 영화의 어떤 측면이 이렇게 엇갈린 평을 낳게 만들었을까. '어둠 속의 댄서'는 아이슬란드 가수 비요크가 주연한 뮤지컬 영화. 유전적 안구질환을 겪는 체코 출신 여성 셀마는 아들도 같은 질병으로 서서히 눈이 멀어가자 이를 고치기 위해 미국으로 옮아가 억척같이 돈을 모은다. 그러나 믿었던 집주인이 돈을 훔쳐가자 돌려 받으러 갔다가 우발적인 살인을 저지른다.... 이 영화의 뮤지컬 장면들은 정말 마술적이다. 자막이나 영상 없이 어둠 속 몇 분 동안 음악만 지속되는 영화의 첫 부분과 반주나 합창 혹은 춤을 동반하지 않은 채 절규처럼 계속되다 절정에서 끊겨버리는 노래로 막을 내리는 마지막 부분은 영화를 새롭게 열고 닫는 폰 트리에의 뛰어난 테크닉을 보여준다. 그러나 문제는 이 영화의 이야기가 낡은 신파라는 점이다. 감동을 위해 짜 맞춘 인위적 설정들로 어색하기 짝이 없는 스토리. 자학과 맹목적인 눈물에만 몰입하는 영화의 이야기는 대책 없는 감상주의와 제스처만 요란한 매저키즘이 교배해 낳은 괴물 같다. '어둠 속의 댄서'에 대한 상반된 반응은 결국 이야기에 주목하느냐 아니면 스타일을 평가하느냐의 차이이며 ‘무엇’과 ‘어떻게’라는 의문부사의 대리전이다. 하지만 강요된 비극에 넘어가 눈물을 흘린다면 그 눈물은 전혀 그 가치를 인정받을 수 없는 것일까.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친일 행적이‘인간이 만든 것 중 가장 아름다운 건 모차르트의 음악과 서정주의 시’라고까지 격찬 받은 미당 시의 탁월함을 모조리 상쇄할 수는 없을 테니까. 자녀들을 돌보기 귀찮아 고아원에 넣었다는 사실 때문에 루소의 "에밀"이 완전히 평가절하 될 수는 없을 테니까. 세상의 모든 것에는 다 이렇듯 양면성이 있지만 문제는 우리에게 단 한 번의 기회만 허락되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 같다. 밀란 쿤데라의 말처럼, 우린 현재의 삶을 이전의 삶과 비교할 수도 없고 이후의 삶에서 교정할 수도 없다. 우리는 매순간 처음으로 주어지는 상황 앞에서 그저 즉흥적인 선택을 해나갈 뿐이다. 자, 이제 그럼 다시 이야기해보자. 어둠 속의 댄서? 감동적이진 않았지만 충분히 감탄스러웠다. /서혜정 hjkara@kfta.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