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1.08 (수)

  • 구름조금동두천 -1.2℃
  • 맑음강릉 1.6℃
  • 구름많음서울 0.0℃
  • 맑음대전 1.2℃
  • 흐림대구 2.7℃
  • 구름조금울산 3.6℃
  • 광주 1.0℃
  • 구름많음부산 4.1℃
  • 구름조금고창 0.0℃
  • 제주 7.2℃
  • 구름많음강화 -0.7℃
  • 구름많음보은 -0.5℃
  • 흐림금산 -0.2℃
  • 구름많음강진군 3.5℃
  • 구름많음경주시 3.3℃
  • 구름조금거제 3.5℃
기상청 제공
상세검색

교양

<2013 교단수기공모 은상>믿음은 희망을 싣고

3년 전 새 학기 첫날, 5학년 담임으로 아이들과 정겨운 인사를 나눌 때의 추억이 머릿속을 가득 메운다. 다들 어색해서인지 조용히 자리를 찾아 앉는 가운데 유독 활발하고 씩씩한 여자 아이가 눈에 띈다.

“선생님, 안녕하세요.”

목소리가 얼마나 우렁찬지 소리와 덩치만으로는 영락없는 남자아이였다. 성격이 활발하고 붙임성도 좋아 ‘참 바르게 컸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발표를 썩 잘하진 못했지만 수업시간마다 손을 높이 들고 무언가를 말하려 애쓰는 모습도 대견했다. 어느덧 한주가 지나고 아이들과 이제 막 적응을 하려는 찰나 사서선생님이 느닷없이 방문해 심각한 표정으로 말을 건넸다.

“선생님 반에 소연(가명)이라는 아이 있죠?”
“예, 우리 반 맞습니다.”

사서 선생님은 조금 흥분한 듯 빠르게 말을 이어나갔다.

“아이가 도서관에서 잠시 자리를 비운사이 서랍 안에 있던 지갑을 훔쳐 십 만원가까이 되는 돈을 다 써버렸더라고요. 일단 타이르긴 했는데, 선생님도 알고 계셔야 할 것 같아서요.”

쉽게 믿기질 않아 일단 죄송하다고 말씀드린 후 아이를 불러 사실관계를 확인했다. 사서선생님 지갑을 몰래 훔쳐 돈을 여기저기 쓰고 다니다 다른 반 친구에게 들킨 상황이다. 만난 지 얼마 안됐지만 첫인상이 누구보다 좋던 아이인데 도둑질이라니.

“선생님, 고치려고 했는데 예쁜 물건이나 돈을 보면 가끔 참을 수 없을 때가 있어요. 앞으로는 훔치지 않을게요. 그리고 엄마한테는 이야기하지 말아주세요. 부탁드려요.”

잘못을 뉘우치나 싶더니 도리어 부탁까지 하는 모습에 어안이 벙벙했다. 그래도 아이의 도벽을 고치기 위해선 신뢰가 중요하다고 생각해 차분하게 대화하며 믿음을 심어줬다. 그리고 나서는 작년 담임을 찾아가 아이에 대해 도움을 구했다. 선생님은 진작 말하지 못해 미안하다며 아이가 도벽증상이 있다고 했다. 친구들 물건에 종종 손을 대 야단도 치고 걱정도 많이 했단다. 그러면서도 안타까워하기에 이유를 묻자 혼자계신 어머니가 투석중이라 거동이 불편해 병간호와 집안일을 도맡아 한다는 것이다. 아이를 무턱대고 혼내지 않은 것이 다행스러운 것 같기도 했다. 엄마한테 알리지 말아달라는 아이의 간곡한 청 또한 소중한 약속이자 마음을 열게 하는 신뢰라 생각해 고민 끝에 지키기로 했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도 잠시, 어느 날 친구 두 명을 꼬드겨 학교에 오지 않고 방황하며 놀다가 학교근처에서 발각됐다. 사고가 나지는 않았는지 걱정돼 쉬는 시간에 아이를 찾아 교문 밖을 나서는 순간 소연이 비슷한 아이가 도망치기에 뒤따라가 붙잡았다. 다신 이런 행동을 하지 않겠다는 다짐을 받아냈다. 교직생활이래 이리 긴 3월은 처음인가 싶더니 또 다른 폭풍이 몰려왔다. 2학년 1반 선생님이 찾아와 소연이가 반 아이에게 작년에 준 5만원을 안 갚는다며 협박을 했다는 것이다.

“예전에 오만원을 줬는데, 갑자기 생각이 나기도 하고 돈도 필요해서 달라고 얘기했어요.”
“작년에 준 돈을 다시 달라고 하면 되겠니? 작년에 오만원이나 되는 큰돈은 어디서 났어?”
“오래 돼서 기억은 잘 안 나지만 훔친 돈 같아요. 그 때는 아무생각 없이 줬는데 지금 생각하니까 아까워서요.”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을 아는지 손을 비비꼬며 들릴 듯 말 듯 한 목소리로 천천히 입을 뗐다.

“동생에게 무섭게 굴어 죄송해요. 그냥 준 돈인데, 제가 심한 것 같아요. 잘못했어요.”

소연이한테 ‘죄송해요’, ‘잘못했어요’라는 말만 몇 번 들었는지 헤아리기조차 힘들다. 일주일 후, 급식지도를 마치고 오후 수업준비를 하고 있을 때 반 아이 몇 명이 교실 문을 쾅 열어젖히며 다급하게 외쳤다.

“선생님, 화장실에서 담배연기가 나요. 빨리 가보세요.”

아이들의 이야기가 무섭게 화장실에서 담배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문을 두드리며 나오라고 소리치자 아니나 다를까 소연이다. 갑작스런 선생님의 등장에 얼마나 놀랬는지 눈만 동그랗게 뜨고 있었다. 그러나 정작 하늘이 노랗고 앞이 캄캄한 건 나였다. 한숨소리만이 화장실 안을 가득 메웠다.

“소연아, 언제부터 담배를 피웠니?”
“작년에 호기심에 몇 번 피웠어요. 5학년 올라와서는 처음이에요.”

요즘 초등학생들도 담배를 피운다고 뉴스에서 보기는 했지만 설마 우리 반 아이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도벽에 담배에 도대체 어디부터 어떻게 지도를 해야 하나 막막했다. 그래도 일단 다른 잘못과 연계하는 실수를 범해서는 안 될 것 같아 각종 시청각 자료를 보여주며 금연교육으로만 몇날며칠을 보냈다.

아이를 믿고 대화를 통해 해결하려는 방법에 대한 회의가 들었다. 차라리 선도위원회를 열어 강하게 처벌을 해야 하는 건 아닌지. 그러나 나름 지속적인 대화와 관심의 결과인지 같은 잘못을 반복해서 저지르지 않고 있다는 것이 조금의 위안은 됐다.





3월과 4월의 사건들이 5월을 시샘이라도 하듯 잠잠한가 싶더니 이번에도 거의 토네이도 급이다. 하교 길에 돈 좀 빌려달라고 했는데 가진 돈이 없자 3학년 아이 두 명을 한대씩 때렸다고 한다. 항상 그랬던 것처럼 또다시 소연이와 마주앉게 됐다. 한 참의 침묵이 흐르고 변명이라도 하려는 듯 작고 힘없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정말 잘못했습니다. 친구들이 맛있는 음식을 사먹는 게 부러워 저도 모르게 그랬어요.”

눈물을 줄줄 흘리며 말을 이어가는 아이를 보자 옛 생각이 났다. 어릴 적 가난으로 먹고 싶은 것도 제대로 못 먹고 항상 친구들을 부러워해야만 했던 모습이 떠오르며 아이를 대하고 있는 내가 경찰이 아닌 교사라 정말 다행스러웠다.

2학기에는 언제 그랬냐는 듯 아이와 그 주변의 일상은 너무나 평온하고 잔잔했다. 아이에게 심어준 작은 믿음의 씨앗이 희망의 열매로 자라난 덕분일까. 친구들도 하나 둘 마음을 열었다. 이제 소연이는 남의 물건에 손대지 않는다. 담배도 피우지 않는다. 친구들을 놀리거나 때리지도 않았다. 소연이의 달라진 모습에 가끔은 어리둥절했지만 엄연한 사실이다.

이뿐만이 아니다. 학년말에는 기초부진도 당당히 벗어났다. 학업성취도 평가에서는 학년 초보다 평균이 20점이나 향상됐다. 더 큰 감동은 ‘사이버청정 실천수기’ 학교 공모전에서 최우수로 입상한 일이다. 소연이가 컴퓨터를 너무 좋아해 폭력의 원인 중 게임의 영향이 크다고 보고 중독예방프로그램을 적용해 1년 동안 함께 노력했다. 그리고 방송실에서 전교생을 대상으로 실천수기를 낭독할 때의 장면은 아직도 기억 속에서 잊혀 지질 않는다.

“4학년 때까지 컴퓨터 게임밖에 몰랐는데, 5학년 올라와서 꾹 참았어요. 이젠 게임을 완전히 끊었습니다. 나를 망가뜨렸던 컴퓨터 게임이 너무 싫어요.”

순간 마음 속 감동의 소용돌이가 휘몰아쳐 울컥 눈물이 쏟아지려는 것을 억지로 숨겼다. 소연이는 그 어떤 진귀한 보석보다도 아름다운 내면의 광채를 발하고 있었다. 투석중인 어머니 병간호도 어찌나 열심히 하는지 말썽만 피우던 소연이의 과거는 아이들의 기억 속에서 흐릿해진지 오래다. 이젠 효녀 소연이로 기억될 뿐이다. 함께한 일 년도 금세 지나고 다음해 6학년이 돼 다른 반 아이로 만났다. 가끔씩 복도에서 스쳐 지날 때마다 얼마나 기특하고 사랑스러운지.

5월 시장표창 모범어린이를 추천하라는 공문이 내려왔다. 우리 반은 아니지만 6학년 선생님들에게 소연이를 추천했다. 소연이의 놀라운 변화에 담임선생님은 물론, 다른 반 선생님들도 적극 공감해 줬고 결국 시장표창을 받게 됐다. 모범어린이로 거듭난 소연이가 대견했고 힘든 나날이었지만 희망의 날개를 본 것 자체로 행복하다. 폭력과 상처 또한 믿음으로 꼬옥 감싸면 부정적이고 공격적인 아이들도 희망의 날개를 활짝 펴고 훨훨 날아오를 수 있다는 가능성에 더욱 힘을 내본다. 소연이는 학교에서 장학금까지 받으며 무사히 졸업을 하고 중학교에 진학해 그 누구보다도 성실히 생활하고 있다.

믿음의 둥지에서 희망의 날개를 활짝 펼쳐 보이며….
배너

관련기사


배너



배너


배너
배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