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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

인천상륙작전의 교두보가 된 장사전투

학도의용군들의 목숨 건 활약
전쟁 초, 전세 역전에 큰 기여
포항선 71명으로 기습 막아내

1950년 6월 25일 일요일 새벽, 북한의 불법 기습 남침으로 한반도는 순식간에 전화(戰火)에 휩싸였다.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던 북한에 비해 당시 현격히 열세였던 우리나라는 단 3일 만에 수도 서울을 뺏겼고, 두 달이 채 지나지 않은 8월 초에는 낙동강까지 밀려났다.

전세는 유엔군의 참전과 인천상륙작전 성공으로 9월 중순이 돼서야 역전됐다. 이 과정에서 우리 군과 국민의 처절한 사투가 큰 역할을 했다. 특히 꽃다운 나이에 스스로 전장에 뛰어든 학도의용군은 절대 잊어선 안 될 우리 역사의 자랑이자 아픔이다.

학도의용군의 활동은 개전과 함께 시작됐다. 3일이 지난 6월 29일에는 수원에서 비상학도대를 결성, 한강을 도하하려던 북한군과의 전투에 참전했다. 이후 전세가 악화될수록 더 많은 학생들이 학도의용군에 가담했다.

이들은 제대로 된 장비도 군번도 없이 전장을 누볐다. 절대 열세였던 병력충원 뿐 아니라 수색, 후방지원, 치안유지, 선무활동 등 다양한 방면에서 아군에 힘을 보탰다.

6·25전쟁의 전세를 뒤엎은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에도 학도의용군의 역할이 매우 컸다. 인천상륙작전에 앞서 북한군의 눈을 돌리기 위해 전개된 장사상륙작전에 투입된 유격대원 대부분이 바로 학도의용군이었다. 작전명 174라고도 불리는 이 전투에서 772명의 학도의용군은 태풍으로 타고 온 배가 침몰하는 와중에도 장사동 남쪽 고지를 탈취해냈다. 작전에는 성공했지만 거센 북한군의 공격 탓에 해군수송선이 먼저 회항하면서 총 772명 중 139명 전사, 92명 부상 외에 대부분이 실종되는 큰 희생을 치러야 했다.

낙동강 방어선의 최대 요충지였던 포항에서는 학도의용군 단 71명이 북한군 유격대의 기습을 저지했다. 포항여중 전투로 불리는 이 전투는 영화 '포화 속으로'의 소재가 되기도 했다. 학도의용군은 전사 48명, 실종 4명, 부상자 6명, 포로 13명의 큰 피해를 입었지만 국군 3사단이 후퇴해 재정비할 시간을 벌어냈다.
경남 하동 화개장터 인근에서는 전남 여수고, 여수공고, 순천고 등에서 자원입대한 학도의용군 180여 명이 전차와 박격포를 앞세운 북한 최정예 부대, 6사단 1개 대대병력과 전투를 벌였다. 일주일 남짓 총 쏘는 훈련만 받는 초짜였지만 30여명이 전사하는 가운데서도 끝까지 맞서 싸웠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자료에 따르면 학도의용군의 공식적 활동기간은 이승만 대통령의 '학생 학교복귀지시 담화'로 육국본부 정훈공작대가 해산된 1951년 4월 3일까지다. 그러나 그 이후에도 많은 이들이 현역병으로 복무하거나 유격단체와 비정규 부대에서 활약하며 국토 수호에 이바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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