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상의 학부모들이 사교육비에 몸살을 앓는다. 누구를 탓할 수 없는 일로 스스로가 저지른 자업자득의 일인데 정책을 탓하거나 공교육의 부실로 기인된 것이라고 학교까지 폄하되고 있다. 조령모개식의 교육정책이 자주 뒤 바뀜 질을 하고 있음은 그 요인이 아닐 수 없다는 견해에는 동의하지 않을 수 없는 것 또한 사실이다. 다만 누구를 탓하기 전에 국민 모두가 이런 측면으로 시각을 바꾸기를 바라며 40여 년 교단을 지켜온 사람으로 제언해 본다.
작금을 살아가는 학부모들은 누구든지 IQ나 EQ를 대화 속에 자주 담는다. 그에 대하여 어느 정도를 알고 있는가는 의문이나 전혀 모른다할 사람 역시 없다 하겠다. 아무튼 필자로서는 하나의 비근한 예를 들어 바른 교육으로의 접근을 계도해 보자는데 의미를 두고 다음과 같이 주장해 보는 바이다.
우선 IQ를 물건에 비유하고 EQ는 그릇에 견주어 두고 이야기를 전개해보자. 우리 사회상의 과거는 무척 가난했다. 정녕 산에 올라보아도 작은 나무 하나 없었다. 하지만 오늘날은 산야가 과거에 비하여 무척 풍요롭다. 과거에는 아무리 큰 자루를 갖고 산에 올라도 그 자루를 채울 것이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일상에 필요로 할 다양한 물건들을 골라서 담아도 빈 자루를 가득 채울 수 있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교육관련 사회상도 유사한 상황을 빚고 있다. 과거에는 듣고 보면서 배울 아무런 교육환경도 전무한 상태였다면 지금은 문명발달에 의한 다양한 문화상을 무수히 접할 수 있음은 물론 국가나 사회단체가 의도적으로 시설해놓은 각종 시청각 자료나 시설 등 볼거리가 즐비하다.
발전 변화된 사회 환경 속에 기성세대들의 극성스러울 만큼 과잉 편중된 교육관에서 아무튼 어린아이들도 예전과 달리 무척 영리하다. 더더욱 어린이들은 조기교육론이 대두되며 오히려 쉴 새도 없이 혹독한 교육훈련에 시달리고 있다. 전문가의 시각에서 보면 아주 잘 못된 일이며 애처롭기 그지없다.
이제 해법을 찾아 조속한 치유만이 갈망될 일이다. 결론은 그릇을 키우면 그만이다. 즉 EQ를 중점적으로 키워야 한다. 그릇(자루)을 크게 갖도록 하면 주위에 지천으로 널려있는 물건은 스스로 담게 된다. 물건을 챙겨주는 행위에 몰두하던 무지는 금기시할 일이다.
그러면 EQ(그릇)는 어찌 어떻게 키울 수 있는가가 관건이 된다. 감성은 인위적으로 만들어 진다기 보다 무한한 사랑으로 빚을 수 있다 하겠다. 아기가 부모나 조부모의 품에 안겨 만족하고 푸근한 심정에 잠겨 눈을 스르르 감으면서 가슴 깊이 “끄응”하는 행복이 넘쳐나는 소리를 내며 살포시 미소 지을 때 우쭉우쭉 EQ는 자라고 확충된다고 믿는다. 물론 맞벌이 부부가 놀이방 등 유사 학원가에 자식을 맡길 수밖에 없는 경우까지 비난을 하자는 것은 결코 아니다. 충분히 가정에서 사랑으로 감싸 안을 수 있는 경우인데도 고액을 써가며 어린이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가르친다는 명목으로 일관하는 작태가 밉다는 지적이다. 이런 잘 못된 경우를 혹평하면 결국 “돈 버리고 애 버리는 일.”이라 해 두겠다.
EQ는 유아기에 왕성한 성장을 한다고 했다. 우리 사랑하는 어린이들이 큰 그릇으로 성장해 가도록 바른 교육방법을 대입시켜 나아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