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일 아침 9시. 아내는 부엌에서 콧노래를 부르며 도서관에서 먹을 김밥과 간식을 준비하느냐고 온갖 수선을 피운다. 다시 찾아 온 작은 행복에 김밥을 만드는 아내의 얼굴위로 미소가 끊이지 않는다. 몇 년 전부터 나는 매주 일요일마다 초등학교 6학년인 딸과 3학년인 막내 녀석을 데리고 집에서 가까운 시립도서관으로 가곤 한다. 처음에는 온갖 투정을 부리며 짜증을 많이 냈던 아이들도 이제는 어느 정도 익숙해져 내가 귀찮아 늦장을 부리면 오히려 아이들이 투정을 부린다. 사실 우리 가족이 이 작은 행복(幸福)을 다시 찾게 되기까지는 남모르는 아픔이 있다.
몇 년 전의 일이었다. 퇴근하여 집에 도착하자마자 아내는 진지한 표정을 지으면서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지금까지 나는 아내의 이런 모습을 한번도 본 적이 없었다. "당신에게 이런 얘기를 해서 죄송해요. 지금까지는 당신이 걱정을 할까봐 얘기를 할 수 없었어요. 이제는 모든 것을 다 얘기해야 할 것 같아요. 우리 아이들 당신이 생각하고 있는 것 보다 훨씬 더 심각해요. 아이들이 학원에 갔다 오면 매일 컴퓨터 앞에 앉아 인터넷 게임을 하느냐고 정신을 못 차려요. 심지어 둘째 놈은 저녁까지 굶어가면서 인터넷 게임에 빠져 있어요. 제가 무어라고 야단을 쳐도 이제는 듣는 척도 하지 않는 걸요. 어떻게 했으면 좋겠어요."
그러고 보니 퇴근을 하여 집에 들어와 보면 아이들이 컴퓨터를 하고 있지 않는 날이 거의 없었던 같았다. 어떤 때는 두 아이는 컴퓨터가 있는 방에서 문을 반쯤 열고 머리만 내밀고 인사를 할 때도 있었다. 하물며 인사를 하지 않는 날도 많았다. 그때마다 나는 아이들을 말로만 야단을 쳤을 뿐 그 이상의 행동은 하지 않았다. 그리고 아이들의 이런 모습에 익숙해져 나 또한 아이들로부터 인사를 받는 것조차 기대를 하지 않았다. 우리 아이들이 이렇게 되기까지에는 나에게도 책임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문득 '매를 아끼면 아이를 망친다.'라는 생각까지 들었다.
사실 결혼을 하여 지금까지 아내는 우리 아이들 문제로 나에게 얘기한 적이 없었다. 그리고 아이들 또한 별 탈 없이 학교생활을 잘해 주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그런 아내에게 항상 고마워하고 있었다. 그런데 요즘 들어 아내는 아이들 문제로 무척 나에게 짜증을 많이 내는 편이었다. 그리고 예전보다 부부싸움이 잦아진 것도 사실이었다. 처음부터 아내는 교사인 나에게 거는 기대가 사뭇 달랐다. 몇 년 전 학교에서 진학교사 우수 표창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아내로부터 축하한다는 말 한마디 듣지 못했다. 진작 신경을 써야 할 자기 자식에게 무관심한 사람이 상(賞)을 받았다는 것 자체가 아내에게는 못마땅한 모양이었다. 생각해보니 아이들하고 대화를 나눈 지도 오래된 것 같았다. 아내의 이야기를 다 듣고 난 후 매일 피곤하다는 핑계로 아이들에게 너무나 무관심한 것에 대해 아내에게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무슨 대책을 세워야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아내와 나는 일주일동안 시간을 두고 좋은 방법을 생각해 보기로 하였다.
다음 날 퇴근을 하여 현관문을 열자 집안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특히 나를 더욱 놀라게 한 것은 현관에 떨어져 있는 핏자국이었다. 예전처럼 딸은 자기 방에서 나오지 않고 말로만 인사를 하는 것이었다. 나는 다급하게 딸에게 물어 보았다. "엄마 어디 가셨니? 그런데 무슨 일이 있었니? 현관에 있는 핏자국은...?" 내 말에 딸은 조금 짜증나는 말투로 대답을 했다. "잠깐만요. 말시키지 마세요. 이 게임에서 지면 돈 만원이 날아간다 말이에요." 딸은 내 질문에는 대답을 하지 않고 영문도 모르는 말만 내뱉고 있었다. 이상한 생각이 들어 방문을 살며시 열어 보았다. 딸은 내가 옆에서 지켜보고 있는 것도 모르는 체 열심히 컴퓨터 자판을 두드리면서 인터넷 게임에만 몰입하고 있었다. 나는 어이가 없어 조용히 방문을 닫고 거실로 나왔다. 딸의 이런 모습을 지켜보면서 문득 어제 밤에 아내가 한 말들이 생각이 났다. 그리고 우리 아이들이 이렇게까지 달라진 것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바로 그 때 현관문이 열리면서 아내와 그 뒤로 마치 큰 잘못을 저지른 사람처럼 머리를 아내 등에 파묻고 둘째가 따라 들어왔다. 그런데 한 손으로 이마를 가리고 있었는데 손가락 사이로 하얀 무언가가 삐져나온 것이 보였다. 내가 퇴근하기 전에 집에서 아이들끼리 한바탕 전쟁을 치른 모양이었다. 깜짝 놀라 아내에게 무슨 일이냐고 물어보았더니 아내는 말없이 안방으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할 수없이 겁먹은 표정을 하고 우두커니 서 있는 둘째에게 물어 보았다. 둘째는 이마에 가린 손을 떼며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을 했다. "아~빠, 누나가 제 이마를 이렇게 해 놓았어요. 컴퓨터 한 대 또 사줘요. 학교에 갔다 와서 컴퓨터를 하는데 누나가 자기가 해야 한다고 하면서 나를 밀었어요. 누나가 미워 죽겠어요."
둘째의 이야기를 듣고 난 후, 결국 화근(禍根)을 불러일으킨 것이 컴퓨터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마치 아무런 일이 없다는 듯 여전히 자기 방에서 컴퓨터 게임에만 열중하고 있는 딸이 그렇게 미울 수가 없었다. 올라오는 감정을 억누르면서 조용히 딸의 방으로 들어갔다. 그때까지도 딸은 계속해서 컴퓨터 게임에만 몰두하고 있었다. 순간 나는 화가 치밀어 컴퓨터의 전원과 인터넷 코드 모두를 뽑아버렸다. 그리고 처음으로 딸에게 손찌검을 하였다. 그 제서야 딸은 분위기가 심상치가 않다는 것을 알고서는 자리에서 일어나 무조건 빌기 시작했다. "아빠, 제가 잘못 했어요. 다시는 안 그럴게요. 그리고 앞으로는 절대로 컴퓨터 게임 하지 않을게요."
딸의 그것마저 가식처럼 보이기까지 했다. 시끄러운 소리를 듣고 달려 온 아내가 말리지 않았으면 아마 무슨 일이 일어났어도 크게 일어났을 것이다. 거실에서는 둘째가 잔뜩 겁에 질러 울고 있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아이들에게 이렇게까지 화를 낸 적이 없었다. 특히 딸에게 손찌검을 해 본적도 없었다. 옆에서 지켜보던 아내 또한 나의 이런 행동에 조금은 의아해 하는 표정을 지었다. 너무나 속상해서 저녁도 먹지 않고 방으로 들어가 나오지를 않았다. 잠시 후 아내가 방문을 열고 들어와 기분 전환도 할 겸 밖으로 나가자고 제안을 했다. 결혼을 한지 십 년이 넘은 지금까지 아내는 항상 나에게 정신적인 지주가 되어 주었다. 사실 그런 아내에게 무엇 하나 제대로 해 준 것도 없었다. 매사에 잘못이 있으면 무조건 자신의 탓으로 돌리는 아내에게 오히려 내가 더 미안한 생각이 든 적도 있었다. 밖으로 나와 아내는 내 기분을 풀어주기 위해서 연애시절 했던 것처럼 온갖 애교를 부렸다. 결국 아내의 그런 모습에 어느새 기분이 조금씩 풀리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아이들 문제를 비롯해 집안의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는 아내에게 우리 아이들을 인터넷 중독에서 구제하기 위한 행복의 조건 5가지를 말하였다. 처음에는 힘들겠지만 그것을 실천에 옮겨보자고 하였다.
행복 하나 우선 먼저 컴퓨터의 인터넷 게임에 빠져있는 우리 아이들을 위해 다소 불편함이 있더 라도 한 달 동안 인터넷을 끊기로 한다. 행복 둘 저녁 시간 이후에는 되도록 이면 TV 시청을 자제하고 책을 보기로 한다. 행복 셋 아이들과 대화의 시간을 갖기 위해서 매주 토요일마다 가까운 산으로 등산을 하기로 한 다. 행복 넷 아이들에게는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으면 반드시 편지지에 편지를 쓰게 한다. 사실 아이 들이 커 가면서 아이들로부터 편지를 받아 본 기억이 별로 없었던 것 같았다. 행복 다섯 일요일에는 집에서 가까운 시립도서관에 가서 책을 읽고 저녁에는 독서 감상문을 쓰게 한다.
평소에도 사소한 것에 감동을 잘 하는 아내는 내 이야기를 다 듣고 난 후, 눈물을 글썽이며 내 손을 꼭 잡고 "여보, 고마워요. 사랑해요."라는 말을 연발하였다. 좋아하는 아내의 모습에 오히려 내가 더 미안한 생각까지 들었다. 그리고 이 약속(約束)이 꼭 지켜질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날 밤. 나는 컴퓨터 모니터 앞에 다음과 같은 글을 적어놓았다. "사랑하는 딸, 아들아! 지금 우리 집에 인터넷 바이러스 균이 침투하여 너희들을 위협하고 있단다. 이 균에 중독이 되면 너희들이 위험에 빠질지도 모른단다. 그래서 오늘부터 한 달 동안 인터넷과 전쟁을 하기로 했단다. 다소 불편하더라도 엄마, 아빠가 이길 수 있도록 너희들이 많이 도와주길 바란다."
인터넷과 전쟁을 선포한 뒤 처음에는 아이들이 방과 후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방황하는 기색이 역력히 나타났다. 그래서 나는 아이들 각자에게 '주간학습계획표'를 만들어 주어 실천해 보도록 하였다. 그리고 나 또한 아이들과 세대 차이를 줄이기 위해서 시간이 날 때마다 아이들이 좋아하는 인터넷 오락게임을 찾아 해보기도 하였다. 해본 결과 대부분의 인터넷 게임들이 아이들을 중독에 빠지도록 구성되어져 있었으며 하마터면 어떤 게임을 하다가 내 자신도 그 게임에 중독이 될 뻔했다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그 사건이 있었던 날 딸이 나에게 했던 말이 무슨 뜻인지도 알게 되었다. "게임에서 지면 돈 만원이 날아간다 말이에요." 인터넷 게임에서 이기게 되면 머니를 충전시켜 아바타를 꾸밀 수 있는 옷과 각종 액세서리를 살 수 있는 그런 게임이었다.
딸의 생일 날. 생일 선물로 무엇을 갖고 싶은지 물어 본 적이 있었다. 딸의 대답은 우리 부부가 생각하고 있었던 그 이상의 것이었다. "아빠, 신형컴퓨터 한 대 사주 세요. 그리고 초고속 인터넷을 달아주세요. 친구들이 저하고는 채팅을 하지 않으려고 해요. 우리 집 컴퓨터 속도가 너무 느려 제가 채팅 방에서 추방을 당했지 뭐예요. 쉽게 얘기해서 아이들에게 왕따를 당한 거죠. 그 기분이 어떤지 엄마, 아빠는 모르실 거예요."
인터넷 채팅 방에서 왕따를 당했다는 딸의 이야기를 듣고 요즘 아이들의 심각성을 알 수가 있었다. 최근 조사에 의하면 인터넷을 하루만 안 하면 마음이 불안해지는 사람은 인터넷 중독으로 보아야 한다는 기사를 읽은 적이 있었다. 이러한 모든 것들이 우리 기성세대에게도 책임이 있다는 생각을 해 보았다. 가끔 스팸메일을 통해 날아 온 성인 사이트를 열어보면 우리 성인도 보기에 낯 뜨거운 그런 장면들이 연출되고 있는 것을 목격할 수가 있다. 모든 것들을 한 번 더 생각하고, 당신의 자식들이 그런 것들을 본다고 생각한다면 절대로 그런 스팸 메일은 보내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해 보았다.
한 달 동안 인터넷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우리 부부는 그것을 자축하기 위하여 새로 인터넷을 개통하였다. 무엇보다도 이 전쟁에서 엄마, 아빠가 이길 수 있도록 뒤에서 열심히 응원을 해 준 우리 두 아이들에게 무어라 고마움을 표할 수가 없었다.
이제 우리 아이들은 인터넷에서 필요한 정보를 찾는 것 외에는 컴퓨터를 하고 있지 않다. 우리 집에서의 인터넷은 우리 아이들이 잘 모르는 유용한 정보만을 가르쳐 주는 척척 박사님으로, 우리 가족에게 사랑의 메시지를 전해주는 사랑의 메신저로 자리 매김하고 있다. 그리고 나 또한 다시 찾아 온 이 작은 행복(幸福)을 소중히 여기며 지켜나갈 것을 다짐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