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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단일기

강마을 편지 - 그리운 옛 벗은 지금 어디에서 참선을 할까

조금 있으면 장마가 시작된다고 합니다. 강마을은 6월의 뜨거운 열기가 바깥에서 몰려오는 것 같습니다. 초록빛으로 변한 들판에는 땅내맡은 어린 모들이 줄을 서서 자라ㅏ고 있습니다.  이렇게 첫여름이 손짓하는 6월의 아침, 강마을 중학교 교무실에서 잠시 차를 한 잔 마시고 하루를 시작합니다.

학교라는 바쁜 일상에서는 차분하게 앉아 제가 좋아하는 녹차를 우려 마시기는 좀 곤란하고, 그냥 일인용 다기에 한 줌의 차나 아니면 티백에 뜨거운 물을 부어 마십니다.

마음에 아련아련 보랏빛 수국이 꽃구름처럼 피어날 것 같은 오늘 아침에는 쟈스민차를 마셨습니다. 짙은 이국의 향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릅니다. 아는 분이 중국을 다녀와서 선물한 것으로 '말리화'라 불리는 쟈스민 꽃향기가 스민 화차(花茶)를 마실 때면 김혜린 씨가 그린 만화 <비천무>에서 나왔던 '설리'의 안타까운 사랑이 생각납니다. 설리의 춤 속에 섞여나던 말리화 향기, 그리고 슬픈 사랑이 향기롭고 아련하여 가슴이 아팠습니다.

제가 아는 가장 아름다운 차 향기는 산사 풍경소리가 어우러진 깊은 차입니다. 십여 년 전 오랜 벗이 출가할 즈음 저 역시 도심의 절집에서 학생회의 지도교사로 있었습니다. 매주 토요일 오후엔 눈 맑은 어린 불자들과 108배를 하고, 경전을 공부하면서 모임이 끝난 후 차도 함께 마셨습니다. 까르르 부서지던 웃음들이 찻잔에 걸려 넘어지는 모습이 노오란 꽃창포처럼 싱그럽고 아름다웠습니다. 그 때 마신 차는 어쩌면 풀꽃 향기 같았습니다.

그러나 그것보다는 어쩌다 수련장이 있던 경남 고성의 작은 암자에서 잠을 자게 될 때, 도반과 함께 대웅전의 풍경소리를 함께 우려서 마시던 차가 더 깊고 은근해서 더 좋았습니다. 고요한 절집의 방 한 켠에서 몇 개의 강정을 앞에 두고 출가 전 벗과 참으로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총총한 별빛이 이슥해 질 때까지 몇 번을 우려 마시던 차는 감로 그 자체였던 것 같았습니다. 젊은 날의 안타까운 미망들이 헛되이 손가락 사이로 날아다니고, 후두둑 오동잎 지는 소리도 들리기도 하고, 멀리 마을에서 밤잠 없는 개는 실없이 짖기도 하고….

‘옛 벗은 지금 어느 절집에서 긴 수행의 날을 보내고 있을까’ 강마을 교무실에 앉아 명치끝이 아려오는 그리움에 혼자 생각의 자락을 펼칩니다. 그 벗과 마시던 차가 그리운 아침입니다. 출가의 길을 걷은 벗의 소식이 아득해진지 몇 해가 되었습니다.

벗에게 그리움을 담아 엽서 한 장을 썼습니다.
출가할 때 벗은 지금 떠나는 길인데, 함께 가겠느냐고 물었습니다. 그 때 저는 교사의 길이 좋다며, 떠나는 벗에게 큰 깨달음이 함께 하길 빌었습니다.
길을 걷다 눈빛 서늘한 비구니 스님을 뵈는 날이면 어느 절집에서 긴 수행의 길을 걷고 있는 벗을 위해 한 잔을 앞에 두고 차를 마십니다.

‘성불하십시오. 스님’
‘깨달음을 이루십시오. 벗이여’

벗이 가는 길에 맑고 향기로움이 가득하기를 내내 기원하면서 마시는 차에서는 문득 향내음이 스칩니다.

날씨가 무덥습니다. 건강에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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