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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탐방

청초호 갯배에 흐르는 <가을동화>와 아바이 마을


준서는 잠깐 구경 좀 하겠다며 중앙동에서 아바이 마을로 가는 갯배를 탄다. 그가 탄 갯배가 청초호 중간쯤에 갔을 때 노란 우산을 받쳐 든 은서의 모습이 보인다. 준서와 반대방향의 갯배를 탄 은서. 두 사람이 탄 갯배는 안타깝게도 서로 스쳐 지나간다. 기린처럼 슬픈 눈망울을 가진 그녀. 흑단처럼 찰랑이는 머릿결에선 슬픔과 가난, 회한이 은방울꽃의 향기처럼 퍼진다. 준서는 지나가는 갯배에서 가여운 은서의 모습을 발견한다. 두 사람이 탄 갯배가 크로스 하는 사이 정일영의 Reason이 잔잔하게 흐른다.

‘내게서 그대는 사라져선 안 되는 빛이었음을 아나요.
그대가 떠나면 나의 모든 세상도 사라진다는 걸 잊지 말아요.’

속초의 청호동에 가면 세칭 ‘아바이 마을’이라고 불리는 허름한 동네가 하나 있다. 동해와 청초호 사이에 섬처럼 떠 있는 이 마을은 70년대 대도시의 골목길 풍경과 비슷하다. 금이 간 시멘트 골목길 양 옆으로 간잔지런하게 늘어서 있는 키 작은 블록 담들. 대문의 색깔은 주로 파란 색이며 군데군데 페인트가 벗겨져 있다. 그리고 담장의 낡은 쇠창살에는 흰 운동화나 오징어, 혹은 가오리가 바닷바람을 받으며 무표정하게 말라가고 있다. 담벼락에 채색되어 있는 아이보리 빛깔이 붉은 석양을 받으면 연주황색으로 변해가는 아바이 마을.




아바이 마을은 함경도 출신의 실향민들이 전쟁이 끝난 후 모여서 형성된 마을이다. 실향민들이 이북의 문화와 언어를 간직하면서 살던 이곳은 지난 2000년 KBS에서 방영된 <가을동화>로 인해 일약 전국적인 관광지가 되었다.

어릴 때는 남매였지만 어른이 되어서는 연인이 된 두 남녀의 사랑을 애틋하게 묘사한 ‘가을동화’. 의붓 남매의 사랑이라는, 한국인에게는 무척 낯선 테마를 과감하게 선보인 이 드라마는 수많은 여성 팬들의 심금을 울린 드라마이다.

매스미디어는 참으로 대단한 위력을 발휘한다. 그토록 조용하던 아바이 마을에 국내인은 물론이고 일본인과 중국인, 동남 아시아인들도 찾아오니 말이다. 아바이 마을은 이제 전국적인 관광지가 되었다. 그리고 이 관광지에는 은서네 슈퍼와 갯배라는 훌륭한 보조 장치도 톡톡히 한 몫을 하고 있다. 특히 갯배는 이제 속초를 대표하는 문화상품으로까지 발전하였다. 오죽했으면 속초시에서 전국 갯배 끌기 대회를 다 개최할까.




지난 50년대부터 아바이 마을 주민들을 속초 시내로 실어 날랐던 갯배는 청호동과 중앙동을 잇는 훌륭한 교통편이었으며 지금도 실용적인 교통편의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청초호를 에둘러서 시내로 가는 길보다는 갯배를 타는 것이 훨씬 빠르기 때문이다.

‘갯배’는 표준어는 아니다. 일종의 토속어인데 엄밀하게 말하면 소형 바지선이라고 해야 맞다. 이 갯배를 운항하기 위해서는 와이어를 갈고리로 잡아 당겨야 한다. 이 와이어는 아바이 마을 쪽에 연결된 채로 청초호 밑바닥에서 갯배 위를 지나 시내 쪽으로 연결되어 있다. 갯배에는 사공이 한 명 있다. 그러나 배에 탄 손님들이 자발적으로 갈고리를 들고 사공과 함께 와이어를 잡아당기는 것이 인상적이다.




은서네 슈퍼는 아바이 마을의 삼거리에 위치하고 있다. 은서의 생모가 간단한 잡화를 팔던 곳으로 나왔는데, 현재는 은서네 슈퍼라는 커다란 간판으로 관광객들의 눈길을 끌고 있다. 그리고 이 은서네 슈퍼에서 청초호 쪽으로 가는 골목길로 접어들면 송승헌과 송혜교의 큼지막한 눈망울을 만날 수 있다. 곧 이어 나타나는 갯배 선착장. 나이 지긋한 어른 한 분이 주인공들의 얼굴이 새겨진 승선권을 팔고 있었다. 단돈 200원. 아마 교통요금으로는 전국 최저를 자랑할 것이다. 또한 도선 요금으로도 전국 최저에 해당될 것이다.

부산 영도의 대평동과 자갈치 시장을 오가는 도선의 요금은 900원이고, 정선의 아우라지를 건너는 조막배의 승선 요금은 500원이니 갯배의 승선 가격이 얼마나 저렴한지 알 수 있다. 그러나 영도의 도선은 운항 시간도 제법 길고 통통배라서 배타는 재미를 만끽할 수 있으며, 정선의 아우라지 조막 배는 사공이 긴 장대를 이용하여 정성껏 실어 날라 준다. 그래서 갯배는 저렴한 요금을 미끼로 손님에게 노동을 요구하는 괘씸한(?) 도선이다.




그래도 순박한 사람들은 아무런 불평이 없다. 시장 통 아주머니가 생선이 가득 실린 리어카를 갯배에 실을라치면 모든 사람들이 합심하여 아주머니를 도와준다. 또한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갈고리를 쥐고서 와이어를 끌어당긴다. 거기에는 남녀가 따로 없고, 노약자가 장유가 따로 없다. 이렇듯 갯배에는 공동체 생활에 젖은 우리 민족의 소중한 문화가 깔밋하게 배어 있는 것이다.

갯배를 홀로 타본다. 그리고 동해의 푸른빛을 가엽게 머금고 있는 청초호의 혼탁한 물도 쳐다본다. 청초호와 동해가 만나는 언저리에서 작은 바람이 불어오고 가을동화의 삽입곡이었던 ‘로망스’가 그 바람에 실려 온다. 르네 끌레망이 연출한 ‘금지된 사랑’의 라스트 신에서 시리도록 가슴을 울렸던 그 아름다운 기타 선율이 들려온다. 은서와 준서의 금지된 사랑도 그 선율에 묻혀서 청초호에 실려 온다. 가을동화는 갯배와 아바이 마을에 갈옷의 황토 빛 물처럼 지워지지 않는 흔적을 남긴 것이다. 그들의 아름답지만 비극적인 사랑의 흔적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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