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계적인 육종학자 우장춘 박사 기념관
여름 하면 가장 많이 생각나는 과일이 하나 있다. 녹색 바탕의 축구공 같은 몸통에 검은 줄이 화선지의 먹처럼 번져 있는 '수박'이 바로 그것이다. 수박을 영어로는 '워터멜론(water-melon)'이라고 하며, 한자어로는 '수과(水瓜)'라고 하는데,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수박은 물이 참 많은 과일이다.
녹색의 몸통을 지닌 수박에 큰 부엌칼을 찔러서 아래로 슬쩍 힘을 주면, 잘 익은 수박일수록 두 쪽으로 발랑 나가 떨어지게 마련이다. 쩍 벌어지는 소리를 내며 두 개의 반원으로 분리되는 수박은 붉디붉은 속살을 사람들에게 유감없이 시위한다. 그리고 연이어 터져 나오는 수박향의 신선함이, 맑은 물 속의 은어를 닮은 향이 분수처럼 코끝을 자극한다.

어머니께서 먹기 좋으라고 여러 쪽으로 분리한 수박을 한 입 베어 물면, 입 안에는 어느새 수박의 물이 울컥 고이게 된다. 그 달고 시원한 수박을 먹으면 정말 둘이 먹다가 하나가 죽어도 모를 정도이지 않던가.
그런데 이렇게 맛있고 달디 단 수박에게는 결정적인 결함이 하나 있다. 수박의 과육에 촘촘히 박혀 있는 검고 윤기 나는 타원형의 씨가 그것인데, 어쩌다가 과육과 함께 오도독 씹히는 수박씨가 왜 그리도 미운지. 그래서 일단의 사람들이 이놈의 수박씨를 없애자는 발상을 하게 되었고, 그 생각이 발전하여 육종학자들은 '씨 없는 수박'이라는 것을 만들게 되었다.
어릴 때, 우리네 교과서를 보면 이 '씨 없는 수박'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그러면서 우장춘 박사님이 씨 없는 수박을 세계 최초로 재배한 것처럼 나오는데, 유감스럽게도 이는 틀린 말이다. 우장춘 박사가 고국에 건너와서 '씨 없는 수박'을 재배한 년도는 1952년인데, 이미 1943년에 일본인 기하라 히또시가 '씨 없는 수박' 재배에 성공했던 것이다.
우장춘 박사가 '씨 없는 수박'을 재배한 이유는 당시 농민들에게 육종에 대한 눈을 뜨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즉, 유전자 조작을 통해 인위적으로 '씨 없는 수박'을 만들 수 있는 근대적인 기술을 보여주기 위함이었다.

우장춘 박사는 1898년 망명정객 우범선과 일본 여성 사카이 나카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런데 우범선이라는 인물의 이력이 자못 특이하며, 그로 인해 우장춘은 어릴 때부터 극심한 가난과 정체성의 혼란을 겪기도 했다.
우범선은 구한말의 대표적인 친일파였다. 그는 명성황후 시해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였으며, 명성황후가 살해된 을미사변 후 일본으로 망명하여 재기를 꿈꾸었다. 그러나 1903년 경 독립협회 부회장을 지낸 고영근에게 암살되고 말았으며, 이후 우범선은 국모살해범으로, 친일 매국노의 전형으로 치부되었다.
이런 이유로 어린 우장춘은 친일 매국노의 자식이라는 손가락질과 극심한 가난에 시달렸다. 게다가 일본인에게는 조선인이라는 멸시까지 받으면서 성장해야 했다. 한마디로 불우한 시절의 연속이었던 셈이다.
그러나 우장춘 박사는 이런 불우한 환경에 굴복하지 않고, 육종학에 대한 꿈을 일구어갔다. 그의 좌우명은 '밟혀도 꽃이 피는 길가의 민들레처럼'이었다고 하는데, 이중 삼중의 고통을 겪으면서도 학문에 대한 열정을 포기하지 않은 입지전적인 인물이었다.

우장춘 박사는 도쿄제국대학 부설 전문학교 농학실과를 졸업한 뒤, 일본 농림성 농사시험장에서 일하면서 체계적인 육종학 연구에 전념하였다. 그는 1936년 다윈의 <진화론>을 수정한 <종의 합성론>으로 도쿄제국대학에서 농학박사 학위를 받았는데, 이 종의 합성론은 우장춘 박사를 세계적인 유전학자로 만든 유명한 이론이었다.
우 박사는 이제 일본에서도 알아주는 육종학자로 자리를 굳건히 지키게 되었는데, 1950년에 조국에서 그를 필요로 하자 일본에서 쌓아올린 모든 명성과 명예를 버리고 귀국하였다. 귀국 후 그는 한국농업과학연구소장, 농업재건임시위원회 위원 등을 지내면서 국내 육종학 양성에 혼신의 힘을 기울였던 것이다. 우장춘 박사는 1959년 사망하였으며, 현재 그의 묘지는 수원에 있는 농촌진흥청 경내에 자리 잡고 있다.
우장춘 박사는 척박한 국내 육종학계를 상당한 수준으로 끌어올린 과학자였다. 그래서 그의 탄신 100주년을 맞아 1999년 10월에는 그가 소장으로 있던 원예시험장 자리에 그를 기념하는 아담한 기념관이 개관하게 되었다.
기념관은 대지면적 300여 평에 연면적 73평 규모의 지상 2층 철근 콘크리트 구조로 이루어져 있는데, 특히 외벽이 노출 콘크리트 마감으로 처리한 점이 특이하다. 기념관 안에는 그가 쓰던 유품과 그에 관련된 각종 사진과 자료가 1, 2층으로 나뉘어 전시되어 있다. 특히 '씨 없는 수박'의 재배법이 사진과 함께 자세히 게재되어 있어 관람객들로 하여금 감탄을 자아내게 한다.
특히 마당에는 자유천이라고 하는 작은 우물이 하나 있는데, 이 우물에는 우 박사와 그의 어머니에 관계된 가슴 아픈 사연이 하나 전해져 온다. 우장춘 박사는 일본인 어머니를 지극히 그리워하였는데, 그가 국내에 있는 동안 그만 어머니가 돌아가셨다고 한다.

그러나 우장춘 박사는 어머니의 임종조차 지키지 못했다. 그가 일본으로 돌아가서 다시 국내로 오지 않을 것을 염려한 정부에서 여권을 발급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우 박사는 어머니의 죽음조차 지키지 못한 불효를 저지르게 되었던 것이다.
당시 원예시험장 마당 한 구석에는 물을 공급하는 우물이 하나 있었다고 하는데, 우 박사는 그 우물을 자유천(자애로운 어머니의 젖이 솟는 샘)으로 명명하면서 평소 어머니에 대한 애틋한 그리움을 달랬다고 한다.
부산 동래구 미남로터리에서 식물원으로 가는 도로 중간쯤에 있는 우장춘 박사 기념관은 오늘도 오가는 사람들을 무심히 바라보고 있다. 그러나 조국의 육종학 발전을 위해 헌신한 그의 정신은 오롯이 남아 있어, 지나가는 사람들의 발길을 붙잡고 있다. 다시 한 번 이 글을 빌어 우장춘 박사님에게 경의를 표한다. 고이 잠드시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