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 옆 강둑에 달맞이꽃이 아침나절 환하게 꽃등을 켜고 있습니다. 흐린 날씨 덕분에 그 환한 웃음을 볼 수 있어 즐거운 날입니다. 달맞이꽃은 그 이름처럼 저녁 무렵 달이 떠오를 때면 피어나는 야생화입니다. 우리나라 토종 야생화는 아니고 귀화 식물인데 키가 멀대처럼 커서 아기자기한 맛은 없지만 여름 저녁 무렵에 피는 동그랗고 노오란 꽃은 수줍은 소녀 같아서 참 어여쁩니다.
특히 제가 좋아하는 달맞이꽃은 여리게 안개비가 내린 아침에 보는 것이다. 햇살이 비치면 금새 시들어버릴 꽃이 안개비에 젖어서 애처롭게 피어 있는 모습은 처연하게 아름다워서 가슴이 두근거립니다. 그 유혹에 못 이겨 노란 한 송이 꺾어들면 고운 향내가 코끝을 간지럽힌다. 맑고 청아한 향기입니다.
세상에는 수많은 꽃이 피고, 그 꽃마다 꽃내음도 참 다양합니다. 모란은 현란한 색채와 크기에 어울리게 숨이 막힐 듯 짙은 향기로 다가서고, 흰색의 꽃으로 피어 노란꽃으로 지는 금은화꽃은 고운 세모시 한복을 입은 전통 미인처럼 다정하고 따뜻한 향기로 주변을 가득 채우고, 저녁 무렵 시골처녀처럼 수줍게 피어나는 분꽃은 여릿여릿 처음 화장한 처녀에게서 나는 분내처럼 묘하게 마음을 당깁니다.
젊은 연인처럼 상쾌한 라일락꽃 향기는 오월의 교정에서 바람결에 날려오면 가장 어울립니다. 새하얀 신부처럼 달콤한 향기가 나는 치자꽃이 피면 한 송이 따서 머리에 꽂고 님마중 나가고 싶어지게 만듭니다. 가을날에 노오랗게 피어나는 감국은 머리가 개운하고 마음이 시원한 내음 때문에 따서 말렸다가 베개 속으로 많이 사용합니다. 소녀처럼 맑은 모습으로 피는 찔레는 귀엽고 앙증맞은 사랑스러운 몸내음으로 다가서지만, 진홍의 해당화는 그 모습만 보아도 유혹될 듯한 미인의 눈웃음같이 황홀합니다.
꽃이 있는 세상은 참 아름답습니다. 그리고 예쁘지 않은 꽃을 본적이 없는 것 같습니다. 모두가 그 나름의 향기와 빛깔로 누가 보아주지 않아도 스스로 가장 아름다운 모습으로 피어납니다. 우리의 인생도 그렇다고 저는 믿습니다. 누가 보아주지 않아도 모두가 자기만의 향기로 피었다가 스스로 작은 열매를 거두어주고는 다시 사라지는 것이 아닐까요.
저도 그렇게 살고 싶습니다. 작은 풀꽃처럼 제 삶이 척박한 땅에서 누가 보아주지 않아도 최선을 다해 뿌리내리고 최선을 다해 열매 맺고 그리고 조용하게 사라지고 싶습니다.
드디어 기다리고 기다리던 방학을 하는 날입니다. 저마다 다른 향기를 풍기는 아이들의 얼굴마다 환한 웃음꽃이 방글방글 피어나고 있습니다. 청소하는 밀대에 힘이 들어가고 발걸음에 바람 소리가 납니다. 기분이 마냥 날아다닐 것 같은 모양입니다.
사실 방학해도 특별한 계획이 있는 것도 아니면서 왜 그렇게 좋은 것일까? 이유가 없습니다. 그냥 좋으니까요.
3학년 교실을 보니 애리랑 예은이가 구석에 모여서 뭔가를 열심히 보고 있습니다. 순정만화를 돌려보고 있습니다. 얼마나 열심히 보는지 내가 옆에서 같이 보는데도 모르고 읽고 있다. 피시식 웃음이 나옵니다. 옛날 중학교 시절에 돌려보았던 '테리우스'와 '안소니' 중 누가 더 멋진가 하고 친구들과 내기까지 했었던 만화 '캔디'가 생각났습니다.
유민와 루터는 체스판을 머리를 맞대고 두고 있습니다. 동우는 다트를 던지다 선생님께 들켰습니다. 담임선생님은 이렇게 던져야 한다고 과녁을 향해 폼재면서 던졌는데 엉뚱하게 출입문에 꽂혔습니다.
"실력이 줄었나! 왕년엔 잘 했는데…."
1학년 장난꾸러기들은 그저 와글와글 떠들고 뛰어다닙니다. 은실이는 "선생님 방학 잘 보내세요!"하고 방학식도 하기 전에 인사를 하고 다닙니다.
귀여운 녀석들! 교사인 나도 이렇게 좋은데 학생들이야 말해 무엇하랴? 즐거운 일은 즐거운 일인 것입니다!
뜨거운 여름을 지내고 다시 만나면 아이들은 조금씩 더 여물어 있을 것입니다. 키가 쑤욱 자란 아이부터 집안일을 돌보아서 까만 얼굴로 나타나는 착한 녀석도 있을 것이고, 여름 내내 낚시대를 들고 강가를 돌아다녀서 시커먼 팔다리와 모기자욱을 자랑하기도 할 것입니다. 다른 향기로 다른 꽃으로 피어날 아이들의 방학이 시작되는 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