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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소식

멈추어진 시간 -하루(남북교육자 상봉 후기)

6.15 공동선언실천을 위한 남북교육자 상봉모임(‘07. 8. 6 ~ ’07. 8. 9) 북한방문 후기는 남․북한의 정치체제의 우월성이나 삶의 질을 비교하여 어떠한 쪽이 우수하다는 논리를 펴자는 것은 결코 아니다. 우리 민족이 분단으로 60여 년이 지난 현재의 시점에서 북한의 실상을 교육자이며 한국교육신문 리포터로서 양심에 부끄러움 없이 진솔하게 보고 느낀 점을 기술함으로써 오늘의 현실을 독자들의 판단에 맡기려고 한다. 될 수 있으면 편향된 시각으로 보지 않으면서 보고, 듣고, 행동하면서 생각하고 느낀 점을 그대로 표현하려고 노력은 하였지만 원래 표현력이 부족하고 아둔한 사람이라 제대로 파악을 하지 못하고 기록을 할 수 있음을 양지해 주기 바란다.

북한 순안공항에 내리자마자 한없이 우리는 기다려야만 했다. 매미 소리만 요란한 가운데 인적이 드물고 한가한 읍 소재지의 역을 연상케 한다. 언제까지 기다려야만 하는지 불안해하며, 누군가 “무엇 때문에 계속 기다려야 하는지 답답하구먼?”하는 소리가 들렸다. 이미 북한을 몇 번 다녀왔다는 분이 이 곳은 가끔 이러한 일이 있다며 귀띔을 한다. 우리가 공항에 첫발을 내딛는 순간 외부인은 아무도 없고 오로지 우리만 도착한 것임을 알았다.

멀리 보이는 풍경은 베다만 풀들과 을씨년스럽게 서 있는 똑 같은 모양의 회색의 연립주택이 산 중턱에 단지를 이루며 여기 저기 보였다. 이 지구상에 몇 남아있지 않은 공산주의 국가에 첫발을 내디딘 탓일런가. 모든 것이 생소해 보였다. 같은 나라 같은 민족의 땅이 이렇게 생소한 느낌을 갖는다는 것은 60여 년 이상을 분단된 땅에서 살아왔기 때문이리라.

한 시간 이상을 지체하여 일단 순안 공항에서 평양으로 출발을 하게 되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일정에 없었던 만수대 참관을 요구하면서 헌화하는 문제로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하여 그렇게 시간이 지체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평양으로 들어오면서 본 산야는 남쪽의 풍경과 별다를 것이 없었다. 간혹 들에서 일하는 사람 외에는 차가 거의 다니지 않는다는 점, 산에 나무가 별로 없다는 점, 멀리 보이는 집들이 회색의 우중충한 건물이라는 점, 옷을 입고 다니는 모습이 옛날에 볼 수 있었던 옷차림과 빨지산 전투복의 옷차림을 하고 다니는 사람이 가끔 눈에 띤다는 점이다.

사진을 찍고 싶어 만지작 그렸지만 함께 탄 안내원들은 사진을 찍도록 허락한 곳에서만 사진을 찍으라고 한다. 괜히 사진을 찍다가 언쟁이라도 붙으면 곤란할 것 같아서 아무소리 안하고 생소한 환경에 거위가 목을 빼듯이 엉거주춤한 자세로 여기저기 새로운 건물과 사람들의 모습을 정확히 기억하기 위해 눈을 뗄 수가 없었다.

평양시내로 들어오는 순간에 거리 곳곳에 김일성 수석과 김정일 국방위원장 부자에 대한 붉은 색의 찬양 글귀가 곳곳에 세워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개선문을 지나 금수산 궁전, 김일성 대학, 천리마 동상, 만수대에 이르기까지 하나라도 놓칠세라 귀담아 듣기 바빴다. 그것도 북한에 여러 번 다녀왔다는 분의 설명을 흘러 들으며 기록도 하고 싶었지만 옆에 앉아 안내하는 선생의 신경을 건드리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 도로 주위에 간판은 주로 영광거리양복점, 역전식료품상회, 역전우동 집, 평남면옥, 영광책방, 국수집, 평양 맥주 집 등이 간간히 보였지만 남한의 간판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으며, 길가에 음료대가 있어서 판매를 할 수 있도록 하고 있으나 판매하는 모습은 볼 수가 없었다.

특히 시내에 버스대신에 무궤도와 궤도 전차를 볼 수 있어서 신기했다. 많은 사람들이 더위에 빽빽이 타고 다니는 모습이 타임머신을 타고 먼 옛날로 되돌아간 듯 하였다. 퇴색된 2층 버스와 줄서있는 사람들의 모습, 장군의 아들 영화 장면을 이곳에서 실제로 보는 듯 하여 신기함이란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경이로운 장면이었다. 신기하게도 가로수가 수양버드나무로 되어 있는 곳과 오랜 만에 신작로 가에 서 있던 미루나무를 볼 수 있었으니 그야말로 멈추어진 시간 먼 옛날로 돌아간 듯 하였다. 말로만 듣던 만수대에 참배 문제로 양측의 신경전으로 예민한 상태였기에 어딘지 모르게 긴장이 되면서, 멀리서도 김일성 주석의 동상의 윗부분을 보면서 어마어마한 규모에 위축이 되었다. 아까부터 오락가락하던 비는 이제 천둥과 번개가 치면서 더욱 불안한 마음을 재촉하는 가운데 버스로 가는 길은 바로 만수대 옆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되어있다.

우리는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안내원들의 눈치를 보아가며 사진 찍기에 여념이 없었다. 실무책임자인 듯한 신사복을 입은 잘생긴 젊은이는 꽃다발을 3개를 가지고 와서 헌화하기를 권유하고 있었다. 모두가 마음은 위축이 될 되로 되어 있는 상태에 비바람이 휘뿌리면서 왜 그리 번개와 천둥소리는 요란한지 평양 시내의 넓은 분지가 다 아래로 내려다보이는 듯 하였다. 안내원들은 나중에 사진 찍을 시간을 줄 테니 무조건 어마어마한 크기의 주석 동상 앞으로 모이기를 독려하고 있었다. 헌화문제로 우왕좌왕하면서 지체하는 순간에 우리는 김일성 주석 동상 옆에 군상들과 동상을 배경으로 몰래 찍는 사진에 정신이 빠져서 널따란 동상의 앞에 올라서는 순간 안내원들이 의도한 대로 헌화가 이루어지지 않았는지 바로 버스에 타라며 독촉하는 바람에 쫓기듯 버스에 타고 말았다. 분위기는 어색하였고 서로 간에 알 수 없는 거리감을 느끼며 양각도 호텔로 향하게 되었다.

평양역을 지나며 양 옆으로 공원에서 많은 사람들이 휴식을 취하며 끼리끼리 모여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내 어릴 때 볼 수 있었던 풍경이며 옷차림 또한 비슷하였으니 옛날로 되돌아간 여행을 하는 기분이었다. 건물은 똑 같이 회색빛과 시멘트 블럭과 벽돌의 무늬가 쌓여진 상태로 길가에 큰 건물들로 이어져 있으나 간판이나 안내판이 없기에 무엇을 하는 곳인지 몰랐으나 이 곳이 바로 주택이라고 한다. 대동강과 보통강에는 수양버드나무 가지가 휘영청 늘어져 있어서 동양화에서 볼 수 있는 정겨운 풍경이기에 정이 많이 끌렸다. 특히 아름다운 보통강 가에서 고기잡이 하는 사람들이 정겨움으로 다가왔다.

우리가 숙소를 정한 곳은 양각도에 위치해 있는 양각도 호텔이다. 이 양각도는 섬의 모습이 양의 뿔과 흡사하여 양각도라 하며, 호텔은 47층으로 큰 규모의 호텔임을 알 수 있었다. 식사를 하기 전에 35층 18호실에 여장을 풀고 밖을 내다보니 대동강과 어우러진 풍경이 너무나 아름답다. 북한이 세계 최고층 빌딩 건설을 목표로 1987년에 착공해 1992년 김일성주석의 80회 생일에 맞추어 완공하려했던 유경호텔이 보인다. 자금, 기술 부족으로 방치된 지금은 콘크리트가 떨어져나가 철근이 노출되어 부식이 진행되고 지반까지 내려앉아 붕괴 위험에 처해있다 한다. 지상 330m 105층, 지하 3층의 유경호텔이 피라미드와 같은 거대한 모습을 드러내고 그 왼쪽으로 쌍둥이 건물(고려호텔?)과 높은 빌딩 숲으로 큰 건물들이 많이 보였지만 길에는 차들이 별로 통행을 하지 않는다. 아래쪽으로 하얀 둥근모양의 건물 모습이 아스라이 보이는데 이곳이 그 유명한 능라도 경기장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점심식사를 하고 우리는 만경대 고향집을 방문하게 되었다. 만경대가 가까워지자 안내원은 ‘만경대는 만 가지 경치를 볼 수 있다고 해서 만경대'라며 김일성주석의 항일투쟁에 대한 설명을 해주었다. 김일성 주석은 14살 때 1925년 나라가 되찾기 전까지 다시는 고향땅을 밟지 않겠다며 만경대 고향집을 떠났다고 하며 이를 광복의 천리길이라 한다고 했다. 만경대 고향집은 김일성 주석이 살았던 곳으로 성역화가 되어 있었다. 아름다운 산수에 아기자기한 정원 속에 초가집으로 정갈하게 정리가 잘 되어 있었다. 방에는 조부모와 부모의 사진이 게시되어 있고, 안방과 건넌방에 가재도구도 그대로 잘 보존되어 있어서 당시의 생활모습을 알 수 있으며 바깥채에는 농기구와 생활용품들이 가지런히 정리가 되어 있었다. 사립문 밖에서 사진을 찍으며 주위의 풍경을 둘러보니 너무나 아름다웠다. 고향집 앞의 넓은 정원과 집 뒤의 백양나무 숲이 평온한 마음을 가지게 하며 그야말로 전형적인 시골의 고향집에 온 듯 하였다. 가까운 곳에 만경대박물관에 들려 김일성 주석의 항일운동 업적을 기린 곳에 들려 안내원의 이야기를 들은 후 우리는 모란봉제일중학교로 향하였다.

모란봉제일중학교의 교육과정은 오전에는 정규수업을 하고 오후에는 방과후 활동을 한다고 한다. 운동장에서 배드민턴과 농구를 하는 학생들이 여기저기서 반갑게 손을 흔든다. 김영식 여자 교장선생님의 안내로 복도와 교실 그리고 수업하는 장면을 참관하게 되었다. 현관으로 들어가서 복도를 지나가는데 어두웠지만 불을 켜지 않아서 답답하였다. 아마 전력을 아끼기 위함이라는 것을 인식하고 어두운 상태로 복도를 따라 2층으로 올라갔다. 나는 복도에 환경 정리한 모습과 교실의 모습을 사진 찍기에 여념이 없었다. 교실은 남한의 교실보다는 좁은 편이고 작았다. 앞부분에 칠판위에는 김일성과 김정일 부자의 사진이 게시되어 있고, 뒤쪽에는 환경게시물이 진열되어 있다. 책상은 2인용 책상으로 한 반에 학생들이 25명 정도 수용을 한다고 한다.

한 교실에 들어가니 심미순, 신효순 학생의 책상과 의자가 놓여 있으며, 책상위에는 영정과 졸업장이 놓여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모란봉제일중학교 명예학생으로 졸업장을 수여 하고, 뒤편에는 미순, 효순 양의 뜻을 이어 받아 조국을 위해 더욱 열심히 공부하자는 내용으로 구조화 하여 환경정리를 해 놓은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과학 공부하는 모습과 영어 공부하는 모습을 보는 중에 그만 나가자는 독촉에 사진을 몇 장 찍기가 바쁘게 강당으로 가게 되었다. 그곳에는 가운데 부분의 좌석을 비워놓은 채 양쪽으로 평양에서 오신 교육자들이 자리를 하고 있었다. 서로 들어오면서 환영 박수를 치면서 제자리에 앉게 되었다. 강당의 상단에는 남한의 한국교총회장과 수석부회장, 전교조 위원장과 부위원장, 북측에서는 조선교육문화직업동맹(교직동) 북측대표 김성철 중앙위원회 위원장과 모란봉제일중학교 김영식 교장 그리고 민화협 위원 등이 강당의 상단에 배치하여 앉았다.

북측 대표인 김성철 조선교육문화직업동맹 중앙위원회 위원장은 연설을 통하여 6·15 통일시대 교육자로서 나라의 자주 통일과 민족교육발전을 위한 교단을 굳건하게 지켜가고 있는 남녘의 여러 교직원들에게 따뜻한 인사를 드린다며 북남 교육단체 사이의 연대를 더욱 공고히 하는 중요한 계기로 삼자고 강조하였다. 모란봉제일중학교 김영식 교장의 환영사 한국교총회장과 전교조 위원장의 답사 순으로 이어졌다. 실질적인 6.15공동선언 남북교류 교육자 상봉 실천을 위한 다짐대회가 이루어진 후 모란봉제일중학교 학생들의 공연을 보는 순서로 이어지게 되는 것이다.

남측 대표인 이원희 한국교총 회장은 금년 11월 한국교총 창립 60주년 전국교육자대회에 북측 김성철 교직동 위원장을 비롯한 북측 교육 동지들을 정식으로 초청한다면서 평화 공존, 화해 협력을 통한 통일을 앞당기는 가장 확실한 길은 교육에 있다고 역설하면서 다음 세 가지 것을 제안하였다. 분단의 벽을 뛰어 넘는 민족 동질성 회복을 위하여 남북의 교육의 교류가 가장 우선적으로 실천되어야 한다. 따라서 분단의 벽을 뛰어 넘는 민족 동질성 회복을 위하여 첫째, 교원 단체교류를 정례화하고, 둘째, 남북 교육자들이 참여하는 학술 모임을 만들어 교류하며 , 셋째, 남과 북의 학생들이 수학여행 등을 통하여 교류 할 것을 제안하였다.

정진화 전교조 위원장은 분단 이후 최초로 평양에서 남북의 교육자 대표들이 모여서 교육자 상봉모임을 갖는 것은 그 동안 6·15 공동 수업 등 꾸준하게 노력해왔던 성과로, 우리 아이들의 미래를 걱정하던 교육자들은 전쟁의 위협을 몰아내고 민족의 단합과 화해를 교육을 통해서 이루어야 하는 책무를 다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이어서 학생들의 특기적성 발표는 우리가 상상하는 이상의 재주를 선보였다. 우리민족 고유의 노래와 춤과 율동은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기에 충분하였다. 너무나 잘 맞추어진 율동과 노래 춤은 오히려 안쓰러움마저 들며 가슴 저 깊숙이에서 밀려 터져 나오는 용광로와 같은 알 수 없는 뜨거움이 요동을 칠 때, 공연의 마지막 인사를 하는 학생이 6.15 공동선언을 실천하여 남북이 하나 되는 조국통일을 염원하는 소망을 말하며, 눈물을 흘리는 것을 보고 남북의 절실한 통일이 가슴에 와 닿았지만, 어찌 나이어린 중학생이 6.15 공동선언 실천으로 통일의 갈망을 눈물로 호소하도록 하게까지 되었는지 마음 한 구석에 애달픈 마음은 오히려 쓰라린 아픔으로 다가왔다. 공연이 끝난 후 오랜 동안 열열한 박수를 끝으로 남측 교육자들이 강당을 빠져나오며 북측 교육자들과 악수를 청하며 물러나게 되었다. 그들은 강당 안의 더위에도 불구하고 자세의 흐트러짐도 없이 끝까지 관람하는 태도가 거의 부동자세와 다름이 없었다. 우리는 땀을 닦고 사진을 찍으며 들고 들어온 물도 마시고, 옆 사람과 잡담을 하며 하는 행동을 보고 아마 그들이 보는 시각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저녁 만찬은 양각도 호텔 만찬장에서 서로 북한 민화협 위원들과 함께 하게 되었다. 만찬장 앞에 금강산 그림이 너무 멋이 있어서 사진을 찍기에 바빴고 만찬장의 앞좌석은 모란봉제일중학교 강당에서와 같이 자리 배치가 되어 있었다. 환영회의 자리였기에 서로가 음료를 권하며 같이 간 일행들도 서로 인사를 나누고 즐거운 시간을 가지게 되었다. 그 자리에서 북측에 함께하는 안내원들이 민화협 위원들이었음을 알게 되었고, 북측의 현장 교원들은 함께 하지 않고 있음을 깨달았다. 서비스하는 안내양들이 친절하고 줄지어 입장과 퇴장을 하는 모습이 이채롭다. 기분이 너무 좋아 마신 술에 얼근히 취하여 숙소로 돌아온 시간이 열한 시가 넘었다.

분단된 이후 언론으로만 듣고 남북관계에 관한 교육을 교실현장에서 실시하였던 교육자가 그야말로 천우신조의 기회에 북한을 방문하게 되어 실제로 보고 깨달을 수 있도록 배려해 준 기회에 감사드리며, 우리 민족 모두가 마음대로 왕래할 수 있는 통일의 그날이 하루빨리 이루어지길 간절히 기원하면서 잠을 청하였다. 특히 북한에서 많은 것을 보고 느낀 점을 2세 교육으로 남북화합의 밀알이 될 수 있도록 배려해 주신 하느님의 은총에 감사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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