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4.19 (토)

  • 구름많음동두천 17.0℃
  • 흐림강릉 12.9℃
  • 서울 17.9℃
  • 구름조금대전 23.1℃
  • 구름조금대구 21.9℃
  • 구름조금울산 22.2℃
  • 구름많음광주 20.9℃
  • 흐림부산 17.9℃
  • 구름많음고창 20.5℃
  • 구름많음제주 17.6℃
  • 구름많음강화 15.6℃
  • 구름조금보은 20.5℃
  • 구름많음금산 22.9℃
  • 흐림강진군 18.7℃
  • 맑음경주시 23.5℃
  • 구름많음거제 17.2℃
기상청 제공
상세검색

문화·탐방

불멸의 용사들, 경상좌수영성의 25의용단을 찾아

임진왜란이 발발한 후 일본군과 조선군이 최초로 벌인 전투는 부산진성 전투였다. 당시 부산진성의 책임자는 정발장군이었으며, 일본군의 수장은 고니시 유키나가였다. 고니시는 18,700명의 병력과 700척의 병선으로 이루어진 제1군을 이끌고 1592년 4월 13일 부산포로 쳐들어 왔다.

당시 부산진성에는 채 1,000명이 되지 않는 병력이 있었으며, 민호은 겨우 300여 호에 불과했다. 누가 보더라도 상대가 되지 않는 싸움이었다. 그러나 정발 장군과 부산진의 주민들은 죽기를 각오하고 싸웠으며, 결국 모두 장렬히 전사하고 말았다. 부산진성을 함락한 일본군은 곧 바로 송상현이 부사로 있는 동래성으로 진출하였다. 당시 송상현공은 경상좌도의 병력과 합세하여 일본군과 싸울 계획이었는데, 한심하게도 경상좌도 병사 이각과 경상좌수사 박홍은 왜군의 위세에 지레 겁을 먹고 도망가고 말았다. 그래서 동래성은 고립무원의 상태에서 적의 대군을 맞아 격전을 벌일 수밖에 없었다. 15일 간 상호간에 피를 말리는 격전이 벌어졌고, 마침내 송상현공을 위시한 대다수의 성민들이 전사한 가운데 일본군은 동래성을 함락하고야 말았다. 이후 일본군은 승승장구하면서 서울과 평양까지 단숨에 점령했으며 조선은 7년간의 전란에 휩싸이게 된다.




이 과정에서 정말 어이없고 화가 나는 대목은 경상좌수사 박홍이란 자의 행태였다. 경상좌수사는 부산을 비롯한 경상도의 해안 방어를 담당하는 총지휘관이었다. 그래서 경상좌수영성은 경상도 인근에서 가장 막강한 해군력을 보유하고 있는 중요한 성이었다. 그런데 임진왜란 징비록에 의하면 <4월 13일 왜병이 국경을 침범해서 부산포를 함락하자 경상 좌수사 박홍이 적의 세력이 너무 큰 것을 보고 감히 출병하지 못하고 성을 버리고 도망갔다>라는 기록이 나온다.

박홍은 화살 한 방 쏘아보지도 않고, 무려 73척에 이르는 군함을 자침시키고는 언양으로 도망가고 말았다. 이 과정에서 무려 만 여명에 이르는 수군이 해체되고 말았으며, 일본군은 피한방울 흘리지 않고 수영성을 점령하였던 것이다. 정말 부끄럽고 창피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경상좌수영의 정식 명칭은 경상좌도 수군 절도사영인데, 조선시대 동남해안을 관할했던, 오늘날로 치면 해군함대 사령부에 해당되는 중요한 군영이었다. 오늘날 부산광역시 '수영구'의 명칭이 이 경상좌수영에서 유래되었으며, 이의 흔적이 남아 있는 곳이 바로 수영구 팔도시장을 지나 주택가 안에 있는 '수영공원'이란 곳이다.

수영공원 안에는 수영구의 모든 문화재가 망라되어 있다. 천연기념물인 곰솔나무와 푸조나무가 아름드리 자리 잡고 있으며, 중요무형문화재인 수영야류(43호), 좌수영어방놀이(62호), 수영농청놀이(2호)등을 주관하는 민속예술관이 놀이마당 한 켠에 소담하게 자리 잡고 있다.

특히 눈에 띄는 기념물로써 25의용단이 있다. 이 의용단에는 전란을 맞이하여 장렬히 산화한 무명용사들의 항전 의지가 담겨 있다. 경상좌수사 박홍이 도망가고 난 후, 수영성에 쉽사리 침입한 왜군은 성내 주민들을 무참히 약탈하고 살육하였다. 그래서 이를 보다 못한 성민들이 죽기를 각오하고 7년 동안 유격전을 펼쳐 일본군에게 끈질기게 대항했다고 한다. 의용단은 바로 그 분들을 추모하고자 세운 기념물인 것이다.




전쟁이 끝난 17년 후, 동래부사 이안눌은 당시 항쟁을 펼쳤던 의인 25분을 찾아내게 되었다. 그리고 그들의 후손에게 군역을 면해주고 집집마다 '의용'이란 푯말을 붙여 충절을 기렸다고 한다. 그 후 1853년(철종4년)에는 경상좌수사 장인식이 수영공원에 비를 세우고 의용사라 불렀다고 전해져 온다.

그러나 세월의 흐름과 더불어 의용사는 퇴락해져 갔다. 그래서 1974년 12월 부산시에서는 우풍에 낡은 비석단 3개소를 정비하게 되었다. 즉, 비석단 근처에 따로 의용제인비 25기를 건립하고 외삼문 1동과 한식 담장을 새롭게 설치했던 것이다. 현재의 의용사는 지역원로들이 뜻을 모아 재정비한 것이다. 1999년에 기초 사업 계획을 세워 2000년 5월에 보수공사를 실시한 후, 2001년 3월에 깨끗하게 준공한 것이다. 이렇듯 후손들은 의롭게 산화한 선조들을 결코 잊지 않는다.




그리고 수영공원에는 울릉도와 독도를 지키신 안용복 장군의 동상이 먼 바다를 바라보는 자세로 늠름하게 세워져 있다. 원래 안용복 장군은 경상좌수영의 평범한 수군 출신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숙종 조에 왜인들이 ‘울릉도와 독도’를 죽도라고 부르며 멋대로 드나들자, 직접 일본으로 건너가 에도막부와 담판을 벌여 왜인들의 출입을 금지시켰던 것이다. 후일 사람들은 그 분의 이런 의기를 높이 사 장군이라고 지칭했으며, 그가 죽자 사당을 지어 그의 의로움과 용기를 추모했던 것이다.

앞으로 수영공원은 의기와 기개, 그리고 충의가 무엇인지 보여주는 소중한 역사 체험장으로 길이 보존되어야 한다. 그래서 이 땅의 청소년들에게 우리 민족의 자주 정신이 살아 있음을 보여주어야 한다.

관련기사


배너





배너
배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