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향하기로 마음이 정해진 이상 더 미련을 두지 않기로 했다. 문제는 어떻게 그만 둔다는 이야기를 꺼내느냐가 문제이다. 그동안 말없이 일을 충실히 해왔기 때문에 내가 그만두는 것도 쉽게 허락하지 않으리라는 것은 예견된 일이었다. 이제 거의 한 달 동안 일을 했지만 월급은 입에 올릴 수도 없고 어떤 핑계를 대어 그만 두느냐가 문제인 것이다. 방법은 눈치를 보아 부사장이 기분이 좋을 때 핑계를 대어 이곳의 일자리를 그만 두고 집으로 돌아가는 방법밖에 별다른 뾰족한 수가 없다고 보았다. 그만 두어야겠다고 생각을 하니 모든 일이 의욕이 생기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오로지 그립고 정겨운 고향집밖에 생각이 나지 않는다.
매섭도록 추운 날 아침 겸 점심을 먹고 용기를 내어 영업 부장한테 눈치껏 말을 꺼냈다. “저~어!, 시골에 부모님이 병환으로 급히 내려오라는 연락을 받았는데, 내려 가 봐야 할 것 같습니다.” 갑자기 내려간다는 말에 “뭐야? 야!, 이제 제대로 일을 할 줄 아는데, 간다고 하면 어떻게 하냐?, 당장 사람도 구해야 하구. 부사장한테는 말하지 말구 기다려!” 하면서 은근히 부사장이 알면 골치 아프다는 뜻을 넌지시 암시하고 있었다. 더 이상 이야기를 할 수도 없었다. 그렇다고 당장 이곳을 떠난다면 그야말로 일전 한 푼 없는 상황에서 시골로 가야할 형편이었다. 그러나 지금까지 일한 임금을 달라는 말은 엄두도 내지 못할 형편이었다. 어찌되었던 당장 이곳을 벗어나는 것이 최고의 당면과제일 뿐이었다.
또 하루가 지났다. 오로지 고향으로 가야한다는 생각에 이곳의 생활이 의미가 없었다. 의미가 없는 생활은 모든 면에서 활기가 없어졌으며, 천성이 명랑하여 이곳의 생활에 잘 적응을 하였었지만 이제는 모두가 귀찮은 생각이 들며 시켜야만 억지로 하는 생활이었으니 보는 사람들도 확연히 달라진 나의 행동을 보고 어디가 아프냐며 물어보곤 하였다. 이러한 생활에 영업부장도 더 이상 붙들고 있어봐야 소용이 없다는 것을 인식하였는지 조용히 나를 불렀다. 내일 아침에 부사장이 없을 때 눈치껏 나가라는 것이었다. 나는 가지고 왔던 옷가지와 사물을 새벽 일찍 정리를 하고 나오게 되었다. 내가 그만두고 나간다는 것은 영업부장과 꼬맹이만 알뿐이었다. 그냥 도망치는 거와 별반 다를 바가 없었다.
지하 000싸롱에서 나온 나의 몰골은 말이 아니었다. 구두는 허옇게 곰팡이가 슬은 것처럼 검은 구두가 지하에서 새어나오는 물에 젖어 거지의 신발과 다를 배 없었다. 옷매무새도 나와 함께 생활하는 싸롱 식구들이 함께 입고 생활하던 것이었기에 초라한 옷차림으로 핼슥한 얼굴은 아마 며칠을 굶은 거지와 진배없었다. 배고프면 더욱 춥다고 하였든가 새해 1월의 날씨는 허리를 바로 펴지 못할 정도로 춥고 길바닥은 반들반들한 얼음판으로 더욱 두렵게 하고 있었다. 우선 돈을 빌리는 것이 시급한 문제이다. 돈이 있어야 그리운 집으로 갈 수 있기 때문이다. 가방을 들고 그동안 000싸롱에서 술안주로 물건을 샀던 잡화도매점으로 갔다. 반갑게 인사를 하고 돈을 빌려달라고 하였더니 화색이 180도로 달라졌다. 시골에 가면 틀림없이 돈을 붙여 드릴테니 빌려달라고 말을 하는 중에 바쁘다며 다른 손님과 물건을 담는 일에 열중해 버린다.
더 이상 가게에서 돈 빌려달라는 이야기를 할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할 수 없이 나왔다. 기가 막힌 일이었다. 젊어서 고생은 사서한다며 무작정 올라왔던 서울은 그야말로 일전 한 푼 없는 나에게 엄청난 시련의 파도에 온몸을 던져버리는 시간이었다. 돌아서서 나올 때의 심정은 오히려 돈을 빌렸을 때보다 더 아픈 고통이었다. 매서운 칼바람은 어깨 죽지 아래로 시린 아려움으로 파고들고 있었다. 더 이상 서울하늘 아래에서는 돈을 빌려달라고 할 수가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래도 거의 한달 동안 얼굴을 마주치며 안면이 있다고 하는 사람도 말도 꺼내지 못하도록 거절을 하는데 어느 누가 일자 면식도 없는데 빌려준단 말인가.
무작정 걸었다. 목적지가 어딘지도 모르고 걷기만 하는 것이다. 아침에 조금 먹은 밥으로는 늘 배가고픈 상황이었는데, 밖에 나와 추위 속에 걷는 이길 속에 어른들이 말하는 배가 고프면 더 춥다는 말이 실감이 났다. 부푼 꿈을 안고 서울로 올 때에는 희망과 무한한 도전정신으로 출발하였던 패기는 어디로 가고 거지의 몰골로 서울의 싸늘한 길거리에 헤매는 모습은 아마 거지 중에서도 상거지임에 틀림이 없을 것이다. 아름다운 고향의 하늘아래 정겹고 훈훈한 나의 가족이 이토록 그리운 것인지 새삼 깨닫게 되었다. 언제나 듬직한 아버지와 인정과 사랑이 넘치는 어머니와 동생들이 그리워진다. 이 추운 겨울날씨에 못난 자식 생각에 얼마나 걱정을 하실는지, 떠나올 때 행주치마로 눈시울을 훔치시던 어머니가 더욱 보고 싶다.
이제 더 이상 걷기도 어렵다. 어디로 가야할까? 서울역 가까이에서 시외버스 터미널을 보게 되었다. 인천 부천 방향의 직행버스들이 드나들고 있었다. 문득 고향에서 명절날이면 내려와 서울에 오면 놀러 오라는 친구가 생각이 났다. 그 친구가 부천에 살고 있었다. 그 친구가 하는 일은 개 훈련을 시키는 직업을 가지고 있었다. 초등학교만 졸업을 하고 일찍 사회에 나와서 여러 가지 일을 하다가 개 훈련사로 직업에 만족을 하면서 생활을 하고 있는 실정이다. 무조건 부천행 시외버스를 탔다. 볼 것 없이 버스 뒤쪽으로 갔다. 안내양이 버스표를 검사할 때 아무래도 제일 뒤에 앉아서 이야기 하는 것이 다른 사람들 눈에도 띄지 않을 것 같기 때문이다. 눈을 지그시 감았다. 아무것도 보고 싶지 않았다. 그동안 젊어서 고생을 사서도 한다며 올라와서 고생하였던 일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간다. 너무 서글픈 생각에 슬픔이 가슴깊이에서 뜨겁게 치밀어 올랐지만 꾹 참았다.
앞에서부터 안내양이 표를 검사하면서 뒤로 서서히 오고 있었다. 어떻게 이 자리를 모면해야 할는지 망막한 순간이었다. 그러나 어떻게 달리 회피할 방법이 없는 것이다. 바로 내 앞에 예쁘장한 안내양이 손을 내밀고 서 있지 않은가. 나는 왼손에 차고 있던 시계를 풀어주었다. 안내양은 의아한 눈초리로 나를 뚫어져라 쳐다본다. “그것 가져요. 그것밖에 아무것도 가진 것 없으니까.” 나는 고개를 땅에다 처박고 바닥만 쳐다보고 있었다. 난감한 시간이 한참이나 흘렀지만 실은 긴 시간은 아니었을 것이다. 갑자기 내 손에 차가운 느낌이 느껴지며 무엇인가 쥐어주는 느낌을 받았다. 살펴보니 내 시계를 다시 꼭 쥐어주는 것이 아닌가. 얼굴을 들고 보니 안내양은 예쁘게 웃으며 “나 중에 꼭 차비를 주세요.” 하면서 살포시 웃는 얼굴에 평화가 넘쳤다. 눈물이 핑 돌았다. 남들이 쳐다볼까봐 흔들리는 버스 바닥만 쳐다보았다.
부천에서 반갑게 맞아주는 친구를 만났다. 고향친구는 격식을 차리지 않아서 좋고, 말을 하지 않아도 서로를 잘 알아서 너무 좋다. 내가 어려울 때 속마음을 털어 놓을 수 있어서 좋고, 눈치를 보아가며 구차한 이야기를 하지 않아도 마냥 편하고 이해할 수 있어서 좋다. 친구를 배려해 주는 마음이 너무 고마웠다. 저녁에는 가까이에 있는 미군부대에 가서 오랜만에 술도 한 잔 먹고 나이트쇼도 보면서 즐겁게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내가 어려울 때 꼬치꼬치 묻지 않고도 편안하게 해 주는 친구와 꿀맛 같은 시간을 보내고 내려오는 차비까지 두둑이 얻어서 정겨운 집으로 오게 되었다. 물론 그리운 가족과의 상봉으로 보다 더 가족의 따뜻한 정과 사랑이 넘치는 가정생활은 굳이 말할 필요는 더 이상 없을 것이다.
젊어서 고생은 사서도 한다는 체험은 나에게 많은 시련과 고통이 따랐지만, 이 고통과 시련은 함께하는 이웃과 우리 아이들 교육을 위해 정성과 사랑으로 보살펴야 한다는 점에서 많은 배움이 되었다고 확신한다. 무계획적인 시도와 무지개의 꿈은 나에게 많은 시련과 고통도 주었지만, 우리 주위에는 알게 모르게 착한 마음씨로 봉사하면서 살아가는 우리 이웃들이 많이 있다. 내가 어려움에 직면하게 될 때 결코 회피하거나 책임을 전가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 어려움은 어떤 의미를 부여하느냐에 따라 크게도 되고 작게도 된다. 중요한 것은 마음가짐에 달려있다. ‘진정한 행복은 마음의 충만함에서 얻어진다.’는 소중함을 깨달았다는 점이다.
비록 사는 모습, 생각하는 방식은 서로 달라도 내가 못하는 것을 다른 사람이 하고, 다른 사람 안하는 일을 내가 하기도 하기에 때론 상처도 입고 때론 손해를 보면서도, 서로 돕고, 도전 받고, 마음을 나누며 함께 만들어 가는 세상이 아름다운 것처럼 ‘젊어서 고생은 사서도 한다.’는 나의 상경 기는 많은 것을 체험하고 느꼈기에 30여 년이 지난 지금에도 선명하게 아름다운 추억으로 오래도록 남아있는 것이다. 독자 여러분! 무자년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건강하시길 소망하며, 4회에 걸친 부끄러운 이야기를 끝까지 읽어주신 독자들께 감사의 말씀을 드리며 이만 대미를 접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