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찰스 밴 도렌의 ‘지식의 역사(갈라파고스, 박중서 옮김)’를 읽고
무더운 여름에 책을 읽기는 쉽지 않다. 낮은 낮대로 밤은 밤대로 책을 손에 드는 것은 끈기와 인내가 필요하다. 더욱 ‘지식의 역사’와 같이 두꺼운 책은 부피에 눌려 참기 어려운 게으름이 먼저 다가온다.
그런데도 이번 여름에 ‘지식의 역사’를 마무리 지었다. 마무리 지었다는 이야기는 이 책을 보기 시작한 것이 꽤 오래되었다는 고백이다. 봄부터 읽기 시작했으니 한참 동안 손에 들고 있었다. 책을 이렇게 오래 읽을 수 있었던 것은 책의 성격 때문이다. 이 책은 한 번에 읽지 않아도 될 백과사전이다. 읽다가 지치면 쉬고 또 읽다가 지치면 다른 일을 하다가 읽을 수 있는 책이다.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의 모든 지식을 찾아’라는 부제가 붙어 있는 것처럼, 이 책은 인간이 만들고 경험하고 이룩한 지식의 역사를 탐구한다. 저자는 지식을 가진 원시인의 삶부터 시작해 지식이 어떻게 진보해 왔는가를 정리하고 있다.
제1장 ‘고대인의 지혜’에서 시작해 제15장 ‘다음 100년’까지 지식이 어떻게 탄생하고 발전되어왔는지 말하고 있다. 저자는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의 편집자로 명성을 날리던 사람이다. 이름에 걸맞게 엄청난 시간의 흐름을 한 권의 책으로 명료하고 압축적으로 정리한다. 인류의 역사에 깊게 선을 그은 사상과 이론을 흥미롭게 풀어간다.
제1장 고대인의 지혜
이집트, 인도, 중국, 메소포타미아, 아스테카와 잉카에 이르는 여러 고대 제국의 사람들이 공유한 보편적 지식들을 살펴본다. 읽기 쓰기를 아는 것이야말로 인류의 발전을 앞당겼는데, 당시에도 읽고 쓰기를 아는 것은 부와 권력으로 가는 지름길이었다고 한다. 오늘날 문자사용 능력도 출세를 위한 결정적 요인으로 남아 있다는 진술은 공감이 간다. 그리고 이 장에서는 인신공양과 기독교, 이슬람교, 불교까지 고대인의 종교를 살펴보고 있다.
제2장 고대 그리스의 지식 폭발
인류 역사상 ‘지식 폭발’이라고 부를 만한 사건은 두 번이 있었는데 첫 번째가 B.C. 6세기 그리스에서 시작되었다. 그리스의 폭발은 긴 생명을 지녔다. 이 장에서는 탈레스, 피타고라스, 데모크리토스,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등으로 대표되는 위대한 철학자들의 이야기를 소개하고 있다. 이들은 수학에서의 놀라운 발전을 이룩했으며, 물질과 혁명적인 이론은 빠른 속도로 퍼져나가 세계 전체를 뒤흔들게 된다.
제3장 로마인이 알았던 것
로마인이 법률에 대한 존경심과 애정을 품으며 생활했던 이야기가 소개된다. 그들은 그리스인과는 달리 실용적인 사고를 했다. 길을 닦고 수로를 개척하는 등 생활에 밀접한 지식들을 발전시켜 나갔다.
제4장 암흑시대의 빛
로마의 몰락에서 시작한다. 로마인은 성공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다. 이들은 오만하고, 탐욕스럽고, 허영심이 강했다. 한 마디로 로마인은 오늘날 우리와 상당히 닮았다고 한다.
제5장 중세 시대 : 거대한 실험
로마 제국 이후의 세계에 관해 이야기한다. 몰락한 로마 제국의 생존자이자 후손인 유럽인은 중세 시대 초기의 몇 세기 동안 거의 모두 무척이나 힘든 삶을 살았다. 적들에게서 살아남기 위한 선택은 필수적 과정이다. 결국 그들은 하느님의 문제에 직면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의 삶은 일찍이 서양의 역사에서 한 번도 없었을 정도로 하느님 중심적인 삶이었다.
제9장 혁명의 시대
산업혁명이 소개된다. 18세기에 가장 중요한 기계적 발명품은 바로 공장이었다. 거대한 기계는 인간과 기계의 요소를 조합하여 이전까지는 전혀 꿈꾸지도 못했던 막대한 양의 상품을 생산했다. 1688년 영국의 명예혁명, 1776년의 미국독립혁명, 1789년의 프랑스 혁명을 돌아본다. 이 시기 혁명은 가장 비인간적이었지만, 보편적인 인간 평등을 향한 위대한 발걸음임은 분명했다.
제11장 1914년의 세계
1914년에 이르러 유럽은 인류 역사상 정점이 된 문명을 낳았다. 이 문명은 지구 곳곳에서 모방되었으며 세계의 전반을 지배했다. 그러나 이 시기 유렵은 대전이 일어났다. 흔히 말하는 ‘제1차 세계대전’이다. 아울러 ‘전쟁이 왜 벌어졌을까’를 파헤치고 있다. 전쟁은 비록 극도로 위험하기도 하지만 차마 저항이 불가능한 유혹이라고 말한다.
제13장 20세기의 과학과 기술
20세기 인간의 삶에 압도적인 변화를 가져온 과학 분야의 핵심적 지식들에 관해 논한다. 뉴턴 이후 어떤 과학자보다 더 우주의 구조를 인류에게 잘 이해시킨 아인슈타인이 등장했다. 또 일본이 진주만을 공격함으로써 미국이 참전하게 되고 결국은 1945년 히로시마를 잿더미로 만든 폭탄이 투하된 것도 다루고 있다.
제14장 20세기의 예술과 미디어
미디어가 메시지라는 매클루언의 명제로 시작한다. 미디어는 폭발적인 힘에 의해 현대인의 삶의 형태를 바꿔놓고 있다. 그러나 ‘미디어 때문에’ 과연 우리는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에 비해서 더 많은 것을 알고 있을까? 설령 우리가 더 많이 알고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혹시 하찮은 지식의 증가가 아닐까? 설령 하찮은 것까지는 아니라 하더라도 ‘미디어 때문에’ 우리는 과연 진정으로 뭔가를 아는 것일까? 모든 독자는 이런 질문에 스스로 답변하려 노력해보아야 한다고 경고한다.
이 책에서 인상 깊은 구절 몇 개가 있다.
한 마디로 그 당시에는 어디에서나, 가령 한 사람과 또 한 사람 사이에서나, 또는 지배자와 그 신민 사이에서도 전쟁의 상황이 벌어지고 있었던 셈이다. 투키디데스가 쓴 것처럼 어디서나 강한 자는 자기가 원하는 대로 행하고, 약한 자는 자기가 반드시 해야 하는 일 때문에 고통을 받았다. 유일한 심판관은 바로 힘뿐이었고, 정의와 공정이란 것이 있긴 했지만, 이는 그저 더 강한 자의 이익을 약간 달리 표현한 것에 불과했다.(pp. 40~41)
인류의 출발은 힘이었다. 힘은 동물의 세계에서 존재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인류도 힘의 논리에 지배를 당했다. 아니 이 힘은 아직도 우리의 생활 전반에 정의의 가면을 쓰고 존재하는 지배 논리다. 21세기도 개인과 개인, 개인과 사회, 국가와 국가는 힘의 논리에 의해 평화를 유지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지식은 인간에게 삶 이상의 매력이 있다. 지식의 발전이 있었기 때문에 동물과 다른 삶을 살았다. 그리고 지구상에서 도태되지 않고 버티고 있는 것이다. 인간은 경험의 축적으로만 살기는 어렵다. 체계적이고 객관적인 지식이 발판이 되어야 삶을 영위할 수 있다. 경험은 애매하고 유동적이다. 반면, 지식은 명확하고 확정적이다. 지식은 인간의 삶을 풍요롭게 하고, 성장 동력을 제공한다. 지식을 통해 도덕도 배우고, 지혜도 얻는다.
인생을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에 대하여 해답도 결국은 지식을 통해 얻는다. 인간이 인간답게 살아가려고 하는 도덕적 양심도 책으로부터 많은 지식을 배우게 되면서 이룩할 수 있다. 신앙도 마찬가지다. 지식과 신앙을 구별하기도 하지만, 둘은 서로 뒤얽혀서 성립되어 있다. 즉, 지식과 신앙의 영역을 명확하게 구별하는 것은 곤란하다. 특히 서양의 종교 역사는 곧 지식의 역사다.
그러나 인간에게서 지식은 전부가 되어서는 안 된다. 지식은 인간이 보다 잘 살아가기 위해서는 필요하지만, 인간에게 진짜 필요한 것은 지식을 초월한 세계 인식이 필요하다. 실제로 저자는 1950년대 출연진과의 고의 조작으로 퀴즈왕이 된 ‘퀴즈쇼 스캔들’로 명예를 잃은 적이 있다. 이는 오늘날 지식의 획득보다 사용이 중요하다는 명제를 확인시켜 주는 사건이다. 즉, 지식을 인간답게 이용하는 따뜻함이 인간을 인간답게 할 수 있다.
저자의 서문에서 밝혔듯이 이 책은 평생에 걸친 독서와 사고와 대화의 산물이다. 약 50년에 걸쳐 이룩한 방대한 작업이다. 1991년에 완성된 책으로 인터넷과 디지털 정보가 없었던 시기에 그 창작의 고통은 가히 짐작이 간다. 그러면서도 이 책에 아쉬움이 남는다. 모든 역사가 그렇듯 여기도 서양 중심적 시각이 드러난다. 자료의 한계도 있었겠지만, 인류의 지식 발전에 동양이나 이슬람이 남긴 거대한 지식의 자취가 보이지 않는다. 이는 찰스 밴 도렌의 개인뿐만 아니라 인류가 극복해야 과제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