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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단일기

삶의 길목에서

인간은 누구나 집단생활을 한다. 그리고 그 집단 내에서 일종에 사회적 서열을 갖는다. 그것은 단순한 위치 배열에 그치지 않고, 지위와 역할 등을 부여받는다. 특히 이런 지위는 개인의 노력에 의하여 얻어진다는 점에서 매력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사는 교직이라는 특수성 때문에 사회적 서열에 관심이 없는 것처럼 말하는 경우가 많다. 아이들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평생 교단에 서 있는 것을 행복하게 여긴다고 한다.

그러나 교사도 현실적인 직장인이다. 생활하다보면 조직의 생리적 구조에 눈을 뜬다. 승진 자체를 목표로 두지는 않지만, 사회적 생리이기 때문에 따라가게 된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조직 내에서 주어지는 성취 지위를 획득하기 위해서 부단히 노력했었다.

나는 교직에 처음 들어오면서 인문계 고등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그러다보니 아이들과 마음을 나누기도 전에 입시 준비를 했다. 그것은 내가 서툰 탓도 있었지만, 아이들과 학부모들이 원했던 방식이었다. 열심히 한 탓에 몇 년 만에 노하우가 생기고, 이내 젊은 시절부터 입시 전문가가 됐다. 일찌감치 부장 직책도 맡으면서 아이들을 지도했다.

당시는 선지원 후시험 제도였다. 그때 나의 전문적(?)인 감으로 보낸 아이들은 그대로 가서 합격을 했다. 밤늦게까지 학습 지도를 한 덕택에 명문대에 수십 명이 붙었다. 아이들도 학부모들도 동료 교사들도 나의 능력을 부러워했다. 그럴수록 나는 학교에서 거침이 없었다.

물론 처음 교직에 들어올 때는 선생님이 되고 싶었다. 교단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선생님에 대한 마음이 뜨거웠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니 꼭 그것만은 아닌 듯하다. 그때 나는 학교를 위해서 학생들을 위해서 헌신한다고 했지만, 욕심이 있었다. 동료 교사들과 경쟁에서 우위를 점하고 싶었다. 그래서 세칭 명문 대학 입학생 숫자에 민감했다. 많으면 안도감을 느끼고 적으면 불안감을 느꼈다. 공개적으로 주도권 싸움을 하지 않았지만, 나의 마음에는 경쟁 관계에서 이기려는 심리가 담겨 있었다.

나는 아이들을 사랑한다고 자주 말했다. 나의 땀방울은 모두 아이들을 위한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돌이켜보니 아이들에게 사랑받고 싶었던 것 같다. 아이들에게 존재감을 확인받고 싶었다. 그들에게 사랑받고 싶어서 눈앞에 보이는 세속적 기준에 집착했다. 나는 교직이라는 노동의 현장에서 인정받고 싶었다. 그래서 아이들에게 이기적인 열정을 보인 것이다.

지금 나에게 남은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아이들이 큰 그릇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따뜻한 손길도 보내지 못했다. 입시 성적을 인정받아 승진을 한 것도 아니다. 대학 입학생 숫자에 매달리던 기억은 산화되어 녹슨 채 남아 있다. 아이들을 사랑한다며 매로 다그치던 모습도 후회의 서랍에 부끄럽게 남아 있다.

내 삶은 끊임없이 외부로 열려 있었다. 외부의 가치 기준에 매몰되고 거기에 집중하기 위해 노력했다. 덧없고 부질없는 일들에 시선이 더 쏠려있으니, 눈빛도 친절하지 않았다. 남처럼 되려고 얘를 쓰고, 남의 수준에 오르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는 와중에 아이들에게 마음의 상처를 입히고, 동료들 사이에서 어깨를 펴고 건방지게 활보했다. 당연히 진실보다 성과만 좇아 다니기에 나를 돌볼 겨를도 없었다. 그것은 경쟁을 위해서 필연적인 행동이라고 합리화했다. 참 힘들게 살았지만 정작 나는 설익은 인격과 미성숙한 심성에 취해 있었다.

다행이 최근에 와서 삶의 길이 달라졌다. 그것은 승진의 길이 아닌 다른 길을 택하고 부터이다. 한편으로 보면 다른 길은 승진을 포기한 것처럼 보인다. 경쟁에서 떠밀려진 것 같고, 차선의 도피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것은 새로운 길의 발견이다. 이제 나를 볼 수가 있다. 내 안에 무엇을 필요로 하고,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일까. 외부의 조건에서 벗어나, 나를 행복하게 만들어주는 가치는 무엇일까. 스스로 나를 돌아보는 시간을 갖는다. 주변의 시선에 흔들리지 않는 힘이 생겼다.

인생이란 간단하게 설명할 수 없다. 분명한 것은 도달해야 할 정상이 있거나 혹은 정해진 결과가 없다는 것이다. 늘 진행형에 불과한 미완성의 과정이다. 따라서 인생은 정상을 향해서, 성공의 문에 도착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것이 아니라 매순간 즐겨야 하는 것이다. 참된 인생을 위해 여기저기서 지침을 제시하고 있지만, 그것도 공허한 일이다. 그저 되돌아보고 새롭게 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야 하는 것뿐이다. 무엇인가 스스로 자문할 때 인생의 길이 보인다.

외진 들녘에서 예쁜 들꽃을 보는 경우가 있다. 화려하지 않지만, 시간의 성숙에 따라 순리로 피어난 꽃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이 꽃들은 산빛과 물빛을 닮아 더 없이 아름답다. 우리의 삶도 다를 바가 없다.

들녘의 꽃이 아름다운 자연의 일부인 것처럼 나도 열심히 살아온 인생이다. 그동안 최선을 다해 달려왔으니 할 만큼은 했다. 후회도 없다. 나의 존귀함이 보인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정작 나를 돌보는 일이 극히 드물다. 그러다보니 나를 사랑한다는 말조차 어색하다. 나를 사랑한다는 것은 나를 아는 것이다. 사람들이 불행해지는 이유는 자신에게 필요한 것을 망각하고 남들만을 위해 살기 때문이다.

나를 사랑하면서 내 고유의 내면세계를 지니게 되었다. 이제껏 가져보지 못한 너그러움이 생긴다. 남과 겨루기보다 그들과 충만하게 나눌 수 있는 사랑이 보인다. 명성과 명예는 덕을 잃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 소박하고 질박한 삶의 모습이 멋있는 경우가 많다. 맑고 단아한 마음, 평정과 겸양을 갖춘 삶이 교만하지 않고 감동을 준다. 마르지 않는 강물처럼 훈훈한 사랑에 인생이 풍요로워진다. 늦은 나이에 발견한 나에 대한 사랑이 삶을 따뜻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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