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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탐방

한국의 노블레스 오블리쥬 경주 최부자

역사상 주목받는 시대는 그 시대를 이끈 시대 정신이 있었다. 서양의 노블레스 오블리주는 로마시대 귀족들이 지켜야 할 사상이며 정신으로 혜택 받은 자들의 책임과 특권계층의 솔선수범을 의미한다. 인간은 누구나 욕망의 존재이다. 그러나 이 욕망이 통제되지 못할 때 불행한 일이 일어나곤 한다. 경주지방 속담에 조천 최부자가 눈아래로 보인다거나 솔씨가 날아가도 조천 최부자집 산이라면 앉는다며 최부잣집 며느리가 되려면 용꿈을 세 번 꾸어야 된다는 것이다.

이 시대의 이슈는 경제민주화이다. 2012년 대선의 이슈가 되었으며, 대한민국은 국가적 위상이 높아졌지만 절대 빈곤층이 증가하고 있는 현실이다. 이러한 추세는 경기침체의 장기화로 인한 것이며 날이 갈수록 빈부 갈등이 높아질 것으로 보인다. 이의 해결을 위해서는 기업의 사회적 책임이 요구되고 정부의 정책적 노력이 필요한 시점이다.

한편, 2012년 한국은행 자료에 의하면 가계의 가처분 소득 대비 부채비율이 135%로 OECD국가중 최고 수준에 육박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중산층의 붕괴와 부 축적에 대한 패배의식이 만연하고 부동산 구입비용의 부채 상환으로 힘겨운 실정이다. 이와 더불어 학생들의 이기주의화와 지나친 과외비 지출로 인한 부담이 크며, 가정의 교육기능 상실로 인성교육이 부재한 현실이다.

이러한 현실 인식을 바탕으로 지금까지 개인, 가족 수준의 부 축적에 대한 인식을 지역, 커뮤티티, 공동체 중심의 “함께 키우고 함께 나누는 지속 가능한 사회”로 발전시키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시점에서 우리 역사상 부를 소유하면서도 함께 나눔을 실천한 가문이 경주 최부자이다. 최부자 가문의 실천은 이탈리아의 메디치가 전통에 비유할 만한 것이다.

오늘날 ‘문화예술의 옹호자’로 칭송받는 코시모 메디치(1389∼1464)는 어느 모로 보나 헛된 곳에 돈을 쓸 인물이 아니었다. 가문에서 두 번째로 1434년 피렌체 공화국의 최고 권력자가 되었지만 그의 핏줄에는 처음 모직물 거래로, 이어 은행업으로 실속 있게 부를 축적한 상인 가문의 유전자가 흐르고 있었다.그의 부친 조반니 디 비치 대에 야심차게 뛰어든 권력 세계도 마찬가지였다. 중세와 르네상스기를 통틀어 이탈리아 반도 전체가 도시 대(對) 도시의 투쟁을 겪고 있었다. 피사에 패한 루카는 피사의 위성도시가 되었으며, 기울어 가는 종탑까지 쌓아올리며 위세를 과시했던 피사도 마침내 피렌체에 종속됐다. 도시국가의 모든 자원은 무역과 군비에 가장 효율적으로 투자됐다. 메디치가는 당대 복식부기의 완성자로도 알려진 가문이었다. 모든 ‘끝자리’가 맞아야 했다.

코시모는 눈에 잘 띄지 않는 지배자였다. 마르고 침착한 인상이던 그는 검소한 차림으로 시내를 걸어 다녔고 누구하고나 대화했다. 위세와 오만은 그에게 어울리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부와 영화란 얼마나 덧없는지 집안의 전승 일화를 통해 들었고, 권력이 얼마나 속절없이 무너질 수 있는지를 도시국가들과 가문들의 경쟁으로 알고 있었다.오직 예술과 학문만이 권력과 돈을 뛰어넘는 영광을 이름으로 남길 수 있었다. 도시와 가문이 소유한 건축물과 예술품은 소유자의 위용을 과시하고 경쟁자에게 경외감을 심어주는 무형의 방어력이기도 했다.
 
“돈 쓰는 것은 버는 것보다 훨씬 큰 즐거움을 안겨준다”는 코시모의 말은 후손들에게 전승됐다. 예술가와 학자에게 아낌없이 돈을 쾌척한다는 얘기는 곧 신용이었다. 알프스 너머의 귀족들도 이 말을 듣고 메디치 은행에 돈을 맡겼다.피렌체의 시민들도 이 가문이 도시에 최고의 영광과 자부심을 보장해 준다는 것을 알았고 지지로 보답했다. 메디치의 지배자들은 늘 당대에서 가문이 끝날 것을 염려했지만 그들의 권력은 약 350년을 지속했다. 그 사이 네 명의 교황과 두 명의 프랑스 왕비가 이 가문에서 나왔다.
 
코시모 메디치는 전 유럽과 오스만튀르크에까지 사람을 파견해 문헌을 수집했다. 그리스 로마 문헌과 성서 관련 문헌을 포함한 고대 사본이 1만 점 이상, 파피루스 사본도 2500점에 달했다. 이렇게 만들어진 라우렌치아나 도서관은 피렌체 시민들에게 개방됐다. 그는 플라톤을 연구하고 강의하는 ‘플라톤 아카데미’를 세웠으며, 조각가 도나텔로와 건축가 브루넬레스키를 초청해 한 사람의 예술가로서 평등하게 대화를 나누었다. 브루넬레스키가 완성한 산타마리아 델 피오레 성당의 돔은 당대의 기술 수준을 뛰어넘는 건축사의 기념비로 남았다.

코시모의 병약한 아들에 이어 도시의 지배권은 1469년 손자 로렌초(1449∼1492)에게 넘어갔다. ‘위대한 로렌초’로 불린, 탁월한 지배자요 경영자였다. 경쟁 도시들에 대한 세심한 균형외교로 피렌체가 북이탈리아의 균형추 역할을 맡을 수 있었던 것은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그의 인문적 교양 덕이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 보티첼리, 미켈란젤로라는 세 큰 별이 그의 후원을 받아 피렌체를 중심으로 활동했으며, 당대 이 도시는 유럽과 나아가 세계의 문화 수도 역할을 했다. 이곳에서 발전한 ‘발레’는 카테리나 데메디치(1519∼1589)가 1533년 프랑스 왕세자빈이 되면서 프랑스 궁정에서 화려한 꽃을 피웠다. 같은 세기 말 피렌체 지식인들이 창안한 새 장르 ‘오페라’는 4세기를 넘어 음악과 연극, 미술, 건축에 이르기까지 유럽 예술을 규정했다.
 
최근 박근혜 대통령은 재계 총수들을 만나 “여러분이 대한민국의 메디치 가문이 돼 주시고 문화예술 분야의 투자와 지원을 확대해 주시길 바란다”고 말했다. 그 메디치 가문은 공상가가 아닌 현실주의자였다. 먼저 꿈과 이상을 자신들의 행복의 원천으로 삼았고, 이어 이를 시민들 공통의 재산으로 만들었으며, 나아가 고품격의 ‘브랜드 가치’가 어떻게 형성되어 효율적으로 재투자되는지 꼼꼼히 계산하고 실행한 능력 있는 조직이었다.

효율화와 수많은 경쟁 속에서 ‘행복의 선순환’을 잃어 가는 사회. 고성장의 한계점에서 창의를 바탕으로 한 새로운 성장 동력을 찾아 고민하는 한국, 이 시대가 오늘 이곳에서의 메디치 가문을 찾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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