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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소식

대한민국, 어디로 가고 있는가

 공자는 국가경영의 가장 중요한 요소로 ‘신뢰’를 들고 있다. 공동체 구성원의 화합을 이루는 기본 토대는 통치자와 국민 사이의 신뢰다. 공자는 국가경영의 가장 중요한 요소로 '식량(경제력)' '군사력' '신뢰' 라는 세 가지를 들고, 특히 '백성이 지도자를 신뢰하는 것'을 무엇보다 중시했다. 백성이 믿어주지 않으면 나라가 존립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지도자에 대한 국민의 신뢰는 지도자의 정직에서 나온다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 우리시대의 많은 문제들이 있고 그것들은 쉽게 해법을 보여주지 않고 있다. 오래 쌓인 폐혜, 적폐인 것이다. 그것을 적폐로 인식하는 사람도 그 정치, 경제적 위치와 여건에 따라 다르게 인지하는 데 더 큰 문제가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럼에도 우리사회의 신뢰의 문제와 교육은 상당히 공감하는 문제이며 그 많은 대안에도 완벽한 것은 없어 보인다.

주유철환하며 그의 사상과 경륜을 펼쳐보려 애쓴 공자님은 쓸쓸히 고향으로 돌아왔다. 돌아오는 황하강가에서 목 놓아 울었다는 얘기는 그의 긴 신산의 삶과 자신의 이상과 철학을 결국 받아주지 않는 시대에 대한 깊은 회한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가 돌아와 더 멋지고 더 오래 인류에 더 강한 영향력을 미칠 교육에 힘을 쏟는 것은 다행이며 아름다운 것이었다. 어쩌면 긴 여행에서 좌절과 깊은 사색과 체험의 결과 높은 사상적 완성과 실천의 구체성을 담고 의미깊은 사상을 축적하였을 것이라 생각된다.

공자님의 많은 사례와 사상을 담은 ‘논어’에서 믿음을 강조하였다. 안연편 7장에 자공이 정사를 묻자,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양식을 풍족히 하고, 병(군사력)을 풍족히 하면 백성들이 믿을 것이다." 자공이 말하였다. "반드시 부득이 해서 버린다면 이 세 가지 중에 무엇을 먼저 해야 합니까?"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병을 버려야 한다." 자공이 말하였다. "반드시 부득이 해서 버린다면 이 두 가지 중에 무엇을 먼저 해야 합니까?"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양식을 버려야 하니, 예로부터 사람은 누구나 다 죽음이 있거니와, 사람은 신의가 없으면 설 수 없는 것이다."는 내용이 있다. 그 핵심으로 무신불립을 주장한다. 병력과 물질의 부요보다 더 근본적으로 백성의 믿음, 그리고 백성끼리의 믿음이 중요함을 강조한 것이다.

세대간, 계층간, 세력간, 지역간 갈등이 메워지기 어려워 보이는 우리사회에 먼저 회복할 일을 믿음과 신뢰다. 믿음은 남에게 먼저 요구할 때 성립되기 어렵다. 내가 먼저 믿음을 주고 그것이 오래고 진정성이 있고 여러 상황과 무관하게 지속될 때 생겨나게 된다.

그런데 이같이 믿음이 깨짐으로 일어난 것이 바로 조선의 멸망이었다. “나는 눈물이 눈썹에 넘쳐흐름을 금치 못하겠다. 이제 조선은 끝났다. 지금부터 세상에 조선의 역사가 다시 있을 수 없고 오직 일본 번속 일부분으로서의 역사만 있을 뿐이다.” 이같은 통곡과 눈물의 주인공은 조선 백성이 아니다. 이 눈물은 청나라 말기 변법유신파의 지도자였다. 량치차오(양계초, 1873~1929)의 뺨에 흘렀다. 량치차오는 캉유웨이의 제자이다. 그는 무술변법운동(1898)을 주도했으며, 신해혁명과 5·4운동 등 중국 근현대사의 굵직한 장면에서 중요한 구실을 한 실천적 지식인이다. 신채호·박은식 등 조선의 애국계몽주의자들도 그의 영향을 받았다. 그는 왜 남의 나라 일에 눈물까지 흘리며 애통해 했는지 알아야 한다.

이 눈물은 언뜻 순수한 의미의 동정으로 보이지만, 실은 청나라의 속국이었던 조선을 일본에 빼앗긴 데 대한 상실감이 더 짙게 배어 있다. 량치차오는 톈진조약에 따라 조선이 청나라의 속국이 아니라고 청나라 스스로 인정한 점을 가장 애통해했다. 또한 조선을 ‘기자의 후손들’이라고 일컬으면서 조선 사람 전체를 싸잡아 매도했다. 그는 “남에게 기대기 좋아하는 천성을 갖고 있고, 당장 배부르면 미래에 대한 고민을 전혀 하지 않으며, 모욕을 당하면 분노하지만 금방 식어버린다고 조롱했다.” 량치차오가 쓴 ‘조선의 망국을 기록하다’를 읽는 것은 괴롭다. 그리고, 조선에 대한 청나라 최고 지식인의 삐뚤어진 인식을 대하는 것은 분통스럽다.

일본 제국주의에 제 발로 걸어 들어간 우리 선조들의 어리석은 작태를 되짚는 것은 쓰라리다. 그럼에도 지금 이 책을 읽어야 하는 이유는 자명하다. 세계정세와 우리의 대응이 그때와 별로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최형욱 한양대 중문과 교수가 이 책을 편역한 이유도 이것일 터다. 그 당시 량치차오는 청나라 역시 곧 조선처럼 제국주의의 먹잇감이 될 위험에 처해 있다는 강한 위기감을 갖고 있었다. 이 책에 실린 글들을 자신이 창간한 ‘신민총보’ 등을 통해 잇달아 발표한 이유도 타산지석으로 삼기 위해서였다. 그래서인지, 조선의 망국 과정에 대한 그의 취재와 분석 자체는 상당히 정확하다고 볼 수 있다.

그는 “조선 멸망의 최대 원인”이 궁정과 양반에 있다고 강조했다. 대원군의 쇄국정책과 대규모 토목공사, 명성황후를 비롯한 민씨 일가의 전횡, 일본당과 중국당으로 나뉘어 외국 군대를 불러들여 서로 죽고 죽인 싸움 등은 우리가 익히 아는 사실이다. 우리가 눈여겨 볼만한 대목은 양반에 대한 서술이다. "사실상 조선국 내에서 자유의지를 가진 자, 독립 인격을 가진 자는 오직 양반뿐이다. 저 양반이라는 자들은 모두 높이 받들어지고 넉넉한 곳에 처하며, 교만하고 방탕하여 일하지 않고, 오직 벼슬하는 것을 유일한 직업으로 삼았다. 다른 나라에서 관리를 두는 것은 국사를 다스리기 위함인데, 조선에서 관리를 두는 것은 오직 직업 없는 사람들을 봉양하기 위함이었다." 니 오늘날 이같은 현길엣거 누가 이에 해당되는 것일까?

량치차오는 이른바 지도층이라는 자들이 사리사욕만을 챙길 뿐 국가에 대한 공적 관념이 희박한 점을 개탄했다. 가장 황당한 일화 중 하나는 일본 정부가 한일병합조약을 공포하기로 이미 결정했는데, 대한제국 정부가 순종 황제 즉위 기념일을 맞아 축하연을 연 뒤 발표하기를 청해 발표를 며칠 미룬 일이다. 그는 “이날 대연회에 신하들이 몰려들어 평상시처럼 즐겼으며, 일본 통감 역시 외국 사신의 예에 따라 그 사이에서 축하하고 기뻐했다. 세계 각국의 무릇 혈기 있는 자들은 한국 군신들의 달관한 모습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고 기술하고 있다.

이처럼 조선은 안으로부터 무너져 내렸다. “조선을 망하게 한 자는 처음에는 중국인이었고, 이어서 러시아인이었으며, 마지막은 일본인이었다. 그렇지만 중·러·일인이 조선을 망하게 한 것이 아니라 조선이 스스로 망한 것이다.”는 비판을 하고 있다. 량치차오는 송병준이 이끄는 일진회가 한일강제병합에 혁혁한 공을 세웠으며, 송병준과 이완용이 경쟁적으로 일본에 아부한 점, 일본이 이들 친일파에게 대대손손 유복하게 먹고살 수 있는 토대를 만들어준 점 등을 여실히 적었다. 또한 일본이 이토 히로부미라는 영악한 인물을 앞세워 조선 황실과 고위 관리들의 마음을 놓게 한 뒤 조선을 실질적으로 장악해나가는 과정을 상세히 묘사하고 있다.

조선인을 비웃던 량치차오는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안중근과, 국치의 분을 참지 못하고 자결한 충청도 금산군수 홍범식에 앞에서는 옷깃을 여미고 찬양한다. “무릇 조선 사람 1000만명중에서 안중근 같은 이가 또한 한둘쯤 없지는 않았다. 내가 어찌 일률적으로 멸시하겠는가. 그러나 이러한 유의 사람은 본래 1억명 중에서 한둘에 지나지 않으며, 설령 한두 사람이 있더라도 또한 사회에서 중시되지 않는다. 대체로 조선 사회에서는 음험하고 부끄러움이 없는 자가 (…) 번성하는 처지에 놓였고, 정결하고 자애하는 자는 쇠멸하는 처지에 놓였다.” 자, 그때와 지금은 얼마나 다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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