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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1.17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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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해만리 검붉은 섬, 홍도와 흑산도

'세월아 하고 부르며 / 부시시 일어날 것만 같은 / 바위며 이끼들 / 세월아 하고 부르면 / 풀썩 바스라져버릴 것만 같은 / 내 살 속의 뼈와 조개의 무덤들 / 달빛 혹은 차디찬 바람이 여백을 꽉 채운다 / 가까이, 아주 가까이 / 골맹이 굴리는 파도소리 있다 / 누가 돌아선다 / 바다는 너무 멀다'

어느 시인이 읊은 '섬'의 한 구절이다. 그렇다. 섬은 세월이 만들어 놓은 자연유산이다. 이번 생태기행은 세월이 잠들어 있는 서해만리 홍도와 흑산도의 봄을 돌아보기로 하고 목포항을 떠난다.

홍도는 목포항에서 서남쪽으로 115킬로미터 떨어진 섬이다. 홍도는 강릉-군산-목포-홍도를 비스듬히 잇고 있는 옥천지질대에 속해 있다. 옥천지질대는 4억년 전에 이루어진 것으로 학계는 추정하고 있다. 따라서 홍도는 다른 다도해 섬들에 비해 1억년이나 앞서 형성된 섬이다. 옥천지질대는 제4빙하기까지 내륙과 이어져 있다가 해수의 상승으로 지질대 일부가 잠수되면서 섬이 된 것이다.
홍도에 가까워지면서 섬들은 조금씩 홍조를 띠며 나타나기 시작한다. 이것은 바위들이 철분을 많이 함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해안은 거의가 해식애(바다절벽)로 되어 있다. 홍도 선착장을 가운데 두고 오른쪽으로는 양산봉(231m) 기슭이 내려와 있고, 왼쪽으로는 깃대봉(367m)이 내려와 있다. 두 기슭이 만나는 곳에 마을이 형성되어 있다.

홍조 띤 절벽에 난 향기 그윽한 홍도
선착장이 닿는 죽항은 빠돌해변에 조성된 작은 포구이다. 빠돌이란 오랜 세월동안 파도에 닳고 닳아서 둥글어진 돌을 말한다. 보길도의 ‘깨돌’과는 달리 돌의 크기가 사람 머리통보다 더 크다. 선착장에서 올라가면 홍도관리사무소 앞에 열댓평 규모의 난 전시실이 있다. 대엽풍란, 풍란, 석곡, 새우난, 맥문동 등등 5백여 종의 홍도 자생란을 전시하고 있다. 홍도 어디서나 볼 수 있는 대엽풍란은 ‘나도풍란’이라고도 하는데, 나무나 바위곁에 붙어서 자라는 상록성 여러해살이 난이다. 홍도의 자생난들은 한때 방목된 염소에 의해 무참히 짓밟혀 위기에 처한 적이 있었으나, 지금은 그런 대로 잘 보전되고 있다.
마을에서 언덕길 끝에 당숲이 있다. 주변에 상록난대림과 소나무가 어우러져 있는 당숲은 신이 지켜주는 숲이다. 당숲 위로 올라가면 절벽 끝으로 바다가 일망무제로 펼쳐진다. 죽항 앞 바다에 떠 있는 남문바위도 손에 잡힐 듯하다. 당숲이 있는 양산봉 기슭과 골짝에는 남쪽 섬 지방에서 볼 수 있는 흰 동백을 비롯하여 감탕나무, 광나무, 구실잣밤나무, 굴거리나무, 멀구슬나무, 모밀잣밤나무, 후박나무, 꽝꽝나무, 섬회양목, 육박나무, 종가시나무, 참가시나무, 식나무, 사철나무, 다정큼나무 등등의 난대수종이 있다. 숲바닥에는 백량금, 장딸기, 겨울딸기, 석
곡, 석위, 풀고사리, 발풀고사리, 풍란, 나도풍란 등도 발견된다. 특히 원추리 군락은 초여름부터 몇 달간 경사진 풀밭을 물감 칠한 듯 뒤덮는다.[PAGE BREAK]상록난대림의 보고, 그리고 기기묘묘한 바위들…
선착장에 도착하면 등대로 오르는 두 갈래 길이 있다. 등산로를 타고 갔다가 언덕길로 내려오는 것이 이곳의 자연을 돌아보는 데 무난하다. 등산로에는 동백과 예덕나무를 비롯하여 여러 종류의 난대수종들이 터널을 이루고 있다. 예덕나무도 남쪽 바닷가에서 더 잘 자라는 나무이지만, 내륙으로는 내장산까지 올라가 자라고 있는 나무다. 숲터널 아래로 마삭덩굴, 콩짜개난, 백화등, 송악, 자금우, 갯머위, 맥문아재비, 맥문동, 보춘화 등등 늘푸른 난대식물이 눈에 띈다. 때맞춰 유채꽃도 만발해 있다. 음습진 바위틈에는 여러해살이 상록식물인 도깨비고비가 싱싱하다. 잎이 유난히 반들거리는데 이것은 강열한 햇볕을 반사하기 위함이다.
등대 주변의 소나무들은 거의가 해송 아닌 육송이다. 이것은 이 섬이 원래 육지의 일부분이었음을 말해 준다. 소나무의 생김새는 중부 내륙에서 흔히 관찰되는 우산솔을 많이 닮아있다. 줄기가 위로 곧장 자라지 않고 지상 3∼5미터 쯤에서 가지들이 마치 우산살처럼 펴진 소나무이다. 수령은 많지만, 키가 작은 것은 거센 바닷바람 때문일 것이다. 석촌 선착장에서 유람선으로 2시간 남짓이면 홍도를 한 바퀴 돌아볼 수 있다. 홍도 본섬을 가운데 두고 크고 작은 바위섬과 기암절벽들이 병졸처럼 둘러싸고 있다. 남문바위, 석화굴, 탑섬, 칼바위, 부부탑, 독립문바위, 거북바위…. 홍도 해안에는 크고 작은 3백여 개의 해식동굴과 해식단층들이 자리하고 있는데, 그 중 십자동굴이 가장 크고 형태도 다양하다.

흑진주처럼 남성적 힘이 느껴지는 흑산도
흑산도는 유인도 11개와 무인도 89개로 이루어진 섬들의 공화국이다. 지질이 ‘흑진주’처럼 검게 빛난다고 해서 흑산도라고 이름 붙였다. 서쪽에 깃대봉(378m)이 있고, 북쪽에 상라산(227m), 남쪽에 선유봉(300m)이 있다. 그래서 홍도에 비해 듬직하니 남성적이다. 흑산도에는 2개의 큰 마을이 있다. 진리는 선착장이 있는 면소재지이며, 예리는 어업과 관광업을 주로 한다. 흑산도에도 논이 없다. 고구마, 보리, 콩 등을 심는 약간의 밭들이 바닷가에 흩어져 있을 뿐이다. 진리 부둣가에 배를 기다리는 관광객 몇몇이 바다에 낚시를 담그고 있다. 장난처럼 담근 낚시에 난류성 어류인 벤자리가 줄줄이 올라온다. 흑산도 해역은 국내 최대의 벤자리 서식처이다.
 흑산도는 1990년대초에 섬 일주도로가 완공되었다. 먼저 찾아본 진리 바닷가에 유명한 초령목(招靈木)이 서 있다. 초령목은 이름 그대로 영혼을 불러온다는 수령 300 년의 노거수(老巨樹)이다. 천연기념물 369호로 지정된 초령목은 목련과에 속하는 상록교목으로 아열대식물이다. 우리 나라에서는 울릉도와 흑산도에만 각 1그루씩 자생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창 무성했을 때는 높이가 20미터, 줄기 둘레가 3미터를 넘었다고 한다. 그러나 아쉽게도 몇 해 전에 고사해서 말라 죽었다.[PAGE BREAK]초령목 아래 개울물에 도요새 몇 마리도 함께 먹이를 찾고 있다. 도요새과의 새들은 거의가 열대지방이나 남반구에서 올라오는 여름새들이다. 종류가 많아서 한국에만도 40여 종이 찾아온다. 쇠물닭 가족들도 개울의 갈대숲을 들락거리며 먹이를 찾고 있다. 그동안 나온 보고서에 따르면 홍도와 흑산도 지역의 조류는 총 77 종이 조사되었다. 개체수로는 직박구리, 동박새, 괭이갈매기, 노랑눈썹솔새, 쑥새, 촉새, 박새, 휘파람새, 제비 순이다. 그 밖에 황로, 칼새, 가마우지, 흑로, 흑비둘기, 힝둥새, 바다직박구리 등은 초심자들에게도 쉽게 관찰된다.
길을 따라가면 처녀신을 모시는 처녀당 숲을 만난다. 풍랑을 만난 옹기배가 처녀신의 청을 받아들여 총각을 몰래 섬에 내려놓고 뭍으로 돌아갔다는 전설의 당숲에는 붉은 동백, 후박나무, 나도밤나무 등의 난대수들과 원추리, 갯머위, 청미래 덩굴, 찔레, 산딸기 등이 숲 바닥을 장식하고 있다. 처녀당 아래는 모래밭 해변이다. 모래의 입자가 먼지처럼 작고 부드럽다. 바위에는 눈알고둥, 비틀이고둥, 말미잘 등이 총총 붙어있다. 모래 바닥에 쏙과 게들의 구멍집이 나 있다. ‘바갈밭’에는 파래들이 마치 이끼처럼 파랗게 군락을 이루며 붙어있다. 도시의 아이들에게는 좋은 자연학습장이다.
모래톱에는 밀물 따라 들어왔다가 길을 잃은 어린 감성돔이 바닷새들에게 안쓰럽게 뜯기고 있다. 흑산도 하면 홍어를 떠올리는 이들이 많다. 홍어는 등짝 가운데 작은 가시비늘이 돋아나 있어서 가오리와 쉽게 구분되는데, 늦가을이면 북쪽에서 흑산도 해안으로 내려와 다음해 봄까지 머문다. 대하와 전어가 살이 올라 있기 때문에 그것을 먹으러 나타나는 것이다. 그러나 요즘은 어획량이 크게 줄었다고 한다.  

도시 아이들에겐 최고의 자연학습장
사리마을에는 다산 정약용의 형인 정약전이 유배를 살다간 적소가 있다. 송악과 담쟁이가 한데 어우러져 돌담장을 덮고 있다. 정약전은 이곳에 머무는 동안 복성재에 머물며 청소년들을 가르치는 한편 섬사람들의 도움을 얻어 우리 바다에서 살고 있는 각종 어류와 해조류에 관한 학술지로 평가받는 <자산어보>를 지었다. ‘자산’은 흑산도의 옛 이름이다. 책 내용 가운데는 뱀에 물린 데는 홍어껍질을 벗겨서 상처를 덮으면 낫는다, 소에게 산낙지를 먹이면 힘을 잘 쓴다는 등등 실생활에 필요한 정보도 함께 싣고 있어서 그의 실학적 애민사상을 엿보게 한다. 천촌리
마을 도로변에 면암 최익현 선생의 유허비가 서 있다.
흑산도 지역의 숲은 윤기 있는 난대성 상록활엽수가 눈에 많이 띈다. 후박, 동백, 송악, 까마귀쪽나무, 다정큼나무, 굴거리나무, 참식나무, 감탕나무, 돈나무…등등. 이름도 희귀한 까마귀쪽나무는 나무 높이 5미터 남짓한 상록활엽수 소교목으로 암수 딴 나무로 가을에 연노랑 꽃이 피고 열매는 이듬해 가을에 보랏빛으로 익는다. 나뭇잎이 반들거리는 것 말고는 까마귀의 이미지와는 별로 관계가 없어서 이름과 나무가 잘 연상되지 않는다. 흑산도에 오면 미국의 식물자원 수탈만행이 떠오른다. 지난 1985년 미국 농무성 산하 국립수목원채취단이 흑산도로 들어와 한국산 식물을 대량으로 반출해갔다. 당국의 허가 아래 우리 학자들의 안내를 받아 가면서 훔쳐(?)간 것이다.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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