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말이 되면 크리스마스 카드나 연하장을 많이 받게 된다. 그 중에는 정말 반가운 것도 있지만 더러 그렇지 않은 것도 있다. 그러나 여기서 몇 가지 생각해 볼 것이 있다. 우선 형식적인 것은 반가움을 주지 못한다. 새해 인사하는 날을 '새해 아침' 또는 '신년 원단(新年元日)'이라고 하는데 연하장이나 각종 카드는 1월 1일 이전에, 빠른 것은 12월 20일경에 도착하니 형식적이라 아니할 수 없다. 더구나 '새해 아침 ○○○재배'라고 쓴 것을 볼 때면 너무 한다는 생각까지 든다. 그러므로 연하장은 1월 1일 이후에 발송해야 맞는다.
시간을 어기고 연하장을 보내는 것은 비례(非禮)에 속한다. 비례(非禮)는 천(天)의 시(時)를 어기는 것(제사를 제 날짜에 지내지 않는 것)으로서 지(地)의 장소(場所)를 어기는(제사를 집에서 지내지 않고 설악산 호텔에서 지내는 것) 무례(無禮)·효도의 대상(人)을 어기는(남의 부모는 공경하나 자신의 부모한테는 불효하는 것) 패례(悖禮)·마음(心)이 빈(제사를 지나치게 호화롭게 지내는 것) 허례(虛禮)·물질(物質)에 인색한(제사를 허술하게 지내는 것) 실례(失禮)보다 더 큰 결례(缺禮)를 범하는 것이다.
올해 같은 경우 음력 1월 1일이 되기 전에 이미 '임오년(壬午年) 새해를 맞이하여 새해 아침 ○○○올림'이라고 쓴 연하장을 받은 경험이 있을 것이다. 양력 2002년 1월 1일은 임오년이 아니라 신사년(辛巳年)이다. 임오년은 2002년 2월 12일 설날(음력 1월 1일)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신년 하례식이나 각종 행사에서도 유명 인사들 대부분이 '임오년 새해를 맞이하여…'라는 인사말을 사용한다. 2002년 1월 1일 모 일간지에 게재된 신년시 끝 부분에 다음과 같이 쓴 것도 보았다. "…새해 아침은 언제나 꿈의 산야이다 /천리마 /만리마 /발굽치며 달리는 /이 우렁찬 역사의 오케스트라이고 싶다" 이 때는 임오년이 아니라 신사년이었다.
누구든 책상 서랍 속에 들어있는 지난 연하장을 꺼내 보면 이해할 수 있는 말이다. 우리말에 '철부지'라는 말은 철을 모른다는 뜻이다. 지금이 봄철인지, 여름철인지, 가을철인지, 겨울철인지 때를 모른다는 뜻이다. 이런 사람들은 때를 모르니 철부지임에 틀림없고 무식하다고는 할 수 없으니 '유식(有識)한 철부지'라고 하는 것이 가장 적합한 표현이 아닌가 싶다. 필자가 하루는 유식한 철부지에게 "지금이 임오년이지 신사년이냐?"하고 물었더니, 대답이 "알기는 아는데 다른 사람이 임오년이라고 하니까 그냥 그렇게 했다"고 하는 것이었다. 이런 착각의 말은 선진국에서는 용납되지 않는다. 영어에는 12시제(時制)가 있지만 국어에는 시제가 없다. 그래서 영국사람은 시간을 잘 지키고 우리 나라 사람은 시간 개념이 희박한 것이다.
또 우리말에 '철 났다'라는 말이 있는데 이것은 24절기를 외운다는 뜻이다. 입춘(立春)부터 대한(大寒)까지의 24절기는 반드시 알아야 한다. 그래야 철 났다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 24절기는 입춘 우수(雨水) 경칩(驚蟄) 춘분(春分) 청명(淸明) 곡우(穀雨) 입하(立夏) 소만(小滿) 망종(芒種) 하지(夏至) 소서(小暑) 대서(大暑) 입추(立秋) 처서(處暑) 백로(白露) 추분(秋分) 한로(寒露) 상강(霜降) 입동(立冬) 소설(小雪) 대설(大雪) 동지(冬至) 소한(小寒) 대한이다.
24절기를 외웠으면 육갑(六甲)을 알아야 한다. 즉 갑자(甲子)로부터 시작해서 계해(癸亥)까지 육십갑자(六十甲子)를 외워야 한다. 육십갑자를 알아야 '병신 육갑한다'는 소리를 듣지 않고 혼인을 할 수 있다. 왜냐하면 농경시대에는 24절기를 몰라서 철이 안 난 철부지는 때를 모르기 때문에 농사를 지을 수 없고 육갑을 모르면 나이를 모르기 때문에 혼인을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육십갑자는 이렇다. 갑자 을축(乙丑) 병인(丙寅) 정묘(丁卯) 무진(戊辰) 기사(己巳) 경오(庚午) 신미(辛未) 임신(壬申) 계유(癸酉) 갑술(甲戌) 을해(乙亥) 병자(丙子) 정축(丁丑) 무인(戊寅) 기묘(己卯) 경진(庚辰) 신사(辛巳) 임오(壬午) 계미(癸未) 갑신(甲申) 을유(乙酉) 병술(丙戌) 정해(丁亥) 무자(戊子) 기축(己丑) 경인(庚寅) 신묘(辛卯) 임진(壬辰) 계사(癸巳) 갑오(甲午) 을미(乙未) 병신(丙申) 정유(丁酉) 무술(戊戌) 기해(己亥) 경자(庚子) 신축(辛丑) 임인(壬寅) 계묘(癸卯) 갑진(甲辰) 을사(乙巳) 병오(丙午) 정미(丁未) 무신(戊申) 기유(己酉) 경술(庚戌) 신해(辛亥) 임자(壬子) 계축(癸丑) 갑인(甲寅) 을묘(乙卯) 병진(丙辰) 정사(丁巳) 무오(戊午) 기미(己未) 경신(庚申) 신유(申酉) 임술(壬戌) 계해.
그런데 요즘 유식하다고 하는 사람 가운데 철도 모르고 육갑도 모르는 사람이 많은 것 같아 참으로 안타깝다. 2003년 1월 1일 0시에 틀림없이 서울 종로의 보신각 종이 울릴텐데 "계미년(癸未年) 새해가 밝았습니다"라고 외치는 지도자 특히 유식한 철부지 아나운서의 우렁찬 목소리를 들을까 걱정되는 것도 그런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