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삼별초, 자주를 외치다지난 호에 이어 진도를 찾아갑니다. 진도는 삼별초의 본거지였습니다. 삼별초는 본래 최씨 무신정권에서 경찰기능을 맡았던 야별초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야별초는 그 수가 많아짐에 따라 좌별초와 우별초로 나뉘게 되었고 후에 몽고와의 전쟁 때 포로가 되었다가 돌아온 병사들인 신의군과 합쳐 삼별초라 부르게 됩니다. 그러니까 삼별초는 도둑을 잡고 범죄자를 투옥하는 치안유지의 기능과 함께 대몽항쟁의 최전방에 있었던 군사적인 기능까지 아울렀던 것입니다.
1206년 칭기즈칸이 나라를 세운 뒤 줄곧 고려는 몽고와 마찰을 빚기 시작했고 급기야 1225년 몽고사신 저고여(著古與) 일행이 압록강가에서 살해되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이를 계기로 몽고의 본격적인 침략이 진행되게 되지요. 이에 맞서 고려의 최씨 무신정권은 장기적 항전을 결심하고 1232년 강화도로 수도를 옮깁니다. 몽고에 대한 줄기찬 항전에는 최씨 무신정권을 뒷받침하고 있던 삼별초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1258년 김인준에 의해 최씨 정권이 무너지면서 이듬해 결국 몽고와 강화를 맺게 되고 그 후 개경 환도가 결정됩니다.
최씨 무신정권의 핵심병력이었던 삼별초는 약 40년간 고려의 수도였던 강화도를 버리고 개경으로 환도하게 되자, 배중손의 지휘 아래 원종의 6촌인 승화후 온을 받들어 반몽 투쟁을 계속해 나가게 됩니다. 그리고 강화도에서 진도로, 진도에서 제주도로 옮겨 4년간 항몽투쟁을 계속하게 되지요. 삼별초의 자주정신을 드러낸 것이라 하겠습니다.
이렇게 진도에 근거지를 마련하게 된 까닭은 개경과 멀리 떨어져 있으면서 남해와 서해를 통괄할 수 있는 요충지였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본토와 적절하게 떨어져 있어서 본토에 대한 일정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거점이기도 했습니다. 진도에 도착한 삼별초군은 용장산성을 구축하고 궁궐을 짓고 남해와 서해를 아우르는 해상 왕국을 건설합니다. 하지만 곧 고려와 몽고 연합군의 공격을 받아 함락하게 되고 나머지 세력이 김통정의 지휘 아래 제주도로 옮겨가게 됩니다. 진도에는 삼별초과 관련한 유적으로 용장산성, 남도석성, 궁녀둠벙, 전(傳) 왕온묘, 배중손 사당 등이 있습니다.
진도의 삼별초 유적군내면 용장리 용장산성은 강화도에서 남하하여 진도에 정착한 삼별초군이 대몽항쟁의 근거지로 삼았던 곳으로 그 둘레가 13㎞에 이릅니다. 현재 산성터, 궁궐터, 우물터, 절터와 석불, 와편 등이 남아 당시의 상황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지리적으로 이곳은 삼면이 산으로 둘러싸인 데다 바다가 가깝다는 이점이 있습니다. 승화후 온을 새 왕으로 추대한 삼별초는 경사면을 이용해 석축을 쌓고 궁궐을 지었습니다. 궁궐 옆으로는 지금도 개울물이 흘러내리고 있어 물이 풍부하고 교통의 요충지에 터전을 잡았음을 추측해 볼 수 있습니다. 그 궁궐터 뒤로 난 길을 올라 산능선을 들어서면 진도 주변의 풍경이 장대하게 펼쳐집니다. 능선에서 만나는 성벽은 유난히 희고 정확하게 자른 돌로 복원해서 그런지 옛 감흥을 느낄 수 없어 실망스럽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능선을 따라 조금만 더 걷다 보면 이내 그 시대 그 사람들이 쌓은 성벽을 만날 수 있습니다. 성벽은 세월에 자리를 내주어 아주 낮게 허물어진 몰골로 남아 있지만 그 성벽을 처음 보았을 때는 눈물이 나기까지 합니다. 돌 하나하나를 보듬어 주고 싶은 심정입니다.
생각해 봅시다. 이 산꼭대기까지 돌을 옮겨 성을 쌓던 삼별초군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요? 개경 환도에 반대해서 멀리 이곳까지 오긴 왔는데 과연 불투명한 자신들의 앞날은, 또 고려의 미래는 어떻게 되리라 예측했을까요? 잠시나마 그들이 흘렸을 땀방울과 눈물을 음미해 봅니다.
이곳에서 1년 정도 머물렀던 삼별초군은 고려 김방경과 몽고의 혼도가 이끄는 여몽연합군의 공격을 받고 마침내 성이 함락되고 맙니다. 삼별초를 이끌었던 배중손 장군은 남도석성으로 옮겨 항전하다 전사하고 김통정은 별동대를 이끌고 금갑포에서 마지막 결전을 펼치게 되죠. 하지만 연합군에 밀려 제주도로 탈출하여 제2의 대몽항전을 전개합니다. 이들은 애월읍 고성리 항파두리에다 성을 쌓고 이듬해까지 싸웠으나 결국 연합군에 의해 진압이 되고 김통정은 한라산 기슭에서 자결함으로써 삼별초의 항쟁이 끝을 맺게 되고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2006년에 용장산성 홍보관이 개관되어 관광객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전형적인 조선시대 읍성의 형태를 갖추고 있는 남도석성에는 아직도 민가가 들어서 있습니다. 튼튼한 성벽을 바람막이 삼아 집들이 빼곡하게 들어서 있는 모습은 남도의 따뜻한 날씨만큼 푸근해 보입니다. 이곳은 배중손 장군이 최후를 마친 곳으로 전해지며, 조선시대에는 왜구의 노략질을 막기 위해 수군과 만호(萬戶)를 배치하여 인근 지역을 경비하였습니다. 남문 밖에는 남박다리가 있습니다. 남박다리는 여수 흥국사나 순천 선암사 승선교와 같은 홍예 형태의 돌다리이지만 규모로 치면 명함도 내밀지 못할 입장입니다. 하지만 편마암질의 다듬지 않은 자연석을 이용하여 투박하면서 서민적인 정취가 물씬 묻어납니다. 남박다리는 가까운 거리를 두고 떨어져 있는 단운교와 쌍운교를 함께 말합니다.
배중손의 사당은 임회면 굴포리 바닷가에 있습니다. 오른손을 치켜들고 왼쪽에 칼을 찬 채 굴포 앞바다를 지켜보는 그의 모습은 비장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또, 삼별초가 고려의 왕으로 추대했던 승화후 온은 연합군에 밀려 후퇴하던 중 의신면 침계리에 있는 ‘왕무덤재’ 또는 ‘왕무덤’이라고 불리는 곳에서 붙잡혀 죽임을 당한 후 고개 한쪽에 묻혔다고 합니다. 이 고개에는 주인 없는 비교적 큰 무덤이 5~6기가 있는데 그중에서 가장 규모가 큰 묘가 그의 묘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왕온의 무덤 앞에는 그가 탔던 말의 무덤이 남아 있습니다.
한편, 부여에 낙화암이 있다면 진도에는 궁녀둠벙이 있습니다. 나당연합군에 의해 백제가 멸망할 때 백제의 3천 궁녀가 낙화암에서 떨어져 스스로 목숨을 끊었듯 진도의 고려 궁녀들은 연합군에 잡히기보다는 차라리 둠벙에 몸을 던졌다고 합니다. 지금의 둠벙은 일부가 메워져 규모가 줄었지만 날씨가 궂으면 여인들의 울음소리가 들려오고 도깨비불이 자주 나타나곤 했답니다.
4대에 걸친 대화맥, 운림산방‘진도 양천 허씨들은 빗자락 몽둥이만 들어도 명필이 나온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의 근원지가 된 곳이 바로 첨찰산 아래 아늑하게 자리 잡은 운림산방입니다. 울창한 상록수림을 배경으로 한 폭의 그림처럼 펼쳐진 운림산방은 조선 후기 남종화의 대가였던 허련의 화실 당호입니다. 허련 이후 일가직계로 4대에 걸쳐 200여 년 동안 대화맥(大畵脈)이 이어지고 있어 이곳은 진도의 상징이자 자존심입니다.
소치(小痴) 허련은 1808년 진도읍 쌍정리에서 허각의 5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는데 일찍이 부모를 여의고 상심의 마음을 그림 그리는 것으로 달랬습니다. 그러다가 해남에 있던 일지암의 고승 초의선사를 찾아가 시문을 배우게 됩니다. 녹우당을 오가며 윤공재 일가의 3대에 이르는 명화첩을 통해 그림을 배워 나가던 중 초의선사의 소개로 추사 선생의 문하에 입문하는 기회를 맞게 됩니다. 이때부터 본격적인 서화(書畵)를 익히게 되고 점차 그의 재능이 인정을 받기에 이릅니다. 42세가 되던 해에는 헌종을 15회나 독대하는 등 그 권위와 명예가 최고조에 이르렀습니다. 그의 호 소치는 스승이었던 추사가 내려 준 것으로 소치의 재능과 능력이 원나라 말기 최고의 화가였던 대치 황공망과 비교해 전혀 손색이 없다고 해서 지어준 것입니다. 추사는 압록강 동쪽에서는 소치를 따를 자가 없다고 극찬하였습니다. 소치는 스승이었던 추사 선생이 세상을 떠나자 고향인 진도로 돌아와 화실을 짓고 ‘소허암’ 또는 ‘운림각’이라 했는데 이곳이 바로 운림산방입니다. 그는 이곳에서 여생을 보냈습니다.

2대 미산(米山) 허형은 의제 허백련의 그림을 지도해 주었으며 당시 희귀했던 전문직업 화가로서 가난 속에 살다 간 서민의 화가였습니다. 미산이라는 호는 원래 소치의 장남이었던 허은의 호였는데 일찍 타계하자 4남이었던 그가 큰형의 호를 그대로 물려받아 쓰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허형을 ‘소미산’ 또는 ‘작은 미산’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미산은 강진 병영을 거쳐 여생을 목포에 정착하면서 작품제작에 몰두하였으며, ‘작대기 산수’로 유명합니다. 역시 양천 허씨 출신으로 유명한 의재 허백련에게 그림을 가르치기도 했지요. 그의 화맥은 3대를 잇는 4남 허건과 5남 허림으로 이어집니다.
남농(南農) 허건은 물상을 현대적인 감각으로 승화시켜 남농 특유의 갈필법을 사용하는 독창적인 화풍을 이루어냈으며 많은 대회에서 수상함으로써 그의 이름을 널리 알리게 되었습니다. 현재의 운림산방은 그가 복원하여 국가에 헌납한 것입니다. 남농과 함께 형제화가로 널리 알려진 임인(林人) 허림은 남농의 친동생으로 모든 물상을 점으로 표현하는 ‘토점화’라는 독창적인 화법을 개척하였습니다. 그러나 젊은 나이에 요절하는 바람에 그의 아들 허문을 통해 화맥이 이어집니다.
4대인 임전(林田) 허문은 안개로 시작하여 안개로 끝난다 하여 일명 ‘안개작가’라 불리며 백부였던 남농으로부터 그림공부를 익히게 됩니다. 4대에 걸쳐 이어진 이러한 화맥은 남농의 손자인 오당(五堂) 허진으로 그 맥이 이어지고 있으며 그 밖에도 많은 사람들이 화가의 길을 가고 있습니다. 세계적으로도 유례가 없는 기적 같은 일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돌이켜 보면 소치 이후 지금까지의 역사는 가장 파란만장한 시대였습니다. 그 와중에서 우리의 전통이 단절되는 경우가 많았지요. 그럼에도 200여 년을 잇는 대화맥을 끈끈하게 이어오고 있는 것을 보면 진도사람들의 진면목을 볼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운림산방에는 화실인 운림산방 외에 소치기념관, 진도역사관, 양천 허씨 문중 사당인 사천사, 소치의 영정이 그려진 운림사, 소치 선생이 직접 심었다는 연지의 백일홍, 일지매(一枝梅) 등이 있습니다.
모세의 기적, 진도의 기적우리나라 서해안과 남해안은 비교적 수심이 얕고 밀물과 썰물의 차가 크기 때문에 이른바 ‘모세의 기적’을 볼 수 있는 곳이 몇 군데 있습니다. 그중 가장 널리 알려진 곳이 바로 진도에 있습니다.
고군면 회동리와 의신면 모도리 사이 2.8㎞에 걸쳐 바닷길이 생기는 이러한 ‘진도의 기적’을 보러 찾아오는 관광객들을 위해 진도군에서는 해마다 신비의바닷길축제를 개최합니다. 올해는 5월 5일부터 7일까지 개최합니다. 뽕할머니 사당에서 열리는 뽕할머니 제사로 시작되는 이 축제는 진도 고유의 민속예술을 볼 좋은 기회이기도 합니다. 남도 들노래, 다시래기, 씻김굿, 만가와 북놀이, 강강술래 등 볼거리가 많습니다. 그밖에 물고기 잡기 행사 등 체험행사도 함께 진행됩니다.
이곳의 바닷길은 1975년 주한 프랑스 대사 피에르랑디가 진돗개 연구차 진도에 왔다가 바닷길이 열리는 현장을 목격하고 ‘한국판 모세의 기적’이라 감탄하여 프랑스 신문에 소개한 것이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답니다. 1996년에는 일본의 인기가수 덴도요시미씨가 신비의 바닷길을 주제로 ‘진도이야기(珍島物語)’ 노래를 불렀지요.

진도에서는 이렇게 바닷길이 열리는 것을 영등살이라고 부릅니다. 영등살과 관련해서 다음의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조선 초기 손동지라는 사람이 제주도로 유배를 가던 중 풍랑을 만나 표류하다가 지금의 회동마을에 살게 되었습니다. 당시에는 호랑이의 침해가 심하여 마을을 호동이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호랑이의 침해가 날로 심해져 더 이상 살기가 어렵게 되자 마을 사람들이 뗏목을 타고 의신면 모도라는 섬마을로 피하면서 황망 중에 뽕할머니 한 분만 마을에 남고 말았습니다.
뽕할머니는 헤어진 가족을 만나고 싶어서 매일 용왕님께 기원하였는데 어느 날 꿈속에 용왕이 나타나 ‘내일 무지개를 내릴 터이니 바다를 건너가라’고 일러주는 것이었습니다. 모도에서 가까운 바닷가에 나가 기도하고 있던 중 갑자기 바닷길이 열리는 것이 아닙니까. 그때서야 모도로 넘어가 있던 마을 사람들이 뽕할머니를 찾기 위해 징과 꽹과리를 치면서 마을에 도착하니 뽕할머니는 ‘나의 기도로 바닷길이 열려 너희들을 만났으니 이젠 죽어도 한이 없다’면서 기진하여 숨을 거두었다고 합니다. 이를 본 주민들은 뽕할머니의 소망이 바닷길을 만들어 영(靈)이 등천(登天)하였다 하여 ‘영등살’이라 하고 이곳에서 매년 제사를 지내게 되었습니다. 자식이 없는 사람, 사랑을 이루지 못한 사람이 소원을 빌면 이루어진다고 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