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래방에서 더러 불러보는 흘러간 옛 가요 중에 ‘번지 없는 주막’과 ‘봄날은 간다’라는 노래가 있다. 대중가요이기는 하지만 사람들의 폭넓은 사랑을 받아서 가요로서는 가히 고전의 범주에 드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곡조에 담긴 애환의 분위기도 아련하려니와 가사의 매력이 웬만한 서정시는 저리 가라이다.
젊은 세대에게는 이런 옛날 노래들이 다소 칙칙하고 고리타분하게 느껴질지 모르겠지만(나도 젊을 때는 그러했으므로), 이 땅에서 살아가는 한국인이라면 중년 고개를 넘어가는 무렵 어디쯤서 아주 자연스럽게 친숙해지는 노래로 다가오게 된다. 노래 어딘가에 숨어 있는 한국적 정서의 원형이 있기 때문에 그러하리라 여겨진다. 이들 두 노래에는 우연히도 ‘맹세’의 장면이 가사로 표현되어 있다.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맹세의 이미지’를 떠올리게 한다. 맹세 이미지에 겹쳐서 슬픔과 그리움의 정조(情調)가 나붓하게 드리워진다.
아주까리 초롱 밑에 마주 앉아서
따르는 이별주는 불같은 정이었소
귀밑머리 쓰다듬어 맹세는 길어도
못 믿겠소 못 믿겠소 울던 사람아
<‘번지 없는 주막’ 2절 가사> ‘번지 없는 주막’에 나오는 맹세는 기약할 수 없는 맹세이다. 기약이 보이지 않는 맹세는 매달리는 맹세가 되기 십상이다. 맹세다운 맹세는 본래 짧고 단호한 법이다. 맹세가 길수록 맹세의 앞길이 어두운 것은, 맹세의 말이 지니는 아이러니이다. 동시에 말로 살아가는 인생의 아이러니이다. 맹세가 부질없음을 예견하는 이별이란 얼마나 가슴 아픈가. 맹세를 가로막는 그들의 운명을 예감하기 때문에, ‘번지 없는 주막’의 맹세는 아쉽고 애잔하다.
연분홍 치마가 봄바람에 휘날리더라
오늘도 옷고름 입에 물고
청 제비 넘나드는 서낭당 길을
꽃이 피면 같이 웃고 꽃이 지면 같이 울던
알뜰한 그 맹세에 봄날은 간다
<‘봄날은 간다’1절 가사> ‘봄날은 간다’에 나타나는 맹세는 소박하다. 상대방과 상관없이 혼자 마음으로 하는 맹세일 수도 있다. 꽃이 피면 같이 웃고 꽃이 지면 같이 울자던 정도의 맹세이니 말이다. 혼자 마음으로 하는 맹세라면 깨어질 까닭도 없다. 이렇듯 소박한 맹세는 스스로 따뜻한 자긍심과 그리움을 만들어 낸다. ‘알뜰한 그 맹세’의 힘으로 지금의 심경을 봄날처럼 아름답게 우아하게 다스릴 수 있다는 것이다. 오랜 맹세를 곱게 유지하고 있는 사람은 그 맹세의 추억만으로도 봄날 같은 온기를 가슴에 지닌다. 그래서 그런지 이 노래는 한국인이 회갑이나 칠순 잔치에서 가장 애창하는 노래라 한다.
그러나 세상의 현실적 맹세들은 혼자 마음으로 하자고 하는 맹세가 아니다. 한 존재가 다른 한 존재를 향하여, 삶의 구체적 결속을 두고, 매우 중대한 사항을 굳게 약속하는 것이 맹세다. 맹세를 사회적으로 공인 받기 위하여 법원에 공증을 해두기도 하고, 심지어는 보험을 들어 두기도 한단다. 그런들 맹세의 본질이 달라지기야 할 것인가. 한용운 시인이 말하는 맹세에 대한 시적 예지를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황금의 꽃같이 굳고 빛나던 옛 맹세는
차디찬 티끌이 되어 한숨의 미풍에 날아갔습니다
<한용운‘님의 침묵’중에서>맹세(盟誓)는 지키기 위해서 생겨난다. 하지만 그것은 맹세가 인간사에서 존재하는 일면만을 본 것이다. 맹세는 지켜지는 경우보다는 깨어지는 경우가 더 많다. 날카롭고 굳은 맹세일지라도 세월과 더불어 무디고 무심해지기 일쑤이다. “아, 그렇지! 그런 맹세가 있었었지”하고, 맹세의 실체를 피부에 와 닿게 알아차리는 것은 맹세가 깨어질 때이다. 그러므로 맹세는 깨어지기 위해서 존재하기도 한다. 사들 사이의 믿음이 깨어지지 않고, 한결같이 변하지 않는다면 굳이 맹세라는 말이 생기기나 했겠는가.
각서(覺書) 또한 마찬가지이다. 반드시 지킬 것을 다짐받고 상대에게 각서를 요구하지만, 각서를 받아두었다고 철석같은 믿음이 생기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불안은 더 커진다. 각서를 쓰겠다고 자청하는 쪽은 또 어떤가. 다급하고 경황없는 장면을 어떻게 해서든 모면해 보려고 “각서를 쓰겠으니 한번만 봐 달라”고 간청한다. 그런데 그렇게 각서를 쓰는 사람은 그 다음에도 똑같은 각서를 또 쓴다. 술로 실수를 하여 아내에게 책을 잡히는 남편, 닦달을 하는 아내 앞에서, 다시는 술 마시지 않겠다고 맹세하며 각서를 쓴다. 각서 쓰고 술 끊었다는 사람을 보기는 어려워도, 무수히 각서를 써오면서도 여태 술 못 끊었다는 이야기는 쉽사리 듣는다. 맹세든 각서든 부질없기는 마찬가지이다.
맹세는 말로써 한다. ‘맹세(盟誓)’의 ‘맹(盟)’자나 ‘세(誓, 일반적으로 ‘서’라고 읽으나 ‘맹세’라고 할 때는 ‘세’로 읽는다)’자는 모두 ‘맹세하다’의 뜻을 가진 한자이다. 그런데 ‘誓’자를 자세히 보면, 이 한자 안에 ‘말씀 언(言)’자가 들어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렇다. 예로부터 맹세는 말로써 이루어져 왔고 지금도 대체로 그러하다.
아무런 담보물도 없는 말, 그 말로써 맹세를 삼아, 그것을 믿고 지킨다는 것이 허술하다고 생각했을까. 사람들은 말 이외의 방식으로 맹세의 의식(儀式)을 가진다. 격하게 맹세의 의미를 강조하는 사람들은 피를 내어 혈서를 씀으로서 맹세를 부각한다. 신체에 문신을 해 넣는 방식으로 맹세의 의식을 가지는 조직폭력배의 무리도 있다. 일부러 조직 전원이 몸에 상처를 내는 식으로 맹세를 집단 각인하는 데에 이르면, 맹세는 가히 위협에 가까운 억압이 된다. 그런 맹세조차도 지켜지는 쪽보다 깨어지는 쪽이 많다.
맹세가 말의 행위로 이루어지는 오랜 문화적 기원을 가지고 있는데도, 굳이 말로 하는 맹세는 믿지 못하겠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자본주의적 가치가 모든 신용을 물적 담보로 만 입증되는 시대를 살고 있기 때문일까. 그러나 맹세가 빛나는 것은 어떤 담보도 없이 오로지 말로써 지켜진다는 데에 있지 않을까. 그 말이란 것이 바로 마음과 정신일 터인데, 맹세는 유물론의 영역이라기보다는 유심론의 영역에 두는 것이 맞다. 맹세조차도 물적 가치로 환산될 일은 아닌 것 같다.
맹세의 가는 길을 누가 알 수 있을까만, 맹세란 것도 결국은 인간 마음이 가는 길에 놓인 것 아닐까. 인간 마음이 가는 길이란 얼마나 다양하고 예측할 수 없는가. 한 번 앉았다 일어서는 데에도 아홉 번도 더 변하는 게 사람 마음이라는데. 그렇기 때문에 맹세 또한 변화무쌍이라 해야 할 것이다. 쇠와 돌처럼 굳은 맹세[金石之盟]라고 하지만, 그것은 맹세가 그러하기를 바라는 인간의 불안한 심사를 반영한 말일 수 있다.
세상 만물 가운데 변하지 않는 것이 어디에 있으랴. 그 중에 인간의 마음처럼 변하기 쉬운 것이 어디 있으며, 그 마음 가운데도 남녀 사랑의 마음만큼 고정되기 힘든 것이 또 어디에 있으랴. 더구나 “사랑은 움직이는 것”이라는 시대의 애정 법칙을 가지고 사는 현대인들에게는 사랑을 맹세에 붙들어 매는 것이 얼마나 쿨(cool)하지 않아 보일 것인가.
한동안 선거의 계절이었다. 선거의 계절 동안 부표처럼 떠도는 맹세의 구호들을 보았다. 낙엽처럼 추락하는 맹세들을 보기도 하였다. 선거의 계절에는 맹세가 인플레이션을 겪는다. 인플레이션 된 만큼 맹세에 대한 불신이 번지기도 한다. 맹세 안 하고도 맹세한 것처럼 살 수는 없을까. 어쨌든 ‘맹세는 없다’는 생각에 한 표를 던지고 싶다.
오월이면 봄기운이 한창이다. 선남선녀들의 결혼 소식이 여기저기 전해 온다. 나는 젊은 제자들의 혼인 주례를 맡아서 그들의 혼인 맹세를 확인한다. 유감스럽게도 예식장에서 신랑 신부는 맹세의 말을 직접 하지 않는다. 주례가 읽어주는 맹세의 말을 듣고 그냥 “예” 하고 답할 뿐이다. 나는 이들이 각자의 맹세를 자기 자신의 말로 직접 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그러면서도 그들이 이다음에 살아가면서는 ‘맹세의 말’을 넘어서기를 바란다. 맹세의 말을 소홀히도 말아야 하겠지만, 맹세의 말에 너무 집착하지도 말았으면 한다. 맹세의 말에 집착하면, 상대의 실제 마음을 이해해 주기 어렵다. 자연스럽고 자유로운 사람이라면 마음도 변하고 가치도 변하고 정서도 변한다. 그 변화가 없다면 성숙은 어디서 기대할 수 있겠는가. 혹시라도 맹세의 벽에 갇혀서 ‘변하지 않는 당신’만을 요구한다면 그것은 오히려 불행을 불러 올 것이다. 맹세란 깨지기 위해서 있다는 것을 너그럽게 인정해 주라. 있는 그대로의 당신, 변하는 그대로의 당신을 사랑할 수 있으면, 그것은 어떤 맹세보다도 크고 넉넉한 사랑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뜻에서 맹세에 대한 생각을 다시 해 본다. 맹세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