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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이란 그것이 생겨난 맥락(脈絡)이란 것이 한없이 풍부하여 그 맥락의 맛을 온전히 다 살려 쓴다는 것이 여간 오묘한 것이 아니다. 말이 생겨난 맥락도 풍부하지만, 말이 사용되는 구체적인 상황 맥락은 또한 얼마나 다양하고 섬세한가. 맥락이란 소통 이론에서 학문적인 의미로도 사용하지만, 굳이 학문적 검토를 빌리지 않더라도, 말에 감돌고 있는 맥박과 생기를 말의 맥(脈)이라 불러도 무방할 것이다. 돌에는 결이 있고 말에는 맥이 있다.
한 젊은이가 어떤 중요한 과업에 매진하여 천신만고 노력을 하였다. 밤잠을 자지 않고 온갖 애를 써 가며 노력하였다. 무수히 많은 난관을 헤쳐 나가며 혼자서 노심초사하는 날의 연속이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그 일이 성공하지 못하게 되었다. 젊은이는 너무도 허탈하였다. 자기의 노력을 하늘이 몰라주는 것 같았다.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했는데, 내가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인가. 괴로워하다가 옛 스승에게 찾아갔다.
“선생님, 저는 이 일을 위해서 저의 최선을 다 했습니다. 제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이라면 어느 것 하나 빠뜨리지 않고 다했습니다. 정말 하늘도 무심하십니다.”
그러자 스승이 말하였다.
“자네는 최선을 다하지는 않았네. 자네 혼자서 수많은 고민을 하고, 자네가 할 수 있는 일은 다 해 보았겠지. 하지만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구하려는 노력을 해 보지 않았네.”
이 에피소드가 의도하는 주제를 우리는 쉽사리 눈치 챌 수 있다. 어려운 일일수록 독불장군으로 해결하기는 어렵다. 다른 사람의 생각을 빌리고, 남과 도움을 주고받는 과정에서 문제를 해결하는 지혜를 배워라. 뭐 이런 뜻의 교훈이 들어 있는 이야기라 하겠다.
나는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이런 주제와는 상관없이, 엉뚱하게도 ‘말의 맥(脈)’이라는 것을 생각하여 보았다. 궁극적으로 젊은이는 ‘최선을 다한다’는 말을 맥을 살려 쓰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말의 맥이란 그 말의 효과를 진실하고 역동적으로 살아나게 하는, 숨어 있는 의미의 효소들이라고나 할까. 사람이 맥이 없으면 허깨비 같은 존재가 되고, 말이 맥을 풍성하게 살려내지 못하면 하나마나 들으나마나 한 말, 즉 죽은 말이 된다.
그렇다면 ‘최선을 다한다’는 말, 이 말의 맥은 무엇일까.‘최선을 다한다’고 말하는 사람 쪽에서 보면, 이 말을 쓰는 순간 그는 무한의 책무감을 심리적 맥으로 감당해야 한다. 따라서 이 말은 그냥 체면치레용으로는 쓸 수 없는 말이다. 그러기에는 심오한 맥을 지니고 있는 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최선을 다하라’는 말을 처음 들었을 때, 나는 이 말에서 풍기는 어떤 비장함의 분위기 같은 것이 강하게 와 닿았다. 물론 이런 생각은 어디까지나 내 주관적인 느낌이다. 최선을 다한다는 말을 하면서 무한 책임의 비장함을 맥을 거느릴 때, 최선을 다한다는 말은 비로소 맥이 살아나는 것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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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이 나온 김에 이 말에 스며 있는 여러 의미의 맥락을 챙겨 본다.‘최선을 다하라’는 말은 간결함으로써 장중함을 불러일으킨다. 이 말이 토종의 우리식 발상을 표상하는 말이 아니라, 영어의 ‘Do your best’를 그대로 직역한 말이라는 것을 알면서, 영어식 발상에 대한 이해를 확장해 준다면, 이 말의 매력은 더 크게 다가올지도 모르겠다. 절체절명의 상황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자신의 노력을 끝까지 쏟아 부어, 마침내는 오연하고도 굳센 자아를 곧추세우기를 요구하거나 다짐할 때 쓰일 법한 말이기 때문이다. 마치 운명과도 맞서겠다는 주체의 강력한 의지를 담고 있다.
그런 점에서 이 말은 확실히 서양적 헬레니즘의 인본주의 분위기를 느끼게도 해 준다. 이런 경우 동양식으로는 오히려‘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이라는 표현이 어울릴 것이라는 생각도 해 본다. ‘최선을 다하다(Do one’s best)’에는 기필코 내가 다 감당하여 마주하겠다는 자아 중심의 성실이 극에 달하는 분위기가 있다면,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에는 사람의 몫과 하늘의 몫을 구분하여 사람이 하늘 앞에 겸허하게 수그리는 성실의 분위기를 느끼게 한다.
‘최선을 다하라’는 말은 어떤 비장함의 분위기가 동반될 때, 이 말의 진정한 맛이 우러나온다. 순정한 애국심과도 같은 어떤 고매한 다짐이 정신적 품위를 가지고 피어오르는 듯하는 것이다.
그것은 아마도 이 말에 연관된 역사적 에피소드의 맥락이 그런 의식을 가지도록 해 주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나폴레옹 함대와 맞서서 운명의 결전을 벌리기로 되어 있는 트라팔가 해전 전투에 임하여 명장 넬슨 제독이 휘하의 전 함대원들에게 했다는 비장의 한 마디가 바로 이 말, ‘최선을 다하라!(Do Your Best!)’이었다고 하지 않는가. 그리고 이 전투에서 나폴레옹 함대를 격파했다. 그러했기에 이 말이 가지는 맥락의 깊이는 한층 더 숭고해지는 데에 이르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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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우리가 일상에서 상투적으로 쓰는‘최선을 다하라’ 또는 ‘최선을 다 하겠습니다’하는 말들이 맥이 빠진 말처럼 들릴 때가 많다. 비장감이나 소명감 같은 의미의 맥은 빠진 채, 그냥 말하기 위한 말로 자동화 되는 말이 아닌가 하는 느낌을 받는다. 왠지 패배가 예상되는 경기에 임한 선수가 억지로 인터뷰할 때 마지못하여 하는 말로 흔히‘최선을 다 하겠다’는 말을 쓴다는 느낌을 준다. 내게는 그렇게 들리는 경우가 더러 있다.
실제로 성공하지 못한 일의 결과를 두고, 변명 아닌 변명을 할 때 자주 등장하는 말이 ‘저로서는 최선을 다 했습니다’하는 말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그러고 보니 나도 이런 투의 표현에 익숙해 있는 것 같다. 결전을 앞둔 트라팔가 해전에서 넬슨 제독이 병사들에게 비장하게 던졌다는 ‘최선을 다하라’의 맥이 재현되지 않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이 말 자체가 ‘최선(最善)’과는 상관이 없는 말로 변해 가는 것 같다. 그러니 ‘최선을 다한다’는 말도 별 매력 없는 말로 변질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물론 나만의 착각이었으면 좋겠다.
맥없는 말 중에 대표적인 것으로 “언제 밥이나 한 끼 합시다.” 같은 것이 있다. 식사를 같이 하자는 말인데, 지금 당장은 아니고 언젠가 하자는 것이다. 이런 제의야말로 참으로 기약할 수 없는 제의이다. 그래서 센스가 있는 사람들은 알아차린다. 그냥 인사치레로 하는 말이라는 것을 아는 것이다. ‘밥이나 한 끼 하자’는 제의에는 장소와 시간이 드러나지 않는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장소와 시간은 내가 정한다는 심리적 맥락이 있는 것인데, 이는 한없이 일방적인 호의의 표출이며 동시에 내가 네게 혜택을 베푼다는 시혜적(施惠的) 의식이 들어 있다.
만약 넘치게 진지한 사람이 있어서 “아! 그래요? 그러면 다음 주 목요일에 00식당에서 밥 한 끼 하도록 할까요?” 이렇게 못을 박으려 든다면 상대는 오히려 ‘뭐 이런 사람이 다 있나’하는 시선으로 쳐다볼지도 모른다. 그리고 당혹해 할 것이다. 아니, 자기를 놀리려고 한다는 생각을 할지도 모른다. 맥이 생동하는 말이 아니므로 마음과 마음을 전하여 움직이게 하는 말이 되기 어렵다. 이런 말은 상대가 나에게 일정한 관심을 주고 있다는 것을 나타내기는 하겠지만, 소통의 맥이 잘 살아나지는 않는 말이다.
더욱 딱한 것은 ‘언제 밥이나 한 끼 합시다’하는 제의가 그야말로 말로써만 던져 보았을 뿐, 실제로는 이루어지지 않는 경우이다. 한국 사회 성인의 사교적 대화에서 ‘언제 밥이나 한 끼 합시다’라는 말을 내 쪽에서 하고 실천 못한 경우, 남으로부터 듣고서 실천되지 못한 경우를 예거해 보라면 수도 없이 많은 사례들이 있을 것이다. 이렇게 되면, ‘언제 밥이나 한 끼 합시다’는 말은 맥없는 말을 넘어서서 실없는 말이 되고, 안 하기보다 훨씬 못한 말이 된다. 말에 따라 붙는 살아 있는 맥을 진중하게 거느리지 못하고, 말 자체에만 매달렸기 때문이다. 말은 플러스의 힘과 마이너스의 힘을 각각 극한으로 가지는 것이다. 말로써 인심을 얻어 흥하기로 한다면 끝이 없고, 말로써 인심을 잃어 패가망신하기로 한다면 그 또한 끝이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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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에는 돌의 결이 있고, 말에는 말의 맥이 있다. 돌의 결을 아는 사람이 돌을 제대로 다룰 수 있듯이, 말의 맥을 아는 사람이야말로 말의 진정한 깊이를 깨우쳐 쓸 수 있는 사람이다. 사람들이 바쁘게 쫓겨 살면서, 생각을 대충대충 하면서 산다. 이렇듯 사람들이 깊게 생각하지 않고 살게 되면서, 말의 맥을 곱씹어 생각하여 소중히 챙기어 쓰는 사람들도 없어져 간다.
말의 맥을 진중하게 사려한다는 것은 우리들 관계와 우리들 사는 생태를 각성한다는 것과 같다. 말의 황폐는 관계의 황폐를 만들어낸다. 배려가 없는 건성의 말들이 생긴다. 더러는 자신의 말이 남에게 얼마나 상처의 창이 되는지를 모르고 무심코 휘두른다. 그래서 말과 마음이 겉도는 언어 생태를 우리는 살고 있다. 맥으로 연결 소통되지 않기 때문이다.
말의 맥을 의미 있게 짚어 본다는 것은 그 자체가 인문정신의 정수라고 할 수 있다. 말의 맥이 곧 인간의 심리에 대한 이해이거나, 인간이 모여 사는 사회에 대한 이해이기 때문이다. 말의 맥은 곧장 인간이 지어놓은 문화에 관통해 있고, 인간의 역사가 던지는 의미의 그물에 연결되어 있기에 더욱 그러하다. 언어능력의 진수는 그냥 말을 유창하게 잘 하는 데에 머물지 않고, 말의 심리적 사회적 문화적 역사적 맥을 깊이 이해하는 데에 가 닿은 것임을 알아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