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직을 하고도 80을 넘긴 선배들이 기라성인데 언감생심 내가 후배들에게 무슨 말을 한다는 것은 분명 주제 넘은 일이다. 나는 2000년 이른바 햇볕정책을 표방하던 김대중 정부가 정년을 단축함에 따라 어느 날 문득 준비되지 않은 채 62세의 피 끓는 나이로 교직을 떠난 몸이다. 갑자기 당한 일이라 나는 날개가 부러진 비둘기처럼 휘청거리는 몸으로 거리를 배회했다. 생뚱맞게 지난 동료들에게 안부를 묻기도 하고 생각나는 제자들에게 전화도 해봤지만 그들로부터 나의 헝클어진 정서를 보상(補償)받을 수는 없었다. 주변은 너무도 고요했고 나는 그 하얀 공백의 중심에 있었다. 누구라도 내 손을 잡아주며 위로 한마디라도 건넨다면 금세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고 내 명치 끝을 밀고 올라오는 국가와 사회에 대한 서운함을 누를 수가 없었다. 재직시절, 나와 너무도 가까이 교분을 하던 교육동지들도 어디론가 사라지고 나하고 형님 동생 하면서 혈친(血親)처럼 서로 돕고 아껴주던 선후배들도 없어졌다. 청년교사 때부터 내가 문턱이 닳도록 다니던 교직단체도 점점 멀어져 가더니 지금은 피안(彼岸)의 저쪽 침침한 시야 언저리로 멀어져 갔다. 내 모습은 마치 무장해제된 병사처럼 추레해졌고 내 주변은 동공화(洞空化) 현상이 된 것처럼 고즈넉하고 쓸쓸하기만 했다. 오랜 공직생활에서 묶였던 ‘룰’이 해제되는 어떤 해방감을 느낀 퇴직자들은 새로 집단을 만들어 해외여행을 가기도 하고 삼삼오오 떼 지어 경향 각지의 맛있는 집을 찾아다니며 식도락을 즐기기도 한다. 그러나 그런 것들은 모두 물질을 수반해야 하기 때문에 한계가 있었다. 오히려 그런 체험을 하고 나면 마음이 더욱 허허로움을 느끼게 되고 여행 중 세계 여러 곳의 화려한 풍물을 보고 돌아오면 다시 엄습해오는 정신적 가난의 ‘쓰나미’를 주체할 수 없게 되기도 한다. 모두, 40여 년간 오로지 과업지향적인 생활에 찌든 나의 자승자박이랄 수밖에 없다. ‘재직 중에 직장생활을 포함해 좀 더 삶에 대한 진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기회가 있었으면 좋았을 것을…’ 하고 있을 때 마침 현직 시절 우리들과 더불어 교육현안을 논하고 교육정책을 구안하던 <새교육>에서 이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됨에 천학비재(淺學非才)한 내가 졸필을 들게 되었다. [PAGE BREAK] Turning Point 무사분주(無事奔走)의 나날, 인생을 세 등분으로 나누어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학창시절은 전반기요, 재직시절은 중반기요, 퇴직 이후는 후반기라고 말한다. 전반부는 ‘초심’으로 지내고 중반부는 ‘열심’으로 살고 후반부는 ‘뚝심’으로 살아야 한다며 세칭 삼심론(三心論)을 제기하기도 한다. 초임부터 교직은 바쁘다. 거창한 정책을 수립하고 그것을 구현하느라 바쁜 것이 아니라 교수 • 학습에 대한 연구를 게을리할 수 없고 거기에다 매월 각종 교내외 행사가 있기 때문에 잡다(雜多)한 일들로 교단생활은 하루도 영일(寧日)이 없는 곳이다. 그런 교직의 업무 특성 을 두고 어떤 사람은 무사분주(無事奔走)라고 한다. 일은 없는데 바쁘다는 뜻이다. 게다가 교사로서의 품위를 유지해야 하고 학생들과는 물론 학부모와의 관계도 원만하게 유지해야 할 뿐만 아니라 가정생활도 영위해야 하기 때문에 1인 다역(多役)을 하는 경우가 많다. 30여 성상을 그런 틀 속에 있게 되면 ‘매너리즘’에 빠져 자기 성찰의 시간을 잃어버리는 경우가 적지 않다. 날마다 상황이 바뀌는 아이들과 지나다 보면 어느새 계절이 바뀌고 학교 행사에 매달리다 보면 어느새 해가 바뀌어 버린다. 방학은 방학대로 바쁘고 휴일은 휴일대로 바쁘다. 그런 환경에 익숙해버리면 다람쥐 쳇바퀴 돌듯 생활 감각조차 잃어버리기 쉽다. 교단에서 새치가 하나, 둘 늘다가 귀밑머리가 하얗게 물들면 휭 하니 50줄을 넘기고 이순(耳順)을 바라본다. 교단에서 회갑을 보내고 나면 바로 코앞이 정년이다. 관자재(觀自在)할 시간을 찾아, 한 번 자신이 걸어온 길을 성찰할 만한 시간이 없다. 그래서 자신의 생활에서 성찰의 시간을 마련하는 게 좋다. 그것이 ‘터닝 포인트’(turning point)가 되기 때문이다. 거기가 바로 인생의 정점이요, 반환점이요, 또한 한 ‘텀’(term)을 설계하고 걸어가야 할 출발점이기도 하다. 불가의 경문에 반야심경(般若心經)이란 것이 있다. 8만 4000 법문 중에 기본이 되는 것으로 불자가 아니더라도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자료이다. 거기에 실려 있는 270자 중에서 첫 번에 나오는 말이 바로 ‘관자재’(觀自在)이다. 일생을 살아가면서 자신의 존재에 대하여 자주 돌이켜 봐야 했지만 우리는 그럴 사유의 시간을 향유하지 못했다. 그런 시간은 향후 내가 독자적인 행보를 통하여 제2의 입신을 해야 할 중차대한 시점이랄 수 있으며 자신의 삶에 쉼표를 찍는 일에 견줄 수 있다. 그럴 때 이곳, 저곳에 해두었던 메모도 정리하고 일기를 쓴 사람이라면 숱한 나날의 이야기를 모아 퇴직할 때 문집을 만드는 데 좋은 참고자료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교직생활에서 따분했던 시간에 끼적거려 두었던 것이나 아이들을 통해 감동을 받았던 순간의 사연들을 모으면 훌륭한 수필집이나 시집도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자료는 버리는 것이 아니다. 존재하는 것은 모두 필요한 것이다. 다만 그 기회가 다를 뿐이다. 위기는 항상 기회를 동반한다. 위기는 교단이라도 예외는 없다. 어떤 과업을 수행할 때 자료가 간절히 필요할 때가 있고 문제를 해결하는 데 그 방법이 막연할 때가 있다. 그럴 때 자력(自力)이 부족하면 자료(data)를 동원해야만 한다. 자기 성찰의 시간에는 제자들이나 동료들의 주소와 전화번호도 정리해야 하고 이런저런 행사 때 찍어두었던 사진이나 자질구레한 기록물도 간추려 놓아야 한다. 우리는 오래도록 소각문화에 젖어왔기 때문에 없애는데 익숙해 있다. 존재하는 것은 모두 필요한 것이다. 언제, 어떻게 쓰이느냐에 따라 효용가치가 달라질 뿐이다.
정상에서 관자재(觀自在), 흔히 인생의 정점을 직위로 해석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그건 잘못된 관점이다. 교장이든 교감이든 교사든 그것은 제도의 이름에 불과하다. 그동안 나를 구속했던 조직의 틀에서 한 걸음 물러나 아주 담담한 마음으로 세상을 내려다보면 보는 이의 마음과 생각에 따라 우물 안에서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고 근시안(近視眼)으로 차단되었던 것들이 드러난다. 내가 경험한 바로는 IT, ET, NT 등 지금까지 내가 살아온 삶의 터전과 전혀 다른 무한경쟁의 외계(外界)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곳은 일상적인 ‘콘셉트’가 다르고 의식이 다르고, 언어가 다르고, 살아가는 삶의 형태가 다르고, 인간관계가 다른 점을 느낄 수 있었다. 여기서 우리의 오랜 전통가치였던 유교의 온고지신(溫故知新)의 논리가 맞지 않음을 알게 된다. 그것은 인문학에서나 통하는 말이지 자연과학에서는 옛것을 연구해 거기서 새로운 지식이나 도리를 찾아낼 수는 없었다. “야, 이런데도 있었구나!”하는 생각이 들면서 강한 호기심을 자극했다. 그러나 그곳에 함부로 뛰어들어서도 안 되고 그렇다고 도외시해도 안 된다. 불가근(不可近) 불가원(不可遠)의 위치에서 바라보지만 관심조차 저버려서는 안 된다. 어쩜 그것은 내가 훗날 다시 배워야 할 새 학습의 장(場)이 될지도 모르는 일이다. [PAGE BREAK] 내가 만든 생애곡선 자신이 현존(現存)하는 실존적 시간, 성경의 창세기에 보면 태초에 하나님이 계시다로부터 시작해 처음에 빛이 있으라 하심에 밤과 낮이 되고 흑암이 혼돈할 때 물과 뭍으로 나누어 바다와 궁창을 만들고 갖가지 동물과 사람을 만드는 이야기가 나온다. 그런데 시간이라는 개념이 없다. 시간을 도형화하기는 어렵지만 다음과 같은 선분으로 표시할 수 도 있을 것이다.
——————— ④ ———————— (time) ① ② ③ ⑤
보통, ②부터 ③까지의 시간을 ‘역사적 시간’(Historic time)이라 하고 인간이 출생과 더불어 무덤까지 살아온 생애를 가리킨다. 이른바 생로병사의 과정을 말하고 기독교에서는 알파와 오메가라 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부분에 대해 관심을 많이 둔다. ①부터 ⑤를 무시무종(無始無終)의 시간(Eternal time)이라 한다.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시간이다. 역사적 시간을 벗어난 시간이다. 불가에서는 이 부분의 시간을 전세, 현세, 내세로 해석해 중생은 끊임없이 삼계육도(三界六道)를 돌고 돌며 생사를 거듭한다는 윤회론(輪回)론에 이른다. ④는 실존적 시간(Exist time)이다. 역사적 시간 안에서 현재 자신이 존재하고 있는 시간을 말한다. now and here(현재 그리고 여기)를 지칭하는 시간이다. 소크라테스는 그의 제자들과의 대화를 통하여 이 시간을 가장 소중한 시간이라고 했다. 제자들이 스승에게 “일생을 살아가는데 가장 소중한 시간은 언제였습니까?”하고 물었을 때 그는 “지금(Now)”이라고 했다. 다른 제자가 “그럼 가장 소중한 장소는 어디였습니까?”하고 물었더니 거침없이 “여기(Here)”라고 했다. 마지막으로 “가장 소중한 사람은 누구였습니까?”하고 물었더니 그는 즉시 “당신(You)”이라고 했다는 이야기는 무척 새롭다.
신은 누구에게나 똑같은 시간을 할애, 했다. 그런데 그것이 특정한 인물과의 만남이나 시대적 상황, 혹은 자신의 노력에 따라 다양한 모양으로 변하기 시작한다. 그러므로 그런 나 자신은 여러 형태의 시간 속에서 유전(流轉)을 거듭하며 알게 모르게 변화를 맞게 된다. 특정한 시대를 만나서 변화를 겪기도 하고 어떤 상황을 맞나 변화하기도 한다. 그중에서도 가장 많은 변화를 주는 것은 어떤 사람과의 ‘마주침’(encounter)에 따라 앞서 제시한 시간이라는 수평선(水平線)이 다양한 형태의 곡선으로 굴절을 거듭하게 된다. 성경에 보면 한낱, 어부에 불과했던 ‘시몬’이 갈릴리 바닷가에서 예수를 만남으로 인해 의심, 배신 등 온갖 우여곡절을 겪다가 마침내 십자가를 거꾸로 지고 순교하면서 베드로가 된 사건이나 베토벤이 오스트리아의 빈에서 쥬리에타와의 만남을 통해 월광 소나타를 작곡하게 되는 경우, 한석봉이 떡장수 어머니를 만남으로 희대(稀代)의 명필이 된 사실(史實)을 알 수 있다. 교직에서도 어떤 교장, 교감, 학년부장, 심지어는 이웃 반 담임을 어떻게 만나느냐에 따라 교직곡선(敎職曲線)이 달라지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먹기를 즐기는 학년부장을 만나면 매일 오후에 군것질을 하게 되어 비만이 되기도 하고 교수 • 학습은 팽개치고 경마, 화투, 카드놀이에 빠진 동료를 만나면 잡기에 빠지게 된다. 이와 같은 현상을 옛날 성현들은 근묵자흑(近墨者黑)이란 말로 썼다.
서울대공원에서 만난 노친들, 퇴직자들도 다름없이 유유상종(類類相從)하게 된다. 경기 과천에 있는 ‘서울대공원’에 가면 여러 퇴직자들을 만나게 된다. 입장료가 무료인데다 잘 정돈된 산책로가 있고 명산 청계산(淸溪山)이 어울려 경관이 좋기 때문이다. 그 길을 수도승처럼 머리에 모자를 눌러쓰고 고개를 숙인 채 혼자서 걷는 사람도 있고 학교 동창이나 동료들이 그룹을 지어 정치, 경제의 현안을 논하고 사회 문제를 이야기하며 시끌벅적하게 걷는 사람도 있다. 그런데 유난히 내 눈이 끌린 집단이 있었다. 보아하니 모두 70줄은 넘긴 것 같고 서로 기탄없이 반말을 주고받는 것을 보면 학교 동창인 듯했다. 종종 박장대소를 하며 지난 이야기를 나누는가 싶더니 어디쯤에선가 원두막에 자리를 잡는다. 옹기종기 대여섯 명이 무릎을 마주하고 앉더니 프린트물을 나누어 갖는다. 그리고 그중에 한 노인이 선독(先讀)하면 나머지 친구들이 따라 읽는다. 틀리면 여러 번 반복하기도 하고 군데군데 중요한 부분은 해석도 해준다. 영어공부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자 또 한 노인이 배낭에서 종이를 꺼내 나누어 준다. 역시 여러 번 소리 내어 낭독하고 설명을 했다. 한문이었다. 거기서 마치는가 했더니 이번에는 다른 노인 한 사람이 생활 중국어를 가르치는 것이다. 묻자 하니 매주 수요일에 모여서 등산을 하고 친구 중에 일가견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통해 여러 가지 공부를 한다는 것이다. 모두 교직에서 퇴직한 교사들이었다는 점에 다시 한 번 놀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