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적 근거가 없다는 것이 밝혀져도 사람들은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고, 이전에 믿었던 대로 믿으려고 하는 경향이 있다. 그 대표적인 것이 바로 혈액형에 관한 믿음이다. 그런가 하면 과학적 근거가 밝혀졌는데도 그 근거를 애써 무시하려는 경향도 있다. 담배가 건강에 해롭다는 것이 확실하게 판명되었는데도 담배를 끊지 못하는 경우가 대표적이다.
이런 걸 보면 사람은 과학적 근거에만 매달려 사는 존재가 아닌지도 모르겠다. 사람들은 자기가 믿고 싶은 것만 믿으려 하는 ‘인식의 감옥’ 하나씩을 마음 안에 지어놓고 산다는 생각도 든다. 특히 정치적으로 어떤 특정한 사안과 관련해 믿고 싶은 것만 믿으려는 사람들끼리 모이면 제법 단단한 ‘당파(黨派)’ 하나가 만들어진다. 그런 종류의 당파성이 넘쳐나는 사회는 문제가 있는 사회이다. 소통이 이루어지기 어렵기 때문이다. 협상과 타협도 기대하기 힘들고, 오로지 대립과 갈등만 증폭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어떤 현상에 자기가 믿고 싶은 대로만 생각하고 움직이는 사람들을 모두 당파성의 관점으로 보는 것도 온당하지는 않다. 과학적 근거가 없는데도 그렇게 믿으려는 심리에는 그럴만한 사연이 있을 것이다. 즉 그런 일에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는, 인간 보편의 주제가 그 어딘가에 들어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앞에서도 잠깐 언급했지만 혈액형에 대해서 일반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인식이 그러하다. 혈액형에 따라 사람의 기질이 특징 있게 나타난다는 인식을 우리는 좀체 버리지 못한다. 흔히들 A형은 잘난척하고 B형은 소심하다는 등의 이야기를 즐겁게 받아들인다. 과학적으로는 아무 근거가 없다는 데도 그런 이야기를 은연중에 믿으며 자주 화제에 올린다. 누군가 과학적 근거가 없다고 말하면 그러거나 말거나 재미있으면 됐지 그게 무슨 상관이냐고 말한다.
그러므로 ‘과학적으로는 타당하다는 것’과 ‘대중이 인간 보편의 관심사로 삼는다는 것’은 서로 별개라는 것을 인정해야 할듯하다. 이렇듯 누구나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는 인간 보편의 주제(Topic)는 그 자체로 강한 소통성을 안으로 지니고 있는 것이다. 그만큼 소통적 파워를 발휘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혈액형에 따라 인간 기질을 논하는 주제는 적어도 대중 사회적으로는 ‘소통성이 높은 주제’라고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텔레비전 예능 프로그램에서 자주 화제가 되는 내용들이 대체로 그러하다. 소통적 창의가 있는 사람은 이런 주제들을 사회적 상황에 맞게 보다 생산적으로 활용하는 사람이라 할 수 있다.
연전에 어떤 여행 패키지에 참여해 이스라엘을 다녀왔다. 일행은 모두 15명이었다. 각기 서로 모르는 사람들로 이루어진데다가 직업이나 경력도 상당히 이질적이었다. 나와 같은 선생도 있었고, 목사님, 사업가, 주부, 대안교육 운동을 하는 분, 선교사, 대학원 과정의 학생도 있었다. 나이도 들쑥날쑥해 30대에서 60대까지 다채로웠다. 여행이 계속되는 동안 한참 서먹서먹했다. 매일 아침 호텔에서 나와 관광버스에 올라타면 각자 자기 자리에서 묵묵히 묵상을 하는 그런 분위기였다. 점잖은 체면을 앞세우는 분들이어서 분위기가 중후하다 못해 다소 답답하고 부자유스러웠다. 자아가 자유롭게 개방된 인간적 소통이 필요하다고나 할까. 사흘째 되던 날 일행 중 40대의 J교수가 앞으로 나가서 마이크를 잡았다. 그가 한 말을 그대로 여기 옮겨 본다.
“여러분, 혈액형에 따라 사람 기질이나 성격이 다르다는 것 잘 아시지요. 제가 이 내용을 알기 쉽게 잘 요약해 드리겠습니다. 잘 기억해 두세요. 물론 이것이 과학적으로는 아무 근거가 없다는 것도 함께 말씀드립니다.
먼저 A형 혈액인 사람들은 한마디로 ‘오이지’입니다. 오이지가 무엇이냐 하면 ‘오만하고 이기적이고 지지리도 못났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오 · 이 · 지>입니다.
다음 B형 혈액인 사람은 ‘소시지’입니다. 소시지가 무엇이냐 하면 ‘소심하고 시기심 많고 지지리도 못났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소 · 시 · 지>입니다.
다음 O형 혈액인 사람은 ‘단무지’입니다. 단무지가 무엇이냐 하면 ‘단순하고 무식하고 지지리도 못났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단 · 무 · 지>입니다.
다음 AB형입니다. 참고로 말씀드리면 저는 AB형입니다. AB형은 ‘3지’, 즉 ‘Three 지’입니다. ‘3지(‘Three 지)’가 뭐냐 하면 ‘지지리도 못났고, 또 지지리도 못났고, 또 지지리도 못났다’는 뜻입니다.
이런 설명 들으니까 여러분 속상하시지요. ‘3지(Three 지)’인 저는 오죽하겠습니까. 그런데 제가 드린 말씀 중에 우리 모두에게 공통되는 것 하나가 있습니다. 그게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우리 모두 잘난체해 봐야 알고 보면 다 ‘지지리도 못난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제부터는 거리낌 없이 서로 못난 것 시원하게 펼쳐 보이면서, 앞으로 함께 여행하는 동안 더 인간적으로 사귀고 재미있게 지내도록 합시다. 제 이야기 잘 들어주셨으니 지지리도 못난 제가 못 부르는 노래이지만 노래 한 곡 하고 들어가겠습니다.”
박수가 터져 나왔다. 이후 우리들의 여행 분위기가 싹 달라진 것은 더 말할 것도 없다. 사람들은 이 혈액형 이야기를 듣는 동안, 그것이 대충 아는 내용임에도 불구하고, 눈과 귀를 바싹 집중했다. 다 자신의 자아를 구명하는 문제이고, 동시에 인간 보편의 관심사이기 때문이다. 들려주는 내용에 따라 먼저 자기를 확인하고, 이어서 옆자리 사람의 혈액형을 묻는다. 폭소와 공감이 터져 나왔다. 15명의 작은 집단이지만 이 이야기 하나로 ‘대동축제(大同祝祭)’의 분위기가 되었다.
이후 우리에게는 ‘오이지’, ‘소시지’, ‘단무지’라는 말이 수시로 터져 나왔다. 이들이야말로 본래는 밥상에 올라오는 기본 밑반찬의 대명사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여행이 끝날 때까지 우리들 인간적 사귐의 밑반찬으로 작용했다.
나는 J교수의 이 스피치를 내가 경험한 수많은 스피치 가운데 매우 인상적이고 뛰어난 스피치로 기억한다. 사람들 사이에 대화가 별로 없는 어색하고 부자유스러운 상황을 일시에 바꿀 수 있는 소통성 높은 주제를 골랐다는 점이 돋보였다. 그리고 모인 사람 누구나가 관심 가질 수 있는 소통성 높은 주제(혈액형 이야기)를 선정한 센스가 정말 놀라웠다. 동시에 뛰어난 유머감각을 보여주었다. 그냥 웃고 즐기는 유머를 넘어 웅숭깊은 인생 교훈 하나를 은은한 울림으로 귓전에 남게 하는 효과까지 살려놓았다.
오늘날 우리들 소통은 대체로 쓸쓸하다. 서로가 자아의 내면은 드러내지 않은 채, 포장과 디자인만으로 만나려 한다. 또한 현대인들은 자신의 진정한 이름으로 불리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저 그런 수단으로 취급되어 기껏 기호화된 객체로 인식된다. 그런 문화 속에 살다보니 심지어는 만남과 소통을 쇼처럼 처리하는 데 익숙한 도시인들도 많다. 남에게 과시하기 위한 수단으로 짝퉁 소통을 추구하는 데에 더 관심을 가진다. 그런 만남들은 알게 모르게 치열한 경쟁의 예각 속에서 이루어진다. 그럴수록 만남과 소통에 대한 불안과 의구심만 키우게 한다. 그래서 겉으로는 만나고 어울리고 함께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 같아도 마음에 위안과 평화는 없고 왠지 쓸쓸하고 외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