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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승과 제자 사이

지난 5월 인성교육범국민실천연합은 가정의 달을 맞아, 인실련이 추진하는 감사나눔운동의 일환으로 ‘선생님·학생·학부모 자랑 글쓰기 대회’를 열었습니다. 본지에서는 이 대회 수상작을 소개할 예정이며 이번 호에서는 ‘학생부문 작품’에서 우수상을 받은 수원 영생고등학교 김황곤 교사의 글을 소개합니다.


 교직에 들어온 지 9년이 되었다. 현장의 어려움을 모른 채, 푸른 꿈만 꾸었던 시절. 그때는 단지 ‘교사가 되고 싶다’가 내 삶의 목표이자 전부였다. 그러나 이제는 고등학교 입시현장 한가운데서 아이들을 지도하고, 함께 생활하면서 그 ‘청운의 꿈’을 잊고 매일 반복되는 일과를 보내고 있는 나를 발견하곤 한다. 발령 초기의 열정은 어디로 갔을까?
얼마 전 학생들과 수업시간에 이야기하던 중 아이들이 바라보는 ‘나’를 말하게 되었다. 언제부터인가 나는 ‘학생’에서 ‘교사’ 신분으로 바뀌어 있었고, 그 사실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아이들 또한 나를 ‘선생님’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래서 가끔 수업시간에 나의 학창 시절 이야기를 해주면 아이들은 신기하게 쳐다본다. 흡사 아이들이 “선생님도 학생 시절이 있었나요?”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렇다. 나도 예전에 지금 가르치는 아이들처럼 학생이었던 시절이 있었다. 또한 나를 이렇게 성장하게 해 주신 훌륭한 선생님들도 아직 교단에서 나보다 더 열심히 생활하고 계신다. 그렇지만 나는 나의 선생님의 존재를 까마득하게 잊고 살았다. 그리고 늘 ‘바쁘다’는 핑계로 선생님께 간단한 연락만 드린 채 찾아뵙지 못하고 있다.
또한 그동안 나에게 배운 많은 제자들이 있다. 그들에게 ‘나’도 ‘선생님’으로 기억되고 있을 것이다. 과연 나는 그들에게 ‘어떠한 선생님이었을까?’하는 생각을 하면 참으로 미안하고 부끄러울 뿐이다. 나를 가르쳐 주신 선생님들처럼 그들을 잘 가르쳐 주었을까? 항상 부족한 마음에 미안함이 앞선다.
이렇듯 부족한 나를 하나하나 완성되게 만들어주신 선생님과 좌충우돌하면서도 신뢰하며 따라온 나의 제자들이 있어서 내가 지금까지 아이들과 호흡하고 있는 것이다. 참 감사할 따름이다. 이렇게 교사로 있게 된 감사한 ‘그들’의 이야기를 해보고 싶다.
나의 학창 시절 “선생님! 짜장면 사 주세요”
18년 전 고3 시절. 집안이 어려워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졸업 후 취직하자는 마음으로 학교에 다녔다. 그러던 고2 말에 뒤늦게 대학 진학을 해야겠다는 마음이 생겼고, 공부를 시작하게 되었다. 그러나 안 했던 공부를 해야 했기에 매우 힘든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게다가 성적도 하위권이었고, 해놓은 공부도 없어 ‘맨땅에 헤딩’하는 심정으로 책을 봤다. 성적은 노력한 것만큼 오르지 않았다. 그래서일까? 선생님께 불려 가는 것은 늘 무서웠다.
어느 날 점심시간, 담임선생님께서 나를 부르셔서 밖으로 데려가시는 것이었다. 속으로 ‘무슨 일일까?’하는 마음에 주눅이 든 채 선생님 뒤만 쫓아갔다. 선생님은 나를 데리고 학교 근처 분식집으로 들어가셨다. 그리고 ‘돌솥 비빔밥’을 시켜주셨다. 평소에 무뚝뚝하셔서 쉽게 다가갈 수 없었던 분께서 점심이라니……. 점심을 앞에 두시고는 ‘열심히 해라’ 한마디만 하시고 식사를 하셨다. 그때 나는 밥이 목으로 넘어가는지, 코로 넘어가는지 모르게 먹고 온 기억밖에 없다. 그러나 지금도 잊히지 않고 확실히 기억하는 것은 ‘열심히 해라’는 말씀이었다. 그 말씀 때문이었을까? 이후 나는 더욱더 열심히 공부했고, 대학에 진학했다. 대학 진학 시 학과 선택과 진로 선택에서도 고3 담임선생님의 영향이 컸던 것 같다. 그래서 교직을 이수하게 되었고 교사까지 되었다.
대학 시절, 교육 실습 때 선생님을 잠깐 뵌 적이 있었다. 그때도 선생님께서는 맛있는 점심을 사주셨는데, 그때 선생님께 약속을 드린 것이 있었다.
바로 “선생님, 다음엔 제가 꼭 점심을 대접하고 싶습니다”였다. 하지만 그 약속을 10년이 지난 지금까지 못 지키고 있다. ‘선생님의 믿음과 가르침, 그것이 없었다면 현재의 내가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최근에는 SNS로 간간이 선생님께 연락을 드린다. 얼마 전 ‘스승의 날’ 늦은 밤에 SNS로 인사를 드리게 되었다. 나는 내 학생들에게 받을 줄만 알았지, 정작 나의 스승님께는 인사를 드리지 못한 배은망덕한 제자가 돼 있었던 것이다. 조심스럽게 스승의 날 감사 인사를 드렸더니 이번에도 따뜻한 문자를 보내주셨다.
“열심히 고민하고 있는 것 알고 있다. 더 가다 보면 찾는 게 보일지도 모르지. 그때까지 가봐. 가는 만큼 이득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래 짜장면 먹으러 와라 나도 보고 싶다.”
그동안 나의 SNS 게시판의 글을 읽으시고 멀리서 지켜보시고 계신 것이었다. 30대 후반이 된 제자를 아직까지도 지켜봐 주시고 지도해주시는 선생님! 이 분을 통해서 내가 진정한 교사가 되어 가고 있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이귀원 선생님! 정말 보고 싶습니다. 그리고 감사합니다. 선생님! 올해는 꼭 짜장면 꼭 사주세요. 아니, 제가 사드리겠습니다.

나의 교사 시절 惡童들이 삶의 樂童들로 바뀌다
담임을 하다보면 정말 다양한 아이들로 구성된 반을 맡는 경우가 있다. 나 역시 그런 경험이 있는데 그 아이들은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2008년, 학교에서 말썽쟁이로 구성된 아이들이 모인 반을 맡게 되었다. 인사 발령이 나던 날 휴직하고 싶을 정도로 정말 막막했다. 아니나 다를까, 개학 후 우리 반은 모두의 예상대로 하루하루를 화려하게 보내고 있었다. 무단 결과 및 결석, 무단 조퇴, 흡연, 수업 중 소란함, 여느 인문계 고등학교에서 느낄 수 없는 ‘혼란함’ 그 자체였다. 하지만 담임으로서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안 되겠기에 여러 방법으로 회유하고 혼내면서 차츰 질서를 잡아가게 되었다.

그중에 악동(惡童)으로 K군과 Y군이 있어 소개하려고 한다.
어느 날 K군은 병원 진료를 위해 저녁 시간에 외출한다고 했다. 의심스러웠지만 아픈 아이를 그냥 둘 수 없어서 외출증을 써서 내보냈는데 시간이 지나도 오지 않는 것이었다. 한참 후 K군이 교실에 돌아왔는데 옷과 몸에서 담배 냄새가 났다. 자초지종을 물으니 “병원에 다녀왔다”는 말만 반복했다. 결국 병원에 전화해 진료 기록을 조회해 본 이후에야 병원에 온 기록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됐다. 부모님께 연락을 드리고 나서야 아이가 “병원에 안 가고 PC방에 가서 흡연을 했다”는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하지만 부모님께 연락이 간 상태라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K군의 아버지는 군인이셔서 무척 엄하셨다. 결국 한걸음에 달려오신 K군의 아버지는 아이를 혼내고 집으로 데려가셨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었다. 아이를 데려가 연병장에 속옷 바람으로 세워 놓으신 후 엄청나게 혼내셨다는 것이다.
그 후 K군의 아버지를 따로 만나 상황을 들을 수 있었다. 어머니께서 암으로 돌아가시고 유치원 다니는 동생과 K군 그리고 아버지 셋이 군인 아파트에서 사는데 친할머니·할아버지가 가끔 와서 아이를 봐 주신다는 것이었다. 또한 어머니가 돌아가신 지 얼마 되지 않아 아버지께서도 K군에게 많이 의지를 한다고 하셨다.
아버지의 애틋한 부성애에 K군을 ‘지도’의 대상이 아닌 ‘관심’의 대상으로 바라보게 되었다. 그 후 K군과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상담을 해 본 결과 아이의 심성이 매우 곱고, 가족에 대한 책임감과 동생에 대한 사랑이 유독 남달랐음을 알 수 있었다. 아버지 역시 아들에 대한 관심이 정말 크셨다. K군도 상담을 통해 나와 신뢰를 쌓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동안 형성된 잘못된 습관은 빨리 쉽게 고쳐지지는 않았다. 그러나 1년간 많이 좋아졌고 학기 말에는 2학년 초기와 같은 문제행동을 보이지 않았다. K군은 매우 성실한 학생으로 변해 있었고 3학년 때에는 열심히 공부해서 대학에도 진학하게 되었다.
K군은 졸업 후에도 종종 찾아오곤 했다. 그 후 더욱 놀라운 사실은 K군이 아버지의 뒤를 이어 직업군인의 길을 택했다는 것이다. 훈련소에서 보낸 편지를 읽으면서 반듯하게 자란 K군에 무척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또 휴가 중에 나를 찾아와 인사하는 늠름한 모습에 얼마나 뿌듯했는지 모른다. 지금도 어딘가에서 나라를 지킬 K군을 생각하면 무척 뿌듯하다. 이제는 자신의 삶을 즐기는 악동(樂童) K군에게 찬사를 보내고 싶다.

또한 우리 반 부반장이었던 Y군의 이야기를 하고 싶다. Y군은 껄렁하고 반항기가 눈에 가득했다. 그 아이가 우리 반 부반장이 되었을 때 사실 걱정이 많았다. 반장과 부반장이라면 뭔가 모범을 보여야 할 텐데 전혀 예상하지 못한 아이가 부반장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나마 부반장이라고 해서 마음을 다잡던 중에 일이 하나 터졌다.
Y군이 급우를 때린 것이다. Y군을 불러 이리저리 이야기하면서 혼내는데 갑자기 “XX, 학교를 관두면 될 거 아냐!”하며 울면서 교복을 내치고 뛰어가는 것이 아니겠는가? 결국 그의 반항기가 터지게 된 것이다. 뒤쫓아가서 아이를 잡고 다독여주기 시작했다. 아이는 펑펑 울었다.
그리고 다시 이야기를 시작했다. 아이의 반항과 분노는 학교가 아닌 그의 삶에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 녀석도 내가 품어야 할 녀석, 부모님과 전화 상담을 통해 아이를 한 번 더 잘 알게 되었고, 이후 아이와 상담을 자주 하게 되었다. Y군 역시 한바탕 울고 나서야 마음의 문을 연 것이다. 상담을 통해 아이가 고민하고 있던 문제 중 하나가 ‘진로’라는 것을 알게 됐다. 운동을 좋아하지만 성적이 안 좋아 자신의 미래에 대해 막막해하는 모습을 보고, ‘직업군인’을 소개했다. 아이와 함께 직업군인이 되는 방법을 함께 알아보았다. 아이도 ‘이러한 방법이 있구나’하면서 무척 좋아했다.
결국 이 녀석도 K군과 같은 직업군인의 길을 택하게 되었고, 지금도 열심히 군 생활을 하고 있다.
가끔 “선생님, 보고 싶어요”라며 전화해 애교를 부리기도 하고, “너 예전에 선생님한테 한 짓 기억하니?”하고 농을 던지면, 부끄러운지 “아이, 선생님, 부끄럽게 왜 또 질문하세요? 그때는 제가 너무 철이 없었습니다”하며 너스레를 떨곤 한다. 간간이 SNS로 그의 사진을 보고 있으면 정말 자신의 삶을 잘 설계하고 꾸미고 있는 삶의 ‘악동(樂童)’으로 보인다.

그 해 이 두 녀석과 함께한 우리 반은 하루하루가 갈수록 좋아지고 있었다. 물론 여러 사건들도 많이 있었다. 아침에 교실 유리창을 깨서 단체로 혼나고, 그 날 점심시간에 교실에서 휴대용 가스레인지에 몰래 라면을 끓여 먹다 걸려서 또 혼난 일, 단체로 떠들어 교실에서 혼난 일, 각종 사고가 끊이지 않았다. 그러나 처음보다 많이 성숙해지고 어른스러워지는 모습에 나 역시 그들을 대하는 태도를 바꾸게 됐다. 무조건 혼내기보단 이유를 물어보고 원인을 살피게 되었던 것이다.
학년이 끝나고 그 녀석들은 3학년으로 진급했다. 그 후 교정에서 그들을 만날 때는 슬그머니 다가와 애교도 부리고 “안 하던 공부를 하니 몹시 피곤하다”며 나에게 와서 투정도 부리곤 했다. 품에 있을 때보다 더 다가오는 녀석들을 보면서 ‘교사로서 보람이 이런 것이구나’를 느끼게 되었다. 비록 그들과 마지막 학년을 함께하지 않았지만 그 녀석들이 졸업할 때는 왠지 모를 아련함과 서운함이 밀려들었다.
지금도 많은 학생들이 졸업하지만 그때만큼의 아련함이 없는 것은 왜일까? 무척이나 미워하고 혼냈던 녀석들, 그렇지만 서로의 마음에 파고든 ‘정’이 있었기 때문에 쉽게 마음을 뗄 수 없던 녀석들, ‘미운 정’은 떼기도 어렵다고 하는데 아이들에게 ‘미운 정’이 들었나 보다. 나에게 혼이 나면서도 큰 사랑을 주고 떠난 아이들 덕분에 한 해, 한 해 맡게 되는 아이들에게 그들의 사랑을 나누어 줄 수 있었던 것 같다. 그 아이들을 통해 한 뼘은 더 성장한 나를 발견할 수 있게 있었다. 그들에게 감사와 사랑한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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